인권해설: 수상 관저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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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 사고 이후 일본사회의 변화를 기록한 것이다. 도쿄 도심 한복판에서 탈핵집회가 연일 이어졌고,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데모 따위는 일부 과격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던 ‘보통’ 사람들이 스스로 거리에 나서 ‘핵발전 NO’를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대재앙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애초에는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한 정보가 차단된 상황에서 방사선 피폭의 불안감과 더불어 일상을 송두리째 빼앗긴 후쿠시마 사람들의 분노는 나날이 높아갔다. 다양한 감정들을 표출하기 위해 사람들은 뭔가를 해야만 했고 결국 그들은 거리에 나서기 시작했다. 60년대를 마지막으로 일본에서 거의 보기 힘들어진 데모가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왔다. 입소문과 SNS를 타고 분노는 온 열도로 퍼졌다. 카메라 앞에서 ‘데모에 참여하는 것은 처음’이라며 얼굴을 붉히는 사람들. 그들의 눈빛에서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기쁨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해방감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한 작은 움직임이 결국 2012년 여름 수상관저 앞에서 ‘탈핵’을 외치는 20만 명의 성난 군중이 되었다.

그 후 아베 정권 등장의 패배감으로 운동은 일시적으로 후퇴된 것처럼 보였지만 끝난 것은 아니었다. 수상관저 앞에서 매주 금요일에 열리는 탈핵 집회도 그렇고 핵발전 의존 정책으로 돌아가려는 정부와의 힘겨루기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작년 ‘비밀보호법’과 ‘안보법안’에 반대하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영화는 주로 도쿄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 시민들의 탈핵운동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지만, 지역에서도 탈핵운동은 그 전보다 현저히 발전했다. 특히 핵발전소 입지 지역 주민들이 핵발전소 재가동을 막기 위해 꾸준한 싸움을 지속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작년 8월 센다이 핵발전소 1, 2호기 재가동을 저지할 수 없었지만, 사고 발생부터 5년 동안 일본의 거의 모든 핵발전소는 지금도 가동되지 않고 있다.

사회를 바꾼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현재 후쿠시마 사고 현장과 전국의 핵발전 재가동 상황 또한 결코 낙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정과 결과의 경계는 항상 애매하다. 낙관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미력은 무력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서로를 믿고 한발 한발 나아간다면, 우리는 조금씩이라도 사회를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이 영화는 그런 희망의 단서이다.

 

오하라 츠나키 (탈핵신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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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국회를 점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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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18일에 발생한 대만 국회(입법원) 점거는 참여자들마다 입장, 이념, 심지어는 요구안까지 상이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투쟁을 이해하는 방식도 각자 다르다. 해바라기운동(太陽花運動), 318운동, 학생운동, 서비스무역협정 반대운동. 이 운동이 어떤 호칭으로 불리건, 어떤 이념을 담았다고 판단하건 간에 모두가 동의하는 명제가 있다고 믿는다. 바로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상상은, 이 운동을 계기로 천지개벽할 정도로 변했다는 점이다.

과거 대만은 오랜 세월 계엄 하에 있었다. 당시 권위주의 정권은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에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과 정적(政敵)들을 제거했다. 심지어는 일반 국민도 피해를 입은 경우가 있어, 나이가 있는 대만인 대다수는 정치를 기피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들은 정치와 조금이라도 관련되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대만의 청년 세대에도 영향을 미쳐 청년들이 정치에 참여할 때 가족이 가장 먼저 이를 말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정치에 대한 상상은 오랜 기간에 걸쳐 억눌려 다시 싹틀 기회도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대만인들은 그동안 정치를 자신과 관련 없는 영역이나 더러운 영역으로 여겨,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318 국회 점거는 정치에 참여한 적 없거나, 참여하는 방법을 모르던 이들을 ‘정치적인 장소’로 몰아넣었다. 그곳은 국회 점거 현장이기도 했고, 친구들과의 대화나 수업 내용이기도 했고, 심지어는 미디어에서 전해오는 소식이기도 했다. 대만 사회 전체가 굉장히 ‘정치적인’ 공간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정치적 역량이 318 국회 점거를 계기로 다시 피어나, 사회개혁을 목표로 하는 단체나 개인들은 정치 공간에서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렇게 일순간에 대만 사회는 정치에 대해 서로 논쟁하는 분위기로 변모했다. 이를 원래 좋아했건, 반대했건, 관심이 없었건 관계없이, 도처에 ‘정치’가 있어 사회 구성원 모두가 타인과 의견을 주고받게 되었다.

혹자는 318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청년 세대가 각성한 세대가 되었고, 당국의 교육,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속박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이들이 대만을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세대로 변모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는 318이 ‘계몽’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찌되었건 318은 우리가 첫 발걸음을 내딛게 만들어준 하나의 계기일 뿐이며, 이후에 나아갈 방향은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해바라기운동이 끝난 지 2년이 지난 지금, 어떤 참여자는 한 발 더 나아갔지만, 어떤 이는 그토록 타도하고 싶어 하던 그들의 편에 서 있다.

318 국회 점거는 단순한 사회운동이 아니라 성장의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318 이후로 2년이 지났지만, 성장의 고통은 아직도 대만 전역과 모든 참여자들을 휘감고 있다. 이 성장이 대만에 가져다 줄 결과가 어떨지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우 보웨이 吳柏緯 (대만 독립언론인)

번역 세정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25인권해설

인권해설: 불온한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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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하다[형용사]
온당하지 아니하다
사상이나 태도 따위가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성질이 있다.
※ 온당하다 – 판단이나 행동 따위가 사리에 어긋나지 아니하고 알맞다.

불온한 당신
판단이나 태도 따위가 사리에 어긋나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성질이 있는 사람
한국 사회에서 ‘불온’은 상대적인 단어이다.
2016년 지금, 이곳에서 불온한 당신은 누구인가.

영화는 현재의 불온한 당신들과, 당신들에게 불온하다고 외치는 이들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불온에 대한 판단에 앞서, 불온과 함께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과 상황을 다양한 각도로 되짚어가며, 도대체 불온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영화에서 어떤 이는 세월호 유가족을 향해, 더 이상 우리 국민들에게 슬픔을 강요하지 말라고 소리 높여 외친다. 그리고 바로 얼마 지나지 않아 퀴어문화축제 현장에 나온 그는 세월호 참사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동성연애자들이 빤스축제를 한다”고 비난한다. 이 두 상황에서 그가 동시에 하는 말은 단 하나이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외침은 한국 사회에서 불온이라는 단어를 점유하고자 사람들을 대변한다.

한편, 한국의 바지씨1) ‘이묵’, 일본의 레즈비언 커플 ‘논’과 ‘텐’은 불온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바지씨인 이 묵은 비정상으로 낙인찍힌 삶을 살아야 했기에 어떤 것들은 어쩔 수 없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진과 쓰나미라는 대재앙 이후 논과 텐은 불온한 사람들로 낙인찍힐지라도, 재난이 닥쳤을 때 서로 의 생사 여부를 공적으로 물을 수 있는 공인된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하기도 한다.

보수화 되어가고 있다는, 한국 사회의 순응할 수 없는 체제의 현실에서, 우리는 모두 불온한 당신이다. 우리는 모두 어떠한 부분에서는 낙인 찍히고, 손가락질 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낙인의 낙원인 이 세상은 이미 불온하며, 우리는 불온한 세상에 불온한 서로를 바라보며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다. 불온이 불온이기에 더 이상 불온은 불온하지 않다.

그렇다면 불온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존재할 권리, 사랑할 권리, 사랑하는 이와 함께할 수 있는 권리, 건강한 노동자로 살아갈 권리, 안전을 보장받을 권리를 외치는 불온한 우리는, 가만히 있으라 이야기하는 불온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자, 다시 한 번 묻는다. ‘불온한 당신’은 누구인가.

 

캔디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1)서구의 ‘부치’ 또는 ‘다이크’에 해당하는 한국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옛 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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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살인자, 그리고 살인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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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전화 받는 태도가 불량하다며 연인의 집에 찾아가 4시간이 넘도록 무차별적으로 폭행한 사건이 보도되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연인관계였던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하자 염산을 뿌리고 달아난 사건과, 혼인신고를 거부한 여자친구의 손가락을 자른 사건까지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사건은 연일 보도되고 있다. 대검찰청 범죄분석 자료에 따르면, 한국에서 지난 10년간 친밀한 관계에 의해 살해당한 살인피해자는 1000여 명에 이른다. 공식 통계 상으로 매해 100여 명의 피해자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연인에 의해 살해되고 있다.

1993년 UN 총회에서 채택된 여성폭력철폐선언(Declaration on Violence against Women)은 여성폭력을 “공적 혹은 사적 생활에서 여성에게 신체적, 성적 혹은 심리적 해악이나 고통을 주거나 줄 수 있는 성별에 기초한(gender-based) 폭력 행위, 그리고 그러한 행위를 하겠다는 협박, 강압 또는 자유의 박탈”로 정의하고 있다. 여성폭력을 성별에 기초한 폭력 행위로 이해하는 관점은 전 세계에 걸쳐 여성들이 여성이기 때문에 경험하는 ‘보편여성의 경험’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친밀한 관계, 연인에 의한 폭력 피해를 연애과정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문제로 여긴다. ‘남성’이 관계를 일방적으로 이끌어나가거나 상대에게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는 행동을 정상적인 연애과정으로 여기는 태도는,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합리화한다. 데이트 폭력을 심각한 범죄 피해로 인지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미디어에서 재생산되는 이성애 연애 각본에서는 ‘남성’이 폭력을 행하고, ‘여성’은 이를 수용·감내하는 모습을 낭만적인 연애로 묘사한다. 한 성별이 다른 성별보다 우위에 있다는 믿음과, 그 믿음을 지속하게 만드는 사회구조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겪는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폭력의 경험, 차별과 혐오 문화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 아니라 ‘나’의 문제이다. 여성폭력은 특별한 사람이 겪는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보통의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보통의 경험이고, 이를 주변에서 목격한 목격자이자 주변인인 우리 모두가 이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란 (한국성폭력상담소 사무국장

26인권해설

인권해설: 야근 대신 뜨개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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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이상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 경주마가 될 수 있으면 남아라. 회사는 가리개를 할 것이고 가리개 밖을 궁금해 하면 함께 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이가 사회적 기업의 리더다. 그리고는 회사의 입장을 존중해 달라고 한다. 일하는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회사가 사회적 기업으로 어떤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가는 부분이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기업의 진출분야는 대부분 사회서비스 부분이다. 애초에 국가가 책임져야 할 사회서비스를 사회적 기업이라는 형태로 외주화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이런 사회서비스는 시장 경쟁에는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따라서 국가의 지원이나 크라우드 펀딩 같은 ‘착한 소비자’의 지원이 끊길 경우 심각한 재정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2007년 정부는 공익적인 목적의 기업형태를 만들고 일자리 창출을 하는 방법으로 사회적 기업을 제안했다. 정부 차원에서 인건비와 일정 부분의 운영비를 지원해왔으며, 지원 기간은 3년이다. 지원이 적용되는 기간 회사는 안정적인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지원이 정지되는 시점에서부터 독립적인 운영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만 살아남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회적 기업은 현재 소멸하거나 운영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공익의 목적은 사라지고 기업의 형태만 남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국가의 사회서비스를 외주 받은 기업으로서 사회적 기업은, 정부 지원 기간이 3년인 3년짜리 외주 하청기업에 불과하다. 현재 사회적 기업에서 빚어지는 갈등은 계약이 끝난 일반적인 외주 하청 기업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매우 유사하다. 자금줄이 끊겨 회사의 존폐를 걱정해야 하고 새로운 시장경쟁에 내몰려 노동자를 해고하며, 노동자를 쥐어 짜내면서 위기를 넘어가려고 하는 것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사회서비스가 갖는 ‘공익’이라는 이름이 이 모든 행위를 정당화시켜 주고 있다는 것뿐이다.

사회적 기업 안에서 노동조합을 꿈꾸는 사람들은 왜 눈치를 봐야 하는가. 이들은 ‘노동조합’이라는 말을 꺼낼 때부터 문제 제기를 받는다. 공익이라는 좋은 취지에서 시작한 일에 왜 초를 치냐는 시선들이 이들에게 어려움을 준다. 노동조합은 일하는 노동자들이 정당하게 교섭권을 가지고 회사와 이야기할 수 있는 권리다. 사회적 기업이 ‘기업’인 한, 고용주와 노동자의 고용관계가 본질에서 바뀌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사회적 기업이 어려움에 빠질수록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좋은 일’이라는 틀을 만들어 놓고 노동자의 권리를 축소하라고 강요하거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얘기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적 기업에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노동자를 핍박하는 기업이야말로 반(反)사회적 기업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유아 (문화연대)

22인권해설

인권해설: 작은 노래를 함께 부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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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노래를 함께 부를 때>는 2011년부터 2014년 사이에 활발하게 진행된 스페인의 15-M 운동(Movimiento 15-M)을 배경으로 다양한 운동 의제들과 그 주체들이 등장하는 다큐멘터리다. <작은 노래를 함께 부를 때>의 본래 제목은 <We Are Not Alone>(우리는 혼자가 아니다)이다. 이처럼 스페인의 15M 운동 곳곳에서 문화를, ‘혼자’가 아닌 ‘우리’가 되는 과정이자 연대로서 바라본다. 다큐멘터리의 원제 자체가 집회나 시위의 프로그램, 대중적 참여를 위한 장치로서 의 ‘문화’에 머물지 않고 삶과 연대의 기반으로서의 ‘문화’를 가리키고 있는 셈이다 .

한국 사회에서 문화 혹은 문화를 둘러 싼 권리는 지나치게 좁게 해석된다. 또는 그것들이 너무 많은 이데올로기에 둘러싸여 있다. “문화는 현실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문화의 탈정치화), “문화는 먹고 살 만해야 하는 것이다”(문화의 주변화), “문화는 예술가들의 영역이다”(문화의 장르화) 등이 그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 결과 한국 사회에서 문화는 일상에서 분리되거나, 주체적 권리가 아닌 부차적이고 수동적인 향유권 중심으로 왜곡되어 왔다.

<작은 노래를 함께 부를 때>는 새로운 사회 변화를 꾀하는 주체들에게 “문화란 무엇인가”, “사회운동과 문화는 어떻게 만날 것인가”를 질문한다. 현대 자본주의의 다양한 폭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문화가 특별한 사람들의 행위이거나 공급받을 수 있는 상품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운동의 측면에서 문화는 “특정한 시기에 한 사회 안에서 우세하게 발현되는 가치, 태도, 신념, 지향점, 전제조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문화는 일반적으로 사회적 삶의 영역들을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네 분야로 나눌 때 그 네 분야의 ‘하나’로서의 문화가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영역의 다른 모든 영역들에서 사람들의 태도와 행동을 안내하고 협동과 조정을 통해 공유하는 가치 및 의미의 체계다. 이 의미의 문화는 학문, 예술, 여가 활동과 구별되며, 장식적이고 부가적인 활동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는 문화 개념과도 구별된다.

문화는 기본의 질서를 뛰어 넘는 새로운 주체가 탄생하고 마주치는 장(field)이며 행위이고 과정이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권리는 예술, 대중문화 등에 제한된 권리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둘러싼 보편적인 권리다. 문화권리는 표현의 자유일 뿐만 아니라 정체성과 다양성, 언어와 커뮤니케이션, 장소성과 커뮤니티, 공간과 도시환경, 커뮤니티와 지역 등을 횡단하며 생성되는 삶의 권리다. 문화권리는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공존하고 연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삶의 권리다.

 

이원재 (문화연대)

27인권해설

인권해설: 벽장을 두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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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gay and won’t marry a straight person.”(나는 성소수자이고, 이성애자와 결혼하지 않겠다.) 최근 중국의 성소수자들은, 해시태그와 함께 자신의 사진을 웨이보에 올리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일부 성소수자 부모들도 “성소수자 자녀에게 결혼을 강요하지 않겠다”며 선언에 나섰다. 이 움직임은 최근 중국 언론이 동성애자의 위장결혼을 다룬 것에서 비롯됐다. 동성애자 남성과 결혼한, 이성애자 여성의 ‘고통’으로 보도되었던 것이다.

이 캠페인을 기획한 PFLAG(Parents and Friends of Lesbians and Gays) 중국 지부는 캠페인의 취지에 대해 “위장결혼의 폐해를 거부하겠다는 의미만 지니고 있지는 않다”고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위장결혼에는 분명 젠더 위계적인 측면이 있다. 성소수자로 태어나더라도 이성애 결혼을 피해가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남성만 가계 혈통을 이을 수 있는 중국에서, ‘아들’은 결혼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다. 동성애자 남성과 한 쌍을 이룬 이성애자 여성은 그렇게 위장결혼의 피해자가 된다.

그러나 이 상황을 ‘남성 동성애자 가해자-여성 이성애자 피해자’로 구도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성소수자가 커밍아웃을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중국의 많은 성소수자들이 서로의 정체성을 아는 상태로 ‘협력결혼’을 택하고 있다. 2005년 개설된 중국 최대협력결혼 사이트 ‘Chinagayles.com’에서는 여태까지 총 23,000쌍이 협력결혼을 올렸다. 또한 ‘퀴어’, ‘iHomo’처럼 게이-레즈비언 파트너를 찾는 앱도 등장했다. 결혼 압력을 견디지 못한 성소수자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들이 정체성을 속여서라도 이성애 결혼을 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에서는 여성과 남성이 결혼해 아이를 낳아 가족을 꾸리는 것만이 ‘정상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여남이 혼인을 올려 아이를 낳는 것만이 길러준 부모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효도이며, 낳은 자식은 먼 훗날 ‘나’의 노후를 책임져줄 혈육이 된다. 지극히 보수적이며 이성애 중심적, 남성 중심적인 사회의 단면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결혼하지 않는 삶을 상상하기 어렵다. 아이를 낳아 대를 잇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지만,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가졌을 땐 상황이 뒤바뀌기도 한다. 미혼이나 비혼 여성이 아이를 낳으면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이성애 결혼을 하지 않는 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정상’ 가족에서 벗어난 모든 사람에게는 ‘비정상’이라는 낙인이 붙는다.

그런데 이러한 낙인은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 사회를 구성하는 보수적인 젠더 규범, 젠더 위계, 이성애중심주의가 촘촘하게 얽혀 이성애 결혼을 강제하고 있다. 이 복잡한 구조는 이성애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악화시킨다. 성소수자들은 성소수자 혐오에 근거해, 그들의 자녀 입양 및 출산을 제약받는다. 또 여성들은 남성우월적인 젠더 규범으로 그들의 몸과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통제받게 된다.

그러므로 이성애 결합이 아닌, 다른 결합이 법적으로 보장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한 개인으로서의 삶을 보장하는 시스템이 없다면 이 구조를 벗어날 수 없다. 다양한 결합이 합법화되더라도 동성애자 커플이나 아이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성애 결혼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렇듯 우리를 둘러싼 벽장은 한 겹이 아니다. 이 벽장은 아주 두텁고 견고하다.

최근 PFLAG의 캠페인에 참여한 중국 성소수자들이 SNS 상에 당당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내’가 ‘나’로서 살아가기 위한 외침이었다. 또 이성애중심적인 결혼, 보수적인 가족시스템 등 그들을 둘러싼 ‘벽장’을 허물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한 벽장문을 열고 얼굴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용기가 필요할까. 분명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크고 두꺼운 벽장에 새로운 문을 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열고 보니 또 다른 문이 있더라도, 더 자유롭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나기 (언니네트워크)

27인권해설

인권해설: 416 프로젝트-망각과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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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자국> <교실> <블루-옐로우> <인양> <살인> <선언>

기억은 동사다. 우리가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할 때, 그것은 2014년 4월 16일이라는 날짜나 희생자의 숫자를 암기하는 것에 그칠 수 없다.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의 프로젝트가 ‘망각과 기억’이라는 이름을 단 이유도 그것이지 않을까. 기억은 망각과의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잊히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어떤 일들은 그럴 수가 없다. 잊고 싶어도 불쑥 불쑥 떠올라 몸과 마음을 힘들게 한다. 그 일을 편안하게 되새길 수 없을 때,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많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을 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여겨지지 않을 때, 기억은 아프다.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들, 생존자와 희생자의 가족들은 이런 의미에서 망각과 투쟁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잊고 싶은 마음, 그러나 잊을 수 없는 조건에서 언젠가 아프지 않게 기억할 수 있기를 바라며 진실을 밝히는 투쟁을 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의 목격자인 우리도 그 곁에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는 지우려는 힘이 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참사 이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았던 때부터 줄곧 피해자들을 억압해왔다. 망각의 강요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세월호 참사는 ‘사고’일 뿐”이라는 주장은 왜 못 잊느냐는 질타이기도 했다. 진실을 밝히자고 하는데 “보상 받으려고 그러는 것”이라며 왜곡 선동을 일삼는 사람들도 있었다. 기억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할 자리를 지우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게 한다. 진상규명을 위해 설립된 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을 방해하는 정부의 시도 역시 그만하라고 선언하기 위해서다. 그러니 기억은 투쟁일 수밖에 없다.

<416 프로젝트-망각과 기억>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여러 편의 영화를 통해 보여준다. 영화가 다루는 모든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기억은 과거의 사건을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사건을 함께 겪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숙제를 내어준다. 특별법도 그랬거니와 특별조사위원회가 성역 없는 진상규명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단원고 교실을 비롯해 참사의 자국이 남아 있는 장소들을 보존하고 기억하는 것, 아직 돌아오지 못한 미수습자를 찾기 위해 선체를 인양하는 것, 생명과 안전에 대한 권리를 내팽개치는 기업을 처벌하는 것…….

잊지 않겠다는 약속은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는지 말하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약속은 함께 행동하면서 지켜질 수밖에 없다.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은 새로운 숙제들을 풀어가는 데 푯대가 된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세우기 위해 어디에서 출발해 어디로 가야 할지 살피기 위한 실마리다. 협력과 연대의 권리는 우리 앞에 놓인 숙제를 풀기 위한 필수 준비물이기도 하다. 일곱 편의 영화 중 마지막에 상영되는 <선언>이 모든 영화와 연결되는 지점도 그것이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4.16연대)

29인권해설

인권해설: 내 이름은 마리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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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마리아나의 생애를 긴 호흡으로 담담하게 되짚어 나갑니다. 그 시간 동안 마리아나의 몸은 많은 장소와 관계를 거쳐 나갑니다. 병원과 법원, 결혼과 연애, 직장, 어머니와 친구, 갑작스러운 질병과 그 이후까지. 영화는 어떤 주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기에, 마리아나는 보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겐 어떤 의미에서는 ‘전형적인 트랜스젠더’로 보일 것 같습니다. 네, 마리아나는 자신의 정체성에 확신을 갖고 의료적 조치와 법적 성별정정을 통해 ‘나의 몸’을 되찾아 나가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마리아나를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의사 앞에서, 법정에서, 질병과 마주하며,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마리아나는 상황에 따라 적극적으로 자신을 바꿔내고 또 살아냅니다. 이는 마리아나가 어떤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 영화는 마리아나를 보여주는 동시에, 마리아나를 보는 관객 자신을 보여줄 것입니다.

마리아나를 만날 때 한 가지 지침이 있다면, 쉽게 분류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마리아나의 삶의 맥락을 풍부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마리아나는 의사와 상담하며, 새로 사귄 남자친구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 장면을 마주했을 때 마리아나를 ‘이성애자’로 분류하거나, 마리아나가 ‘트랜스젠더는 이성애자일 것’이라는 편견을 재생산한다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게만 판단할 수 없는 의문과 의미들이 끝없이 남습니다. 마리아나는 왜 갑자기 의사에게 남자친구 이야기를 꺼냈을까. 마리아나가 이성애자라면, 여전히 지속되는 전 파트너 여성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이어지다 보면, 마리아나의 삶은 비-트랜스젠더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이성애자/동성애자의 구분에 대한 문제제기와도 이어질 수 있고, 성적 지향과 젠더의 상호적인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할 점을 던져줄 수 있습니다. 혹은 진료실에서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에 대처하는 마리아나의 적극적인 말하기 전략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걱정이 있다면, 마리아나가 겪은 급작스러운 뇌졸중을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조치에 따른 부작용이라고 단정 지으며 트랜스젠더 의료적 조치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가지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세계트랜스젠더보건의료전문가협회(WPATH)는 “50세 이상이며 이미 위험요소를 보유한 환자의 경우 에스트로겐 투여가 심혈관질환이 발생할 위험성을 증가시킬 수 있으므로, 지속적인 관리와 검진이 필요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세계 뇌졸중 캠페인은 “남성 5명 중 1명, 여성 5명 중 1명 꼴로 뇌졸중이 발병한다”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뇌졸중은 생활 조건과 예방이 중요한 질병입니다.

이렇듯 몸과 질병과의 관계는 일대일의 인과적 요인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호르몬을 과다 투여한 트랜스젠더 개인을 책망하거나, 트랜스젠더를 질병화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처방보다 더 많은 호르몬을 투여하고자 하고, 뇌졸중 발병 이후에 그것을 자신만의 탓으로 돌리는 마리아나를 보며, 그 당시 마리아나가 느꼈을 감정들, 마리아나에게 가해진 사회적인 소외와 압박을 떠올렸습니다.

질문하고 생각하기를 멈추는 바로 그 순간, 이미 사회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작동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이름은 마리아나>가 그녀의 생애가 품고 있는 풍부한 질문과 의미들을 마주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수엉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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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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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치유상담학교가 3월 10일 개교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은 노골적으로 강화되고 있고 ‘탈동성애포럼’과 같은 행사도 국회나 국가인권위원회 등 국가기관에서 아무런 제재 없이 개최되곤 했다. 동성애치유상담의 목적은 상담을 통해 개인의 성정체성을 바꿀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람을 살리는 길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존엄을 파괴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탈동성애도 인권’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하며, 동성애를 성적지향으로서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말하는 ‘사랑’은 일방적이고 폭력적으로 행해진다.

진주 사랑의교회에서 20대 초반 트랜스젠더 연희에게 전환치료 폭력을 행사한 사건이 3월 9일 보도됐다. ‘정상적’인 정체성을 찾아주겠다는 명목으로 행해졌지만, 당사자인 연희는 “사실상 비과학적인 논리에 근거해 구타와 언어폭력들로 이루어진 고문과도 같은 행위였다”고 증언했다. 급소를 누르며 “귀신을 몰아내야 한다”고 하거나 “동성애자는 돌로 쳐 죽어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듣고 있어야 했던 연희에게, 그 시간은 고통 그 자체였다.

연희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부정해야 했고, 혼자서 폭력적인 상황을 견뎌야 했다. 연희에게 그 때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일것이다.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 속 한 장면도 아니다. 불과 2개월 전 언론을 통해 보도된 사건의 일부고, 우리 주변에서 또 벌어질 수 있는 이야기다. 뉴스앤조이 기자는 직접 해당 교회를 찾아가 전환치료 경험을 하고 오기도 했다.

그런데 전환치료는 감금되거나 신체적 폭력을 당해야 꼭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일상 속에서 성소수자들은 늘 ‘치유적’ 삶을 강요받는다. 총선 당시 기독자유당은 ‘동성애 척결’, ‘차별금지법 반대’를 외쳤고 몇몇 정치인들은 ‘동성애가 인륜을 배반하는 것’이라 떠들어댔다. 이를 보면서 성소수자들의 고통이 반복되고 있음을 경험했다.

이런 상황에서 성소수자들은 자신의 존재를 숨겨야 살아남을 수 있다. 또 사회구성원으로부터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도 매일 깨닫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성소수자들의 마음에 대한 치유는 외면 받는다. 출구를 찾기 위한 노력마저 무력해질 때가 있다. 동성애가 정신질환이 아니라고 밝혀진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우리 사회는 여전히 동성애가 병인지 아닌지 설명해야 하는 원시적 논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동성애는 병”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폭력 앞에서, 평화롭고 평등하게 살고자 하는 성소수자들의 삶은 끊임없이 위협받는다. 3월 22일 세계정신의학협회는 “‘전환치료’ 금지, 비범죄화·차별금지법 등의 지지, 사회적 낙인과 차별로 인한 정신건강적 불평등 제거를 위한 지원” 등을 강조한 성명서를 채택했다. 반가운 소식이기도 하지만, 이 성명이 나올 정도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꽤 위험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전환치료’, ‘동성애치유’와 같은 말은 아직 낯설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다르게 살고 싶었던 영화 속 ‘아나’는 한국의 연희와 닮았다. 한국은 앞으로 또 다른 아나와 연희를 만날 것이다. 인간의 존엄을 끔찍하게 짓밟는 전환치료에 맞서 발견해야 할 인권의 언어는 ‘생존’과 ‘존엄’이다. 반복되는 악몽을 깰 수 있도록 돕는 진정한 ‘치유’는, 싸워나갈 수 있는 힘을 축적하는 것이다. 나답게 사는 것, 존중 받는다는 기쁨,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말,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들, 다르게 살고 싶은 의지! 이 모든 것이 전환치료에 맞서 싸울 힘의 자원들이다. 이것을 기억하자.

 

정욜 (전환치료근절운동네트워크(준),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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