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은 정치적이다 My body is political

작품 줄거리

상파울루 빈곤 지역. 여기 네 명의 트랜스젠더가 있다.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일상을 지킨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직장에 가거나 학교에 간다. 각자의 방식대로 나를 잃지 않으려 한다. 나의 존재는 연극과 노래로, 때로는 사진이나 말로 세상에 드러난다. 서로 다른 삶에서 나는 오늘도 나의 몸, 나의 정체성 그리고 내가 불리고자 하는 이름으로 살고 싶다. 일상이 곧 저항이 되는 내 몸은 정치적이다.

프로그램 노트

“내 이름, 내가 붙이는 이름, 내 정체성, 내 몸에 인생이 있고 역사가 있다.” 지정 성별과 자신이 인식하는 성별이 다른 사람들의 외침이다. 이들은 학교 선생님으로 일하면서, 연극을 지도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학생으로 지내면서, 사진을 찍으면서 일상을 살아간다. 이 영화는 내가 원하는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 내 정체성으로 살아가고 싶은, 일상이 저항인 사람들의 이야기다.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빈민가에서 자라나 살 곳이 없어도 이름은 언제 어디서나 나를 따라다닌다. 그러나 서류에 있는 이름은 나를 나타내지 않는다”고 얘기한다. 이들은 내 이름을 갖기 위해서, 그 이름으로 불리기 위한 긴 싸움을 해야 한다. 이들을 없는 존재로 가리려는 세상과 싸우고 “왜 트랜스젠더는 성별이분법에서 벗어날 수 없냐”고 묻는 이와 맞선다.

영화 속 한 트랜스 여성은 사진 작업을 하러 간다. 촬영의 대상인 흑인 여성은 “나는 흑인으로서, 당신은 트랜스 여성으로서, 소수자성으로 연합되는 이 교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어떤 트랜스젠더는 연극을 지도하며 여성혐오를 이야기하고 자신의 퀴어성을 노래한다.

이들은 각자 다른 소수자 정체성을 기반으로 교류한다. 같은 소수집단이 아니어도, 소수자로서 차별받는 지점은 중첩된다. 그렇기에 함께 싸워나가는 이 저항은 서로에게 힘이 되고 든든한 지지가 된다. 이것은 영화 속 브라질만의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함께 연대하며 싸워나가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요즘 한국에서 일부 사람들은 이 연대를, 이 힘을 부정한다. 그런 건 없다며 “챙기지 않겠다” 말한다. 트랜스젠더를 배제한 페미니즘을 외치는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가 그중 하나다. 이렇게 네 편과 내 편을 가르고 혐오 속에 혐오가 자라나는 와중에도 ‘나’를 존중하고 함께 싸워나가는 ‘우리’가 있다. ‘우리’를 가리려는 편협한 생각과 혐오의 적막을, ‘우리’의 삶이 일으키는 파동으로 부순다.

감독

알리스 히피

알리스 히피는 브라질 감독이다. 2011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관련된 다큐멘터리 <Dialogues>와 2012년 래퍼들이 자유롭게 도시에서의 삶을 비판하는 <Cidade Improvisada>를 제작했다.

인권해설

태어나면서부터 성별이 여/남으로 정해지고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이분법적인 사회 속에서 트랜스젠더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떠한 경험일까? 물론 각자의 맥락이 있기에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영화는 트랜스젠더 네 명의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이나마 이러한 경험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사실 트랜스젠더의 삶은 다른 이들의 삶과 아주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직장에서 일을 하고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친구들과 만나 밤늦게까지 놀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등 취미생활을 즐기는, 때로는 즐거워하고 때로는 고민하는, 그런 삶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런 일상적 삶 속에서 트랜스젠더이기에, 규범을 벗어난 존재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차별과 배제의 경험도 존재한다. 자신을 대표하지 못하는 이름을 가져야 하는 일, 의료서비스 이용에서의 장벽을 마주하는 일, 가족들에게 정체성을 부정당하는 일, 교육현장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일 등과 같이, 성별이분법적인 사회 속에서 트랜스젠더들은 존재하지 않는, 말할 필요 없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의 부정은 브라질만이 아닌 한국을 살아가는 트랜스젠더들 역시 겪고 있는 일이다.

“동성애를 반대하지만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생각한다.” 지난 대선후보 토론에서도 나온 이 말은, 성소수자 이슈의 질문에 대한 정치인들의 의례적인 답변이 되어 버린 것 같다.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도 몇몇 후보들은 “개인적으로 동성애에 찬성하지 않는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와 같은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이렇게 동성애를,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반대할 수 있다는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발언을 정치인들은 앞장서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성적지향·성별정체성을 포함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10년이 넘게 제정되지 못하고 있으며, 성소수자 인권을 보장한다는 이유로 각 지역의 인권조례가 폐지되고 있다. 또한 여성가족부는 성평등과 성소수자 인권은 별개라는 이야기를 하였고 교육부는 성소수자를 다루지 않는 성교육 표준안을 배포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성소수자의 존재는 사회적 합의의 대상, 누군가에 의해 공공연하게 부정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

한편, 존재의 반대와 차별은 별개라는 주장에는, 범죄화나 해고 등과 같은 의도적이고 거대한 것만이 차별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차별의 경험과 이야기는 결코 그렇게 명시적인 결과만으로 구성될 수는 없다. 기실 성소수자가 겪는 차별의 경험은 이성애가 당연한 사회 속에서 자신의 동성 애인을 이야기할 수 없는 문제, 지정 성별에 따라 남성/여성으로 여겨지고 아들, 딸 등으로 호칭되는 문제와 같이 당연한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험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의 부정은 개인의 자존감을 손상시키며, 동등한 시민으로서 소통할 수 있는 조건을 훼손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심각한 차별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소수자의 존재를 지우는, 공기처럼 만연한 구조적 차별 앞에 우리는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영화 속 사진을 찍는 장면에서 흑인 여성의 말이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사회가 소수자의 존재를 주변화화고 지워버릴수록,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몸을 드러내며 서로를 확인하고 연대해나가야 한다. 이러한 드러냄을 통해 소수자를 억압하고 차별을 만들어내는 규범의 모순점을 드러내고 균열을 만들어 나갈 수 있으며, 끝내는 이를 전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규범에서 벗어난 몸은, 존재는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박한희(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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