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사망원인: 불명

인권해설

감독은 언니가 약의 부작용으로 급작스러운 ‘죽임’을 당한 것인지 알고자 촬영을 시작했다. 이 영화는 ‘의료사고(투약이나 오진처럼 의료인의 과실로 환자에게 상해나 사망이 발생하는 것)’를 고발하는 영화가 아니다. 감독은 10년간 의약품이 개발되어 환자에게 오기까지의 전 과정을 좇아야 했다.

제약산업은 군수산업, IT산업, 금융업보다도 수익률이 높은, 세상에서 가장 수익률이 높은 산업이다. 2015년 제약산업 판매 수익은 7750억 달러(약 800조 원)로 추정된다. 이중 상위 25개 제약사의 판매 수익이 70%에 달할 정도로 독점경향이 크다. 2015년 상위 25개 제약사의 평균 수익률은 20.1%이다. 의약품은 건강에 직결되기 때문에 의약품 개발 및 유통에 대한 요구는 사회적이다.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의약품 수요는 점점 더 증가할 수밖에 없고 수익률도 높은,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다.

제약산업 로비의 가장 큰 성과물은 트립스협정(TRIPS,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이라고 할 수 있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 출범과 함께 그 부속협정인 트립스협정이 발효되어 전 세계적으로 특허제도가 통일되었다. 그 전까지 특허제도가 없는 곳도 있었고, 식량이나 의약품, 농산물 등 인간의 삶과 생명에 필수적인 것에는 특허를 허용하지 않는 곳도 있었고, 특허보호기간도 달랐다. 그러나 트립스협정 이후 동물, 인체 등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특허의 대상이 되었고, 20년간 특허보호기간을 보장해야했다. 이 트립스협정의 초안을 화이자제약과 IBM이 만들었다.

제약산업은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마케팅에 활용한다. 에이즈나 정신질환처럼 사회적 낙인으로 고통받는 환자들, 희귀난치성질환이나 암과 같은 중증질환을 가진 환자들의 치료 욕구는 더욱 클 수밖에 없다. 2003년부터 줄곧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인 한국은 그 사회·경제·문화적 원인을 떠나 제약회사에게는 ‘시장’이다. 대표적인 2세대 항정신질환제 ‘프로작’은 1987년 항우울제로 승인되었다. 제약회사 릴리는 우울증 진단을 받지 않더라도 감정조절이나 기분전환을 위해 프로작을 복용하도록 마케팅전략을 펼쳤다. “전 세계 사람들이 코카콜라, 말보로, 프로작 이런 이름을 아는 데엔 이유가 있겠죠.”라는 릴리의 마케팅 자문위원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프로작’은 2000년 기준 세상에서 네 번째로 많이 팔린 약이다. 릴리는 독점기간 동안 “오프라벨(off-label. 승인되지 않은 효능에 사용하는 것)” 전략으로 최대한의 이윤을 창출했다.

2001년, 프로작 특허가 만료되었지만 “에버그리닝 전략(기존 의약품을 약간 변형시키거나 약의 용도와 용법을 바꾸는 등의 방법으로 특허를 받아 독점을 연장하는 것)”으로 독점기간을 연장한다. 2000년에 월경전불쾌장애에 효과가 있다고 미 FDA 승인을 받고, ‘세라팜’이라는 상품으로 출시됐다. 동일한 화합물이지만 새로운 치료 용도를 발견했기 때문에 ‘세라팜’은 2007년까지 특허가 연장되었다. 월경전불쾌장애는 ‘병’이 되었다. 또 2001년엔 일주일에 한 번만 먹으면 되는 ‘프로작위클리’를 출시했고, 이에 대한 특허는 2017년에 만료되었다. 2001년 프로작 특허가 끝나던 해에, 릴리는 자사의 양대 베스트-셀링 의약품인 ‘프로작’과 ‘자이프렉사’를 병용하면 시너지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자이프렉사는 조울증, 조현병에 대한 효과를 승인받아 1996년에 출시된 약이다. 승인받은 효능이 다르지만 프로작을 먹던 환자들이 자이프렉사로 대체하도록 마케팅을 했다. “과부. 그녀는 매우 의심이 많고 쉽게 화를 낸다.”, “싱글맘. 생기 없는 옷을 입으며 아파 보인다.”, “최근 갑작스런 감정 기복이 생겼다.” 이런 증상을 보이는 사람에게 자이프렉사를 처방하도록 했다.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제약산업은 우리의 불안, 고통, 생명을 담보로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 시스템은 글로벌(global) 수준이기 때문에 한 국가 수준에서의 변화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프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할까, 항정신질환제를 먹지 말아야 할까? 그럴 수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아플 수 있고, 항정신질환제가 필요한 사람이 있으며, 항정신질환제에 국한된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감독은 언니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고자 할수록 질문이 늘어났다. 안전성을 확인하는 임상시험은 충분히 이뤄졌는지, 효과가 뚜렷하지 않은 약이 어떻게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릴 수 있었는지, 제약사의 마케팅으로 정신질환의 원인과 치료에 대한 패러다임이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 허가를 내준 보건당국마저 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지. 이 질문들을 이어 나가보자.

권미란(정보공유연대 IPLeft)

25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사망원인: 불명

프로그램 노트

병원에서 진단받은 병과 처방받는 약에 대해서 우리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잘 알지는 못해도 사람의 몸과 건강을 가지고 쉽게 장난치지는 않을 거라 믿는다. 이 세상이 아무리 자본의 논리로 점철되어 있다 해도, 분명 의학과 제약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니까.
그런데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사람들이 죽고 있다. 감독의 언니도 그중 하나였다. 아무도 의문을 해결해주지 않았기에 동생은 언니의 유품인 반지를 품은 채 10년 동안의 기록을 시작한다.
이상한 현상들이 끊임없이 포착된다. 항정신질환 의약품의 부작용엔 돌연사가 포함되어있고 그로 인한 사망자의 수가 너무나 많다. 놀랍게도 정신과 의사들조차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 이면엔 정신의학계의 성경과도 같은 DSM과 제약업계가 긴밀히 연결돼있다는 사실이 숨겨져 있었다. 판매하고자 하는 약품에 따라 정신병의 범위는 늘어만 간다. 이렇게 DSM을 등에 업고 만들어진 약은 의사의 눈을 가린 채 불티나게 팔린다.
이런 의심쩍은 상황을 파헤쳐보니 제약업계를 둘러싼 더욱더 촘촘한 자본의 톱니바퀴가 굴러가고 있었다. 독점판매권을 위한 로비, 불법마케팅 등 ‘생명’과는 거리가 먼일들이 제약회사, FDA, 학회 사이에서 은밀히 진행되고 있었다. 이 연쇄 과정 속에서 제약회사는 약을 최대한 많이 팔면 그만이고 환자들은 약을 구매할 ‘소비자’일 뿐이었다. 사람들을 살릴 줄로만 알았던 진단과 처방은 열심히 자본의 배를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노골적인 자본의 톱니는 의료계라는 전문적인 영역 안에 은밀히 숨어버린다. ‘전문가’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날이 갈수록 우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들이 늘어만 간다. 그 정보의 간극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을까.
언니를 그저 떠나보낼 수 없었기에 시작한 움직임이었다. 언니의 반지를 빼지 않았던 건 죽음의 원인과 이 거대한 구조를 끝까지 파헤치겠다는 약속과도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는 이들이, 절대 드러나지 않을 것만 같던 적막을 하나둘 벗겨내고 있다.

25프로그램 노트

인권해설: 더 블랙

인권해설

결국 2017년 8월 30일, 서울고법은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장원장에 대한 파기환송심에서 국정원법과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선고했다. 2013년 6월에 기소된 이후 4년 만에 국가기관의 불법적인 정치개입, 선거개입에 단죄가 내려졌다. 원세훈의 국정원은 인터넷 댓글 여론조작 활동을 대북심리전이라는 이름으로 수행했다. 물론 정보기관인 국정원이 심리전을 수행할 근거는 없으며, 이는 국정원의 직무 범위를 벗어난 일이다.

2016년 말 들불처럼 일어난 촛불 혁명은 결국 박근혜를 탄핵시키고 새 정권을 탄생시켰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직후 ‘국정원 개혁 발전위원회’를 만들어 그동안 제기된 국정원 관련 의혹 사건에 대한 재조사에 들어갔다. 2012년 대선 과정의 인터넷 댓글 여론조작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간첩 조작 사건, 박원순 시장 등 정치인과 시민사회에 대한 불법사찰, 보수단체에 대한 자금지원과 관제시위 동원, RCS라는 해킹 프로그램을 통한 인터넷 감시, 세월호 참사 관련 의혹, 채동욱 전 검찰총장에 대한 뒷조사 등 국정원을 둘러싼 의혹은 한둘이 아니었다. 모든 의혹이 시원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국정원 개혁 발전위원회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6개월간의 활동을 마무리하였다.

진실을 밝히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 억울한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책임져야 할 사람에게 응당한 책임을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국정원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똑같은 일이 앞으로 얼마든지 되풀이될 수 있다. 간첩 조작, 인터넷 댓글 여론조작, 정치 개입과 사찰… 이런 일들은 애초부터 국정원의 직무는 아니었다. 문제는 국정원이 너무나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는 반면, 그 권한의 남용을 통제할 수 있는 사회적인 감독 장치는 부재했다는 것이다.

서훈 신임 국정원장은 지난해 6월 취임과 동시에 국내 주요 기관을 출입하는 국내정보담당관(IO) 제도를 폐지하는 등 조직을 개편하였다. 의미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이런 내부적인 조직 개편은 언제든지 과거로 회귀할 수 있다. 그동안 국정원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킬 때마다 수차례 ‘셀프 개혁’을 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국정원의 권한 남용을 감독할 수 있는 외부적인 통제 장치다.

현재 국회에는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이 대표 발의한 국정원법 개정안이 발의되어 있다. 이 법안은 그동안 내국인 사찰의 근거가 되어 왔던 ‘국내보안정보’, ‘대공, 대정부전복 정보’를 국정원의 정보수집 범위에서 삭제하였다. 그리고 폐지된 국내정보담당관(IO) 제도를 정권에 따라 부활시키지 못하도록, 법률로 금지하였다. 또한, 국정원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기 위하여 그동안 시민사회가 요구해왔던 정보감찰관 제도를 도입하고, 국회 정보위원회에 대한 예산 보고, 국정원장의 자료제출 및 답변 의무, 특정 사안에 대해 감사원의 비공개 감사 요구 등 국정원에 대한 국회 통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국정원이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상급기관으로 군림하며 각 부처의 정보 및 정보업무를 관할할 수 있도록 한 ‘정보 및 보안업무 기획 권한’을 그대로 두었고, 국정원의 직무에 사이버 보안과 관련된 권한을 새롭게 추가한 것은 문제이다.

과연 이번 정부에서는 국정원이 탈바꿈할 수 있을까?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국회에서 국정원 개혁 법안이 통과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자유한국당 등 보수 정당의 반대도 만만치 않고 이러한 반대를 극복할 만큼 집권 여당의 의지가 강한지도 의문이다. 지난 2012년 대선에서의 인터넷 댓글 여론조작 사건은 마무리되었지만, 국정원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오병일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21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더 블랙

프로그램 노트

2012년, 대한민국의 국가원수인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치러졌다. 올바른 절차에 따라 선거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했지만, 그 뒤에선 국가의 조직적이고 불법적인 선거 개입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국가권력이 민주적인 선거에 개입하는 것은, 그 자체로 반민주적인 행위이다. 당시 여당의 박근혜 후보에게 우호적인 여론을 만들어가며 정권유지를 꾀하였던 국가정보원은, 불법적인 댓글 공작과 여론 조작을 펼치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 국민들의 투표는 민주주의 안에서 공정하게 이루어지는 듯했지만, 그 이면에선 국가가 이미 여론을 조작하며 표의 방향을 이끌어가고 있던 것이다.

가려진 줄 알았던 범죄의 정황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고 수많은 증거들이 밝혀졌다. 하지만 수사 결과는 ‘공작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음’이었다. 정부 여당과 경찰, 검찰 내부에서 수사 과정에 대한 탄압과 은폐가 지속되었고, 결국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은 채 사건이 종결되었다. 국가권력이 저지르는 여론 조작은 선거 개입뿐만 아니라 진실 은폐로까지 이어졌다. 민주주의를 뒤흔들며 대통령으로 선출된 박근혜와 그 정권은, 집권 이후 국가의 이름으로 수많은 국가폭력을 자행했으며 국민의 생각과 표현을 조종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한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후 국가권력의 범죄와 폭력에 대한 규탄, 저항의 목소리가 광장의 촛불과 함께 변혁의 파동을 만들어냈다. 국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국가권력의 핵심인 대통령을 탄핵했다. 그동안 벌어졌던 국정원의 정치 공작도 촛불의 흐름 속에서 다시 밝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적막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은 아니다. 국가의 여론 조작과 선거 개입은 지금도,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다. 국가권력이라는 적막은 언제나 존재함을, 그와 동시에 절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국민들은 다시 깨달았다. 그리고 더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두려움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일어나십시오.” 이남종의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잊지 않고, 우리는 국가가 만드는 적막에 소란을 피워나갈 것이다.

31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퀴어의 방

프로그램 노트

집에서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와 가족은 서로에게 어떤 의미일까.
지친 몸을 잠시 뉘러 들어온 ‘집’은 다시 투쟁의 장소가 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매번 온 힘을 끌어모아 이야기하지만, 그곳의 사람들은 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아 가족이 만든 울타리에서 탈출한다.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내 방문을 다시 울타리 삼아 숨을 쉴 만한 공간을 채우기도 한다. 나를 부정하는 부모가 아닌 서로 공유하는 삶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을 찾아간다. 그 가족이 아니라 새로운 가족을 상상하며 이 공간을 채울 사람을 기다린다. 이렇게 ‘자기만의 방’을 가지게 된 네 사람은 저마다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퀴어인 내게, 집은 어떤 공간일까. 퀴어인 내게, 가족은 어떤 의미일까.
집을 구성하는 가족 구성원들은 퀴어인 나를 참을 수 없어 한다. 왜 평범하게 살지 않냐고, 그렇게 살면 내가 죽어버리겠다는 말로 내 존재를 위협한다. 퀴어인 나를 드러낼 수 없는 집에서 나는 미래를 상상할 수조차 없다. 이렇게 집에서나 집 밖에서나, 퀴어인 내가 온전히 몸을 뉠 곳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나는 원가족으로 부터 탈출한다. 그렇게 나는 지금 이 집에서 ‘탈주’한다.

내 정체성을 온전케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 퀴어정체성을 온전케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저 나를 퀴어라 명명함으로 온전한 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퀴어정체성으로 채워나갈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공간이 필요하다. 내가 퀴어라는 것을 매번 새롭게 이야기해야 하거나 숨기지 않아도 되는 관계망에 있는 나를 상상한다. 나도 모르게 정상성에 끌려다녀 지친 나를 다시 숨 쉬게 할 수 있는 곳. 이런 내 심호흡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상상한다. 그렇게 서로에게 퀴어로 남을 수 있는 ‘퀴어의 방’을 만든다.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 내가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 그 새로운 ‘집’에 나를 뉘고 싶다.

35프로그램 노트

인권해설: 퀴어의 방

인권해설

‘집’은 혼인·출산을 통해 구성된 가족들이 세대를 재생산하는 장소로서 그 사회적 중요성이 부여된다. 그래서 주택 정책은 기본적으로 부부와 미혼 자녀로 구성된 ‘정상가족’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그에 따른 전형적 생애주기를 전제한다. 계급 양극화, 청년 실업, 고령화 같은 사회 문제가 대두됨에 따라 청년, 노인을 대상으로 한 ‘맞춤형’ 주택 정책이 마련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문제가 애초에 노동, 보건복지 등 ‘정상가족’을 모델로 운영되는 사회적 재생산 구조의 참패를 방증한다는 것을 쉽게 잊고 만다. 다수의 주거 취약층을 소수자화하고, 이들에게 주택공급, 임대, 대출 제도의 문을 부분적으로만 개방한다.

개인에게 ‘집’은 소유물이나 자산 증식 수단, 정착과 휴식의 공간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집’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 집에서 정착하고 휴식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이는 가구마다 다르며, 한 가구 내에서도 구성원들마다 다른 처지에 놓인다. ‘주부’나 ‘엄마’에게 집은 언제나 일터였다. ‘가족’은 공동의 이해관계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차별과 폭력이 일어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집은 구성원 각각의 정체성과 욕망을 협상할 수 있는 장소여야 한다. TV, PC, 식탁과 의자 등 물리적인 공간 배치뿐만 아니라, 밥을 먹고 TV를 보고 잠을 자야 하는 시간 규율, 누군가 방문을 함부로 열 수는 있지만 맘대로 잠가서는 안되는 룰, 친구를 초대할 수 있는지 등, 이미 이런 사소한 룰들까지도 힘의 불평등 위에서 결정된다. 여성, 아동과 청소년, 장애인,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은 집에서 협상력을 가질 수 있을까.

퀴어는 어떠한가? 퀴어는 가족에게 커밍아웃하는 것이 더 어렵고 고되다. 퀴어퍼레이드에서 가져온 스티커나 무지개 깃발을 둘 곳이 마땅찮다. 퀴어로서 공간을 점유한다는 것은 그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느냐를 넘어 퀴어의 삶의 방식과 정체성이 인정될 수 있는가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래서 퀴어는 집에서 ‘존재’하기 어렵다. <퀴어의 방>은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나서는 여정과 변화이다. <퀴어의 방>의 주인공들은 퀴어 정체성뿐만 아니라 입시거부, 흡연, 동물권 운동과 비거니즘 등의 면면이 원가족 안에서 불화한다는 점을 깨닫고, 가족을 통해 재생산되는 것이 ‘정상성’이라는 것을 폭로한다. 그래서 소수자 주거권 문제는 ‘가족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물질적 집이 아니라 ‘정상성을 재생산하는 공간으로서의 가족과 집’, 즉 권력과 차별의 문제를 돌아보도록 요청한다.

‘다양한 가족형태에 따른 차별해소와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연구모임’(2006~), ‘소수자 주거권 확보를 위한 틈새 없는 주거권 만들기 모임’(2010~) 등은 소수자, 반차별, 가족과 정책의 문제를 다뤄왔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퀴어타운 프로젝트>(2011), 가족구성권연구모임과 언니네트워크의 <정상가족 관람불가展>(2012),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네트워크>(2013~) 등의 프로젝트는 성소수자 공동체 상상을 위한 자원들을 연결해왔다.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2015~)의 일시 쉼터, 함께주택협동조합의 성소수자 공동주택 ‘무지개하우스’ 등 사적(私的) 복지를 넘는 퀴어 주거의 가능성은 여전히 실험 중이다.

더지(언니네트워크)

29인권해설

인권해설: 딩동

인권해설

아무렇지 않게 혐오하다.

장애에 대해 사람들은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 결함이나 손상된 몸과 정신을 떠올린다. 장애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인식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불쌍한, 불편한, 불가능한, 불결한 존재로 여기도록 작동한다. 개별적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개성, 꿈, 주어진 삶의 조건들에 의한 다양한 경험들은 삭제되고 동정과 시혜, 희화 혹은 기피의 대상인 ‘장애인’으로 ‘퉁쳐진다’. 장애인의 개인적 삶에 관심을 두거나 질문을 하는 대신 이미 개인이나 사회적으로 내재된 인식 때문에 ‘장애인’을 쉽게 규정하는 것이다. 장애인은 선하고 약한 사람, 불행한 사람, 성적 욕구가 없는 사람, 무조건 도와줘야 하는 사람 등 당사자와의 소통이나 질문이 생략된 타인에 의한 규정은 혐오의 감정과 맞닿아 있다.

개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이해하는 것을 노력 없이 너무 쉽게 얻고자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딩동>이 장애란 이것이다! 식의 정의나 호소 없이 던져주는 파장이 있다고 생각한다.

“(중증의 장애인들이) 시설 밖 지역사회에서 살고 있는 케이스가 있냐고 물어보면 100 케이스 넘게 얘기할 수 있어요”
“지금까지 쌓아오고 내가 만들어 온 색깔이 있거든요. (장애를) 굳이 고치고 싶지 않아요”

영화 속 장애인과 그 주변인들이 전해주는 다양한 생각과 경험의 얘기들은 사람들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견고한 인식에 균열을 내고, 그 생각이 편견이자 혐오의 모습과 닮았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

혐오의 사전상 정의는 ‘어떠한 것을 증오, 불결함 등의 이유로 싫어하거나 기피하는 감정으로, 불쾌함, 싫어함 등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강한 감정’이다. 하지만 장애에 대한 혐오는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어 그것이 혐오라는 것을 인식 못 하는 경우도 있다. 전철이나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젊은 장애여성을 보며 “너무 어린 나이에 안됐어”, “씩씩하게 잘살고 있네!”, “위험하게 왜 밖에 돌아다니지?”, “어쩌다 장애를 갖게 되었을까?”라는 사람들의 쏟아지는 질문들은 배려나 걱정처럼 친절한 모습을 띠고 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장애인을 불행한 사람으로 아무렇게나 규정하며 내던지는 폭력이자 혐오의 발화이다.

그동안 장애 혹은 장애인에 대한 혐오는 장애인을 사회로부터 격리/분리/통제/배제하는 차별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장애인과 가족, 주변인, 장애인단체, 인권단체들이 ‘이동권 확보’나 ‘장애등급제 폐지’를 요구하는 집회를 할 때마다, 일반 시민들의 일상을 방해하며 정부에 생떼를 쓰는 이익집단으로 치부하는 혐오의 시선과 함께 욕설이 들려온다. 발달장애인에 대한 혐오는 통합교육을 반대하는 학부모들 앞에 장애인 자녀의 엄마들을 무릎 꿇게 만들었다. 장애인을 철저하게 경제활동에서 배제하여 빈곤으로 내몰고, 세금 절약이라는 명목하에 아직도 많은 장애인들이 시설이라는 폐쇄된 곳에서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게 한다. 장애인에 대한 혐오는 이와 같은 차별을 합리적인 것, 당연한 것,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느끼게 하고 유지하게 하는 강력한 동기이며, 이 사회와 일반 시민들이 장애인을 동등한 시민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드러나는 슬픈 장면이다.

또한, 정부의 제도는 장애 혐오를 가능하게 하는 공식화 된 가장 큰 권력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동등한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 제도적으로 필요한 조건들을 무시한 채, 개인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방치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우리는 이미 ‘장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장애가 문제화되는 ‘사회환경이 문제’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따라서 정교하고 치밀하게 사회적 혐오를 부추기고 이용하는 정부 권력에 대한 비판이 이뤄져야 한다.

이유를 막론하고 ‘다른 몸’, ‘다른 정체성’, ‘다른 국적’ 등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혐오가 정당화되는 사회라면 나 역시 언제든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고, 구체적인 차별로써 개인의 삶을 어떻게 위협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이 사회가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를 혐오하고 반인권적으로 후퇴하는 것을 막는 것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과제이다.

장은희(장애여성공감)

21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딩동

프로그램 노트

장애란 무엇일까. 누군가는 이 물음에 “장애는 단지 조금 불편한 게 아닙니다. 열라 힘들어요.”라고 답한다. ‘장애인은 재활시설을 나와서는 제대로 살 수 없을까?’라는 질문에 사회는 고개를 저으며 반대하고 활동가들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 지역 사회 안에서 절대 못 살 것 같은 장애인 당사자들의 증언이 있다. 친구들과 눈을 마주 보면서 웃음 짓고, 띄엄띄엄 글도 읽는 삶들이 있다.

사회에는 장애를 바라보는 여러 시선이 존재한다. 그중에는 장애인을 한없이 착한 존재로 상정하는 시선도 있고, 장애인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들을 끊임없이 대상화하며 괴롭히는 시선도 있다. 장애인들은 늘 어떤 시선에 둘러싸여 왔다. 그 시선들은 대게 차별적이었고 장애인에 대한 프레임을 형성해 그들의 행동을 제약해왔다. ‘장애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매우 복잡한 문제지만, 사회는 너무나도 쉽게 그 답을 내린다.

<딩동>은 장애를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그 답변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한다. 이야기는 쉽게 규정된 혐오에 저항하는, 긴 만남의 시작이다. 내가 “열라 힘든” 것도, 이 정체성이 나에게 중요하다는 것도, 나의 가족이 겪는 괴로움도 모두 내 삶이라 말하는 것. 혐오에 대항하는 ‘우리’의 서사는 장애를 제약이 아닌 삶의 이야기로 만든다. 같이 말해보는 것은 드러난 혐오를, 가려진 시선을 함께 말하는 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도 모르고 있던 내 안의 혐오와 마주하는 일이다.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된 이곳에 서로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소란이 생긴다. 소란은 모여서 저항이 된다. 우리의 저항은 지금 이 적막을 부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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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노트: 프리크라임

프로그램 노트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고 있는 현시대에 데이터 알고리즘은 정확한 것, 좋은 것으로 인식된다. 데이터 알고리즘은 우리를 지켜주는 것으로 환영받는다. 하지만, 데이터 알고리즘을 통해 예비범죄자 리스트를 만들어 범죄를 예측하고 예방하는 기술인 프리크라임(pre-crime)은 질서와 안전을 빌미로 일상적 감시를 정당화한다. 이렇게 일상화된 감시는 우리의 삶을, 인권을 조여 온다. 예비범죄자 리스트에 올랐다는 이유로 경찰은 불시에 집을 찾아와 문을 두드리고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어디를 가든지 경찰의 감시를 받는 집중 사찰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모두 이 리스트에 언제든지 오를 수 있는, 그들이 정한 ‘예비범죄자’가 될 수 있는 피해자다. 감시와 검열로 이루어지는 정보인권의 침해는 온라인에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현실에서의 물리적 행동까지 제한한다. 이렇듯 정보인권의 침해는 삶 전반에 걸친 인권침해다.
비가 내리면 낮은 곳부터 잠기듯이, 이러한 정보인권의 침해는 사회적 소수자에게 더 자주, 심하게 일어난다. 사회적 소수자는 빈민가와 같은 우범지역에 거주하는 비율이 높다. 데이터 알고리즘은 사회적 요인이나 범죄의 원인을 고려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알고리즘은 사회적 소수자를 단순히 ‘범죄와 밀접한 사람’으로 판단하고 예비범죄자 리스트에 올린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적 소수자에게는 예비범죄자라는 낙인이 찍힌다. 데이터 알고리즘에 이용되는 정보는 기업으로부터 나온다. 기업은 헐값에 고객들의 정보를 정부에게 팔아넘기고 이 정보는 예비범죄자 리스트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 예비범죄자 리스트 등재자는 “그냥 사람들의 생각대로 행동할 수도 있었다고요. 하지만 그건 제가 아닙니다. 그건 당신의 시선일 뿐입니다.”라고 외친다. 이 외침은 프리크라임이 범죄의 예방이 아닌 낙인찍기에 불과함을 폭로한다.
범죄예방은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생계를 지원하고, 튼튼한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방법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감시와 억압을 통한 낙인찍기와 사회통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객관성과 효율성이라는 탈을 쓴 숨 막히는 ‘적막’에 대항하여, 감시당하지 않을 자유와 정보인권 실현을 위해 ‘소란’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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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프리크라임

인권해설

알고리즘에 대해 싸움을 시작할 때다.
그간 우리는 개인정보 유출의 문제를 ‘약간’ 걱정해 왔다. 개인정보 유출은 어차피 다들 겪는 일이라고, 허탈함을 섞어 말했다. 보이스피싱만 조심하면 된다고. 내가 조심하면 되는 문제라고.
박근혜 정부의 전문가들과 기업들은 한목소리로 말했다. 개인정보 가지고 큰일은 없지 않았냐고. 그러니 이제 개인정보에 대한 권리에 연연하지 말라고. 개인정보는 인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은 개인정보를 재산으로 취급한다. 우리도 개인정보 판매를 자유롭게 하자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개인정보 규제를 완화하면 돈 벌 기회가 널려 있다고.
그러나 그들은 말하지 않았다. 누가 개인정보를 가지고 돈을 버는가를. 누가 개인정보를 사고 싶어 하는가를.
그들이 말하지 않은 것이 더 있다. 알고리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저들의 인공지능이 조용하게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의 개인정보는 비싸다. 홈플러스가 보험사에 판매한 온라인 회원 정보는 건당 2,800원이었고 경품응모자의 정보는 건당 1,980원이었다. 2천4백만 건의 개인정보 엑셀을 열 군데의 보험회사에 팔면서 홈플러스가 벌어들인 돈이 231억 원이었다.
보험사는 이 정보를 왜 비싸게 사들였을까?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광고에 썼다. 가족 중에 아이가 있는 이에게는 어린이보험을 팔고, 차가 있는 집에는 자동차보험을 팔았다. 맞춤 광고라서 내가 필요한 부분을 알아주니 편리하다고 볼 일일까? 보험이 필요치 않으면 광고 전화를 무시하고 말 일일까?

최근 진화한 알고리즘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보험에 가입하면 인공지능이 당신을 판단한다. 스스로 학습하는 인공지능은 빅데이터를 이용해 당신을 공부한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공개된 정보, 마트에서 사 온 정보, 그 밖에도 온갖 곳에서 사 온 정보들로 당신의 등급을 매긴다. 알고리즘이 “보험금을 제때 내지 않을 것 같다”고 판단한 이들에게는 보험료가 높게 책정된다. 보험료 지급을 요청할 때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은 이미 당신의 트위터를 읽어 두었고, 마트에서 무엇을 샀는지 알고 있다. 휴대전화 회사에서 사 온 위치정보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어떤 병으로 병원을 다녀왔는지도 알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이 보험 약관을 위반한 일을 한 적은 없는지 ‘자동으로’ 판단한다.

유럽 개인정보 담당자들은 “우리가 했던 행동이 아니라 장차 우리가 할 법한 행동이라고, 데이터가 말하는 대로 평가받는” 세상이 되었다고 개탄한다. 그리고 빅데이터로 인한 인권침해를 걱정할 때라고 경고한다. 알고리즘은 사회적으로 불공정하고 차별적인 의사결정을 야기할 수 있다. 차별받아온 이들에 대한 편견을 강화할 수 있다. 병이 있는 이들, 이주민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은 믿을 수 없다고. 이들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거나 더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거나.

구매 정보는 경찰에도 팔린다. 미국 경찰이나 정보기관은 신용카드사 정보도 구입한다. 이런 정보가 경찰에 왜 필요할까? 그들은 범죄예방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당신이 범죄율이 높은 동네에서 무기류를 구입했는지 알아두고 당신의 등급을 매겨 두겠다는 것이다. 트위터에 위험한 이야기를 쓰고 평소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렸다가 경찰서에 들른 적이 있다면 빼박이다. 이 기록은 당신이 죽을 때까지 삭제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 사후까지도.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미국, 영국, 독일 경찰의 알고리즘을, 한국 경찰도 도입하려고 한다. 지금 국회에 발의되어 있는 ‘범죄예방 기반 조성에 관한 법률안’은 인공지능으로 ‘범죄예방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한다. 범죄를 미리 예방하겠다는 좋은 취지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 영국, 독일 시민들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경찰의 인공지능은 차별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알고리즘은 범죄자를 친구로 둔 흑인을 감시하고, 이주민이 많이 살고 있는 낙후된 동네를 주목한다. 여기서 불심검문을 많이 하다 보면 성과도 있게 마련이다. 더 높은 검거율은 확신을 강화한다. 역시, 인공지능이 옳았어. 이 동네가 문제였어. 유색인종이 문제였어. 하지만 기업 범죄는 경찰 범죄예방시스템의 관심 밖이다.

홈플러스 소비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 개인정보가 팔렸다는 사실에 화를 냈다. ‘내가 모르는 새’라는 점이 중요하다. 개인정보 처리에 대해 알 권리는 정보인권의 출발점이다. 보험사의 알고리즘이, 경찰의 알고리즘이 어떻게 구동하는지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한발 더 나가 보자. 보험사나 경찰의 인공지능이 나에 대해 의사결정 하는 것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알고리즘은 양심이 없다. 저들이 우리의 미래를 조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편견과 차별에 저항해야 한다는 인권의 가치를 위해서이다. 알고리즘에 관한 싸움은 개인정보에 대한 더 강한 통제권을 주장하는 데서 시작한다. 내 개인정보가 어디에 쓰이는지 나는 알 수 있어야하고, 내가 통제할 수 있어야한다. 인공지능이 나를 평가하고 의사결정 하는 것을 거부하겠다. 이것이 정보 인권이다. 개인정보 문제를 인권 문제로 접근해온 유럽은, 최근 발효된 유럽 개인정보보호법(GDPR)에 알고리즘 통제 규정을 포함하였다. 우리에게도 할 일이 있다.

장여경 (정보인권연구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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