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네이슨

인권해설

네이슨의 존엄사를 다룬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네이슨의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이 죽음까지의 경로는 네이슨 본인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오롯이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죽음의 원인이나 계기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힐 것이라 생각한다. 가족으로부터의 부정, 성폭력 등의 트라우마, 트랜지션 과정에서의 수술 부작용, 더 이상의 희망이 없고 살아갈 의지가 없어서 등 갖가지 이유들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그러한 가능성도 있지만 가족의 부정, 성폭력이 네이슨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거나, 트랜지션 수술 부작용이 네이슨을 죽음으로 몰고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단 한 가지의 이유라기보다 여러 가지 종합적인 것들이 죽음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지 않았을까 싶다.

분명 영화에서는 ‘네이슨이 수술 부작용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었고, 부작용이 삶에 끼친 영향으로 더 이상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라고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미 세계 유수의 매체를 통해 네이슨은 트랜지션 수술 실패로 인한 좌절로 죽음을 선택한 트랜스젠더로 많이 알려져 있다. 물론 그 이유가 결정적이었을 수도 있으나, 그러한 기사들은 네이슨이 수술 실패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안락사를 선택한 것처럼 비춰지기 쉬울 것 같다. 과연 그게 트랜지션 실패라는 이유일까? 실패라고 한다면 어떤 것이 실패이며, 과연 그것이 직접적으로 죽음과 연결하는 연결고리가 되었을까? 그를 죽음까지 이르게 한 것은 자기 자신일까, 혹은 사회일까? 확실한 건 수술과 관련된 이야기가 영화 결말의 결정적인 이유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그것만을 결정적인 이유라고 판단하는 건 얼마나 단편적인 해석인가!

수술이 잘못되었을 때 그리고 그 수술이 재수술로 바로 잡히지 못한다는 그 고통과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FTM 트랜스젠더의 성기재건수술은 수술 부작용의 위험 부담과 금전적인 부담이 큰 수술이다. 많은 부작용 사례들이나 수술 실패 사례들이 있어 왔으며 당사자들에게는 하나의 큰 고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몇 년 전까지 FTM이 법적 성별변경을 할 때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수술 조건으로 성기재건수술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후 많은 노력으로 의학적인 부분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의 한계와 수술의 부작용이나 실패사례, 그리고 금전적인 부담 등을 강조하여 성별변경 시 성기재건수술의 조건이 일부 완화된 바 있다. 그렇지만 수술을 할지 말지는 본인의 선택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생각을 할 수 없듯이 모든 트랜스젠더들도 각자 다 원하는 몸이 다를 것이다. 자신의 육체에 혐오나 불만이 없을 수도 있고 건강상 하지 못할 수도있고 몸과는 별개로 생각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각자가 원하는 몸에 대한 이미지가 있는 것처럼 트랜스젠더에게도 수술에 대한 선택이 그 어떤 것이든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네이슨은 남성의 육체를 가지길 원했고 그로 인해 선택한 성기재건수술이 본인의 만족과는 별개로 기능성의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성기재건수술은 한 번의 수술로 끝나기 어려운 수술이며 긴 과정과 오랜 회복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수술의 고통이 잠깐으로 끝나지 않는다. 주위에 수술 과정을 겪은 사람들은 다 같은 말을 했었다. 죽고 싶을 만큼 아프고 괴로웠다고… 그런 말들로 미루어 보아 네이슨은 여러 번의 재수술을 통해 그 고통을 수차례 겪었을 것이다. 네이슨의 과거 이야기와 다른 병원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 등은 너무나 짧게, 그리고 빠르게 지나가고 만다. 그래서 더욱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양한 상상이나 해석을 하게끔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네이슨에 투영하여 볼 수도 있고, 나의 주변 사람으로도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아예 제 3자 입장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이 영화를 같이 본 사람들과 서로의 생각을 얘기해 보고 다른 사람들은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가에 대해 대화를 나눠보면 이 영화가 얼마나 다양하게 읽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네이슨의 친구들은 그가 오랜 기간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고 말을 한다. 그렇다면 영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네이슨이 신분증 속의 성별을 바꾸고 웃음 가득 기뻐했던 모습이나 지지해 주는 친구들을 만나 편하게 대화하던 시간들, 그리고 자신이 정말 타고 싶어했던 열기구를 탔을 때 좋아하던 모습 등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네이슨은 고통이나 좌절 속에서만 살아온 것은 아닐 것이다. 네이슨의 우울감, 좌절감, 고통 등은 그가 트랜스젠더라서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는 것이다. 남들과 다를 바 없다. 물론 다른 점이라면 어쩌면 남들은 겪지 않아도 되는 경험을 해야 했다는 그 차이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누구나 긴 여운을 느끼는 듯하다. 이 길지 않은 한 편의 영화에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이 영화를 보며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고, 접하기 힘든 다양한 트랜스젠더중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또 그 안에는 복잡한 가정사와 수많은 감정의 기복 그리고 트랜지션 과정… 한 가지의 주제로는 다 풀어낼 수 없을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단편적으로만 해석하게 된다면 정말 안타까울 것 같다. 영화의 결말은 죽음이었지만 이 영화의, 네이슨의 삶의 결말이 어떠한 뜻이었다라고 선뜻 말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덧붙여 네이슨이 스스로 결정한 죽음에 대해서 옳다/그르다 혹은 좋다/나쁘다고도 감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좀 다른 방향에서 보자면, 네이슨의 죽음은 용기 있는 죽음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이별을 고하고 자신의 안락사를 축하하는 자리를 가지며 자신의 죽음까지 본인의 발로 걸어 들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Free as a bird… 어디에서든 그가 그토록 원했던 삶을 살고 있길 바란다.

진호 (조각보-트랜스젠더인권단체설립준비위원회)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그 날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옆에는 마지막 날까지 함께 하는 친구들이 있다.

누군가 당신에게 난 이제 더 이상 내 삶의 고통과 맞서 싸우기 지쳤으니 스스로 끝낼 결심을 했다고 말했을 때, 어떤 감정과 생각이들까. 아니, 당신이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다면 그 이겨낼 수 없는 고통이란 어떤 깊이일까. 그 결심을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설득하고 지지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을까. 고통을 경험하는 인간으로서의 나와 고통 속에서도 희망과 의지를 발견하도록 돕는 자로서의 내가 수 없이 교차한다. 만약 그의 친구라면 난 그에게 뭐라 할 수 있을까. 상대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어떻게든 그 결정을 돌리고 싶은 절박함, 그렇지만 어떻게도 도울 수 없다는 무력감, 여러 감정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하지만 그의 삶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면 그래서 그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 것임을 알고 있다면 선뜻 막아설 수 있을까.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다는 절망을 견디며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 아닌가. 마지막의 시기를 결정하고 삶을 정리하고 원하는 방식으로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은 것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 아닐까. 답을 내리지 못하는 질문들이 쌓여간다.

영화는 쉽게 답하기 어려운, 아니 어쩌면 생각해본 적도 없을 수 있는, 삶을 끝낼 수 있는 권리, 삶이 주는 고통을 끝낼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나라에서 안락사를 선택한 네이슨의 마지막 나날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과정은 어쩌면 담담하게, 때로는 즐겁게, 그래서 오히려 먹먹하게 다가온다. 고통의 원천에 대해서는 아주 잠깐씩 드러난다. 어린 시절 엄마의 학대, 오빠의 성폭력, 트랜지션을 지지해주었던 아빠의 죽음, 수술의 실패… 눈에 띄는 큰 사건들 사이에 얼마나 더 많은 상처가 있었을지는 알 수 없다. 이 경험들 속에서 고통은 켜켜이 쌓여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약물, 심리치료, 상담 등의 개입도 고통의 무게를 덜어주지는 못했다. 엄마는 끝까지 비난의 말을 쏟는다. 형제들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군다. 자신을 일으켜 세워주는 것 같았던 아빠는 법적으로 남성이 되는 날 돌아가셨다. 스스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려 애썼지만 가족이라는 공동체 중 다수의 사람들이 마지막까지도 비수를 꽂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끝내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고통이 그의 절망을 더 깊게 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길을 함께 해준 친구들과의 작별을 성실하게 해나가지만 친구들 속에서도 여전히 외로웠음이 드러난다. 그가 친구들에게 남기는 말은 너무나도 긍정적이고 희망적이어서 쓸쓸하다. 그 누구보다 네이슨 자신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조금 더 고통을 말할 수 있었다면, 주는 것만큼 더 받을 수도 있었다면, 그 외로움이조금 더 감당할 만했다면 하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고통을 대신 겪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한 번은 더 말 걸고 손 내밀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의 절망에 아파하면서 마지막 길에 따뜻한 마음으로 함께 했지만 여전히 다시 한 번 생각해 줄 수는 없겠니, 이게 정말 최선이니, 묻고 싶어진다. 그의 친구들이 그랬듯 나 또한 그를 잃는 것이 안타까워서였을까. 아니면 아무것도 도울 수 없는 나의 무력감에 맞닿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그의 친구들은 그를 잃지 않고 싶은, 결심을 되돌리고 싶은 소망을 솔직하게 표현했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결정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옆을 지켰다. 어떤인연은 끝내 회복될 수 없었고 어떤 인연은 마지막까지 이어져 있다.

떠오른 많은 질문에 여전히 답할 수 없다. 아니, 답하지 않고 계속 질문하려 한다. 편협한 잣대로 성급히 판단 내리지 않으려 한다. 다만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 나와 다른 생각과 삶의 방향을 존중하는 것, 고통의 순간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하는 것의 가치를 되새기려 한다. 잘나거나 모자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 가진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서도 괜찮은 사람임을 인정받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갖고 있는 소망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나 어떤 사건으로 인해서 나의 몸과 정신이 침해되거나 손상되었을 때, 그 상처를 잘 보살피고 나 자신으로서의 삶과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성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한 개인의 몫을 넘어선 그를 둘러싼 여러 연결고리의 사람들, 나아가 이 사회가 함께할 몫이다. 어떤 틀로 분류된 무엇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수많은 네이슨과 만날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네이슨의 손을 놓지 않았던 친구들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기를, 그래서 나 또한 절망할 때 용기 내어 손 내밀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조이수현(트라우마치유공동체 사회적협동조합 사람.마음)

 


 

수많은 해외 연구에 따르면, 성소수자들은 비성소수자보다 건강이 나빠질 확률이 높다. 성소수자는 비성소수자와 비교할 때, 흡연, 음주 등을 더 많이 하는 경향이 있고, 심장질환이나 비만, 성감염증에 걸릴 확률도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건강상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건강연구를 하는 수많은 전문가들은 차별, 특히 동성애혐오와 사회적 낙인으로 인해 성소수자들의 건강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당연시되는 사회분위기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드러날까 늘 위축되어야 하는 사회 심리적 요인, 커밍아웃했을 때 또는 아웃팅을 당했을 때 이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법/제도적 근거가 전무한 상황, 일상적으로 이들이 마주쳐야 하는 낙인의 위험, 직접적인 혐오범죄의 대상이 될 가능성, 도움이나 상담을 받기 위해 찾은 의료기관에서조차 차별당하거나 낙인을 두려워해야 하는 상황 등을 꼽자면 이들의 건강이 나쁜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특히 트랜스젠더의 경우, 트랜지션(성전환수술)을 하는 이들이 다수 있기에 의료체계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많다. 건강이 나빠질 수 있는 조건뿐 아니라, 젠더표현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혐오 범죄의 직접적 대상이 될 가능성도 크다. 자살 생각도 매우 광범위한 편이이서, 해외연구에서는 트랜스젠더 중 38~65%가 자살생각을 하고 있으며, 16~32%는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 적 있다고 나타난다. 성전환을 한 트랜스젠더의 경우, 일상생활을 관리하고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긴장과 스트레스는 배가되기 쉬워, 심리상담이 요구되기도 한다. 이렇듯, 건강상의 큰 위험을 안고 살아가지만, 트랜스젠더의 건강, 특히 우울증, 불안 등 정신건강상 문제를 알고 이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시도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외에서도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를 비교하는 연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국내에서도 트랜스젠더의 건강에 대한 문제는 전무하다.

건강이란 무엇일까? 세계보건기구가 말하듯이, 건강이란 신체적 건강만을 뜻하지 않으며, 심리적 행복과 안녕을 포함한다. 사람들은 건강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좋은’ 음식을 찾고 운동을 하며 의사를 찾아가기도 한다. 더불어, 가족과 친구, 지인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구하기도 하며, 그들로 인해 불행할 때는 다른 사회적 관계망, 지지망을 형성하고자 한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도 여전히 신체적 고통이 지속될 때, 심리적 행복과 안녕이 보장되지 않을 때 개인의 선택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안락사는 그 목적, 방식, 환자의 자발성 여부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지만, 영화 <네이슨>의 선택은 적극적 안락사이자 존엄사로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의료계는 자살에 대한 의사의 조력, 죽음에이를 수 있는 약품에 대한 정보 제공, 의사가 직접적 안락사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며 이를 법제화하여 허용한 나라 또한 많지않다. 의사가 환자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원칙,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위하여 발전해온 의료행위가 생명윤리와 충돌한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1994년 미국 오리건 주에서 ‘존엄사법’이 통과되고, 2000년 네덜란드, 2002년 벨기에, 2004년 룩셈부르크가 안락사를 법으로 허용하면서 안락사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더불어,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의사의 의견을 물은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의사들의 생각도 달라지는 듯하다. 54%가 의사 조력자살 허용에 찬성한다고 답한 것이다.

안락사를 하기로 한 트랜스젠더 <네이슨>의 선택은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규정할 수도 없다. 아동기 폭력의 피해경험, 트랜스젠더로서의 정체성, 성전환수술의 실패, 전 생애를 걸쳐온 고립감과 외로움은 차별받는 이들이 공히 갖고 있는 ‘건강의 위험요인’들이다. 이들을 건강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적 ‘위험요인’을 없애기 위해서는 살아남은 자들의 싸움이 더 끈질기게 필요하다. 그것이 지금껏 우리 곁에 있었던 수많은 다른 <네이슨>의 죽음을 슬퍼하고 추모하는 길이자, 함께 안녕히 살아갈 수 있는 길이다.

박주영(연구공동체 건강과 대안)

 


 

용어 해설

외상(trauma)
과도한 위험과 공포, 스트레스 상황에 대한 심각한 심리적 충격을 일컫는다『.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 5판』에 따르면 죽음, 심각한 상해 또는 성적인 폭력과 같은 외상사건을 실제로 겪었거나 그러한 위험에 직면했을 때, 혹은 외상사건이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거나 가족 등 가까운 사람에게 일어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에 대한 강렬한 두려움, 무력감, 공포를 경험한 경우를 의미한다.

안락사
의사의 역할에 따라서 적극적 안락사, 소극적 안락사로 구분되며, 환자가 자발적으로 동의하고 이를 요구하는 경우 존엄사라고도 한다. 의사가 약물 등 정보를 소개하고 돕는 경우가 적극적 안락사에 해당되며, 의사조력 자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극적 안락사는 환자의 치료가 불가능한 경우 추가적인 의료조치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연명치료 중단, 심폐소생술 거부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 아래의 용어 해설은『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사람생각, 2008)의 용어정리 pp.13-23 에서 많은 부분을 참조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성전환자/트랜스젠더
먼저 ‘트랜스젠더(transgender)’는 ‘전환이나 초월’을 뜻하는 ‘trans-’와 ‘성별’을 뜻하는 ‘gender’가 합쳐진 말인데, 이를 줄여 ‘TG’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 한국의 언론은 트랜스젠더와 트랜스섹슈얼, 성전환자와 같은 용어를 서로 구분이 안 되는,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트랜스젠더와 트랜스섹슈얼을 구분하며, 트랜스섹슈얼은 수술을 하는 사람, 트랜스젠더는 반드시 수술을 하는 건 아닌 사람들을 일컫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는 하다.

만약 이 용어들의 뜻을 미국 학제에서 사용하는 방식에 따른다면, 성전환자를 ‘정신적인 성과 육체적인 성이 불일치하는 사람’이라고 얘기할 수 있고, 트랜스섹슈얼은 ‘정신적인 성에 육체적인 성을 일치시키려는 사람’, 즉 호르몬 투여와 성전환수술을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용어는 정신병리적인 현상으로서의 성전환자를 설명할 때 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반해 트랜스젠더는, 이런 의료식민화를 비판하며 운동적인 성격을 띠고 등장했다. 트랜스젠더는 반드시 수술이나 호르몬을 하는 것은 아니며, 그 사회에서 요구하는 젠더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로 상당히 넓게 사용하고 있다. 현재에 와선 트랜스섹슈얼이 반드시 정신병리적인 의미로만 사용하는 건 아닌데, 트랜스젠더와 달리 트랜스섹슈얼이란 용어가 성전환수술 경험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이들 용어를 사용하는 방법이 미국의 그것과 동일하다면 그저 어느 유명한 이론가의 정의를 그대로 번역하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란 용어가 특정한 의미로 대중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는 점에서 미국의 맥락과 상당히 다르다. 몇몇 유명 연예인들이 트랜스젠더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각인되면서,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란 용어는 태어났을 때 주민등록번호로 할당받은 성별과 갈등 하는 존재로서, 대체로 성전환수술을 하거나 지금은 하지 않는다 해도 언젠간 수술을 할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지칭한다.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에서 이 용어는, 육체적인 성은 남성(혹은 여성)이어도 정신적인 성은 여성(혹은 남성)인 사람들을 의미하는 경향이있으며, 정신적인 성이 여성(혹은 남성)이기에 수술을 하는 이들을 지칭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성전환수술을 한 사람들 상당수가 자신은 트랜스섹슈얼이 아니라 트랜스젠더라고 얘기한다.

ftm/트랜스남성
ftm은 ‘female to male’의 준말로, 생물학적으로 여성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남성 정체성을 가진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mtf는 male to female의 준말). 당사자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체성과 전환의 의미를 담은 이 용어들을 즐겨 쓰지만,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성별만을 상정하고 있어 성별이분법적이고, 전환의 의미를 너무 강조하기에 자신을 설명하는 단어로 적절치 않다’는 입장 혹은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남자였지 여자에서 남자로 바꾼 게 아니다’라는 입장 등의 다양한 이유로 이러한 표현을 거부
하는 이들도 공존한다.

‘트랜스남성’이란 용어는 보통 ‘ftm’과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는데, 엄밀히 말해 트랜스남성은 출생 시 부여받은 성(여성)과 달리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의료적 조치를 받았는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 젠더정체성(남성)에 입각하여 의료적 조치를 받았는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남성임을 드러내는 용어이다. 의학적 조치를 통한 경우(트랜스섹슈얼 남성)뿐 아니라, 의학적 조치가 아닌 다양한 젠더적 수행을 통해 자신이 남성임을 드러내는 경우(트랜스젠더 남성)도 모두 트랜스남성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또한 트랜스남성이란 용어는 사회 안의 다양한 남성들과 같이, 예를 들면, 장애남성, 흑인남성과 같이 트랜스남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용어이기도 하다.

트랜지션
트랜지션(transition)은 보통 ‘전환/전환 과정/성전환’으로 번역되곤 하는데, 트랜스젠더에게 전환이란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성별과 다른 젠더정체성으로 ‘정체화하는 과정에 들어선다’는 넓은 의미에서 볼 때, (1)옷차림이나 말투 행동거지 등 젠더 표현을 자신의 젠더정체성에 맞게 재사회화하고 학습하는 과정, (2)호르몬 투여를 시작하거나 성전환을 위한 여러 수술을 받음, (3)법적 성별을 바꾸어 살아가는 일련의 절차 등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물론 이 모든 과정들을 거쳤다고 해서 반드시 전환이 종료되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보통 트랜스젠더들이 모여 있는 커뮤니티에서 ‘전환 중’이라는 표현은 의료적 조치(그리고 이에 뒤이은 법적 성별변경 과정)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패싱/통과하기
패싱(passing) 또는 통과하기는 ‘이러이러한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짐’이란 뜻을 갖는다. 트랜스젠더에게만 국한하여 쓰이는 용어는 아니며 인종, 민족,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장애 등에도 통용되는 단어이다. 패싱(passing)은 원래 유태인이나 유색인종 등 서구 사회의 주류에 속하지 못하는 민족이나 인종이 그 사회에 어떤 식으로 속하는지를 설명하고자 할 때 쓰였던 단어였다. 그러다가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에 확대 적용되어 왔으며, 쓰이는 대상에 따라 그 의미와 맥락이 달라지기도 하여 왔다.
ftm일 경우, 태어날 때부터 법적 신분증에 남성으로 표기되어 있는 듯이, 학창시절 남학생이었던 듯이, 여자인 몸으로서의 경험이 전혀 없는 듯이 얘기하고, 주변 사람들도 그 사람이 ‘원래 남성’이란 사실을 의심하지 않도록 행동할 수 있는데, 이를 패싱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영미권의 트랜스젠더 인권운동 역사 속에서 패싱은 트랜스젠더로서의 역사-개인으로서나 집단으로서의 역사 모두를 지우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이는 패싱의 의미를 너무 협소하게 보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기도 하다. 먼저 트랜스젠더에게 있어 패싱이란 젠더 표현과 젠더 역할, 젠더적 수행이 자신의 젠더정체성대로 받아들여진다는 의미와 더불어서, 자신이 정체화하고 있는 성별과는 다른 성별로 오인된다(비수술 트랜스젠더의 경우 특히 그러하다)는 모순되고 양가적 의미 모두 다로 쓰일 수 있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네이슨처럼 ftm인 경우,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남성’이었다고 말하고 ‘남성’으로 통하는 것도 패싱이며, ftm/트랜스남성이 ‘여성’으로 통했던 역사 역시 패싱일 수 있다. 그리고 모든 트랜스젠더가 남녀 중 한쪽의 성별로만 패싱하려 하지는 않으며, 어떤 이들은 트랜스젠더로, 누군가는 트랜스남성/여성으로 패싱하려 하기도 한다

이처럼 패싱은 좁은 의미로만 보면 과거를 지우거나 부정하거나 속이는 행위로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의 맥락에서 개인과 집단의 역사, 각각의 육체의 역사와 관계망의 역사를 거듭 재구성하면서 자기 개인의 일관성을 추구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SRS/성전환수술/성재지정수술/성확정수술
Sex Reassignment Surgery(SRS)는 ‘성전환수술’이라고 가장 흔히 번역되곤 하며, ‘성재지정수술’이나 ‘성확정수술’ 등 다른 용어로 번역되기도 한다. 넓은 의미에서 성전환수술이라 함은, 신체에서 성별을 나타낸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외과적 수술 – 성선(정소, 난소), 내부성기(정낭, 질, 자궁, 나팔관), 외부성기(음낭, 음경, 음핵, 음순) 등 생식기관의 제거와 성형, 나아가 유방, 얼굴 등 외부에서 성별을 판단하는 외형들의 성형을 포함 – 을 통하여 성별적으로 신체적 외형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광의의 SRS를 포
함하는 의료적 조치에는 호르몬 투여, 정신과적 진단 및 조치 등을 전부 포괄하는 의미로도 쓰이곤 한다. 하지만 대중적으로는 성기 및 생식능력제거 수술을 지칭하는 경우로 가장 자주 쓰이곤 한다.

일반적으로 이 용어는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젠더정체성에 따라 출생 시 부여된 성별과 ‘반대’의 성별로 수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트랜스젠더로 자신을 정체화한 사람만의 전유물만은 아니어서, 간성인 사람이 자신이 편안하다고 느끼는 성별로 신체를 변화시키거나,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지만 필요에 따라 성전환수술을 행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성전환수술이란 용어는 ‘성을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나에게 주어졌어야 할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입장을 가진 이들에서는 사용하기를 꺼려지곤 한다. 대신에 이들은 관련된 외과적 수술을 ‘성을 자신에게 부합하게 정위치에 돌린다’는 의미에서 성정위수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혹은 ‘나에게 적합한 몸’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성적합수술이라고 하거나, 출생 시에 외부성기에 의해 지정된 성을 ‘자신에게 편안한 성으로 다시 지정한다’는 의미에서 성재지정수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31인권해설

인권해설: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마

인권해설

국화꽃 너머로 보이는 당신의 얼굴들. 살아서 만났으면 더 좋았을 것을, 나는 정확히 당신들이 어떤 사람이였는지를 당신들이 떠나고 나서 텍스트로 읽게 되었다. 감히 평가할 수 없는 한 우주가 떠나는 것을 이리도 허망하게 바라보아야 한다니, 이 단단한 죽음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낙인의 사슬 장애등급제와 빈곤의 사슬 부양의무제 농성장은 2012년 8월 21일, 비가 많이 오던 여름날 차려졌다. 아무것도 없었던 광화문 농성장에는 2015년 지금, 총 11개의 영정 사진이 놓여져 있다. 이 영화는 11개의 영정 사진들과 함께있는 지역사회에 나온 지 6개월 만에 꿈을 져버릴 수밖에 없었던 국현 형의 이야기이다.

작년 봄, 노들장애인야학으로 국현 형이 왔다. 한글을 잘 모르던 그는 장애인을 더 이상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게끔 활동하는 탈시설 활동가들의 지원으로 함께 학교를 다녔다. 시설을 24살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형의 나이는 2014년 봄, 53세였다. 4월 13일 체험홈에(시설에서 나와 자립생활을 온전히 하기 전까지 머물다가 가는공간) 불이 나게 되었다. 형이 있던 방까지 불이 번졌지만 국현 형은 침대 위에서 그을린 채로 전신 3도의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 국민연금 공단은 그런 그의 장애를 5급으로 판정, 활동보조 서비스를 받지 못하게 하였다. 다시 이의신청을 하고 싸웠던 그 기간에 그렇게 화마가 그의 삶을 휩쓸었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가 있은 지 바로 다음날인 17일 형은 영원히 떠났다.

전체 삶의 대부분을 시설에서 보내다 자립생활을 하기 위해 지역사회에 나온 지 6개월만의 일이다. 27년 만에 시설 밖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한 그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였다. 현재의 장애등급은 본인의 손상의 조건을 밝히며 ‘내가 당신보다 더 장애가 심하다.’라는 명목으로 줄세우기를 한다. 그리고 등급별로 사람을 나누어서 1급~6급까지의 장애등급으로 사람을 나누어 해당되는 등급별 서비스만을 제공한다. 일본을 제외하면 전세계에서 실제로 사장된 제도인 장애등급에 따른 서비스를 제공하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살 수 있었는데, 그랬었는데.’라는 이 말은 너무나 무겁다. 이 죽음들이 너무나 억울하다. 광화문지하 역사 안에 놓인 11개의 영정 사진들, 그 사람의 단단한 죽음들, 이 죽음에 억울한 나날들. 그 죽음을 품고 살아가기엔 아직 우리는 너무 떨리는 존재들이다. 광화문역사 지하2층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 광화문 농성장에 함께해 주시길, 이 단단한 죽음들의 무게를 우리 함께 안아갈 수 있었으면 한다.

한명희(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 광화문공동행동)

30인권해설

인권해설: 메이드 인 인디아: 옷, 인도, 여성

인권해설

전 세계 수출가공지대의 절반 이상은 동아시아·동남아시아에 집중되어 있다. 이곳의 섬유·전자·완구 산업 노동자의 80% 이상은 여성이다. 이들이 극단적인 저임금과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고통 받는 대가로, 다국적기업과 국가경제는 살찌워진다. 1970년대 이후
한국의 고속경제성장 역시 수출지향 정책 아래 여성노동자들의 희생을 딛고 이루어졌다. 아시아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가장 고통 받아온 이들, 지금도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은 바로 가난한 여성들이다.

이 영화는 인도 뱅갈로르 의류제조업 현장의 노동 착취와 그에 맞서는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보여준다. 영화 속 여성들의 증언은 다른 아시아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노조 결성, 단체 협상 등의 당연한 권리도 박탈당한 채 일한다. 과도한 목표량과 휴식 없는 중노동 속에서 병들어간다. 여성은 고분고분해야 하며 남자가 함부로 대해도 괜찮다는 가부장적 의식은, 여성-노동자에 대한 남성-관리자의 언어적·신체적 폭력을 가져온다.

그러나 영화 속 여성들은 그 와중에도 눈을 빛내며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한다. 경제적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자립지원단체를 만들고 노조 결성을 위해 노력하며, 인간적 대우를 얻기 위해 함께 싸운다. “우리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누가 우릴 도와주겠어요? 우리 문제는 우리 손으로 해결해야 해요.”

다국적기업이 경제적 합리성만을 고려할 때 노동자들의 인권은 간단히 무시된다. “생산단가가 높은 곳은 축출됩니다. 인도의 단가가 높으면 방글라데시나 베트남 등으로 옮겨가죠.”, “자본은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지만 여성인력은 언제든 또 채워 넣으면 되니까요. ”

그러므로 이 문제는 인도 여성 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며, 그들 홀로 해결할 일도 아니다. 하루아침에 공장폐쇄를 통보한 다국적기업 아세아스와니에 항의한 한국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이 사건을 다룬 영화 <스와니>는 이번 인권영화제에서 함께 상영된다) 이러한 자본의 일방성에 맞서는 싸움이었다. 이러한 싸움은 지금도 다른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경제적 합리성이 유일한 합리성인 양 하는 세상에 우리는 다른 이성, 인간의 얼굴을 내민다.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외침은 계속되고 있다.

이서(한국여성민우회)

32인권해설

인권해설: 오래된 희망

인권해설

“평밭에서 다섯 명이 백지화 계를 넣고 있어. 한 달에 2만원씩. 지금 백만 원이 됐어. 그거를 갖고 우리는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모르겠고, 우리는 떠날 거야.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몰라. 우리는 계획이 다 짜졌어. 우리 도와준 사람들 와서 공짜로 자고 가도록 문을 열어놓고 갈 거야.”

2012년 가을,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는 어느 날, 평밭의 한옥순 할매는 카메라 앞에서 발그레한 소녀 같은 얼굴로 ‘오래된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할매는 20개월 뒤, 움막을 철거하기 위해 칼과 커터기를 들고 달려드는 수천 명의 경찰 병력 앞에서 맨몸으로 싸워야 했고, 끝내 혼절하고, 끌려나와야 했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그들의 ‘오래된 희망’은 유예되고 있다.

영화는 밀양시 산외면 보라마을 공사현장에서 이치우 어르신이 분신 자결한 2012년 1월 이후부터 밀양에 들어온 미디어 활동가들이 3년간 촬영해 놓은 방대한 자료에 근거해 있다. 그 사이 세 번의 공사 재개가 있었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충돌의 스펙터클이 펼쳐졌다. 쓰러지고, 실려 나가고, 버둥거리고, 혼절한다. 제 몸에 쇠사슬을 묶는 할매의 얼굴은 말할 수 없이 결연하다. 중장비에 밧줄을 묶고 줄줄 눈물을 흘리는 할매의 얼굴은 바라보기가 괴롭다. 경찰 저지선을 향해, 한전 직원과 인부들과 중장비들이 쳐 놓은 겹겹의 스크럼을 향해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백발의 노인들. 도대체 저들은 왜 저렇게 싸우는 것일까?

<오래된 희망>은 이 질문에 대하여 대단히 차분하고 이성적인 답변을 시도한다. 카메라는 그 충돌의 스펙터클을 기술적으로 요리하여 특정한 종류의 정서적 반응으로 향하는 길을 스스로 차단하고, 이충돌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거대한 시스템을 조목조목 해부하는 길을 택한다. 거기에는 지난 몇 년간 방송 뉴스에 등장한 방대한 에너지 관련 뉴스 자료들과 전문가들의 분석, 진단이 동원된다. 그리하여 <오래된 희망>이 찾아 낸 최종의 해답은 ‘국민 모두에게 손해를 입히고 극소수 핵산업계 대자본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대용량 핵발전 및 장거리송전 체계, 원가 이하의 산업용 전기를 대자본에게 공급하기 위해 시골 노인들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미래 세대에게 어마어마한 위험을 떠넘기는 방식으로 구조화된 오늘날 대한민국의 에너지 시스템이다. <오래된 희망>이 시도한 차분하고 논리적인 접근은 끝내 밀양 주민들의 주장이 모두 옳았음을 하나하나 증명해 낸다. 영화 시사회를 마친 뒤 밀양 주민들은 모두 희열에 들떴다. 시사회장에서 밀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들은 “이 영화를 세상 모두에게 알리고, 후손들에게 남겨야 한다”며 들뜬 얼굴로 기염을 토했다. 밀양은 옳았으나, 현실 속에서 패배했다. ‘오래된 희망’은 지금도 유예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영화가 종료되고 나면 우리는 어떤 새로운 깨달음 앞에 마주서게 된다. 가닿을 수 없어서 불가능한 희망인 듯하였으나, 돌이켜 보니 그 ‘오래된 희망’은 바로 지금 여기, 당신들의 삶과 투쟁을 통해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2012년 가을, 카메라 앞에서 읊었던 한옥순 할매의 ‘오래된 희망’의 남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한 형제같이 이렇게 살고 싶어. 우리같이 어려운 데, 강정도 가고 싶고, 용산 참사도 갈 거야. 그렇게 참여하고 살다가 죽을 거야. (그런 시간이) 쪼끔만 더 빨리 왔으면, 쫌만 더 젊었으면 좋았겠지. 그래도 늦다 한 게 빠른 거다. 그렇게 사는 보람을, 넘(남)을 도와가면서, 너거가 와서 우리 도와주듯이, 우리도 그렇고 살고 싶어.” 밀양은 패배하지 않았다. ‘오래된 희망’은 밀양 투쟁이 시작된 지 10년을 맞는 지금, 여전히, 깃발처럼 펄럭이고 있다.

이계삼(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

28인권해설

인권해설: 후타바에서 멀리 떨어져서 2 : 핵의나라2

인권해설

이 영화는 벌써 4주기가 된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로 인해 피난민이 되어야 했던, 그리고 지금까지도 피난민으로서의 삶을 ‘지겹게’ 지속하고 있는 후타바 사람들을 담고 있다.

폐교로 피난하여 단체 생활을 하고 있는 후타바의 주민들. 영상 속에는 유달리 먹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이들의 식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도란도란 모여 앉아 즐기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삶을 지속하기 위해 먹는, 그들 말대로 ‘Feeding’ (먹이 공급)처럼 느껴진다. 정부의 무책임한 탁상행정을 뉴스 화면을 통해 보며 ‘밥이 잘 안 넘어간다’ 속상해 할지라도 그들은 먹는다. 정말 인간이 최소한으로 누려야 할 권리마저 제한되는 피난소의 생활이다. 영화의 시선은 이윽고 단체 피난소에서 긴급주거지로 옮겨 가는데, 긴급주거지의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피난소의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눈치다. 보상금과 제공되는 식사의 차이를 운운하며, 차별받고 있음을 토로한다. 이미 처참해질 대로 처참해진 모두이건만, 슬픔 속의 편 가르기는 계속 된다. 참 잔인하다.

후타바 주민들에게 선택지란 없다. 선택지가 없는 곳에서 인권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해야 하니 하는’ 것들 투성이다. 그들은 힘없이 ‘분해도 어쩔 수 없지 않나 이제는…’ 이라고 말한다. 거대한 핵발전의 폭력, 그리고 국가의 폭력에 그들은 ‘분해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묵묵히 삶을 지속해 간다. 사람들로 북적이며 ‘사람으로’ 살아갔던 후타바는 이제 텅 비어 버렸다. 세상에 태어난 생명 그 자체로 존엄했던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제거당한 채 비참한 마음으로 삶을 지속해가고 있다. 함께 기억해주지 않는 후쿠시마의 사고. 그 사고의 아픈 기억과 현재는 오롯이 그들만의 것이 되어 그들을 더 아프게 찌른다.

핵발전으로 인한 인권유린의 현장은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찾아볼수 있다. 고리원전부지로부터 고작 700m 떨어진 곳에 살며 국가가 인정해 주지 않는 각종 암과 질병을 앓고 있는 부산 기장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은 40여 년 동안 집단이주권을 주장했으나 번번이 묵살되고 있다. 자신들의 앞마당에 당장 송전탑이 들어오게 되는 밀양 할매들은 어떠한가. 정말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그들에게 국가는 ‘목숨’을 빼앗을 기세로 달려든다. 청도에서, 당진에서, 삼척에서, 영덕에서, 아니 서울을 제외한 모든 곳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핵발전이 주는 폭력은 광범위하고 또 강하다. 그러다가 만에 하나 사고라도 나면? 인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이 아닌 자들의 인권을 너무나 쉽게 짓밟는다. 이 모든 것들이 핵발전소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다.

쓰리마일의 미래는 체르노빌만이 아니었으며, 체르노빌의 미래는 후쿠시마만이 아니다. 다 같이 기억하고 기억으로부터 행동해야 한다. 기억, 하자.

신지선(녹색연합)

24인권해설

인권해설: 밀양 아리랑

인권해설

2014년 6월 11일, 새벽을 틈타 마지막으로 남은 밀양송전탑 반대 움막 4개가 철거됐다. 동원된 경찰병력만도 2천5백여 명. 매일 밤낮없이 움막을 지켰던 주민들이 잔혹하게 진압당한 채 끌려나왔다. 10년간의 반대 투쟁은 이제 끝났다고 비웃는 한전과 경찰 앞에
서 주민들이 잔치를 열었다. 고기를 삶고, 지짐도 부치고, 육개장도 끓이고…. 오느라 고생했다고, 울 필요 없다고, 여기가 끝은 아니라고, 며칠 사이 부쩍 주름이 깊어진 어르신들이 외려 등을 토닥여준다. 서로 고생했다, 갈 길 멀다 인사 속에, 투쟁하기 딱 좋은 나이라는 구성진 노랫가락 속에 밀양의 밤이 깊어갔다. 6월 11일로부터 불과 3일이 지난 6월 14일, 밀양 단장면 용회마을에서 열린 ‘밀양송전탑 반대 제150차 촛불집회’ 풍경이었다.

일제의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열 일고여덟의 나이에 시집을 가야했던 이가, 보도연맹으로 남편을 잃은 것도 모자라 월남전에서 부상을 당한 아들을 평생 뒷바라지해야 했던 이가, 대형마트에 밀려난 이가, 1997년 금융위기 때 직장을 잃고 귀농을 해야 했던 이가 모두 밀양을 살아내고 있는 주민들이다. 그리하여 너나 할 것 없이모두, 한국 근현대사의 삶을 오롯이 살아내야 했던 이들이다. 국가는 이들의 삶을 지켜주기는커녕 무참히 짓밟았다. 무거운 짐바구니를 하도 이고 다녀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빠지고, 평생 놓지 못한 호미자루에 손가락이 휘고, 농사일에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면서도 이들은 매년 땅 한 마지기, 한 마지기씩 늘려왔다. 그렇게 소중한 땅이었다. 그러나 국가는 이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한 푼이라도더 받아내려는 욕심이라며 모욕했다. 비록 소박하지만 선산 있고, 공기 좋고, 작은 터전도 있으니, 나이 먹어가는 자손들이 나 가고 나면 여와서 살면 좋겠다며 꾸던 꿈을, 순리 대로 이치 대로 욕보며 정직하게 걸어온 인생을, 건강을 되찾게 해준 자연을 국가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싹둑싹둑 베어냈다.

울력과 정으로 살아내던 마을에 증오와 미움의 씨앗을 뿌리고 송전탑을 세웠다. 한평생 살아온 땅과 고향을 지키기 위해, 지금껏 살아온 삶의 방식을 지키기 위해 시작된 송전탑 투쟁. 10년의 시간 속에서 많은 이들이 손을 털고 떠나갔고, 누군가는 이제 끝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남은 이들은 끝까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밤낮없이, 도대체 무엇이 일상인지조차 모르게 싸웠던 시간들이 벅차지만 “포기했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돈도 필요 없다”며 “우리가 끝은 아닐 것”이라 말한다. 하루에도 열두 번 희망이 있나 없나 오락가락하지만, 누군가 문제를 해결해주길 앉아서 기다리기보단 스스로 희망이 된다. 자신의 힘 대로 욕보며, 잊지 않고 밀양을 찾아주는 이들의 손을 꼭 잡으면서, 오늘도 길을 나선다.

그 길은 길고 길지만, 가야만 할 길이다. 지난 10년간의 파행에 대한 공식 사과를 요구하고, 송전탑 피해를 실사하는 기구를 구성하고, 송전탑이 불필요할 경우 철거할 것을 요구하는 길이다. 또한 무려 2천 900km에 걸친 전국의 핵발전소와 송전탑 지역을 누비는 여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길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손을 잡고,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울고, 스타케미컬 노동자의 굴뚝 농성에 보낸 함성과 만나 가닿을 수 없는 마음들을 토닥이고 저항과 연대를 다짐하는 길이기도 하다. 밀양 주민들이 아픔을 삼키며 생을 걸고 밀어 올리는 시간들에 우리는 무엇으로 함께 할 것인가? 스스로 희망이 된 이들과 함께 우리 역시 희망이 되어 만난다면 어떨까? 모두가 존엄한 인간으로 살기 위해.

지난 10년의 싸움으로 80여 명이 100건의 사건으로 기소되었다. 밀양에 필요한 법률 비용과 벌금만 2억 3천만 원에 달한다. 가난한 농부의 어깨 위에 지어진 무거운 짐을 조금씩 나눠 지어 주시길. 모금을 통해 밀양 투쟁의 정당성과 의미 역시 세상에 다시 한 번 전해질 터이다.

: 후원계좌 농협 301-0164-5386-11 (밀양송전탑법률지원 모금위원회)

유해정(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

27인권해설

인권해설: 스와니: 1989 아세아스와니 원정투쟁의 기록

인권해설

1989년 미요시 사장을 찾아 떠났던 여성/청소년/노동자들은 2015년, 여전히 일터에 있다.

‘견습 김덕순’은 현장실습생과 ‘알바’가 되어 있다. 학교에서는 교육이라 부르지만 산업체에서는 값싼 인력으로 혹사당하는 노동자. ‘용돈’벌이로 치부당하며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 나이가 어리다고 폭언은 예사고 매사에 무시당하며 괴롭힘에 시달리는 노동자. 경력이 쌓여도 만년 수습인 노동자. 최저임금이라도 받을 수 있는 일자리가 최고의 일자리라 여기는 노동자가 되어 있다. 시커먼 시멘트벽으로 어두컴컴했던 공장이 온갖 화려한 조명으로 치장한 연회장으로, 드륵 드륵 미싱 소리가 ‘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로 바뀌었을 뿐이다. 노동자의 인권은 변함이 없다.

진짜 사장이 누구인지 모르고 일하는 것도 비슷하다. 연회장과 돌잔치 뷔페 등에서 일을 하려면 중간업체를 통해야 한다. 중간업체가 있으니 사업주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고, 노동자를 필요할 때만 부를 수 있으니 비용도 절감된다. 노동조합이 생길까 걱정할 이유도 없다. 중간업체는 더 많은 이득을 남기기 위해 10대 후반~20대 초반의 청소년노동자를 선호한다. 청소년노동자가 하루 13시간 일하고 손에 쥐는 돈은 6만원 남짓. 시급으로 계산하면 올해 최저임금 5580원에도 못 미친다. 학업을 병행하는 청소년이라면 주말에 일할 수 있고, 일당이 바로 지급되기에 그나마 매력적인(?) 일터다. 부당한 노동조건을 알지만 모른 척 꾹 참고 견뎌낼 때가 더 많다. 노동부에 진정을 해봤자 일하면서 당했던 모욕에 대한 사과는커녕 체불된 임금만 겨우 받을 뿐이다. 다른 노동조건은 결코 고려되지 않는다.

노동자의 인권을 오롯이 챙기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다. 가짜 사장 뒤에 숨어 잇속만 챙기는 진짜 사장, 관리 감독할 책임이 있는 행정관청의 직무유기,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노동법을 사업주 입장에서 치우쳐 해석하는 법원, 폭언·폭행하는 고객과 지위를 악용해 괴롭힘을 일삼는 관리자 등등. 26년 전 그 산을 함께 넘었던 수많은 연대와 싸움은 그들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라는 인식이 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지금의 청소년노동자에게도 연대가 절실하다. 청소년노동자, “너는 나다” 는 생각에서 시작
하는 연대 말이다.

이수정(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24인권해설

인권해설: 점령의 그림자

인권해설

5월 15일은 팔레스타인 민중들에게 비극적인 날이다. 1948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을 점령하고 일방적으로 국가 수립을 선포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매년 5월 15일을 기리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위기는 매우 다르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영토를 빼앗긴 ‘나크바(대재앙을 뜻하는 아랍어)’이고, 이스라엘인들에게는 건국기념일인 것이다.

영국과 여타 제국주의 열강의 암묵적 승인과 협조 속에 세워진 이스라엘은 지금까지도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식민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수법은 팔레스타인 인구를 줄이고 싶은 지역마다 ‘불법건물’이라는 명목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의 집을 부수고 유대인 정착촌을 키우는 것이다. 이러한 가옥 파괴와 불법 정착촌 건설 정책은 1973년부터 동예루살렘과 서안지역에 특히 집중되고 있다.

예루살렘은 흔히 이스라엘 영토로 알려진 것과 달리 오랫동안 동과 서로 나뉜 채 동예루살렘에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서예루살렘에는 유대인들이 주로 거주해 온 곳이다. 이를 무시한 채 이스라엘은 1994년 ‘예루살렘 거대화 정책’을 공식 채택한 이후 지금까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심장부로 탈바꿈하려는 계획을 밀어붙이고 있다. 그 결과 동예루살렘에서는 2014년에만 590채의 팔레스타인 건물이 파괴되고 1,177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강제이주를 당했다.

가옥 파괴는 거주자의 법적 대응이 어렵도록 이른 새벽에 들이닥친 수십 명의 무장 경찰들에 의해 신속히 이뤄진다. 거주자들은 극도의 공포감 속에서 방금 전까지 자신을 품고 있던 삶의 터전을 잃고, 건물 잔해를 일정 기한 내에 치우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한다는 통보까지 받는다. 가옥파괴를 당한 이들의 삶은 이스라엘의 관심 밖이며, 오히려 그 삶을 밀어낸 자리에는 유대인 정착촌과 함께 공원이나 고속도로가 들어선다. 당연히 이스라엘 전용 시설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지도상의 작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둘 사이의 분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볼때 그 땅 위의 현실은 일방적이고 불법적으로 찢겨진 팔레스타인인의 삶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점령의 그림자>가 숫자들로만 회자되기 쉬운 그 삶들을 함께 들여다보고 팔레스타인인들의 목소리에 함께 귀 기울일 수 있는 출발점이 되길 희망한다.

세라(팔레스타인평화연대)

25인권해설

인권해설: 거리에서 온 편지

인권해설

그/녀들은 거리에서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철폐를 외치며 싸운다. 왜 공장이 아니라 거리에서 싸우는가? 기륭처럼 회사가 공장기계를 팔아 치우고 야반도주했기 때문이며, 혹은 SK나 LG처럼 재벌 회사가 이들을 다단계 하도급으로 고용했기에 실제 원청업체인 본사가 있는 곳에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 이들의 현실을 드러낼 수 있는 곳이 거리이기 때문이다. 거리의 시민들이 해고된 노동자들과 함께 연대할 때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2014년 8월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를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인 852만명(45.4%)이 비정규직이다. 정규직과의 임금 격차는 100:50으로 고정되어 있다. 또한 영화에서 나오듯이 통신비정규직 노동자들에
게 작업복도 지급하지 않는다. 그 정도로 간접고용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영화에서 고공농성을 하는 SK브로드밴드 장연의 씨의 말처럼 답답함과 막막함은 투쟁을 하지 않아도 지속된다. 간접고용인 파견노동이 일반화된 것은 신자유주의 고용유연화를 위해 1998년 파견법이 시행되면서부터다.

그리고 유연화정책의 다른 쌍인 정리해고를 도입하면서 ‘긴박한 경영상의 위기’를 들어 노동자들을 집단 해고할 수 있는, 해고의 자유가 회사에게 주어졌다. 그렇게 정리해고된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 된다. 쌍용차를 인수한 상하이자본은 2009년 회계조작으로 경
영상의 위기가 있는 척하여 노동자 2,636명을 정리해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있지도 않은 위기’로도 정리해고를 할 수 있다며 회사손을 들어줬다. 더욱이 2015년 신차가 잘 팔리고 있음에도, 회사는 복직을 이행하지 않았고 결국 28번째 해고자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스타케미칼도 비슷하다. 스타케미칼이 인수하기 전 한국합섬은 2007년 파산했다. 공장부지만 2500여억 원이 넘었는데, 스타케미칼이 2011년 이를 399억 원에 인수하더니 1년 8개월 만인 2013년에 폐업을 선언하고 노동자들의 권고사직을 종용했다. 공장을 인수
비용보다 높게 분할매각해 차액을 남기려는 꼼수다. 사채업체도 아닌데 공장 가동에는 관심이 없다. 이처럼 먹튀 자본을 용인했기에 빈공장의 45M 굴뚝에서 지금도 사람이 싸우고 있다.

현재 345일을 넘긴 스타케미칼 차광호씨의 굴뚝농성을 제외하고 쌍용차(101일), SK브로드밴드와 LGU+통신비정규직 노동자들(80일)의 고공농성은 끝났다. 그렇다고 그/녀들의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오체투지나 고공농성 같은 투쟁 때만 우리는 그/녀들을 보
았을 뿐이다. 극한 투쟁을 하지 않을지라도 그/녀들의 싸움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기에 힘을 보탤 수 있으면 좋겠다.

명숙(인권운동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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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니가 필요해

인권해설

영화 속에는 미처 나오지 않는 수많은 얼굴들이 떠오른다. 어떤 일에도 당찼던 꼬마 부부, 딸 셋을 낳고 또 아이를 낳으러 간 언니, 짠돌이였지만 때때로 고생한다고 거금을(그래봐야 지폐 몇 장의 쌈짓돈이지만) 내놓던 형님, 늘 주변을 즐겁게 해주는 성현성…. 그리고 영상에 등장하는, 끝까지 버텨낸 이들….

대공장이라는 이름이 무색한 냄새나는 개천가 가건물에서 한여름의 폭염, 한겨울의 칼바람을 그대로 맞아가며 최저임금을 받고 일했다. 상여금이란 건 있어봐야 1년 사이 업체가 세 번이나 바뀌는 통에 그림의 떡이었다. 세 번째 업체에서의 생활도 잠시, 우리가 일하던 공정을 공장 밖으로 빼면서 인원을 줄이고 조건은 더 열악해질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업체가 세 번을 바뀌는 사이 번번이 더 아래로만 곤두박질치려는 노동조건 때문에 함께 회사에 맞섰던 DYT 언니들은 이번에도 열심히 싸웠다. 그러나 결국에는 회사를 따라나섰다. 외주화는 DYT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스피드, 욱산, 대일 등 많은 하청업체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원청업체의 생산성 향상(생산성 향상의 방법은 십중팔구 인원을 줄이는 것이다)이니 외주화니 하는 계획으로 일상적인 고용불안에 시달렸고 그 중 실제로 많은 수가 잘려나갔다. 천여 명 가까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무더기로 잘려나가던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껏 판매가 부진했던 지엠대우차가 가장 잘 팔려나가던 시기였다.

그 와중에 비정규직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결과는 처참했다. 지회 설립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몰아친 탄압으로, 조합에 가입했던 상당수는 곧바로 탈퇴를 했고 버텨낸 이들은 해고당했다. 하청업체들은 원청의 눈치를 볼 뿐이었고, 하청업체의 노동자들은 누가 봐도 원청인 지엠의 감독 하에 일을 해 왔다. 그리고 이를 증명해야 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몫이었다. 쫓겨난 노동자들은 이를 증명할 방법도 회사를 상대로 싸울 방법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고작 공장 밖에서의 처절한 투쟁이었다. 안 해본 것 없이 4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천막농성은 기본이고, 교통관제탑에도 오르고, 한강물에도 뛰어들고, 단식을 하고, 또 회사 건조물에 오르고…. 그렇게 마침내 공장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많은 이들이 하나둘 곁을 떠나갔고 남아 있는 이들은 또 그냥 그렇게 투쟁을 이어갔다. 그 와중에 갈등도 있었지만 또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온 시간이었던 것 같다. 떠나간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시작하던 순간에는 그들도 함께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니까.

조혜연(한국지엠부평비정규직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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