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팅 아이스크림 Melting Icecream

작품 줄거리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던 8~90년대의 투쟁을 담은 에이컷 사진이 수해를 입었다. 진흙탕 안에서 필름끼리 눌어붙고 녹아내려서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없어진 줄 알았던 필름이 알고 보니 사료들 구석에 남아있었다. 유제면이 불어서 밑으로 흘러내려 버렸지만, 이제라도 학생과 노동자의 목소리가 생생히 기록된 그 사진들을 다시 복구하려고 한다. 동시에 역사에 봉인되었던 그 시대의 테제와 정신도 함께 복구한다. 그리고 고백한다. 그 시절의 과오를. 그 시절의 안일함을. 역사가 해결하지 못했던 부조리와 여전히 기록되지 않는 목소리를 고백한다. 이 솔직한 고백을 듣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프로그램 노트

오랜 시간 뭉뚱그려져 젖고 녹아내린 기록을 다시 보존하고 끄집어내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1980년대부터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지난했던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사진으로 기록한 사람들이다. 독재정권 시기에 언론이 제 역할을 못 하자 사진운동이 그 공백을 메웠다. 사진운동은 투쟁의 현장을 여실히 전달했던 소식통이었고 사진기록운동가는 대한민국 근현대의 민주화투쟁과 노동운동을 겪어온 당사자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들의 회고가 시작된다.

분파에 따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하느냐와 작가주의를 추구하느냐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사진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같았다. 뉴스와 신문이 전달하지 않는 역사의 증인들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 이들은 혁명가들과 함께 격랑의 한복판에서 민주화를 꿈꿨다. 민주화라는 거대 담론이 보편의제로 자리 잡는 과정부터 87년 6월과 노동자대투쟁, 6・29민주화 선언까지 굵직한 사건들을 기록하며 여성노동해방과 비정규직철폐, 액팅워킹비자를 외치는 청년노동운동가들의 목소리도 빠짐없이 담았다.

그리고 이제는 그 시절의 민주화 테제가 추상적이었고 안일했음을 고백한다. 걸출했던 노동운동가들이 대거 정치권으로 투신하자 싸움을 이끌고 계획하던 모습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민주주의 정부를 열망했으나 그 이후에 대한 논의는 부족했고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김영삼은 삼당합당을 했고 김대중은 JP와 손잡았다. 노무현 정권에서조차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노동의 유연화는 악화되고 비정규직과 특수고용노동자, 이주노동자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같은 방식으로 무시당했다.

역사 속 영웅과 황홀경은 사그라들었다. 같은 역사가 반복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잊힌 역사를, 물에 젖고 녹아내린 시절을 끄집어낸다. 회고하고 비판하며 현실의 역사와 마주한다. 잊지 않겠다는 것은 곧 그다음을 생각하겠다는 것이다. 그다음을 생각하겠다는 것은 역사를 이어 나가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회의보다 역동할 것이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감독

홍진훤

인간이 의도치 않게 만들어버린 빗나간 풍경들을 응시하고 카메라로 수집하는 일을 주로 한다. 여섯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동료들과 공간을 함께 운영하며 이런 저런 전시와 이런 저런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때로는 프로그래밍을 하며 웹사이트를 개발하고 가끔은 글을 쓰고 또 가끔은 요리를 한다. 아. 이젠 영화도 만든다.

인권해설

인권활동을 하다보면,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남기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카메라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며 때론 저건 왜 찍는 걸까? 라는 물음이 생기기도 한다. 기나긴 집회의 연설과 가만히 앉아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덩그러니 놓인 가방, 때론이 공간과 무관해 보이는 곳에 카메라 렌즈가 향하는 것 같기도 하다. 메모를 남기거나, 현장의 소란스러움이 끝나길 기다리다 말을 거는 사람도 본다.

우리는 이러한 ‘인권’의 기억을 담은 사진과 말을 인권 기록이라 부른다. 현장과 무관해 보였던 카메라의 렌즈에는 그곳에서 존재하는 존엄의 다양한 모습이 담겨있다. 영화나 책과 같은 기록, 성명서나 자료집처럼 인권운동이 일상적으로 만들어온 기록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남겨져 있다.

인권기록을 정리하기 시작하며 기록 속에 담겨진 것들을 접한다. 인권운동에서 주장하는 것들,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폭력과 차별이 만들어지는 구조와 그 속에서 겪게 되는 사람들의 아픔,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받치는 마음이 그것이다.

하지만 인권의 현장을 담아온 기록이 모두 ‘인권적’이진 않다. 기록은 그 당시의 현장만이 아닌, 그때의 운동이 가진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오래된 기록에는 인권 침해의 현장이 적나라하게 담겨져 있어 피해생존자가 이 기록을 접했을 때 다시 그 고통의 시간으로 돌아가게 한다. 때론 피해자로서의 모습만을 강조하기도 하고 강

인한 투사로서의 모습만을 드러내기도 한다. 인권운동이 무엇을 어떻게 ‘재연’할 것인지, 인간의 존엄을 상기시키기 위해 자칫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무너트리지 않는지 지금도 고민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과거의 기록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현장을 잘 전달하는 소식통 수준에서 시작을 했던 거죠.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겠다. 나라도 하자.”는 말처럼 기록을 남긴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때의 현장이, 잊힌 기억이 아닌 지금의 기억이 된다. “계급의 위대, 전형성이라는 말을 되게 많이 썼어요. 전형성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가지고 어떤 노동자의 얼굴을 찍었을 때 이것이 정말 노동자 계급의 얼굴을 대표할 수 있는 그런 사진이냐”는 말은 당시 운동이 보여주려 했던 사회 모순과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얼굴을 담은 세계가 가진 한계점을 생각하게 한다.

영화에 담긴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투쟁하는 사람들의 결기에 압도당하면서도 그들의 삶에 투쟁만이 있지 않기에 그 이외의 삶에 대해 궁금해진다. 한 사람의 세계는 여러 면으로 이루어졌기에 여러 개의 기록은 또 다른 면을 채워낸다. 우리가 인권기록을 남기고 보존하는 건, 다양한 세계와 존엄한 삶의 방식들을 채워내기 위함이다.

기록은 남기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양한 기록이 모이고 그 기록을 함께 나눈다면 기록은 사회적 기억이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의 존엄이 무엇인지, 공명하는 인권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우리 모두 각자의 존엄에 대한 기록을 남기자. 그렇게 모인 기록을 서로 나누며, 살아가는 힘을 연결하자. 인권기록을 통해 서로 말을 걸며 어깨에 기대어 보자.

훈창(인권아카이브)


인권아카이브 http://hrarchive.or.kr
인권아카이브는 인권기록을 정리하고 보존하기 위해 2016년부터 활동하고 있습니다. 인권아카이브 웹페이지에는 오랜 인권기록부터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기록까지 보존하고 있으며, 누구나 손쉽게 자료를 볼 수 있도록 원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1125회 서울인권영화제우리가 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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