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우린 같지만 달라> 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영화는 성미산마을의 퀴어청소년인 노똘복(노: 노랭, 똘: 똘추, 복: 복순)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퀴어청소년을 만나 서로 ‘다른’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만남을 성사하기 위해 SNS뿐만 아니라 직접 거리를 돌아다니며 포스터를 붙이고,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한자리에서 스스로 퀴어임을 자각하는 순간, 커밍아웃, 안전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때로 이들이 이야기보다 음식에 집중하는 것 같아 관객은 웃음이 나기도 한다.

노똘복의 용기 있는 행동이 유달리 대단해 보이는 한편 그들 자신을 자신으로 존재하게 하려는 몸짓으로도 느껴진다.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정체성을 지켜나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므로 옆에서 지지해줄 주변인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서로 마주한 적 없는 존재들이 모여 내가 나로서 있게 하는 노똘복의 경험은 퀴어문화축제에 모인 이들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혐오와 차별, 때로는 무지와 무관심을 뚫고 전국 각지의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의 동료이자 앨라이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서로의 존재는 큰 힘이 되고 새로운 세상으로 연결되는 감각을 선사한다. 안전감, 자신에 대한 존중, 억압된 에너지의 발산. 드디어 만났다는 안도와 환희 속에 견고하고 쉽게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사이. 영화에서도 제한된 현재의 세상이 아니라 새 세상으로 시선을 돌리는 힘을 보여준다. 직접 소통하며 전국 각지의 퀴어들과 연결된 세상. 멀지만 가까운 곳에서, 맞이할 새 세상과 서로를 지지하는 존재들을 보여준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영화별 상영 시간표

명 우린 같지만 달라의 스틸컷. 귀여운 그림체로 무지개 앞에서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이 그려져있다.
  • 2022년 09월 23일 17:20
35프로그램 노트

<코리도라스> 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박동수는 22년간 시설에서 지내며 50여 편의 시를 썼다. 그는 시 안에 미움도 고통도 없는 아름다운 나라를 건설했다. 그러나 시설을 나온 후 그는 어째서인지 예전만큼 시를 자주 쓰지 않게 된다. 의아해진 박동수는 자신의 과거를 하나씩 되짚으며 ‘시’의 의미를 찾아 나선다. 그의 기억을 따라 한 뇌성마비장애인의 시간과 관계들이 드러난다. 삶의 고뇌는 자신의 몫이겠지만 결코 홀로 지내지 않는 일상들이 삶 곳곳에 있다.

요즘 박동수는 매일 활동보조인 진산과 만나 바깥 외출을 한다. 종종 친구들과 다른 활동보조인도 만나고 술자리도 같이하며 서로의 인생을 함께 지낸다. 시설에 살 때는 어떠했던가. 공간 자체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함께 살 수 없다고 선을 그어놓은 곳이 아니었던가. 시설에도 장애인을 돌보는 비장애인은 있었으나 그 관계가 동료시민으로서 동등하지는 않았다. 박동수의 세상은 한 건물 안에 격리되었고 그가 겪은 일련의 사건들은 아주 불평등했고 부당했다. 사람이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을 때, 존재의 목소리에 귀를 닫을 때 어떤 관계는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단절되었고 세상은 단절되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박동수는 말한다. 시설에 있을 때는 희망도 없고 앞이 깜깜한 느낌이었다고. 그래서 시로 다른 세상을 만들었던 것 같다고. 시설에서 나온 지금 시는 박동수의 유일한 탈출구가 아니다. 공간이 바뀌자 관계의 방식이 바뀌었다. 그의 인생을 따라, 시의 의미가 재정립되는 과정을 따라 관계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추억과 사람이 쌓인다. 그는 마치 들판에 새처럼 둥지를 벗어나 연결의 공간으로 삶을 확장한다. 진산과 마을주민, 시장 상인과 미용사,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 그의 세상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도 박동수가 있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날짜별 상영 시간표

    영화별 상영 시간표

    스틸컷1. 박동수가 어항에서 헤엄치는 코리도라스를 바라본다.
    • 2022년 09월 23일 17:50
    26프로그램 노트

    <바스티안> 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우리가 수많은 타인에 둘러싸여 사는 존재임을 상기하는 일은 새삼스럽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로서의 우리 자신, 그 새로운 것 없는 주제야말로 영화 <바스티안>이 집요하게 따르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데도 <바스티안> 속 “어느 가족”이 보여주는 풍경에 관객은 매료당하고 마는가.

    영화는 감독의 사촌과 그 주변 인물들을 따라간다. ‘안드레아’로 불리던 사촌은 몸의 변화를 겪으면서, 스스로 ‘남자아이’ 같다고 느끼면서,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트랜스’라는 말이 자신을 잘 설명해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느 크리스마스 파티 날, 그는 감독에게 자신을 ‘다비드’로 소개하며 연이어 다른 가족들에게도 모두 그와 같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선포한다. 온 세상에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겠노라고. 그 순간 감독은 결심한다. 어른이 될 때까지 ‘너’를 찍겠다고. 그렇게 영화가 시작된다.

    나를 새로운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요청은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부터 시작되는 ‘정확한 사랑’이야말로 변화 내지는 성장의 토양이다. 성장은 안드레아에서 다비드로, 다비드에서 바스티안으로 변하는 주인공만의 것이 아니다. 영화에는 계속 생일, 크리스마스, 핼러윈, 이렇게 무언가를 축하하거나 기념하는 ‘특별한’ 날들이 등장한다. 그 속에서 나이를 먹어가고, 점차 ‘어른’이 되어가는 바스티안을 보여주면서, 매번 ‘새로이 태어나는’ 주변 인물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 변천의 태도는 자연스러운 듯 애쓰는 듯한데, 관객으로서 그 ‘애씀’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전국을 돌며 트랜스에 대해 강연을 하는 바스티안의 아버지에 대해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He is reborn with you.” 이 말을 “너의 아버지는 <너와 함께> 다시 태어났다”로도 바꿔 보고, “너의 아버지는 <너로 인해> 다시 태어났다”로도 바꿔 본다. 수용과 인정과 환대의 경험 속에서, 바스티안과 그 가족은 다시 다른 누군가를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다. “미래의 트랜스 학생들”, 그러니까 자신의 ‘후배들’을 위해 길을 닦고 싶다는 바스티안. 그렇게 바스티안과 그 가족은 세상과 만난다.

    날짜별 상영 시간표

    2022/09/21 수

    영화별 상영 시간표

    • 2022년 09월 21일 20:00
    29프로그램 노트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파업 긴급인권보고서

    소식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파업투쟁 긴급인권보고서

    “진수를 가로막는 자 누구인가” – 정부, 산업은행, 대우조선해양의 책임을 묻는다

    ▼보고서 바로 보기 (아래 표지 이미지를 클릭해주세요.)
    사진. 발표회 모습. 사회자와 발표자들이 일렬로 앉아있다. 사회자의 뒤에서 수어통역사가 통역 중이다.
    사진. 발표회 모습. 오른쪽부터 인권운동공간 활 기선, 다산인권센터 랄라,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이광훈,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김혜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노동위원회 이용우. 수어통역사 명혜진.
    36소식

    [활동펼치기] 서인영은 지금 절찬리 프로그래밍중

    소식

    서울인권영화제 전체회의가 진행중이다. 패드에 활동가들의 줌 화면이 떠 있다.

    치열했던 상영작 선정 과정을 마치고 숨을 돌리기도 잠시, 서인영은 6월부터 본격적으로 영화제 기조 논의와 프로그래밍에 돌입했습니다. 하나하나의 영화를 보고 상영을 할지 말지 판단하는 선정 과정과는 다르게 좁게는 이번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의 전반적인 경향부터 넓게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까지 고루 고려해야 하는 과정이라 개인적으로는 회의가 갈수록 어려워지는데요… 지금 인권 영화 창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일까, 서인영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관객분들이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요즘입니다.

    먼저 프로그래밍이 뭔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요, 프로그래밍의 주된 과정은 섹션 구성입니다. 섹션 구성으로 영화들을 서로 엮어 각 영화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를 보완하고 강화할 수 있습니다. 프로그래밍 회의로 깨달은 것은 상투적으로 들릴 순 있겠지만 섹션 구성하는 법에 정답은 없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같은 주제를 다룬 영화끼리 엮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영화의 톤을 고려하기도 하고, 영화를 어떤 틀로 해석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 섹션을 구성했다가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일도 빈번한데요, 결국은 각 영화가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한 작업인 것 같다는 생각에 대충 하기 어려운 작업인 듯합니다. 이후에는 섹션에 알맞은 이름을 붙이고 나름의 순서를 정해서 섹션을 배치합니다. 이렇게 점점 영화제 전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구체화됩니다.

    영화제가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가 바로 영화제 기조이고 이를 한 마디로 담아낸 것이 슬로건일 텐데요. 프로그래밍이 영화 자체에 더 신경을 쓴다면 기조 논의에서는 우리 영화제가 놓인 현시대 상황을 더 고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화 자체의 내용보다는 지금 우리는 어떤 생각과 감정으로 한국 사회를, 이 지구(!)를 살아가는지 이야기 나누며 정리합니다. 논의 중 한가지 공통된 이야기가 있었다면 희망이 희미해질수록 더 힘 나고 전복적인 문장을 찾자는 말이었습니다. 4년 만에 광장으로 돌아오는 영화제인 만큼 서인영 활동가와 관객분들 모두가 공감하고 힘을 얻을 수 있는 슬로건이 탄생하면 좋겠습니다.

    광장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7월 회의에서 중요한 것은 또 있습니다. 바로바로 마로니에 공원 사용 신청입니다. 그런데 7월 첫째 주 회의를 앞두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링크를 클릭하고 제가 마주한 것은… 9월에 마로니에 공원 사용이 어렵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얼떨결에 장소 물색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요, 사실 다른 영화제처럼 실내 상영을 하거나 입장료를 받는다면 장소를 찾는 일이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서인영은 단순히 영화제일 뿐 아니라 상영을 통한 활동이라는 점에서 광장에서의 무료 상영 원칙은 어떤 일이 있어도 타협할 수 없는 원칙입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영화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장애인 접근권 고려도 필수적이고요. 여러모로 최적의 장소였던 마로니에 공원을 놓아주기 어렵지만 (ㅠㅠ) 저희의 원칙을 포기하지 않으며 다른 공간을 찾고 있습니다. 영화제 장소 선정까지도 허투루 하지 않는 서인영을 응원해 주세요. 무사히 여러분을 9월에 뵐 수 있길 바라며 저희는 하던 대로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미나상

    35소식

    [함께나눠요] 영화 <딩동> 보기를 제안하며

    소식

    작은 눈을 가진 사람이다. 어깨까지의 상반신이 찍혀 있다. 검은 배경.

    장애인은 분명히 내가 선 이곳에 존재하는데 내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차별의 흔적이다. 그래서 나는 한때 장애인 친구가 생기는 꿈을 꾸었다. 장애인 친구가 생긴다는 건 비장애인인 나의 가까이에, 장애인을 만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기회들이 있다는 거니깐. 그리고 그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공존하는 세상을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꿈은 말 그대로 ‘한때’였던 것 같다. 내가 선 곳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분리하고 ‘장애’와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동떨어진 일로 생각하게 했으니깐. 무관심했으리.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장애인 동료가 생겼다. 그의 장애를 알게 된 건 옆에 있는 문자통역사의 존재와 조금 늦은 반응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별로 회의를 하는 때에 그의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맞닿으며 문자통역사의 자막 없이 그와 내가, 우리가 소통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문자통역사가 도착하기 전에 그가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주고받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사람마다 장애의 모습이 다양하다곤 생각했는데, 실제로 마주하니 도통 알 수 없겠더라.

     

    서로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 그가 SNS를 통해 나의 동네에 놀러 가도 되냐고 물었다. 조금 당황했는데, 나를 사실 당황케 한 건 그가 가진 장애가 무엇인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둘이 만나면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는데, 선뜻 그에게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가 동네에 도착하기 몇 분 전쯤에야 겨우 메시지로 물었는데, 그의 답은 “함 만나서 알아볼까요?”였다. 내가 조급했고 우리의 만남을 두려워했다는 걸 그때 느꼈다.

     

    ‘장애’와 ‘장애인’에 대해 알고 지내고자 하는 마음은 실제 그에 대한 이해와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되게 막연하게 장애인은 장애에 대한 불편을 겪는다고 생각하고, 그들은 항시 불행한 삶을 보낼 거라고 믿으며, 장애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는 게 조심스럽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본다. 앞선 경험에서 나의 조심스러움은 내 곁에서 찾기 어려운 장애인의 존재와 같은 차별의 흔적이지만, 나와 ‘조금’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오기 때문에 내 안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분리하고 차별하는 무언가가 되는 건 아닐까? 좀 더 일찍 그에게 “어떤 소통 방법을 이용하면 좋을지” 물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한다.

     

    영화 <딩동>은 관객에게 장애와 장애인을 얼마나 마주하는지 묻는다. 그리고 여러 장애인과 장애인 주변인의 짤막한 이야기를 보이고 들려준다. 나의 경우, 장애를 가진 사람과 만나는 경험은 흔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애인과 장애와의 만남은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꼭 필요하다는 걸 장애를 가진 동료와 나눈 이야기를 통해 느꼈다. 그래서 나는 초인종 벨인 ‘딩동’ 소리와 함께 장애와 장애인의 삶과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고 제안한다. 영화에 담긴 이야기에 비추어 자신의 마음속 ‘장애’와 ‘장애인’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외자

    43소식

    [활동가편지] 농담과 옥상

    소식

     

     농담이 없는 삶을 생각해 봅니다. 저는 농담이 없는 세계에서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잘 짜인 농담을 읽으면 마음이 벅찰 정도로 좋습니다. 웃음기 없는 농담도 좋아합니다. 웃음을 터트리지 않아도 마음이 녹는 그런 농담이요.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농담은 말할 것도 없이 행복합니다. 낯선 사람과 나누는 농담은 그 사람을 사랑스럽게 만듭니다. 물론, 무례하지 않은 농담 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농담은 잘 짜인, 무례하지 않은,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농담입니다. 무해한 농담을 많이 해봅시다. 농담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의미를 뒤집어 보아요. 동시에 농담은 가장 어려운 말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 말을 잘 구사하는 사람을 보면 단순히 웃긴 것을 넘어서 경이로움까지 듭니다. 

     농담을 알아들으려면 어느 정도의 맥락이 있어야 합니다. 맥락을 오래 쌓아온 사람일수록 할 수 있는 농담이 많아집니다. 옥상에서 그 맥락을 쌓아온 사람과 농담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저희 집은 옥탑방이라 옥상이 있습니다. 집 안에 옥상으로 가는 문이 있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집이라는 무서운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옥상에 의자 두 개를 놓았습니다. 앉아서 담배를 피우려고요. 선선한 여름밤에 옥상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농담을 나누던 그 시간이 아득하고 즐겁습니다. 왜 저에게 소중한 기억은 자꾸만 아득해지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나눈 농담도 아득합니다. 어깨를 가볍게 치며 웃던 기억과 눈을 마주치며 이를 보이던 기억만 납니다. 옥상에서 나눈 농담은 정말, 정말 행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농담은 우리만의 언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 같습니다. 한 단어만 말해도 꺄르르 웃을 수 있는, 열렬한 환호를 얻을 수 있는 그런 언어 말입니다. 우리들만의 언어를 쌓아 갈 때의 즐거움을 영원토록 느끼고 싶습니다.

     농담과 옥상은 잘 어울리는 단어 같습니다. 저는 잘 어울리는 단어를 나열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가령 휴학과 바퀴벌레, 유혹과 술 같은 것이요. 저는 이런 웃기지도 않은 농담도 좋아합니다. 이런 것도 저에게는 농담이에요. 알고 계신 농담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저는 하루 종일 되뇌며 행복할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농담이 조금은 섞인 하루를 보내 보시길 바랍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뵈어요.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은긍

     

    37소식

    [활동펼치기] 우리에게는 애도와 기억이 필요합니다

    소식

    “나는 사실 이 자리가 궁금해 참여했다. 애도와 기억은 좋고 유의미한데, 우리에게 왜 이 자리가 필요한 걸까. 포스터로 충분히 해결되지 않는 질문에 답을 찾고자 향했다. 그리고 ‘감염자 수’, ‘사망자 수’로 치환된 우리의 많은 존재와 함께 가려진 문제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침묵 행진을 했을 때 횡단 보도로 이어진 광화문 사거리를 돌아 원래 자리로 돌아오며, 떠난 자리를 마주한 나는 질문했다. 저 자리에서 무얼 했냐고.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김영옥님의 말씀처럼 나는 뒤돌아 질문했다. 그렇게 반성의 자리를 만들고자 했다.” –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외자

    그림1. 코로나19 대확산으로 인한 죽음, 애도와 기억의 장 추모문화제 “우리에게는 애도와 기억이 필요합니다” 안내 포스터.

    지금 우리에게는 애도와 기억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6월 17일 금요일, 다시 한번 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가족과 위중증환자 보호자, 공적 추모를 요구하는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을 준비하는 이들, 음악을 통해 연대하는 문화노동자와 이 자리를 기록하는 미디어활동가들, 그리고 마음을 함께 모은 시민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사진1. 애도와 기억의 장 현수막 앞에서 노래하는 문화노동자 연영석. 기타를 매고 있다. 왼편에 가사를 통역하는 수어통역사가 있다.

    지금은 아직 코로나19 감염병의 시대입니다. 이제 섣불리 언젠가 “끝난다”고 이야기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럼에도 올해 초 치솟던 확진자, 사망자, 위·중증 환자의 수가 감소함에 따라 사회적 분위기는 달라지고 있습니다. ‘일상 회복, 경제 성장’을 앞세우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감염병의 위기를, 감염병으로 인해 고통받는 동료 시민의 얼굴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 뒤로 인간의 존엄을 미루던 것도 모자라, 숫자에도 포함되지 않는 우리의 동료 시민이 있습니다.

    마스크를 벗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만이 일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늦은 밤까지 2차를 가고 3차를 가는 것만이 일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망각의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을 새롭게 일구고 나누어야 합니다. 코로나19로 떠나보낸 이들, 숨죽여온 이들이 함께하는 일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기침 소리만 나도 날카롭게 돌아보던 날을, 매일 아침 확진자 숫자를 확인하며 한숨쉬던 날을, 우리 동네 확진자의 동선을 꼼꼼하게 추적하며 평가하던 날을, 의료공백의 소용돌이 속에서 병원에 가지 못한 채 앓아야 했던 날을, 거리두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도 서로의 숨소리까지 들어가며 일해야 했던 날을, 자가격리를 할 수 없는 단칸방에서 숨죽여야 했던 날을, 쿠팡에서 온 택배를 손도 안 댄 채 무료 반품 시킨 날을, 마스크를 사는 긴 줄 사이에서 주민등록증이 없어 작아져야 했던 날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사진2. 애도와 기억의 장 현수막 앞에서 발언하는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의 김영옥 활동가. 왼편에 수어통역사의 통역이 함께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애도하기 때문입니다. 혐오와 낙인 속에서 온전한 추모의 마음을 전할 새 없이 떠나보내야 했던 이들을, 차별과 배제 속에서 통증을 홀로 견뎌내야 했던 이들을, 공포와 감시 아래 죄인이 되어야 했던 수많은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들을, 우리의 이웃과 친구와 동료와 가족을 애도하기 때문입니다.

    감염병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며, 감염병의 종식을 이야기할수록 감염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이야기는 가려집니다. 바이러스가 언젠가 이땅에서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가려져온 이야기를 다 듣지 않고서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일상의 회복을, 무언가의 성장을 말할 수 없습니다.

    회복은 혼자만의 것이 될 수 없고 경제만의 것이 될 수 없으며 국가만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비탄의 세월이 드러낸 고통을 직시하고, 기억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자리를 떠올리고 애도할 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함께 힘을 모을 때,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회복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픔을 겪어낸 우리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차별과 불평등을 만들어낸 책임을 묻고, 애도와 기억을 모아, 더 존엄하고 평등한 세상을 향해 서로를 돌보며 새로운 길을 닦아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금에는, 내일에는, 애도와 기억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애도와 기억의 장에 함께 모인 모든 분들께, 코로나19로 먼저 세상을 떠나야 했던 모든 분들과 그 가족, 친구, 이웃, 동료 시민들께 연대의 인사를 보냅니다.

    사진3. 파이낸스센터 앞 계단에 추모의 메시지가 담긴 색색깔의 손피켓과 LED 촛불이 늘어서있다. ‘빈 자리를 바라보며 기억합니다, 당신의 삶을’, ‘애도할 권리 기억할 권리’, ‘토닥토닥 맘 튼튼’, ‘애도, 추모하는 마음이 존중받는 세상’,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기억하겠습니다’, ‘애도는 우리를 연결시킵니다. 망자와 산자를 서로 다른 남은 이들을’ 등의 메시지.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고운

    38소식

    [활동펼치기] ‘동지’들께 드리는 편지

    소식

    안녕하세요, 심지입니다.

    지난 주 수요일, 그러니까 6월 15일에 우리는 한국산연지회 농성장에서 성소수자와 함께 하는 이야기마당을 열고, 두 영화 <내가 싸우듯이>와 <평등길1110>을 상영했어요. 그 후기를 쓰려고 책상에 앉았는데 마침 조합원들의 전면 단식 소식을 전해들었네요. 그 소식을 접하고 보니 왠지 이 후기는 편지여야 할 것 같더라고요. 산연 ‘동지’들에게 쓰는 편지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에 앞서 ‘동지’들에게 저를 소개해보겠습니다. 저는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이기도 하고,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노동권팀의 신입 회원이기도 해요. 활동가이자, 노동자이자, 성소수자라고 말해봐도 되겠죠. 활동과 그 밖의 삶을 분리하는 듯 마는 듯 애매하게 지내는 요즘, 저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구인 광고>를 내놓듯 ‘동성혼 소송’을 함께 할 파트너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냥 연애하기도 마냥 쉽지는 않은데 동성혼 소송을 함께 할 파트너라니… 구하기 꽤 어려울 것 같지 않나요. 네… 별로 궁금하시진 않으시겠지만… 왠지 모르게 제 소개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더 구구절절해지기 전에 본론으로 넘어가볼까요. (…)    ‘

    처음에 행성인 노동권팀에서 한국산연지회 농성장에서 함께 이야기마당을 해보자고 하셔서 살짝 겁을 먹었는데요. 저는 한국산연지회 ‘동지’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거든요. 몇 번의 검색을 통해 어떤 투쟁을 하는 분들인지 조금 접할 수 있었지만, 예를 들어 여러분이 바다 건너 일본 시민들의 연대까지 이끌어낸 멋진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제가 여러분에 대해 뭘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도 그런 생각하셨죠? “저 사람들은 우리에 대해서 뭘 알아가지고 우리와 함께 한다고 할까”, 그런 생각들이요. 그럼에도 한편으론 기쁘셨으리라 생각도 해요. 어쨌든 농성장에 누가 찾아온다는 게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저도 조금은 느껴봤거든요. 때로는 그 누가 ‘낯선 사람’일수록 더욱 반갑다는 것도요.

    사진1.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서울인권영화제 활동가 등 농성장을 찾아온 사람들과 한국산연지회 조합원들이 함께 모여 찍은 사진

    [사진1.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서울인권영화제 활동가 등 농성장을 찾아온 사람들과 한국산연지회 조합원들이 함께 모여 찍은 사진] 

    서로를 잘 모르는 우리지만, 그럼에도 감히 여러분을 ‘동지’라고 불러봅니다. 농성장을 찾아간 성소수자와 그 친구들이 차별금지법을 만들자고 하는 사람들인지 거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인지조차 몰랐다는 여러분을, 감히 나의 ‘동지’라고 불러봅니다. 성소수자 활동가 종걸에게 김진숙 지도위원이 ‘선배’이듯이, 여러분 역시 저의 ‘선배’이겠지요. 저 역시 ‘조끼 입은 사람들’을 약간 무서워하던 때도 있었는데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언젠가부터 제게는 ‘편견’이 생겼거든요. 싸워야 하는 사람들, 싸울 수밖에는 없는 사람들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그런 편견이 생겼거든요. “끝까지 싸워본 사람만이 이 사회가 어떤지 알 수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었는데요. 그래서인지 저는 ‘싸우는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배워왔고, 그래서인지 저는 이왕이면 항상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에 함께 있고 싶어요.

    세상은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다가도 순식간에 나빠지는 것도 같고, 그래서 저는 더 이상 무언가를 쉽게 믿지 않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럼에도 여러분의, 우리의 간절함만은 믿어보고 싶어요. 행성인 상임활동가 호림의 말대로 “싸워본 사람들이 싸우는 사람들의 심정을 아는” 게 아닐까요. 고백하자면 저는 무언가를 이뤄내기 위해 곡기를 끊는 마음까지는 아직 잘 몰라요. 다만 숨을 가다듬고, 조금씩 가늠해볼 뿐입니다. “걷다 보면 도착점이 있을 거라 믿어야 한다”는 해진 동지의 말을 기억합니다. 언젠가 여러분과 축배를 들 수도 있을까요. 마음만은 언제나 함께 할게요. 종종 몸도 마음도 함께 할게요.  부디 어느 저녁 오간 이야기들이 여러분께도 “짜릿한 연대의 기억”으로 남기를 빌어봅니다. 

     

    심지 드림

     

    [독자를 위한 덧붙임] 

    “오해진 금속노조 경남지부 한국산연지회장은 “공장(도 떠나) 거점이 없는 상황에다 법으로 보장된 내용도 없어 굉장히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며 “이후 다른 사업장에서도 이런 일이 반복돼선 안 된다는 경각심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외국인자본에 대한 법 제정도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투쟁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 산켄전기는 2020년 9월 홈페이지로 2021년 1월20일부로 한국산연을 해산한다는 결정을 알렸다.”

    http://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9047

    38소식

    [활동가편지] 인류의 설정값이 평등이 아닐 수 있나요

    소식

    이번 15일 서울시열린광시민위원회에서 서울퀴어문화축제의 시청광장 사용에 대해 조건부 승인을 했다는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신체 과다 노출이나 청소년 보호법상 유해 음란물을 판매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지요. 퀴어의 존재를 오직 성적으로만 다루는 성소수자 혐오적인 처사였습니다. 이 사회는 이렇게나 혐오적인데 우리의 사회는 그보다는 조금 더 평등합니다. 가령 제 정체성을 아는 친구들이나, 제가 하는 사회풍물패나, 이곳 서울인권영화제도 그렇고요. 소수자 혐오적인 사회와 제가 사는 작은 공동체의 차이가 도대체 무엇일지…

    그러고보니 한달 전 쯤인가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커밍아웃을 반대로 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나는 바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였는데요, “나는 여자랑도 연애할 수 있어.”라고 말해야 할 것을 “나는 남자랑도 연애할 수 있어.”라고 반대로 말해버린 겁니다. 제가 남자랑 연애하면 그건 헤테로 연애라 커밍아웃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요 몇년간 레즈비언 친구들이랑 놀았더니 기본 설정값이 동성애가 되어버려서 생긴 작고 귀여운 헤프닝이었죠. 친구들이 알아서 찰떡같이 알아듣기는 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약간 재밌더라고요. 도대체 어떻게 알아들은건지. 여자 좋아하는 거 티 났나. 

    또 한번은 대학 동아리에서 풍물극 공연을 준비하는데 여성 캐릭터에 지정성별 남성인 친구가 지원한 적이 있습니다. 원래 여성인 캐릭터를 남성으로 바꿀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친구를 ‘여성’으로 설정하고 공연에 올렸습니다. 친구는 정많고 유머러스한 주모(酒母) 역할을 아주 잘 해주었습니다. 공연연습을 하면서도, 그리고 공연 당일에도 누구도 주모의 캐릭터에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각본과 연출, 그리고 무대 위에 모든 캐릭터들이 주모를 여성으로 여기니 관객도 자연스레 동화되었을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걸 보면 세상을 설정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은 어떤 성별과 어떤 사랑을, 어떤 정체성과 어떤 욕망을 ‘정상’이라고 설정하고 있는걸까요. 아마 이 글을 읽는 모두가 그 설정값을 잘 알고 정상범주의 폭력성과 맞서고 있을겁니다. 누군가는 운동으로, 누군가는 생존으로, 누군가는 일상의 전선에서요. 우리는 타인의 성정체성이나 성적지향을 무리하게 규정하려는 시도나 모든 인간을 동일한 정체성으로 일괄하는 것을 지양하려고 합니다. 모든 시도가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피드백과 공부를 하며 조금씩 시정하고 있지요. 이 움직임들은 분명 언젠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설정값을 더욱 평등에 가깝게 만들겁니다. 우리의 변화와 혁신은 평등과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질 것이니까요.

    사진1. 분수대 위로 무지개가 보인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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