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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줄거리

서울에서 알마티로 향한다. 사과의 도시라 불리지만, 거리엔 동상만 넘치고 사과는 보이지 않는다. 시장을 뒤지고, 농장을 찾고, 베어진 나무의 자리를 쫓는다. 숲이 밀려난 곳에 빌딩이, 기억이 지워진 자리에 동상이 들어섰다. 사과처럼, 이 도시의 기억도 형식만 남는 건 아닐까. 쉽게 지나쳐가는 풍경을 붙잡기 위해, 우리에겐 더 많은 질문이 필요하다.

프로그램 노트

알마티는 한때 도시 전체를 사과 과수원이 감싸고 있던 곳이었다.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이자 세계 사과의 발원지로 불리는 이 도시의 이름은 카자흐어로 ‘사과의 아버지’를 뜻한다. 특히 크고 향이 짙은 아포르트 사과는 소련 시절 모스크바까지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 급격한 시장화와 권위주의적 개발은 도시의 풍경을 빠르게 바꿔놓았다. 과수원은 아파트와 쇼핑몰로 대체되었고, 살아남은 나무들마저 재개발 속에서 잘려 나갔다.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사과나무가 아니라 사과 동상이다. 생명이 뿌리내려야 할 자리에 남은 차가운 기념물은, 실체를 지우고 형상만 남겨둔 채 한 시대의 망각을 증언한다. 서울에서 온 감독은 이 역설적인 풍경 앞에 멈춰 서서, 알마티의 상실 속에서 한국의 개발 시대를 겹쳐 본다.

영화는 발전의 찬반을 묻기보다,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느끼지 못하게 된 감각을 응시한다. 사라진 것들의 자리를 오래 바라보는 카메라는 우리에게 조용히 질문한다. 여기에 한때 무엇이 있었는가, 그것은 왜 사라졌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가.

– 서울인권영화제 이음활동가 우진

감독

안소정

한국에서 다큐멘터리를 공부하고 만든다. 유사성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들을 연결하고자 돌아다닌다.


라마잔

1999 년에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태어났다. 다큐멘터리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현재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다.

인권해설

이 영화는 크게 두 가지로 양분화 되어있다. 처음은 사라진 카자흐스탄 사과 품종 이야기로 시작해서 끝은 카자흐스탄 민중의 민주화운동으로 확장되는 야심찬 영화다. 리슨투더시티 은선과 다혜는 이 영화를 다르게 해석했다. 디렉터인 은선은 이 영화가 카자흐스탄의 민주화: 즉 러시아의 영향과 중국의 영향 아래 건재하는 개발독재 그림자 속 카자흐스탄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싶어 한다고 해석했고, 리슨투더시티에서 영화를 담당하는 정다혜 감독은 아포르트 사과는 재개발로 사라져 다시 갈 수 없는 몇몇 장소, 자리를 잃고 떠난 사람들과의 단절을 떠올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과가 두 이야기를 이어주는 소재라는 점에서 동의했으며 질문을 할 수 없는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의 두 가지 시각을 인권해설에 모두 담아보고자 한다. 

은선: 사과나무와 카자흐스탄 민주화 운동, 그리고 230명의 시민

2022년 카자흐스탄 시민 봉기는 영화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러시아군 주도의 진압으로 230명이 넘는 시민이 목숨을 잃은 비극이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 사건은 중앙아시아 최대 규모의 민중 저항으로, 부패와 독재에 억눌린 시민들의 불복종 시위였다. LPG 가격 상한제 폐지에 반대하며 시작된 평화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고, 토카예프 대통령은 러시아 군대를 동원해 강경 진압에 나섰다. 이후 대통령 권한 축소, 의회 및 지방정부 권한 강화, 나자르바예프 초대 대통령의 특권 폐지 등 일련의 정치 개혁이 추진되었지만, 완전한 정권 교체와는 거리가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은 동네의 초콜릿 공장이 한국인 사업가에게 넘어갔다고 말하고, 석유는 쉐브론(Chevron), 엑손모빌(ExxonMobil), 루코일(Lukoil) 같은 외국 자본이 장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카자흐스탄은 자원은 풍부하지만, 그 혜택이 공동체에 배분되지 않는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식민지 구조였다. 2022년 이후에도 빈부 격차, 급속한 도시 개발, 다국적 자본에 의한 수탈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영화가 모든 이야기를 담아내지는 못했지만,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희생된 이들을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다혜: 사라진 사과, 사라진 장소

카자흐스탄의 독립과 현대화를 거치며, 알마티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던 기억 속의 아포르트 사과는 사라졌다. 도시에 남은 것은 사과를 기억하는 이들의 증언과 기념 조형물뿐이다. 가본 적 없는 먼 곳의 이야기가 전혀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비슷한 일이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서도, 그리고 수많은 다른 장소에서도 지금 이 순간 벌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알마티의 현대화는 다른 도시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더 편리하고 세련된 삶을 약속하며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아포르트 사과와 과수원, 그것을 향유하며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은 ‘도시에서 사라져도 되는 것’으로 분류되었다. 영화 속 한 학생은 말한다. 발전하는 도시에는 새로운 건물과 새로운 직업이 필요하고, 사과는 도심 바깥에서도 재배할 수 있으니 과수원보다 사람이 살 공간이 먼저라고. 그 말은 언뜻 합리적으로 들린다. 효율, 성장, 미래라는 설득력 있는 언어와 함께 작동하는 개발의 논리는, 아포르트 사과 같은 존재들을 현실에서도 기억 속에서도 조금씩 밀어낸다.

리슨투더시티의 <산림동의 만드는 사람들>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나는 청계천과 을지로 재개발 구역에서 ‘낙후 환경 개선’이라는 말 아래 삶이 어떻게 멈춰 서는지를 목격했다. 이제 그곳은 껍데기조차 남지 않은 채 신식 건물로 대체되어 가고 있다. 재개발과 현대화가 도시를 더 편리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고, 어떤 면에서 그것은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알마티의 아포르트 사과가 조형물로만 남아 더 이상 맛볼 수 없게 되었듯, 우리는 그 과정에서 다시 볼 수 없고 다시 만날 수 없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안소정 감독은 앞으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 무엇인지를 물으며 영화를 마무리한다.

알마티의 아포르트 사과는 카자흐스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개발의 언어가 공동체의 기억을 지우고, 자원의 풍요가 시민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는 서울에서도, 그리고 우리가 이름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도시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이 영화는 사라진 사과의 행방을 되묻는 동시에,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조차 묻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에 관한 질문을 남긴다.

– 은선, 다혜(리슨투더시티)

프로그램 협력 리슨투더시티

리슨투더시티(Listen to the City)는 2009년 결성된 예술 콜렉티브로, 도시 공간의 변화를 기록하고 재개발과 재난 현장에서 소외된 목소리를 발굴하는 등 다양한 예술적 실천을 통해 사회에 개입해왔다. 시각예술을 기반으로 도시 계획, 건축, 영화, 디자인, 도시운동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기존 예술의 경계를 확장하는 이들의 작업은 연구를 넘어 직접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도시, 생태, 장애, 재난, 페미니즘, 노동 등 복합적인 주제를 다루는 프로젝트들은 예술이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방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영화, 출판, 디자인, 법 개정 등 다양한 수단을 적극 활용하며, 예술이 도시와 사회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증명해왔다. 현재 멤버들은 미술, 디자인, 건축, 영화, 인문학, 도시계획 등 다양한 분야에 속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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