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오래된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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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밭에서 다섯 명이 백지화 계를 넣고 있어. 한 달에 2만원씩. 지금 백만 원이 됐어. 그거를 갖고 우리는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모르겠고, 우리는 떠날 거야.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몰라. 우리는 계획이 다 짜졌어. 우리 도와준 사람들 와서 공짜로 자고 가도록 문을 열어놓고 갈 거야.”

2012년 가을,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는 어느 날, 평밭의 한옥순 할매는 카메라 앞에서 발그레한 소녀 같은 얼굴로 ‘오래된 희망’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할매는 20개월 뒤, 움막을 철거하기 위해 칼과 커터기를 들고 달려드는 수천 명의 경찰 병력 앞에서 맨몸으로 싸워야 했고, 끝내 혼절하고, 끌려나와야 했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그들의 ‘오래된 희망’은 유예되고 있다.

영화는 밀양시 산외면 보라마을 공사현장에서 이치우 어르신이 분신 자결한 2012년 1월 이후부터 밀양에 들어온 미디어 활동가들이 3년간 촬영해 놓은 방대한 자료에 근거해 있다. 그 사이 세 번의 공사 재개가 있었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충돌의 스펙터클이 펼쳐졌다. 쓰러지고, 실려 나가고, 버둥거리고, 혼절한다. 제 몸에 쇠사슬을 묶는 할매의 얼굴은 말할 수 없이 결연하다. 중장비에 밧줄을 묶고 줄줄 눈물을 흘리는 할매의 얼굴은 바라보기가 괴롭다. 경찰 저지선을 향해, 한전 직원과 인부들과 중장비들이 쳐 놓은 겹겹의 스크럼을 향해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백발의 노인들. 도대체 저들은 왜 저렇게 싸우는 것일까?

<오래된 희망>은 이 질문에 대하여 대단히 차분하고 이성적인 답변을 시도한다. 카메라는 그 충돌의 스펙터클을 기술적으로 요리하여 특정한 종류의 정서적 반응으로 향하는 길을 스스로 차단하고, 이충돌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거대한 시스템을 조목조목 해부하는 길을 택한다. 거기에는 지난 몇 년간 방송 뉴스에 등장한 방대한 에너지 관련 뉴스 자료들과 전문가들의 분석, 진단이 동원된다. 그리하여 <오래된 희망>이 찾아 낸 최종의 해답은 ‘국민 모두에게 손해를 입히고 극소수 핵산업계 대자본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대용량 핵발전 및 장거리송전 체계, 원가 이하의 산업용 전기를 대자본에게 공급하기 위해 시골 노인들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미래 세대에게 어마어마한 위험을 떠넘기는 방식으로 구조화된 오늘날 대한민국의 에너지 시스템이다. <오래된 희망>이 시도한 차분하고 논리적인 접근은 끝내 밀양 주민들의 주장이 모두 옳았음을 하나하나 증명해 낸다. 영화 시사회를 마친 뒤 밀양 주민들은 모두 희열에 들떴다. 시사회장에서 밀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들은 “이 영화를 세상 모두에게 알리고, 후손들에게 남겨야 한다”며 들뜬 얼굴로 기염을 토했다. 밀양은 옳았으나, 현실 속에서 패배했다. ‘오래된 희망’은 지금도 유예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영화가 종료되고 나면 우리는 어떤 새로운 깨달음 앞에 마주서게 된다. 가닿을 수 없어서 불가능한 희망인 듯하였으나, 돌이켜 보니 그 ‘오래된 희망’은 바로 지금 여기, 당신들의 삶과 투쟁을 통해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2012년 가을, 카메라 앞에서 읊었던 한옥순 할매의 ‘오래된 희망’의 남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한 형제같이 이렇게 살고 싶어. 우리같이 어려운 데, 강정도 가고 싶고, 용산 참사도 갈 거야. 그렇게 참여하고 살다가 죽을 거야. (그런 시간이) 쪼끔만 더 빨리 왔으면, 쫌만 더 젊었으면 좋았겠지. 그래도 늦다 한 게 빠른 거다. 그렇게 사는 보람을, 넘(남)을 도와가면서, 너거가 와서 우리 도와주듯이, 우리도 그렇고 살고 싶어.” 밀양은 패배하지 않았다. ‘오래된 희망’은 밀양 투쟁이 시작된 지 10년을 맞는 지금, 여전히, 깃발처럼 펄럭이고 있다.

이계삼(밀양765kV송전탑반대대책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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