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파랑 너머

인권해설

태어났더니 성별 이분법 주민등록세계

2020년 10월, 행정안전부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난수화 하는 체계를 시행했다. 그러나 오직 성별 정보만이 남았다. 신분에 성별이 꼭 필요한가? 한국 사회는 태연스럽게 사람들을 남녀로 구분 지어 가부장제를 공고히 하고, 결론적으로 우리 트랜스젠더를 너무나 못살게 군다.

한국사회에서 트랜스젠더는 악순환의 삼각형에 빠져있다. 지금 한국에는 트랜스젠더가 성별을 변경하기 위한 법률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오직 대법원 내규에 따라 절차가 진행되며 이는 강제도 아니어서 ‘관대한 판사님’이 통과시켜 주기를 기도해야 하는 상황인데, 이 대법원 내규에서 성기수술을 강제하고 있기 때문에 주민등록상 성별을 정정하고자 하는 트랜스젠더는 막대한 의료비 부담을 져야만 한다. 노동, 의료, 교육, 금융 등 그 어느 현장에 주민등록번호가 필요하지 않은 곳이 있을까. 주민등록 번호를 바꾸지 않으면 제대로 일할 수 없고. 제대로 일하지 못하면 트랜지션 비용이 감당되지 않고, 성기수술을 하지 못하면 주민등록번호는 변경할 수 없다.

많은 어려움의 근본적인 원인에는 성별이분법적인 사회, 그리고 모든 국민을 간편히 등록해 관리하며 신분에 성별을 강제하는 국가가 있다. 영화에서 도입 반대 시위를 한 그 시스템은 한국에선 이미 수십 년째 이어오는 전통이 되었다. 또한 어떤 부분에선 더 악랄하고 지독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이라면 당연하게 지니고 태어나 환경이 되어버린 주민등록번호는 인권적 측면에서 볼 때 그 단점이 지대하다. 제도가 생겨나게 된 태생적 문제는 둘째치더라도 불필요하게 많이 쓰이며 다수의 개인정보가 포함돼있다.

사람의 신분에 성별이 그렇게도 중요한 걸까? 누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트랜스인지, 외형이나 신분증에 표기된 번호 따위로는 판단할 수 없다. 세속적인 한국사회에서는 신분증에 종교가 들어가있지 않지만, 사회 분위기에 따라 종교란이 기입된 국가도 있다. 만약 지금 당장 주민등록번호에 종교번호가 들어간다면 한국 사회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종교가 신분을 나타내는데 중요한 지표가 되는 국가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국가도 있다. 성별 또한 인식을 조금만 바꿔본다면 꼭 있어야만 할 필연적 이유는 없다. 선택지라도 다양해 원하는 정체성을 기입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남녀 두 가지로만 구분 짓는 제도는 이미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또한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과도한 수행만 추구하게 될 뿐이다. 남성 혹은 여성밖에는 없는 번호체계 안에서 그 사이 혹은 바깥의 많은 스펙트럼들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생겨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제도가 바뀌어야 사회도 바뀐다. 사회가 점차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공고히 해나갈수록 트랜스젠더는 가족에게 수용 받기 어려워진다. 가정에서 고통 받는다면 사회라도 보듬어야 할 텐데 이들을 보호해야할 사회는 마땅한 시스템을 마련하지 않는다. 그리고 트랜스젠더는 고통 받는다. 신분증을 요구하는 일상 속 모든 순간이 나를 끝없이 해명하는 고통스러운 순간으로 변모한다. 나는 나일 뿐인데 신분이 불일치하다며 멋대로 판단 지을 권리를 주민등록번호가 쥐어준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 존중 받아야 하지 해명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어떤 투쟁을 하며 살아야 할지 선택해야 할 만큼 투쟁할 일이 너무나 많은 우리의 삶이다. 그러니 밥이라도 벌어먹을 수 있게 주민등록번호에 성별만은 제발 빼줬으면 좋겠다.

겨울 (트랜스해방전선)

 

트랜스해방전선

https://twitter.com/freetransright 

2017년 12월 창립한 트랜스해방전선은 트랜스젠더퀴어의 인권 증진을 위해 제도개선, 정치, 사회, 문화 등 사회 전반적인 영역에서 트랜스젠더퀴어를 가시화하고 행동하는 단체입니다. 2018년도부터 지난해까지 6년째 이태원에서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집회 및 행진을 이어왔으며, 성별정정특별법 등 입법운동, 트랜스젠더 가시화 등 캠페인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61인권해설

인권해설: 오류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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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구 오류시장, 55년 만에 역사 속으로… 최고 26층 주상복합으로 재정비” 올해 8월 경향신문 기사 제목이다. 하지만 기사에는 오류시장 사장님들의 투쟁 이야기가 담겨있지 않으며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경향신문뿐 아니라 다른 신문들도 여기가 어떤 시장이었고,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 언급하는 내용은 없다. 그렇게 우리 도시의 역사는 제대로 기록되지 못하고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쫓겨나는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기록하는 도시 다큐는 예술작품이자, 중요한 도시 역사 사료라고 생각한다.

<오류시장> 다큐멘터리는 오류시장의 재개발 이야기를 다루는 다큐멘터리이다. 도시 공간을 오로지 부동산 가치로 보는 시스템 안에서 사람들이 자기 삶의 공간을 지키려는 이야기이다. 도시 개발 투쟁 이야기가 다 비슷한 것이 아니냐고 일반화할 수 있겠지만 떡집 사장님 부부가 시장을 아끼는 모습은 마음을 울린다.

영화를 보고 첫 장면부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리슨투더시티가 2015년 을지로에 이사 온 뒤 2018년부터 철공소가 가장 많은 동네인 입정동에 재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3-1-4, 5구역에서만 2018년 4월과 12월 사이 7개월 만에 440개의 점포가 퇴거당했다. 60~70대 된 아저씨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짐을 싸고 30년 넘은 일터에서 쫓겨났다. 영화에서는 우리가 당했던 일들이 그대로 벌어지고 있었다. 시행사 한호건설은 법적으로 퇴거해야 하는 시기인 관리처분인가 이전에 상인들에게 각각 2억에서 8억 사이의 손해배상청구를 하면서 상인들을 쫓아냈다. 평생 남 앞에서 울 일이 없었을 그들은 추운 길바닥에서 가게 문을 닫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유명한 을지로 3가의 을지면옥은 100평 넘는 토지의 토지주이지만 시행사 한호건설에 의해 강제 수용당하고, 결국 강제집행까지 당했다. 그 후 리슨투더시티와 여러 연구자와 함께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를 조직해 지역 상인들과 함께 청계천을지로를 지키기 위한 여러 활동을 해오고 있다.

<오류시장>에는 청계천 사장님들과 똑같은 평생 일만 했을 상인들이 나온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그들의 손과 눈에서 짐작할 수 있다. 50년 된 시장에서 50년 넘게 장사하신 여성, 자기가 삶을 일궈낸 터전인 오류시장을 지키려는 떡집 사장님 부부, 오류시장을 기억하고 아끼는 구로FM 사람들은 을지OB베어를 지키려는 우리들과, 청계천 사람들을 지키려는 우리들과 거울과 같이 닮았다. 이들의 존재와 싸움이 도시의 역사가 아니라면 무엇이 역사일까? 특히 떡집 사장님의 수첩은 너무나 중요한 역사적 사료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듯 재개발 절차는 비민주적이다. 세입자만 재개발 절차에서 소외당하는 것이 아니라 시행사의 뜻에 거스르는 토지주들에게는 정보를 주지 않는다. 도시정비법상 75%만 동의한다면 나머지 25%는 공시지가로 수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깜짝 놀란 점은 시장개발의 경우 겨우 60%의 동의만 해도 강제 수용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또한 지분 쪼개기를 계속하면서 집주인이 늘어나는 과정도 영화에 잘 담겼는데 을지로의 경우에도 1평 남짓한 땅의 주인이 6~9명이 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행사들이 수익성이 된다고 판단하면 지분쪼개기 작업을 들어가 편법으로 땅 주인을 늘린다. 하지만 법원에서 세입자들인 재개발에 반대하는 지주들이 이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하나 공유하고 싶은 기쁜 소식은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의 경우 2018년 말부터 해온 투쟁의 결실로 수표동 공구상가의 경우 200호의 임대상가를 짓고 있으며, 산림동에는 2023년 6월 58호의 지식산업센터를 건립해 쫓겨나는 기술자들을 재정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은 험난했다. 공무원들을 설득하고, 사장님들을 설득하고, 시민들에게 내용을 공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세훈 시장이 새로 부임하면서 세운재정비촉진지구에 재개발 시 앞으로 짓기로 되어있던 메이커스파크나, 지식산업센터도 백지화되면서 우리는 또 밤낮없이 싸우고 있다. 현재 을지OB오비베어 공대위,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리슨투더시티에서는 상가 재개발 시에도 반드시 세입자들을 다시 수용하는 방향으로 도시정비법 개정을 준비하고 있다. 

오류시장이 결국 재개발된다는 소식을 뉴스로 접했다. 시장 건물이 물리적으로 사라진다 하더라도 오류시장이 어떤 식으로든 기억되게끔 오류시장 박물관이 새 건물에 건립되었으면 좋겠고 이 영화도 주기적으로 상영했으면 좋겠다. 사장님들이 새로 지은 건물에 분양권을 받을 수 있고 세입자로 들어갈 시에 주변시세 80% 이하의 임대료로 임차를 할 수 있게 여러 제도가 필요해 보인다. 우리는 상상한 만큼 만들어 낼 수 있다. 오류시장을 지키고 사랑해 온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당신의 노력과 눈물 때문에 그나마 우리 도시의 공공성이 지켜진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좋은 영화를 만들어 주신 감독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여러 장소에서 함께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박은선(리슨투더시티)

 

*2023년 28회 인천인권영화제 프로그램에서 재수록하였습니다.

 

리슨투더시티 

인스타 listentothecity

리슨투더시티는 2009년 시작되었으며, 미술, 디자인, 건축, 도시계획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함께하는 콜렉티브이다. 리슨투더시티의 활동 자체의 시작점은 한국의 과도한 개발과 환경적 사회적 무책임에 대한 문제에 대하여 의문점을 가지고 시작했다. 현재 내성천의 친구들,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을지OB베어 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폭력에 대한 침묵은 강력한 동조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함께 즐겁게 연대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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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헤제이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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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은 없지만 가드닝에 잠시 한눈을 팔던 때가 있었다. 마당을 가꾸는 사람들은 돌을 여러 곳에 활용하는데, 까만 현무암은 디딤석으로 많이 사용한다. 비뚤비뚤한 모양으로 자연스럽게 잘린 납작한 돌을 ‘부정형 판석’이라고 부른다. 지금 한국에서 사용하는 부정형 판석의 대부분은 베트남에서 온다. 유튜브에 올라온 석재 상인의 돌 소개를 보던 중 한 상인이 그런 말을 했다. 지금은 베트남이 가장 싸지만, 베트남 돌값이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는 미얀마, 캄보디아, 전 세계 어디를 가서든 고객 여러분께 가장 싸고 좋은 돌을 찾아드리겠습니다.

증기기관의 발달은 공간의 이동을 단축했다. 단축된 시간을 따라 한 세계의 자원은 다른 세계로 쉬이 이동할 수 있게 됐다. 각 자원은 그저 시간의 단축에 따라 자유롭게 오가지 않았다. 비용의 차이에 따라 발생하는 차익, 새로운 이윤이 자원을 이동시키는 톱니바퀴였다. 식민지 지배자들이 남반구에서 북반구로, 아프리카 대륙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자원과 노예를 이동시킨 것도, 공장고 산업이 미국과 유럽에서 한국을 거쳐 중국과 베트남으로 옮겨 다닌 것도, 미국의 ‘고객’이 콜센터에 전화를 걸면 인도의 노동자가 전화를 받는 것도 바로 이 차익을 쫓아 일어난 이동이다.

땅과 광물같이 한정된 자원의 경우 경쟁은 더 격렬해진다. 볼리비아의 아름다운 소금사막 우유니에는 세계 리튬의 50~70%가 매장돼 있다. 약탈을 막기 위해 자원 국유화를 지키던 모랄레스 대통령은 미국과 다국적 기업의 지원을 받은 이들이 공모한 쿠데타에 의해 쫓겨났다. 한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2012년 이래 10년간 최소 1,733명의 환경운동가들이 살해당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아마존 열대우림이 펼쳐진 브라질과 콜롬비아 등 남미의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을 살해한 대표적인 동기는 광업, 벌목과 같은 사업의 진척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더 많은 이익이 기대될수록 더 많은 사람이 다친다.

사람만 쫓겨나는 것은 아니다. 전 세계 콜탄의 70~80%가 매장되어 있는 콩고민주공화국에서는 콜탄 추출을 위해 고릴라 서식지를 없앤다. 콜탄은 노트북과 스마트폰에 사용된다. 많은 이들이 2년이면 한 번씩 바꾸는 스마트폰이 새로 만들어질 때마다 고릴라가 가장 먼저 쫓겨나고, 고릴라가 쫓겨난 자리에서 아동을 비롯한 내전의 피해자들이 강제 노동에 시달린다. 힘이 없는 이들에게 자원은 저주다. 폭력으로 가공된 저주는 ‘저렴하고 좋은 물건’으로 모두의 풍요가 되어 돌아온다.

안타깝지만 이 땅에 사는 그 누구도 이 가해로부터 결백하지 않다. 수백만 원을 주고 핸드폰을 산다손 고릴라의 목숨값을 지불할 수는 없는 법이며, 자본의 이익을 향해 촘촘히 구조화된 세계를 홀로 빠져나갈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에겐 하나의 가능성이 있다.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 이윤이 아니라 평등, 자유, 연대, 정의, 평화의 원리로 세계의 그물을 다시 짜는 것.

누군가는 꿈같은 소리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을 보라. 무너지는 댐 앞에 사람들을 방치하는 지금의 시스템이야말로 허황하지 않나. 우리의 풍요에 질문을 던질 때다. 내가 살고 싶은 세계를 만들어갈 힘, 당신에게 있다.

윤영(빈곤사회연대)

 

빈곤사회연대

http://antipoverty.kr/

한국사회에서 심각해지고 있는 빈곤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빈곤을 확산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책에 따른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따라서 빈곤사회연대는 반신자유주의 반빈곤 연대운동을 지향하며, 사회구성원으로서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기본생활소득 △노동권 △공적 사회서비스 확보를 ‘민중의 기본생활권’ 쟁취를 위한 주요 과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개발정책, 빈곤대책으로 인해 오히려 인간다운 삶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 노점상, 철거민, 홈리스 당사자 운동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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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백미러로 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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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이는 승합차에 사람들이 타고 내린다. 익숙하던 삶의 공간을 떠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는 이들. 노인은 남겨두고 온 소를 떠올리며 눈물을 훔치고, 어린이는 군 입대를 앞둔 아버지와 이별의 포옹을 나눈다. 긴 여행 중에 용변이 급한 고양이는 차가 멈추자마자 볼일을 본다. 백미러에 비친 이들의 얼굴은 우리의 시선을 전쟁 속 구체적인 삶의 자리로 이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지 2년이 훌쩍 지났고,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에서는 약 천만 명의 피난민이 발생했다. 천만이라는 숫자 뒤엔 두려운 얼굴로 승합차에 탑승한 사람들과, 그들과 함께 살던 비인간동물들의 삶, 그리고 파괴된 마을과 대지가 있다. 전쟁은 주로 뉴스에 등장하는 전투와 군인들, 폭격으로 가시화 되지만, 전쟁을 겪는 삶들은 다양하며 고유하다. 

피난민들을 비추는 승합차의 백미러는 어린이와 노인, 그리고 여성들의 얼굴을 비춘다. 백미러에 등장하지 않는 어떤 사람들은 승합차에 타는 대신 강을 헤엄치거나 어둠 속을 걸어 피난을 떠난다. 이들에게 피난처는 허락되지 않는다. 징집을 피해 국경을 넘는 사람들 얘기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우크라이나는 계엄령을 선포하며 18세에서 60세 사이 남성들의 출국을 금지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우크라이나는 50만 명의 추가 병력을 동원하기 위한 목표를 세우고, 해외에 거주하는 해당 연령 남성들에 대한 영사 업무를 중단했다. 징병가능한 연령대의 남성들은 해외 체류 중 여권이 만료돼도 갱신하거나 새로 발급 받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강제동원이 가능한 연령 역시 기존 27세에서 25세로 하향조정 되었다. 우크라이나 내무부에 따르면, 전쟁 발발 이후 ‘병역기피’ 혐의로 고발된 사람들은 9천 명에 달한다. 루마니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티사강에서는 최소 33명이 징집을 피해 이 강을 건너려다 익사했다고 전해졌다. 

전쟁의 승패를 묻는 순간, 어떤 이들의 피난에는 ‘병역기피’라는 이름이 붙는다. 전쟁은 일상을 파괴하고, 파괴된 일상의 자리에 새로운 힘의 질서를 만든다. 전투력과 승리를 절실히 호소하는 질서 속에서, 피난민을 수송하는 승합차의 백미러는 징집을 피해 도망치는 남성들을 쉽게 비출 수 있을까. 전쟁의 잔혹함은 폭격에서 뿐만 아니라, 승합차의 백미러가 비추는 / 비추지 못하는 장면에서도 낱낱히 읽혀야 한다. 

승합차에 탄 노인은 뒷자리에 탄 어린이들을 바라보며 말한다. 

“부디 잘 살아라.” 

그의 목소리에 어린이들에 대한 염려와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2022년 2월 이후, 한국의 무기산업은 전례없는 호황을 맞았다. 한국의 한 언론은 이를 보도하며 한국의 방산주를 ‘자녀에게 물려줄 주식’이라고 말했다. 이 이질적인 두 장면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이 겪는 전쟁이 지구 반대편 누군가에게는 이익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이 누군가에게 돈이 되는 시스템은 계속해서 죽음을, 피난을, 멸종을 만든다. 어린 삶들이 부디 잘 살기를 바라는 노인의 마음이 보편이라면, 물려주어야 할 것은 방산주가 아닌 ‘전쟁 없는 세상’이다. 

뭉치(피스모모)

48인권해설

인권해설: 축하해, 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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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 미검출은 환영과 포용의 기준이 아니다

덱스는 영화 초반에 의사를 통해 본인의 HIV 미검출 상태를 확인한다. 여기서 말하는 미검출은 혈액 내 HIV의 양이 기준치보다 낮은 상태를 말하는데 국가별로 차이는 있으나 국제적인 기준으로는 200개/ml 미만, 한국의 경우 20개/ml 미만이다. 일반적으로 HIV 감염인이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를 지속한다면 최대 6개월 이내에 HIV 미검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HIV 미검출인 HIV 감염인은 비감염인과 콘돔을 사용하지 않은 성관계를 하더라도 전파확률이 0%이다. 이러한 상태를 U=U(Undetectable=Untransmittable)라고 한다. U=U 캠페인는 2007년부터 2016년 사이에 수천 쌍의 커플(HIV 감염인과 비감염인 커플)을 대상으로 진행된 연구들에 기반하며, 100개 이상의 국가와 1000개 이상의 조직이 U=U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다. WHO와 UNAIDS 등 국제기구도 인정하는 사실이고 한국의 질병청 또한 U=U를 홈페이지에 소개하고 있다.

미검출과 U=U는 HIV 비범죄화와 연결된다. 현재 여러 국가에 아직 HIV범죄화 법규범이 남아있는데, 일부 국가에서는 미검출 상태를 방어수단으로 사용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한국에는 HIV 감염인을 범죄화하고 있는 에이즈예방법 19조 전파매개행위죄가 있다. 전파매개행위죄는 2023년 10월 26일 헌법재판소 선고에서 합헌4, 일부위헌5로 심판족정수를 채우지 못해 합헌결정이 났으나 양측 모두 U=U를 인정했다. 그러나 만약 미검출인 상태가 범죄화 법규범에 방어수단이 된다고 하더라도 미검출에 도달할 수 없는, 미검출에 도달하기 어려운 HIV 감염인을 여전히 범죄화한다는 점에서 완전한 비범죄화라고 할 수 없다. HIV/AIDS에 대한 새로운 낙인을 재생산할 뿐이다. 그렇기에 U=U가 비범죄화의 근거 중 하나로 작용할 수는 있어도 U=U가 비범죄화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선 안된다. HIV 예방과 HIV 감염인의 지속적인 치료를 위해서도 완전한 비범죄화가 되어야 한다.

HIV 예방의 핵심은 HIV 감염 여부를 모르는 사람이 조기검진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고, HIV 감염인을 인지한 사람이 조기치료에 접근할 수 있도록 의약품접근권과 의료접근권을 보장해야 하고,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혐오와 차별, 낙인을 철폐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HIV/AIDS에 대한 낙인과 차별, 혐오가 사회에 만연해 있고, 국가는 HIV를 범죄화하는 법을 통해 조기검진, 조기치료를 방해하고 있다. 초국적 제약회사는 독점적인 특허권 유지와 높은 치료제 가격으로 폭리를 취함과 동시에 퀴어와 HIV 감염인의 의약품접근권을 침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HIV 감염인에게만 미검출 도달을 강요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미검출 상태에 도달한 HIV 감염인 덱스를 커뮤니티가 포용하는 것처럼 그려낸 듯한 마지막 장면은 앞선 이유로 인해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마치 덱스가 2년 동안 커뮤니티와의 단절을 선택하고, 다시 커뮤니티에 돌아가기 위해 “미검출”이란 티켓을 얻은 걸 축하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2년 전에 덱스가 HIV 감염인이라는 것을 밝혔다면 커뮤니티가 포용할 수 있었을까? 미검출 상태에 도달하지 못했더라도 우리는 2년 전의 덱스를 환영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함께 잘 살 수 있는 커뮤니티를 꿈꾸고 만들어야 한다.

소리 (HIV/AIDS인권행동 알)

 

HIV/AIDS인권행동 알

https://action-al.org/

HIV/AIDS 감염인의 인권증진과 네트워킹을 목적으로 2011년 12월 1일에 설립되었습니다. HIV감염인 노동권 침해 대응, 진료거부 및 의료차별 대응, 전파매개행위죄 폐지 운동 등 HIV/AIDS 인권증진을 위한 행동을 합니다. ‘HIV/AIDS정보사이트 아카히브’를 제작, 유지하고 있고 청소년 청년 HIV 감염인이 차별없이 안전하게 소통하고 교류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매해 인권캠프를 개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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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여기서부터: ‘간사이레미콘’ 사건과 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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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6월 여의도에 1,500명의 경찰이 투입되었다. 경찰은 도끼, 쇠망치, 쇠파이프, 소화기 등을 동원해 건설운송노조의 농성장을 침탈하여 레미콘 차량을 파손하고 강제진압했다. 특수고용 노동자도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다는 말에 민주노총을 찾아 노동조합을 세웠던 레미콘 운송 노동자들은 자본과 정권의 거센 탄압을 마주해야 했다. 노동조합의 투쟁을 업무방해, 폭행 등으로 몰아 수십 건의 고소고발을 하고, 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해고되었지만, 정작 무자비한 폭력을 행한 주범은 그들이었다. 각 현장에서의 격렬한 투쟁의 와중에 건설운송노조를 설립한 최초 13인 중의 한 명이었던 안동근 노동자가 사망하는 일도 발생했다. 노동자들은 굴하지 않고 투쟁을 이어갔지만, ‘특수고용’으로 전환된 레미콘 노동자들에 대해 ‘노동자가 아니’라는 법원의 판결이 이어지면서 노동조합은 힘을 잃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산별노조가 세워지고 건설기계업종 노동자들의 조직화가 활발해지기까지 수년간 레미콘 노동자들의 권리를 향한 움직임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건설노조는 산별노조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을 아우르며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활동을 한다. 또한 건설현장이 자본의 이윤논리가 만연한 공간이 되지 않도록, 그래서 노동자들과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공간이 되지 않도록 하는 활동을 벌인다. 이 같은 활동이 결실을 보려면 다단계하도급으로 이루어진 건설업에서 원청 건설사의 책임을 강하게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원청 건설사를 상대로 한 투쟁은 일용직 노동형태가 만연하던 현장을 조직하는 과정과 함께 진행되었다. 스스로 ‘모래알’같다고 말하던 건설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모이기 시작했고, 노동조합은 점차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원청을 상대로 한 노동조합 활동에 ‘공갈협박’이라는 죄명을 붙였다. 현장의 산업안전법규 위반을 신고하고, 단체교섭을 요구하는 활동이 ‘공갈협박’, ‘금품갈취’이고, ‘업무방해’라는 논리로 많은 활동가들이 구속되었다. 이에 맞서 노동자들은 2004년 명동성당에서 71일간의 농성을 전개했고, 2006년 다시 몰아친 탄압에 맞서 88미터 높이의 올림픽대교에 올라 탄압의 부당함을 외쳐야 했다.

노동조합은 끈질기게 일어섰다. 건설노조는 다시 조직력을 키우며, 현장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건설산업과 관련한 제도개선 등의 활동을 활발하게 펼쳐나갔다. 그리고 지금, 윤석열 정부하에서 세 번째 대규모 탄압을 겪고 있다. 또다시 ‘공갈협박’, ‘갈취’와 같은 오명을 노동자들에게 씌웠다. 이번에는 ‘건폭’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일부 업종이 아닌 건설노조 전체에 대한 전방위적인 탄압이 이루어지고 있다. 불안정한 삶과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권을 쟁취하고 안정된 삶을 일구어 온 노동조합은 폭력집단으로 매도되고, 삶을 지켜준 노동조합이 매도되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던 노동자 양회동은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 그럼에도 아직 어둠은 걷히지 않고 있다. 오랜 기간 건설노조의 활동이 있었지만, 단기간에 강력하게 몰아친 탄압은 현장의 권리 기준을 대부분 무너트렸다. 조합원은 일터에 들어가지 못하고, 임금은 큰 폭으로 후퇴했고, 노동조합이 밀려난 현장에서는 부실공사가 만연해 사회의 안전을 위협한다. 

터한 나라는 다르지만 자본의 탄압은 마치 쌍둥이처럼 같은 모습을 보인다. 90년대 정규직이었던 레미콘 노동자를 특수고용으로 전환하는 방식은 일본에서 들여왔다 하고, 2000년대 초중반 한국에서 벌어진 공안탄압은 간사이 레미콘에서 똑같이 반복되었다. 노동조합이 사라진 일터는 우리의 삶과 노동을 돌보지 않는다. 2023년 건설노조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공공기관이 발주한 현장조차 휴게실, 화장실, 샤워실, 탈의실 등이 턱없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열악한 현장은 상대적으로 약한 처지의 이들에게 더욱 위협적이라서, 여성을, 이주노동자를, 그리고 노동조합의 손이 닿지 못한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을 더 크게 해칠 수밖에 없다. 곧 다시 폭염의 시기가 다가온다. 공공기관이 발주한 현장이 이러한데 민간 사업장은 어떨까. 소규모 건설현장의 노동자들의 처지는 또 어떨까. 오래전 집으로 돌아가던 늦은 시간, 일을 마치고 공사 현장 한편에서 수도꼭지 하나에 의지해 발을 씻던 건설노동자의 모습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한다. 이들의 삶을 빼앗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자는 누구인가. 답은 너무 명백하다.

엄진령(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workright@jinbo.net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는 ‘불안정 노동 철폐’를 자기 과제로 하는 활동가, 노동자, 법률가, 연구자 등이 모여 2002년 설립되었습니다. 누구나 건강하고 안정된 일자리를 가질 권리가 있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는 권리를 빼앗고 노동과 삶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모든 것에 맞서 싸우며,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46인권해설

인권해설: 팬텀 패럿

인권해설

국가의 디지털 감시에 인권 원칙은 무슨 소용

2015년 4월 8일 세월호참사 추모집회에서 시민 1백여 명이 연행되었다. 경찰은 이 중 40명 이상에 대해 휴대전화를 압수하였다. 그리고 법원은 그날 밤 청구된 압수수색영장을 거의 다 내주었다. 그래서 참가자들은 자신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문자메시지, 카카오톡, 사진, 통화기록은 물론 페이스북 등 원격접속내용까지 깡그리 경찰에 제공해야 했다. 휴대전화 패턴을 풀라고 강요당한 사람도 있었다. 누가 집회를 주도하였느냐고 묻는 경찰 신문에서 진술을 거부하려던 어느 참가자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추모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경찰이 내 인생을 전부 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묵비권이 헌법상 권리라는 선언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늘날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는 것은 우리의 삶 거의 모든 면모에 관한 디지털 기록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미국 연방대법원은 휴대전화를 국가가 압수하는 것이 “과거에 집을 철저하게 수색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민감한 정보를 노출시키며, 그 정보들은 전례없이 광범위하게 집합되어 있다.”고 우려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국가가 기본권을 최소한으로만 침해해야 한다는 그간의 인권 원칙이 디지털 시대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제 디지털 기술은 나의 모든 이동기록, 사회관계, 취향, 건강, 심지어 생각까지 한데 모으고 드러내고 심지어 추측을 하는 데 이르렀다. 국가는 이런 기술적 권력을 동원하여 개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손쉽게 들여다 보게 되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문제의 본질이 기술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기술은 국가의 오래된 욕망을 실현시켰을 뿐이다. 유엔인권최고대표는 디지털 시대 국가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동시다발적이고 침입적으로, 표적적으로나 광범위하게 감시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경고한다. 

이것은 테러방지법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휴대전화 만의 문제도 아니다. 집회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연행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코로나19 시기에 확진되었다가 휴대전화와 신용카드의 모든 정보가 제공된 환자의 문제이기도 하다. 장애인 부정수급을 수사한다며 관내 거의 모든 장애인과 활동지원사 6백 명의 정보를 저인망식으로 털어간 경찰의 문제이고, 코로나 시기 이태원 클럽을 방문했던 사람 1만 명의 휴대전화번호를 수집한 당국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처럼 디지털 기술은 ‘전수조사’에 대한 국가의 욕망을 갈수록 완벽하게 실현해 가고 있다. 모든 행동과 생각에 디지털 기록을 남기는 세상으로 빠르게 바뀐 마당에, 침해는 최소한이어야 한다는 오래된 인권 규범이 고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기술이 국가 권력을 뒷받침하는 데 굳이 이와 불화하는 인권 규범은 세상 그 자체와 맞지 않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기술이 허용하는 최대한까지 국가의 침입을 허용한다면 개인은 늘 최소 침해가 아니라 최대 침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권력 앞에 한없이 개인이 투명해지는 상황을 우리가 방치한다면 민주주의조차 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여전히 관건은 국가 권력을 인권의 원칙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국가 권력의 기본권 침해가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는 원칙은 디지털 기술에 대해서도 꼭 관철되어야 한다.

장여경(정보인권연구소 상임이사)

 

정보인권연구소

http://idr.jinbo.net

디지털 플랫폼과 인공지능이 우리의 삶에 갈수록 깊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스마트한 디지털 기술의 편의성은 모두가 평등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시민들은 디지털 환경을 일구는 주체가 아니라 개인정보와 지갑을 내주는 대상으로만 취급됩니다. 정보인권연구소는 디지털 환경에서 시민사회 관점에서 정보인권을 지지하는 대안 정책을 연구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38인권해설

인권해설: 이런 몸을 찾습니다

인권해설

우리에겐 이상한 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나와 같은 몸을 가진 사람이 어떤 경험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영화를 만들고 출연한 장애 여성 엘라가 자신과 같은 몸 찾기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유다. 영화의 주인공 엘라는 이제껏 비슷한 몸을 가진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장애에 대한 적절한 통계조차 찾기 어려운 현실에 분노하며 삶을 공유할 수 있는 몸을 찾아 나서고 기록한다.

 

정상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이상한 몸과 정체성으로 규정된 이들은 자신의 몸에 대해 알고 삶을 결정할 권리를 박탈당해 왔다. 몸은 최대한 숨기거나 정상적으로 치료하고 재활해야 할 부끄러운 것으로 억압받는다. 있는 그대로 나를 드러내며 살기 어려우니 같은 얼굴과 몸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궤적과 연결되기도 어려워진다. 낙인의 그림자는 불평등한 위치에 더 크게 짙어져 그들의 얼굴을 가린다. 그러나 배제와 차별로 인해 홀로 동떨어져 고립된 순간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이기에 서로의 경험을 공명하며 함께 싸워줄 얼굴들을 찾게 된다. 나의 몸과 얼굴로, 나답게 살기 위해, 비슷한 처지의 동료의 삶은 더욱 간절해진다. 비슷한 몸들과 연결감과 어긋남을 동시에 느끼며, 상호적인 갈등과 역동을 타고 현재 나의 이야기는 너의 이야기이자 우리의 이야기로 갱신된다.

 

국가는 장애인 거주시설을 통해 빠르고 효율적인 몸, 표준적인 삶에 들어갈 수 있는 대상을 구분 지어왔다. 2019년 7월부터 폐지된 장애등급제는 의학적인 기준에 따라 장애인의 몸을 등급으로 나누어 복지서비스의 수혜자를 선별하는 차별적인 제도다. 등급제가 폐지됐다고 하지만 장애 정도를 개편하는 수준에 그치며 권리화되지 못한 제도는 여전히 장애를 시혜의 대상으로 묶어둔다. 보호주의로 시설을 정당화해 온 국가의 폭력에 맞서며 시설 밖으로 몸을 이동시킨 장애인들은 노동하고 관계 맺는 삶을 살고자 했다. 그렇게 2020년 투쟁으로 쟁취한 권리중심공공일자리는 최중증 장애인의 권익옹호, 문화예술, 인권교육 등의 노동을 국가가 인정하도록 요구한 투쟁이었다. 하지만 서울시는 올해 1월, 권리중심공공일자리의 예산을 전액 삭감하면서 장애인노동자 506명을 해고하여 해고 철회 및 원직복직투쟁중이다. 또한 서울시는 탈시설 지원 예산을 전액 삭감하는 것도 모자라 지난 2월 장애인 자립지원절차 개선안을 발표했다. 탈시설을 할 수 있는 자립 역량 조사 이후에도 5년간 자립역량을 평가하며 퇴소 후 부적응 시 시설 재입소를 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절차에서 퇴소를 결정하는 의료인, 전문가의 개입을 더욱 강화하면서 정책의 기반이 되는 탈시설 지원조례 폐지 등 탈시설 권리를 약화시키고 있다. 제도와 정책이 이상한 몸으로 사회 속에서 노동하고 관계 맺으며 살아온, 살아갈 삶의 공간들을 황폐화시키며 시설사회를 강화하고 있다.

한편 장애 여성 운동은 장애인권 운동과 연대하면서도 성과 재생산 문제야말로 몸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사회적 문제임을 제기해 왔다. 따라서 생산구조의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생산과 재생산을 구분하고 사회적 재생산 노동을 여성에게 전가하거나 부차적인 문제로 다뤄온 역사를 문제 삼는다. 따라서 몸과 섹슈얼리티가 시설화되는 경험에 주목하며 성교육, 반성폭력, 성평등, 돌봄 운동 현장에서 싸운다. 영화에서 엘라는 자신의 성적 욕망과 실천에서도 적극적이다. 비장애 중심의 사회에서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사회가 강요하는 정상성을 따라가는 것은 아닐지 자신의 욕망을 끊임없이 질문함과 동시에 결정권이 훼손당하지 않기 위해 출산 방식을 꼼꼼히 따지기도 한다. 그리고 현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나의 퀴어성을 잃은 건 아니다. 어쩌다 남자와 있을 뿐이다”라고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말한다. 작년 9월, 여성가족부가 10년간 진행한 비장애학생과 장애학생이 참여하는 ‘성인권교육’ 사업예산이 전액 삭감 계획을 규탄하며 장애여성공감(이하 공감) 발달 장애 여성 활동가 조화영의 “자위 배워서 자위할래”란 발언이 겹쳐진다. 어떤 욕망을 원하는지 말하고, 필요한 사회적 자원과 정보에 접근할 권리를 요구하고, 성적 폭력에 반대하며 몸의 즐거움을 찾는 여정, 내 몸과 섹슈얼리티를 내가 정의할 수 있는 힘, 모두 성적 권리다. 그러나 최근 공공도서관의 성평등 도서를 유해 도서로 규정하고 성평등 도서가 열람 거부 및 폐기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장애, 인종, 성적지향과 성별 정체성, 가족구성권 등 다양한 몸과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삭제하며 성평등을 가로막으려 한다. 차별과 혐오를 앞세워 평등을 지연시키는 국가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 투쟁은 이상한 몸들의 존엄을 지키는 투쟁이자 모두의 존엄과 연결된다. 엘라가 자신과 비슷한 몸을 찾아 나섰듯 공공도서관에서 나와 비슷하거나 다른 몸의 경험들을 우리는 언제든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영화에서 다리에는 뼈만 있는 것이 아니고, 동맥과 신경이 지나간다는 장면이 있다. 다리는 걷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일러주는 것 같다. 영화에 등장하는 장애인들의 말처럼 “다르다는 건 힘들”지만 “우리는 다 다르게 걷고” “정상이란 건 통계적 개념”일 뿐이다. 그러니 몸에 대한 이야기는 사회적 차별을 고발하는 동시에 다른 삶의 전략과 관계가 누적된 상호적인 돌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다른 몸과 정체성을 병리화시키며 손상으로만 몸의 상태를 설명할 때 어떻게 상호적으로 돌봄을 주고 받는 것이 중요한지 묻는 관계는 사라질 수 있다. 모두가 다 걷는다고, 똑같이 걷는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서로를 도울 방법 찾기를 게을리하기 쉽다. “스위치를 낮게 달면 해결될거라는 사회가 끔찍하다”고 엘라는 말하는데, 공감의 장애 여성 활동가 진은선이 말했던 “완벽하게 세팅된 자리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관계를 맺고 싶어요”는 말과 연결되는 대목이다. 갈등이 있지만 관계의 넘나듦이 있는 세계가 평등한 관계를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갈등이 가능하려면 관계 맺는 속에서 서로의 몸을 알아가야 한다. 서로를 살피고 만나고 지지하는 것은 사회적 재생산을 둘러싼 기반 속에서 가능해진다. 그러나 지난 4월 26일, 서울시의회는 서울시사회서비스원 조례 폐지안을 통과시키며 서울시가 사회서비스원의 예산을 전액 삭감 이후 해산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공공 돌봄의 공백을 저임금, 단시간의 형태로 메우고, 돌봄의 책임을 또다시 가족에게 떠넘기며 돌봄에 대한 사회적 논의와 제도를 후퇴시키고 있다.

우리는 서로 잘 의존하고 돌보기 위하여, 이상한 몸들이 비슷하거나 다르게 살아온 방법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때론 처음 만난 순간 서로의 낯선 모습에 흠칫 당황할지라도, 나와 당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 정답이 아니라 질문을 찾아가는 과정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엘라의 말처럼 “휠체어는 우리의 자유”이기에 이상한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험들 속에서 우리는 더 많은 권리를 찾아내고 재구성하면서, 더 많은 자유를 이야기하는 연대를 계속할 것이다. 그의 말대로 “장애인이 없는 세상은 더 별로”일 것이기에.

 

이진희(장애여성공감)

 

장애여성공감 

https://wde.or.kr/

장애여성 인권운동을 하는 단체입니다.

장애여성을 배제하는 제도와 기준이 가진 문제에 공감하고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1998년에 창립했습니다.

장애여성공감은 장애여성이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 존중받고 장애여성의 선택과 결정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며,

소수자들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사회에 변화를 일으키는 움직임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55인권해설

인권해설: 당신이 미치지 않도록

인권해설

정상과 비정상은 얼마나 가깝고 멀까? ‘비정상’이나 ‘미쳤다’는 것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화해 왔지만, 여전히 자주 간과 된다. 주지하다시피 책을 너무 많이 읽는 여성,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흑인 노예, 동성을 사랑하는 이들은 과거 ‘정신병자’였다.

또 한편 우리는 동일한 환경에서도 다른 감각을 느낀다. 여성과 남성은 같은 밤길을 다르게 걷고, 트렌스젠더와 비트렌스젠더는 화장실 앞에서 다른 고민을 한다. 밤길을 걷거나 화장실 앞에서 긴장감을 느끼거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은 ‘비정상’일까? 누군가는 사람들 앞에서 발표 할 때 더 많이 긴장하고, 누군가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 할 때 큰 해방감을 느끼기도 한다. 긴장과 해방감을 어느 정도로 느끼는 게 정상인지 혹은 비정상인지 규정할 수 있을까. 

영화의 ‘웰빙 라이프 스타일 연구 프로젝트’는 인간이 오랫동안 건강하게 사는 비밀을 밝혀내겠다고 하며, 누구도 아프지 않는 환경을 조성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개인의 심장박동수, 수면 시간, 문자를 보내는 속도, 불안을 느끼거나 부정적 생각이 드는 빈도를 포함해서 신체적 정신적 행동을 낱낱이 수치화한다. 영화에 나오는 10대 전후의 어린이는 잠드는 데 오래 걸리고 부정적인 생각이 자주 든다고 말한다. 그의 일상은 ‘문제적 증세’로 데이터화 돼서 집적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어린이는 교사에게 말한다. 자신이 잠드는 데 오래 걸리고 자주 부정적인 생각이 든다는 것을 알고 있는 친구들과 같은 팀이 되고 싶다고. 아마도 자신의 ‘문제’를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다. 사회가 그 어린이의 특성을 ‘문제’라고 규정하지 않고 ‘고유성’으로 수용했다면 어땠을까. 

해당 프로젝트는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 촛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정한 현상이 몸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구조적 맥락을 살피기 보다 ‘증세’로 포착하고, 그것을 치료하거나 교정하려고 드는 것은 질병을 개인화하는 위험을 높인다. 건강을 세포나 숫자에 한정시키며, 건강의 사회성과 연대성을 삭제 시키는 위험을 낳는다. 

사회는 개인의 건강권을 강조하며 개인의 몸을 정상과 표준에 맞춰 치료와 교정의 잣대를 끊이 없이 들이대고, 그럼에도 치료나 교정이 되지 않으면 ‘고쳐지지 않는’ 낙오 된 몸으로 남겨진다. 그래서 우리는 건강권 넘어 질병권(잘아플권리)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아플 때 의료적 개입이나 치료가 전혀 불필요 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파도 괜찮고 잘 아플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자고 말이다. 의료는 아픈 몸은 실패한 몸이라고 끊임없이 규정하지만, 우리에게 치료 되지 않는 아픈 몸은 ‘정상’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다른몸들의 구성원이자 조현병이 있는 동료는 수시로 환청을 듣고, 오랫동안 약물 치료를 받았지만 환청이 사라지지 않는다. 정신과에서 그는 치료 되지 않는 ‘실패한 몸’이지만, 그는 말한다. ‘내가 듣고 있는 목소리가 환청이라는 것을 안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이는 정신장애운동의 목소리 듣기 운동(Hearing Voice Movement)과 궤를 같이 하는 주장이며, 정신장애인은 ‘비정상적으로 정상적인 존재’라는 주장이다. ‘미친사람’은 ‘미친사람’의 감각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고 감각하고 살아간다. 마치 어떤 농인들이 인공 달팽이관 수술을 원하지 않고 고유한 세상을 살고자 하듯 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프로젝트 주장대로 누구도 아프지 않은 게 좋은 세상일까? 그러니까 모두 다 사회가 규정한 정상적인 몸, 표준의 몸으로 치료 되고 교정 된 이들이 가득한 세상. 즉, 불안하지 않고 안정된, 부정적이지 않고 긍정적인, 밤이면 금새 숙면에 들고, 아침이면 빠르게 일어나서 학교와 직장으로 정시에 달려가서 성실하게 요구를 수행하는 생산적인 몸들만이 가득한 세상 말이다. 질병권 운동에서는 이런 시도와 욕망을 반대해 왔다. 오히려 개인의 고유성이 존중받고 건강의 연대성이 살아 있어서, 아프거나 미쳐도 미안해하지 않으며, 차별이나 낙인 없이 잘 아플 수 있는 세상이 우리의 해방 된 미래에 가깝다. 

조한진희(다른몸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저자)

 

다른몸들 https://www.facebook.com/damom.action/

질병권이 보장되는 n개의 다른몸들이 존중 받는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정상성’에 대한 질문과 페미니즘에 기반해서 질병, 젠더, 장애, 돌봄, 계급, 종차별등에 대한 교차적 사유와 느린변혁을 지향합니다.

42인권해설

인권해설: 퀸의 뜨개질

인권해설

영화의 첫 장면은 감독이자 주인공인 한나의 네 호흡 말과 두 행위로 이루어져 있다. 말: “화장품 너무 오랜만에 써 가지고 안 나와.” “어머 어떡해 안 나오는 거 아니야?” “눈매를 어떻게 하면 남자답게 그릴까?” “너무 싫어 너무 느끼한 남자 같애.” 행위: 그는 화장을 한다. 즉, 여자되기 도구의 상징인 화장품으로 그는 느끼한 남자를 창작한다. 그는 회색빛 얇은 실로 촘촘하게 뜬, 마스크처럼 그 양 끝을 귀에 걸어 얼굴 일부를 가리지만 입은 뚫린, 턱과 인중만을 가리는 무언가를 쓴다. 즉, 여자들의 손기술이자 예술방식의 대표 격인 뜨개질로 그는 남자의 턱수염을 뜬다. 이렇게나 친절한 감독의 안내와 함께 나는 뜨개질로 자신의 젠더-세계를 한 코 한 코 떠나가는 영화의 여정에 기꺼이 동참한다.

이 세계가 실과 바늘로 만든 어떤 결과물이라고 상상해 본다. 인간뿐 아니라 온갖 인간 아닌 동물, 식물, 흙을 원료이자 수단으로 삼아, 즉 착취해, 뜨개질보다 훨씬 더 촘촘하고 광범위하게 짜인 세계를 상상해 본다. 다른 차원에서 그 세계는 “성별, 장애, 병력(病歷), 나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유전정보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전과,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학력(學歷), 고용형태, 사회적신분 등”의 실로 짜인 복합적인 세계다(권인숙 등이 2021년 발의한 ‘평등 및 차별금지법’ 법률안의 일부). 이 영화가 특히 주목하는 부분으로 한정해 말하자면 이 세계는 모든 행동, 말투, 취미, 기술, 삶과 죽음의 방식을 이성애자 남자 아니면 여자의 의미망으로 짜 내려가는 세계다.

영화는 말한다. “나는 내 방을 뜨개질의 세계로 만들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나는 내 방에서 뜨개질로 세계를 만들었다.” 영화는 이 거대한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 만다라 매드니스, 미친 원을 떠나간다. 한나가 능숙한 코바느질로 만다라를 짜는 시간은 그가 자신의 기술을 활용해 기존의 젠더-세계에 개입하는 활동이다. 그 시간 동안 기억, 관계, 흔적, 악몽이 떠오른다. 그가 좋은 신부가 되길 바라며 그에게 뜨개질을 가르쳐준 할머니 춘자 역시 따라온다. 이 세계를 벗어나는 일이 가능할까? 남자가 되고 싶었다던 어린 한나처럼, 한 사람이 여자의 의미망에서 남자의 의미망으로, 혹은 그 반대로 이동하는 일이 가능할까?

그에 대해 영화는 뜨개질로 답한다. 한나의 방에서 만다라는 한 점에서 출발해 중심에서 주변으로 퍼져나간다. 이 만다라는 한나가 촘촘하고 단단하게 짜내는 또 하나의 세계다. 이런 세계는 (무엇보다 재미있기 때문에) 다른 이를 초대한다. 영화가 진행되고 만다라가 점점 커지는 동안 한나의 친구들이 점점 영화 안으로 들어와 한나의 창작활동에 동참한다. 한나에게 신부수업을 강요하던 젠더규범 집행자처럼 느껴지던 춘자 또한 이 세계를 통해서야 자신만의 뜨개질로 어떤 세계를 만들어 온 여자가 된다. 만다라가 완성돼서야 한나는 말한다. “할머니의 뜨개질은 어떤 것이었을까. (…) 난 할머니의 뜨개질을 잘 모르는 것 같애.” 한나는 무언가를 창작하며 이미 알던 것을 모르게 된다. 권력자에게 무지는 권력의 수단이자 결과라지만, 창작자는 굳게 짜인 이 세계의 코를 풀고 또 다시 뜨며 아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만들며 세계에 개입한다. 젠더규범을 포함해, 한 인간에게 위치를 부여하고 다른 위치로 이동하지 못하게 결박하는 세계에서 어떤 이동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가끔 인간은 그 세계 안에서 다른 세계를 창작한다.

수엉(트랜스 연구자,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여성학 전공 대학원생, 이-무-기 멤버,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활동가입니다.

 

*2023년 28회 인천인권영화제 프로그램에서 일부 수정하여 재수록하였습니다.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https://www.instagram.com/scarlet_chacha/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는 주홀글씨로 낙인찍힌 모든 성노동자를 위해 차별과 낙인을 차근차근 없애나가는 당사자 중심 모임, 성노동자 인권 운동 단체다. 모든 성노동자가 안전한 환경에서 정당한 대가를 받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현재 용주골 여종사자모임 자작나무회와 함께 파주시의 강압적인 성매매 집결지 폐쇄 문제에 대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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