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동의 시간들 Moments in Building E

작품 줄거리

이미 폐업한 지 오래, ‘유진’과 친구들은 36년만에 태광산업 부산공장을 찾았다. 그립지만 이야기 할 수 없었고, 고난했으나 잊을 수 없었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사회의 무시와 편견 아래서, 차마 꺼내놓지 못했던 시간들. 언제나 그리웠던, 다같이 모여 웃고 울었던 이곳, ‘여공’의 시간은 어떻게 나에게 남아, 삶이 되었는가.

프로그램 노트

‘유진’은 36년 전, 태광산업의 산업체 부설 학교에 다녔다. 3교대로 일하면서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방직공장에서 일하고, 저녁 6시부터는 학교에서 수업을 받았다. 매일매일 정신없었고, 미금이라도 남는 날에는 학교에 갈 수 없어 바쁘게 일을 끝내야 했다.

중년이 되어 부산에 다시 찾아온 ‘유진’과 친구들은, 이제는 미용고등학교가 된 산업체 고등학교 곳곳을 누비며, 폐업한 지 오래인 태광산업공장을 거닐며, 과거를 추억하기에 여념 없다. 단신으로 왔던 부산은 두려웠으나 새로웠고, 고된 노동은 힘들었으나 친구들과 수다 떠는 날은 행복했다. 우정을 쌓고, 데모로 뜻을 관철하고, 그 한 몸으로 가족의 생과 나의 삶을 일구었는데, 어째서 이들은 이 시절의 기억을,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할 수 없었던 것일까?

이제 그 자리에는 황량한 공장만 남았고, 여공은 각자 자신의 삶으로 뻗어져 나갔다. 뻗어나간 자리에서, ‘공순이’ 출신이 마주해야 했던 차별과 편견은, 자신이 ‘태광여상’ 출신인 것도 숨기게 했다. 그럼에도 ‘유진’은, 그의 동료이자 친구들은, 그 시절의 힘을, 고난 안에서도 꽃피우는 웃음을 잊지 않았다.

“그날을 기억하며, 너희들을 기억하며”, 그 시절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랫동안 당사자들만 알아야 했던 그 이야기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 어디에, 어느 중년의 삶 속에, 여전히 ‘여공’의 시간이 새겨져 있다.

– 서울인권영화제 이음활동가 나기

감독

이소명

약 2 년 전, 어머니가 여공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최근까지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어머니는 왜 산업체 부설학교를 다니며 여공 시절을 보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출발한 작품이다. ‘유진’에게 있어서 80 년대 여공시절의 기억을 담고 있는 ‘태광산업’과 ‘동평여상’이라는 장소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무엇이
여공시절에 대한 기억을 묻어두게 하였는지를 탐구한다

인권해설

공간은 누구의 기억을 품고 있는가

공간은 때로 사람보다 오래 남는다. 

건물이 낡고, 기계가 멈추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뒤에도 공간은 한때 그곳을 지나간 사람들의 시간을 품고 있다. 폐쇄된 공장이란 누군가에겐 그저 흉물스러운 민원의 대상이자 개발되어야 할 낡은 부지일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에게 그곳은 열일곱의 자신이 처음 사회를 만난 장소이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계 소리를 들으며 일했던 일터이며, 친구들과 웃고 울고 잠들었던 어린 시절의 거의 전부다.

영화 〈E동의 시간들〉은 그 공간으로 다시 돌아가는 영화다. 영화 속 여성들에게 공장은 그저 일터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 곳에는 노동의 피로와 배움에 대한 갈망, 낯선 삶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 친구들과 나눈 웃음과 위로가 함께 남아 있다. 그래서 이들의 기억은 고단함만으로도, 그리움만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세상은 산업화 시기의 여성노동자를 너무 쉽게 하나의 이미지로 기록하곤 한다. 가난 때문에 공장에 간 ‘공순이’, 안타깝고 불쌍했던 시대의 얼굴들. 그러나 연민만으로는 그 삶에 충분히 닿을 수 없다. 그 안에는 구체적인 사람들의 삶이 있었다. 〈E동의 시간들〉이 소중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이 영화는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손쉬운 비극으로 정리하지 않는다. 그들의 웃음과 눈물, 수치심과 자부심, 떠나고 싶었던 마음과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함께 보여준다.

인권의 시선으로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과거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확인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 일이다. 물론 이 영화에는 열악한 노동의 현실이 있다. 당시 공장에서 일했던 여성 청소년 노동자들의 고된 노동 경험이 영화 곳곳에 생생하게 흐른다. 그러나 이 영화가 더 깊게 건드리는 것은 그 이후에 남겨진 문제다. 왜 그토록 많은 삶이 오랫동안 제대로 말해지지 못했는가. 왜 누군가의 청춘은 역사로 기록되지 못하고, 사적인 기억이나 부끄러운 이력처럼 남겨져야 했는가. 노동의 관점으로 한 사람의 삶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 질문들까지 끌어안는 일이다. 노동은 일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한 사람의 안에서 때로는 관계로, 때로는 시간으로, 그리고 때로는 끝내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이후 삶의 일부가 된다.

기억에도 권리가 있다. 자신이 살아낸 시간을 말할 권리, 그 시간이 깃든 장소에 다시 가닿을 권리, 낮춰 불렸던 이름 뒤에 있던 자기 삶을 스스로 해석할 권리. 공간이 사라질 때 가장 먼저 지워지는 것은 대개 힘없는 사람들의 기억이다. 산업화와 성장의 기록은 남지만, 그 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어린 여성노동자들의 일상은 자주 주변으로 밀려난다. 누가 얼마나 생산했는지는 기록되지만, 그 생산을 감당한 몸이 무엇을 느꼈는지는 잘 남지 않는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조금 더 오래, 보다 섬세하고 구체적인 시선으로 노동과 삶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공순이’라는 말 하나로 뭉뚱그려졌던 사람들의 얼굴을, 가난과 노동이라는 말 뒤에 가려졌던 삶을, 그리고 고단한 시간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던 관계와 존엄을 보라고 말이다. 영화는 그들의 기억을 우리 앞에 놓고 묻는다. 폐공장의 소유권과 지역 개발 계획 같은 것과 무관하게, 그 공간에 깊이 새겨진 그 모든 기억들이 진정 누구의 것이었는지, 그리고 우리는 그 기억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 밍갱(한국여성노동자회 기획국장)

프로그램 협력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노동자회는 1987년 창립 이래 늘 투쟁하는 여성 노동자와 연대하며 힘을 보태어 왔습니다. 여성의 비정규직화와 지나치게 낮은 최저임금에 맞서 싸워 왔습니다. 한국여성노동자회는 낡은 성차별 사회, 인권을 유린하는 사회가 아닌 새로운 사회를 꿈꿉니다. 지구와 생명이 공존하는 환경을 위해 기후 위기에 맞서 탈 · 성장, 돌봄 중심 사회로의 체제 전환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소수자들과의 교차적 연대를 통해 성평등 노동 실현을 핵심 가치로 활동합니다.

1427회 서울인권영화제세상에 사람으로 살다

리뷰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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