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프로그램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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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세월>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예은 아빠’ 유경근이 또 다른 유족들을 만난다. 이들은 세월호를, 대구 지하철 화재를,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화재를 겪었다. 그 ‘사건’들을 통과했다. 무심하고도 잔인한 사실은, 상실로 인해 일상이 송두리째 흔들려도 삶은 나아간다는 것이다. 세월은 흐른다.

그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싸우는 사람’이 된다. 차마 과거에 기억을 던져둘 수 없으므로. 내가 겪은 사건이 누구에게도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므로. 이들은 세상의 무관심과 싸우고, 사회의 불합리와 싸운다. 마땅히 ‘국가의 몫’인 일들을, 이들은 묵묵히 해낸다. 그것이 ‘떠난 이’들이 ‘남겨진 이’들에게 내준 숙제이므로.

그런데 세월호를 겪은 유경근은 왜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도’ 만날까? ‘공동체’의 변화를 요청하는 어떤 ‘사건’들을 몸소 겪고 ‘싸움’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은 닮았다. 누군가 “싸워본 사람들만이 싸우는 사람들의 심정을 안다”고 했던가. 이들 역시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런 점에서 배은심 역시 유경근의 ‘선배’다.

이들은 그래서, 만나서 무엇을 하나? 역사를 새로 쓴다. 익명으로 남을 수도 있었을 수많은 주인공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일은, 그리하여 그 기억과 기록을 서로 잇는 일은, 역사를 새로 쓰는 일이다. 그 숙제를 하면서, 이들은 ‘새로운 미래’로 갈 것이다. 그 여정에 기꺼이 당신을 초대한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영화별 상영 시간표

  • 2022년 09월 24일 19:00
32프로그램 노트

<애프터 미투> 프로그램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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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에 ‘이후’가 있을까?

미투 이후는 한 줄의 시간선이 아니라 수많은 결들이 앞으로 나아가고 때로는 뒤로 돌아가기도 하고 뚝 끊겼다가 엉켰다가 팽팽해졌다가 느슨해지기도 하며 만들어진 지형이다. 세상 속에서 무너지고 지워지지 않기 위해 분투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지층을 가진 단단하면서도 복잡다면한 지형을 만든다. ‘나를 용서한다’고 소리 내서 내게 말해주고 비슷한 서로를 직접 찾아 나서고, 끝없이 고민하고 이야기한다. 나의 평화를 찾고 누군가를 혼자 두지 않기 위해서. 

영화에 나오는 이들과 ‘우리’는 고통이 없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각자 다른 형태로 찾아오는 기억과 고통, 아무런 잘못이 없는 나를 돌아보았던 순간들을 담담하게 때로는 두려워하며 이야기한다. 이처럼 ‘미투’와 ‘이후’의 의미는 모두에게 다르다. 하지만 ‘피해자’라는 말 앞에서 자신을 무엇이라고 부를지 고민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미투 이후라는 복잡한 지형 속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감정들은 실존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분명히 존재하는 이 감정을 자연스럽게 느끼고 말로 내뱉는 것을 막고 때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이전’과 같이 자기 삶을 돌보기 위해서도,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도, 연대하기 위해서도 노력한다. 그리고 이 과정이 매우 지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왜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껴지는 연결된 감각을 가지고 피해를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말할 수 있도록 서로를 도우며 계속해서 새로운 일들을 해 나간다. 이렇게 서로의 목소리가 모여 세상에 하나씩 변화를 만들어갈 때 ‘해소되지 못한 마음의 목소리’는 역사가 된다.  

혐오와 차별을 기반으로 한 폭력적인 가부장 사회가 끝장났을 때, 세상에서 성폭력이라는 것이 사라졌을 때 비로소 ‘미투’라고 말하는 일은 끝날 수 있다. 이미 우리는 부단히 그런 세상을 일궈 나가는 중이다. 역사라는 것이 과거에 있었던 사건 혹은 시기를 의미한다면 혐오범죄와 성폭력이 일어나는 지금의 남성중심사회, 가부장사회는 가까운 앞날의 사람들이 역겨워할 시기이기를. 역사가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무형의 흐름을 의미한다면 끝나지 않는 폭력과 혐오의 굴레 속에서도 자기 자신과 타인을 치유하고 끝없이 ‘미투가 바꿀 세상’을 말하며 맞서 싸우는 사람 그 자체이기를.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영화별 상영 시간표

  • 2022년 09월 24일 17:20
34프로그램 노트

<기억의 숨결> 프로그램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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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아노, 루치아나, 혹은 루시. 그녀가 보여주는 삶의 궤적은 이탈리아의 최연장자 트랜스여성이라는 수식 너머로 흘러 넘친다. <기억의 숨결>은 루시가 풀어내는 90여 년의 기억을 그대로 담아내며, 그 이야기를 듣는 그녀 주변인들의 표정과 응답, 손짓 하나하나까지도 섬세하게 쫓아간다.

90년이 넘는 기억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울까. 루시가 그녀의 기억을 곱씹고 꺼내어 펼쳐놓음으로써 우리는 또 하나의 세계를 마주한다. 루시의 이야기는 정제되지 않은, 그녀 자신의 언어로 발화된다. 가장 사적이면서도 가장 생생한 이야기. <기억의 숨결>의 관객들은 그 이야기의 기록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한다. 

루시가 살아낸 생에는 성직자로부터의 성폭력, 성매매, 전쟁에서의 징병과 포로 생활 등의 기억들이 얽혀있다. 루시는 이 기억들을 ‘극복’했다고 하지 않는다. 이야기할 때마다 몸서리치기도 하며, 그 감정을 그대로 전한다. 루시의 이야기 속에는 루시가 어떻게 이러한 삶을 살아냈고 살아왔는지, 밀도 높은 역사가 담겨있다. 꾹 닫아놓아도 힘들 기억들을 루시는 어떻게 열어냈을까.

루시가 기억의 문을 여는 힘은 그녀 스스로의 강인함에도 있겠지만, 그녀 주위에서 삶을 함께하는 이들의 존재에 있기도 하다. 서로의 곁이 되어주며 돌봄을 나누는 이들의 목소리, 고갯짓 하나하나가 기억의 문을 여는 힘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을 보며 가만히 생각해본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마주하며 사는가. 96세 트랜스여성의 삶을 그려본 적이 있었던가. 노년 퀴어의 얼굴을, 삶을, 그 속의 기억을 그려본 적이 있었던가. 당사자도, 주변인도, 우리는 쉽사리 노년의 기억에 대해 떠올리기 어렵다.

그러나 기억의 숨결이 나에게서 너에게로 전해질 때, 그렇게 나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남아 흐를 때, 우리는 좀 더 미래의 기억에 대해 편안하게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힘이 되자고, 기억의 문을 여는 힘이 되어주자고 그려본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영화별 상영 시간표

스틸컷1. 다카우 포로수용소 행사의 초대장을 꺼내드는 루시. 백발의 머리에 얼굴에는 세월의 주름이 앉아있다.
  • 2022년 09월 10일 12:30
34프로그램 노트

<기다림> 프로그램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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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하는 삶을 본다. 그 기억은 각기 다르지만 엮이고 뭉쳐 하나의 힘을 만든다. 기억을 이루는 말들은 힘을 가진다. 기억을 만드는 힘은 듣고, 보고, 읽는 것이다. 연대하는 이들이 기억의 문을 여는 힘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듣고, 보고, 읽어야 한다. 계속해서 기억해야 한다. 기억한다는 것은 기억의 문을 함께 열고, 그 문턱이 닳을 때까지 드나들고, 문고리가 느슨해질 때까지 열고 또 여는 것이다.

<기다림>의 생존자들은 용기를 말한다. 힘을 말한다. 기억을 말한다. 우리가 기대어 살아온 삶을 말한다. 방글라데시와 한국은 전쟁이 있었고, 전쟁으로 파괴된 사람들이 있다. 한국에서는 그들을 위안부라고 이야기하고, 방글라데시에서는 비렁거나라고 이야기한다. 카메라를 응시하며 이름을 말하는 위안부 할머니들과 비렁거나 할머니들은 서로 마주한 적 없겠지만 그 얼굴에 담긴 진실함은 같다. (너무 비약적인지) 일본과 파키스탄이 역사를 인정하고 사죄하기를 바라는 것. 역사를 똑바로 마주하고 세월로 덮지 않는 것.

그들의 기억은 선명하다. 그때의 걸음, 무게, 소리, 시선까지 여전히 생생하다. 생생한 기억은 더 이상 과거로 남겨져 있지 않다. 기억은 영원히 ‘있었던 것’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필연적인 일이다. ‘없었던 것’이 될 수 없다. ‘없었던 것’으로 덮어버리려는 국가는 피의자를 재판하지도, 처벌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하기’를 시작해야 한다. 영화에서 말했던 것처럼, 진실은 반드시 모습을 드러낸다.

모든 것이 국가주의적으로 귀결될 때 생은 피해자의 입을 막는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을 듣고 보고 읽으려 노력해야 한다. 기억이 떠내려가지 않게. 더 많은 기억 속에 이들의 이야기가 남겨지길 바라며 기억의 문고리를 잡자.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영화별 상영 시간표

  • 2022년 09월 10일 11:00
34프로그램 노트

<오시카무라에 부는 바람> 프로그램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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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카무라의 사람들은 직접 기른 야채를 따먹고, 나무를 베어 땔감을 만들고,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사람들을 환대하며 일상을 보낸다. 그곳에서는 사람과 나무와 그곳에 거주하는 모든 생명이 살아가는 존재로서 관계한다. 영화를 통해 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함께하고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살아가는 장소를 지키려 하는 각자의 이유를 만나본다.

리니아 신칸센 공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어떤 이에게는 삶의 터전이 파괴되는 공사이고, 어떤 이에게는 생계를 이어가는 노동이며, 어떤 이에게는 도쿄와 나고야를 빠르게 오갈 수 있는 공사이기도 하다. 영화는 오시카무라 안팎을 넘나들며 여러 시선과 삶을 보여준다.

이 일은 비단 오시카무라의 일만이 아니다. 자본에 의해 삶의 공간이 파괴되는 일은 이미 일어나고 있고, 언제 일어나도 어색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떤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나. 이 시대에 애정을 갖고 살아갈 공간이 계속 존재할 수 있을까?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영화별 상영 시간표

스틸컷2. 난로 주위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는 오시카무라 주민들.
  • 2022년 09월 09일 13:00
30프로그램 노트

<섬이없는지도> 프로그램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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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중인 예멘을 떠나야 했던 야스민은 여러 나라를 거쳐 2018년 제주라는 섬에 도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성은을 만나 친구가 되고, 카메라를 배우고, 함께 영화를 만들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야스민은 생계 문제로 또 한 번 육지로 ‘떠나야’했다. 난민 심사 이후 주어진 인도적 체류자라는 불확실한 지위와 함께.

<섬이 없는 지도>는 제주를 떠나며 야스민이 성은에게 남긴 편지로 시작해 예멘 난민을 비롯해, 제주 비자림, 강정마을 주민, 홍콩 시민 등 뿌리뽑힌 존재들의 연대기를 엮어낸다. 일본에서 들어온 비자나무는 또다시 도로를 지어야 한다고 강제로 베어진다. 일평생 땀 흘려 마농밭(마늘밭)을 일구어온 삶이 얼굴에 새겨진 강정마을 삼춘은 이제 그 마농밭에 해군기지가 세워지는 것을 목격한다. 영화는 이처럼 돌아올 곳을 잃어버린 존재들과 지워지는 장소들을 흔들리는 카메라로 충실히 기록한다.

우리는 장소에 단지 잠시 머무르다 가지만 하지 않는다. 매일매일 장소의 모양, 빛깔, 냄새, 소리, 그 속의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텅 빈 공간은 우리에게 구체적인 장소로 다가온다. 장소에서의 경험은 몸에 새겨지고 정체성과 긴밀히 연결되어 비로소 장소는 ‘나’의 일부가 된다. 영화에서 평화운동가 에밀리가 증언하듯 “국경이 몸에 그어진” 느낌을 받거나 “한 곳에서 여러 땅을 밟으며 살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이유도 장소와 정체성의 긴밀함 때문일 것이다.

개개의 존재에게는 삶을 뿌리내리는 장소를 제삼자가 개발의 공간, 권력 쟁탈의 공간으로 인식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러한 인식에 따른 행위에는 어떤 결과가 따르고 그 값은 누가 치르는가? 제삼자가 아닌 장소에 거주하는 당사자들이 개발과 권력의 필요성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장소의 다른 구성원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예멘, 제주, 홍콩을 오가는 이야기로 감독은 관객에게 장소를 둘러싼 다양한 시선으로 초대한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영화별 상영 시간표

  • 2022년 09월 23일 15:00
27프로그램 노트

<파디아의 나무> 프로그램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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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을 운영하고, 힘들 때면 마당 한 편의 나무 옆에 앉아 사색에 잠기는 파디아는 현재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에 살고 있다. 그는 언젠가 고향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꿈꾸며 가본 적 없는 집을 그린다. 언덕 위의 집, 동쪽으로 난 문 옆에는 큰 나무, 그 나무를 보러 올라가는 파디아… 집이 모두에게 중요하듯 파디아도 고향에 돌아가길 열망한다.

파디아 가족의 고향은 한때 팔레스타인 마을이었지만 이스라엘에 점령당한 사사(Sa’sa’)이다. 파디아가 지내고 있는 레바논의 남쪽 국경과 맞닿아있는 마을이라 거리상으로는 매우 가깝지만, 파디아의 팔레스타인 여권으로는 이스라엘 체크포인트를 넘어갈 수 없어 그가 고향에 갈 수 있는 길은 없다. 이토록 가깝고도 먼 집을 바라만 보며 파디아는 애가 탄다.

영국인인 감독은 이런 파디아의 대리인으로서 귀향길에 오른다. 파디아가 그에게 부탁한 것은 다름 아닌 할아버지의 나무를 찾는 것. 감독은 한정된 정보로 더듬더듬 나무를 따라가면서 파디아의 고향이 철새 이주에 중요한 지점이라는 사실도 접한다. 얼마나 멀리 떠나든 본능적으로, 경계를 넘나들며, 또 반드시 집으로 돌아오는 새들을 보며 관객은 단순히 주거라는 기능을 넘어서 집이란 어떤 의미일지, 누군가를 이동하지 못하게 막는 경계는 어떻게 그어지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영화별 상영 시간표

스틸컷1. 창문 너머 콘크리트 벽을 바라보는 파디아의 뒷모습.
  • 2022년 09월 08일 14:00
29프로그램 노트

<2차 송환> 프로그램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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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에게 ‘한국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반도 분단의 역사 속에서 북한 출신의 전향 장기수들은 수십 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그 후에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이들에게 ‘집’은 일상의 공간이 아니라 그리움의 공간이다. 바랜 사진 속에서나, 희미한 기억 속에서나, 어쩌면 텔레비전 속에서나 만날 수 있을 그곳. “내가 날아간다면 저만큼만 가면 내 고향인데, 고향에도 산 사람이 있을까” 하고 하염없이 그리게 되는 곳.

이들은 언젠가 통일이 되면 고향에 가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지만, ‘통일’은커녕, ‘송환’은커녕, 일시적인 ‘금강산 관광’마저 불발된다. 그뿐일까. 국가보안법의 세계에서, 이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미친놈들” 취급을 받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나라를 망친다”는 소리도 듣는다. 옥살이를 하고 나온 세상에서, 이들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다.

물론 이들에게도 ‘이곳’ 남한에서의 일상이 있고, 희로애락이 있다. “웃을 줄도 알고, 울 줄도 알고, 화도 낼 줄 아는” 이들은 서로의 집에 놀러 가고, ‘만남의 집’에 모이고, 폐지를 줍고, 텃밭을 가꾸고, 피아노를 치고, 글을 쓴다. 글씨도 못 쓰고 받침도 틀리지만 계속 쓰려고 한다. 그것이 그들 스스로를 ‘표현’하고 서로가 이야기를 나누는 방법이기에.

2004년 <송환>의 개봉 이후 주인공 김영식은 영화에 대해 “미국에 대한 비판이 부족하다”고 평한다. 김영식에게서 ‘집’을 빼앗은 것은 열강의 놀음일 터이나, 이들에게 집을 돌려줄 수 있는 열쇠를 쥔 것 역시 그 열강이라는 점은 얄궂다. 영화 <2차 송환>을 상영하는 2022년 현재, 생존해 있는 2차 송환 신청자들의 평균 나이 91세. 국내외 정세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언젠가 이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긍정적으로 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들과 함께 ‘분단’과 ‘통일’을 이야기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영화별 상영 시간표

스틸컷1. 녹색 식물이 가득한 마당. 김영식 선생이 돋보기로 작은 나무의 이파리를 들여다 본다.
  • 2022년 09월 15일 16:00
26프로그램 노트

<빠마> 프로그램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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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샤는 맞닥뜨리는 게 참 많다. ‘결혼 이주 여성’에 관한 잘못된 편견, 출산에 대한 압박, 니샤가 지니는 문화에 대한 존중은 없으면서 강요되는 ‘며느리’의 모습, 차별과 무시. 니샤는 어떻게 해서 이 상황을 지내왔을까. 니샤는 끝내 이 모든 걸 감당하게 하는 장소에서 “씨발”이라 외치고 자리를 박차며 나간다. 그는 시간이 흐른 뒤, 탈(脫) 하지 않고 있었던 장소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곳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다. 니샤가 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다른 인물들은 성찰하게 되며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힘을 얻는다. 니샤는 세상 너머를 그렸지, 세상을 탈(脫) 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세상을 탈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고향을 떠나 한국에 정착한 결혼 이주 여성의 상황이라면 또한 그럴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하는 것들도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이지, 이곳을 탈출해 우주에 둥둥 뜨며 살기를 바라는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우주 쓰레기처럼 내가 내던져진 것인지 내 힘으로 나온 것인지도 모를 것 같다. 우리는 관계로 엮인 존재들이다. 어느 관계는 자의든 타의든 단절되기도 하지만 모든 관계를 끊고 살기란 어렵다. 단절만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복합적인 상황과 감정을 폭발시키는 니샤의 탈(脫)은 일시의 적막 속에서 성찰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고 안정되게 한다. 관계는 그와 같이 계속해서 만들어진다. 또한,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행동을 하기에 대해 의미를 새긴다. 모두가 처음부터 자신의 자리에서 이탈하는 방식으로 싸우려는 건 아닐 거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는 강력한 힘에 부딪혀 상황의 요구와 선택에 따라 우리 자리를 내걸게 된다. 그러나 우리, 누군가의 자리가 강제로 빼앗기지 않도록 연대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에 힘써보자. 그렇게 세상을 벗어나려 하지 않고 여기서 같이 세상을 바꾸는 일에 힘써보자.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영화별 상영 시간표

스틸컷1. 니샤가 웃으며 자전거를 타고 있고 뒤에서는 남편이 자전거를 밀고 있다.
  • 2022년 09월 22일 19:00
31프로그램 노트

<로힝야를 거닐다> 프로그램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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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우리는 함께 로힝야 난민 캠프를 거닌다. 세상에서 제일 큰, 60만 명의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난민캠프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밥을 짓고, 공을 차고, 빨래하고, 글을 배우며, 기억을 말하고, 카메라를 응시한다.

2017년 8월 많은 로힝야족이 버마를 떠났다. 학살이 있었고 그 와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 실종된 사람이 많았다. 캠프에는 생존자들이 모였고 캠프에 오기 전, 학살이 있기 전의 기억들이 모이게 되었다.

그 기억들은 마치 유령처럼 사람들 사이를 배회한다. 칼람은 이 캠프에는 시공간이 없다고 말한다. 시공간이 사라진 곳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지 물으면서, 그 자리에 사람들의 기억을 채운다. 상실, 분노, 절망, 그리움, 비극의 기억이 스며든다.

이들의 존재는 이 기억을 끌어안고 구성된다. ‘고향을 잃은’, ‘학살 또는 전쟁을 경험한’ 혹은 ‘이전의 삶을 극복하는’의 수식만으로는 구성되지 않는 존재다. 칼람도, 캠프의 다른 로힝야 난민들도 ‘유령’ 같은 기억을 각자의 방식으로 꺼낸다. 이들이 이야기를 잇는 것은 기억을 꺼내는 작업이기도 하며, 동시에 기억을 만들어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결국 관객들은 그 이야기를 따라가며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계속해서 구성해나가고 있음을 포착한다.

그 기억은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칼람도, 다른 로힝야 난민들도 이 기억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신 이를 오롯이 끌어안고 담담하게 말을 건넨다. 총격으로 인해 움직일 수 없게 된 다리를 매만지기도, 꿈속에서 검은 유령이 길을 가로막기도, 밤이 되면 그저 눈물이 흐르기도, 계속 어떤 비극을 파고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밥을 먹고, 그러다가 날이 밝고, 그러다가 기도를 올린다.

어떤 사람의 존재는 지나온 삶의 기억으로 구성된다. 그 기억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존재는 달라지기도 한다. <로힝야를 거닐다>의 이들은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말을 건네고, 그로써 기억을 꺼낸다. 관객을 만나며 이는 기억을 만드는 작업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계속해서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 나가는 스크린을 마주한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영화별 상영 시간표

스틸컷2.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 위에 여러 사람들이 서있고 그 너머로 노을이 보인다.
  • 2022년 09월 22일 20:10
27프로그램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