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블랙 코드

인권해설

한때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공간은 자신을 표현하고, 서로 연대할 수 있는 공간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인터넷이 언론, 기업, 권력의 카르텔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의 새 공간을 열 수 있는, ‘전 세계 시민의 무기’가 될 것이라는 그런 믿음이었다. 2010년을 전후로 발생한 “아랍의 봄”은 그러한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우리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 2002년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 사건 추모 촛불집회는 대안 인터넷 언론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고, 2008년 미국 광우병 쇠고기 협상 반대 촛불집회에서는 다양한 시민 미디어가 꽃을 피웠다.

그러나 인터넷이 권력이 없는 시민들에게만 새로운 권력을 준 것은 아니었다. 인터넷은 거대한 정부의 관료 체제에도 새로운 권력을 허락했다. 비록 변화에 대한 대응은 늦었지만 그들이 인터넷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이해했을 때, 그 힘은 훨씬 더 막강해졌다. 아랍의 봄에 당황했던 권위주의 체제는 자신들을 한때 위협했던 인터넷을 오히려 통제를 위한 도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인터넷 대량 감시를 드러낸 ‘스노든의 폭로’는 이러한 불법적 감시 행태가 비단 독재 정부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해킹팀이나 감마와 같은, IT 업체들이 만들어 전 세계 정부기관에 공급하는 은밀한 해킹 감시 프로그램은 이미 국제적인 규제가 논의될 정도로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지난 2015년, 한국에서도 국가정보원이 이탈리아 업체 해킹팀의 RCS라는 해킹 프로그램을 구매하여  활용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RCS는 감시 대상의 PC나 핸드폰을 악성 프로그램으로 감염시켜 대상자의 위치를 추적한다. 뿐만 아니라 이메일과 SNS 등 인터넷 활용을 감시하고, 핸드폰의 카메라나 마이크를 원격으로 몰래 작동할 수 있는 기능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전히 신기술에 능한 일부 활동가들은 정부의 감시망을 뚫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러나 사이버 범죄자들이나 테러리스트 역시 정부의 감시망을 피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인터넷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사이버 위협과 테러를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인터넷에 대한 감시를 한층 강화할 것이다. 그 사이에서 기술을 모르는 대다수의 인터넷 거주민들은 사이버 안전을 위해 정부의 감시를 수용할 것을 강요받게 된다. 보안학자 브루스 슈나이어는 이를 “디지털 봉건주의”라고 부른다.

시민들이 기술을 이해하고, 정부의 감시를 피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법과 정책의 차원에서 정부의 무분별한 사이버 감시를 통제할 수 없다면, 슈나이어가 지적했듯 우리는 봉건주의로, 하지만 더욱 촘촘한 감시의 촉수를 갖고 있는 군주의 시대로 회귀하는 것일지 모른다.

오병일 (정보인권연구소 이사)

21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블랙 코드

프로그램 노트

최근 알려진 수많은 사건들은 통신기술의 발달이 편리하다는 것을 넘어 억압과 감시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보인권의 침해는 단순한 프라이버시의 침해가 아니다. 우리는 국가에 의한 정보인권 침해가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인권침해로 이어지는 것을 목격해왔다. 감시와 통제를 통한 ‘표현의 자유’의 억압은, ‘신체의 자유’의 침해(체포), ‘신념의 자유’, ‘종교의 자유’에 대한 억압(고문, 추궁, 감시)으로 이어진다. 당신의 표현을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다는 것은 당신을 언제든 ‘불온한 존재’로 낙인 찍어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블랙 코드>는 다양한 사건을 통해 이것이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문제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는 ‘불온한’ 우리가 단순히 권력에 의한 피감시자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감시의 주체로 올라설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시티즌 랩’은 정부의 해킹 프로그램을 해킹하고 1인 미디어 활동가들은 인터넷에 실시간으로 시위 영상을 공유하는 등 각자 다른 방식으로 정부권력을 감시한다. 통신기술은 우리를 불온하게 만들고 불온한 우리를 가둘 수도 있지만, 불온한 우리의 권리를 구하고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21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안녕 히어로

프로그램 노트

2009년, 쌍용자동차의 대주주인 상하이차가 경영 포기를 선언했다. 쌍용자동차는 정리해고를 동반한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하며 회계조작과 공권력을 동원해 수많은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해고노동자들이 ‘같이 살자’고 외치는 동안, 25명이 유명을 달리한다. 불법과 폭력, 충돌과 울부짖음이 공존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또 다른 삶이 이어져간다.
현우의 5년은 쌍용자동차와 장기투쟁을 하는 아빠와 함께한다. 9살 현우가 아직 낯선 상황에 혼란스러워했다면, 5년이 지난 14살의 현우는 때론 아빠에게 답답한 점을 말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아빠가 대체 어떤 활동을 하는지 궁금해하기도 한다. 더이상 투쟁과 아빠는 낯선 조합이 아닌 그들의 삶으로 다가온다. 그 스며듦 속에서 현우와 아빠는 그렇게 살아간다.
사람답게 살고 노동하기 위해 우리는 투쟁한다. 함께 살자고 외치는 아빠의 투쟁을 지켜보며 성장하는 현우, 그리고 그런 현우의 5년을 담은 영화 속에서 우리는 분명 잔잔한 삶의 파동이 우리에게로 스며듦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21프로그램 노트

인권해설: 안녕 히어로

인권해설

지난 4월 24일, 19명의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8년 만에 공장으로 출근했다. 2016년 2월 1일 1차 복직한 18명에 이어, 1년 2개월 만에 이뤄진 추가 복직이었다. 이렇게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된 단계적 복직에 대해 보수언론과 경제지들은 “경영실적 개선효과가 미미함에도” 쌍용차 경영진이 노노사 합의를 이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며 회사의 ‘결단’을 극찬해 마지 않았다. 하지만 눈물과 한숨의 시간들이 정말 이것으로 전부 다 끝난 걸까?

2015년 12월 30일, 쌍용차 사측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기업노조 3자 간에 맺은 노노사 합의는, 물론 ‘해고노동자’라는 끔찍한 낙인을 떨쳐낼 가뭄 끝 단비처럼 반가운 소식이었다. 해고노동자들이 감내해야 했던 지난 시간들은 일터뿐 아니라 가족과 지역사회라는 공동체가 송두리째 무너져내리는 아픔의 나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9년 대규모 정리해고 사태 이후 ‘산 자’와 ‘죽은 자’로 갈라서야 했던 쌍용차 노동자들의 고통은, 이제 공장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복직자’와 ‘복직대기자’로 나뉜 채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런 와중에 회사가 제시한 복직 프로그램을 “합리적 처방”이라고 칭송하는 일부 언론의 태도는 여러모로 석연치가 않다. 특히 쌍용차 경영진은 2009년 대규모 정리해고를 강행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불투명한 경영환경”을 앞세우며, 복직시한을 못박지도 않고 ‘단계적 복직’만을 고수했다. 쌍용차지부 조합원들에게 또다시 희생을 강요한 것이다. 결국 합의서에 명시한 “2017년 상반기까지 전원 복직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시점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지금, 상당수의 해고노동자들과 희망퇴직자들은 여전히 ‘복직대기자’의 신분을 벗지 못하고 있다.

경영위기를 빌미로 복직을 차일피일 미루는 쌍용차 사측의 태도로 인해 2017년 상반기 내 전원복직은 사실상 불투명해진 상황이다. 그럼에도 쌍용차 노동자들은 극중 현우의 말마따나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것”이라 믿는다. 2012년 18대 대선에서 유력 대선후보들이 일제히 쌍용차 국정조사를 약속하고도 그 뒤 싸늘하게 외면했을 때처럼, 2014년 11월 대법원 해고무효소송에서 결국 패소했을 때처럼, 칠흑 같은 절망의 한복판에서도 그들은 용수철처럼 다시 힘차게 튀어올랐으니까.

따라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손배가압류, 국가폭력의 잔혹한 실상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 노동의 ‘적폐’들을 가감 없이 드러냈던 쌍용차 노동자들의 싸움을 잊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겠다. 아빠의 삶의 궤적이 현우에게는 더없이 자랑스러운 것이었듯, 함께 살기 위한 쌍용차 노동자들의 분투가 우리 모두에게도 보배같이 값진 그 무엇이길 바란다.

임용현 (쌍용차범대위, 사회변혁노동자당)

23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시장이 있던 자리

프로그램 노트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근사한 현대식 재래시장 건물 ‘마켓홀’이 개장했다. 마켓홀은 지역 랜드마크로 떠올랐으며, 전통시장 우수개혁사례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 자리에 700년 된 시장이 있었다. 관광객은 발견할 수 없는 일상이 있었다.

삶의 공간이 변화하면 그 안의 일상도 변화한다. 수레를 끌고 나와 커피를 권하던 이가 있던 새벽, 열심히 한 주를 보내고 교회에 가던 일요일, 함께 일하던 여섯 명의 동료가 있던 일상은 마켓홀에 담기지 못했다. 원래 있던 일상이 변화된 공간에 담기기 위해서는 얼마나 긴 논의와 합의의 시간이 필요한가. 그럼에도 그것은 소중한 일이기에 우리는 그 시간을 함께 보내야만 한다. 그러나 정책결정자들은 마켓홀의 관광효과에 들떠있었고, 상인들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건립을 추진했다.

마켓홀이 완공되면 상인들은 생존이 걸린 결정을 해야 한다. 시시각각 그 시간은 가까워져 온다. 초조함을 안고서는 논의도, 연대도, 투쟁도 쉽지 않다. 마켓홀이 개장하고 상인들은 떠밀리듯 완전히 새로운 일상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커피 수레만이, 이곳에 결국 어울리지 못한 일상이 있었음을 보여주며 유령처럼 떠돈다. 마켓홀은 그렇게 ‘관광명소’가 되었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23프로그램 노트

인권해설: 시장이 있던 자리

인권해설

용역들에게 끌려나온 두리반 식당으로 다시 들어가 농성을 시작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공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살을 파고들었다. 이 사회의 ‘폐인’이 됐다는 고립감과 부끄러움은 농성장 바깥으로 출입하는 것을 망설이게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생계의 압박 또한 강도를 더해갔다. 격절(激切)의 시간이 분명했다.

그 1년 6개월 동안 어둠의 공간에 웅크리고 앉아 수많은 기록영화를 보았다. 그건 하나의 역설이다. 뜻밖의 축복인가 싶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국가와 자본의 폭력을 고발하는 작품들이 주류를 이뤘으니까. 망할 놈의 내 처지에 쫓겨난 자들의 서러움까지 겹쳐지면서 번번이 눈물을 쏟았다. 폭력의 야만성에 치를 떨기도 다반사였다. <상계동 올림픽>, <용산>, <국가는 폭력이다>, <쫓겨나지 않는 사람들>, <대추리에 살다>, <용산 남일당 이야기> 같은 작품들은 7년이 지난 여태도 생생하다.

마를렌 판데르버르프 감독의 <시장이 있던 자리> 역시 그런 류의 작품일 거라고 지레 짐작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7백 년 된 시장을 철거하고 마켓홀을 오픈하는 과정을 담았다니, 달리 어떤 짐작을 하겠는가. 예상했던 대로 영화의 도입부는 어두웠다. 지게차의 굉음이 먼저 흘러나왔다. 그러나 곧 눈발 흩날리는 시장이 펼쳐진다. 과일전에도, 어물전에도, 야채전에도, 병전에도, 드링크 수레를 끄는 노점상에게도, 장보는 이들에게도 눈이 내린다. 고르게 내린다. 감독은 왜 굳이 눈 내리는 시장을 보여주는 걸까? 그는 시장상인들의 입을 빌려 답한다. “시장은 새와 같아요. 자연이에요. 가둬두면 죽는 거예요.”

시장에 내리는 눈처럼 자연현상은 선별적이지 않다. 눈은 갑남을녀에게 고르게 내린다. 하지만 로테르담 시의회에서 추진하는 마켓홀 사업은 예외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시는 인간의 삶을 자본의 논리로 규정하고 있다. 시는 마켓홀이 로테르담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으면, 로테르담을 세계최고의 쇼핑도시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시장의 규모는 축소될 것이다”, “1백 명의 상인은 마켓홀에 입점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입점할지 말지 지금 당장 결정하라”, 시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사업을 강행한다.

대를 이어 장사를 해왔으면 뭐하나?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고, 죽은 남편으로부터 물려받은 삶의 둥지에서 쫓겨나면 나머지 생은 어쩌란 말이냐? 상인들은 쫓겨나는 1백 명에 내가 포함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우왕좌왕한다. 하물며 마켓홀이다. 시는 마켓홀에 입주할 상인들이 지켜야 할 지침에 대해서도 잊지 않는다. 일요일 영업은 필수다. 문 여는 시간과 문 닫는 시간 또한 일정해야 한다. 시장을 새와 같다고 비유한 상인들에게는 엎친 데 덮친 격이 아닐 수 없다. 설령 행운의 여신 덕에 마켓홀 입주가 결정될지라도 분명 새의 날개를 꺾는 지침이라는 얘기다.

두려움에 떨던 상인들은 하나둘 반발하기 시작한다. 대책을 논의하고, 거칠게 마켓홀 사업팀을 방문하기도 한다. 한국의 기록영화라면 이쯤에서 익숙한 폭력사태가 등장한다. 검은 유니폼을 입은 용역깡패들, 용역들을 보호하느라 도열해 있는 듯한 경찰들, 집게발을 앞세우고 가차 없이 철거를 강행하는 포클레인, <시장이 있던 자리>는 다행히 그런 것들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대신 쉽게 포기하고 쉽게 순응하는 장면으로 채워나간다.

덕분에 마켓홀은 별다른 저항 없이 오픈할 수 있게 된다. 낡은 드링크 수레만이 오픈한 마켓홀을 오감으로써 한때 자연으로서의 시장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건 무척 기묘한 역설을 담고 있다. 언뜻 드링크 수레를 포착함으로써 <시장이 있던 자리>는 낡은 것과 새 것의 대비, 정체하느냐 변화하느냐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시장이 있던 자리>는 삶의 둥지에서 쫓겨난 1백 명이 넘는 상인들의 뒷얘기는 보여주지 않는다. 마켓홀에서 삶의 둥지를 틀고자 몸부림치고 있는 낡은 드링크 수레를 보여줌으로써 둥지에서 영영 쫓겨난 이들의 고단함을 여운으로 남겨두고자 하는 것이다.

유채림 (소설가, 두리반 주인의 남편)

25인권해설

인권해설: 플레이 온

인권해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하는데, 떠나기만 한다고 더 좋은 절이 나타날까.” 왜 노동조합을 시작했느냐는 질문에 김용호 씨는 이렇게 말한다. 독립운동보다 힘들다는 노동운동. 독립운동은 잘 모르지만 SK브로드밴드 설치수리기사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인정받는 과정은 어렵고, 힘들었다.

문제의식을 가진 노동자들 몇몇이 모인다고 해서 노동조합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적은 수의 조합원으로 노동조합을 시작하면 회사의 탄압에 버틸 수 없다. 노동자들은 일정 수가 모일 때까지 조심스럽게 동료들을 설득하고 조직한다. 비밀리에 모임을 갖고, 관리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사람들을 만난다. 일정 수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도 걱정이다. 회사가 먼저 회사(어용)노조를 만들어 말 잘 듣는 노동자들을 가입시키면 고생해서 준비한 민주노조는 힘을 가질 수 없다. 노동조합 설립신고도 치밀한 계획과 철저한 보안을 통해 내야 한다. 그렇게 노동조합 설립신고가 끝나면 이제 막 한 고비를 넘겼다. 이제부터는 회사의 탄압에 맞서 노조를 지켜야 한다.

SK브로드밴드 설치수리기사들도 그랬다. 노조 설립을 세상에 알린 날이 2014년 4월 10일. 그로부터 1년을 싸운 후에야 회사와 조인식을 맺고, 노조의 요구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어떤 날은 관리자의 회유를 뿌리쳐야 했고, 어떤 날은 괴롭힘과 탄압을 견뎌야 했다. 비조합원들의 차가운 눈빛과 싸워야 했고, 가족들의 우려도 설득해야 했다. 언론의 무관심에 실망하기도 하고, ‘노조=빨갱이’라는 눈초리에도 시달렸다. 파업, 고공농성, 노숙농성, 본사점거, 오체투지…. 거리로 나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냈던 1년. 노동자들은 회사로부터 탄압받았을 뿐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고립되어야 했다. 이는 ‘노동조합’을 혐오하는 사회풍토와 ‘노조=장기투쟁’이라는 공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만든 고립이었다.

투쟁이 끝난 후 SK브로드밴드 설치수리기사들은 “노조의 맛을 알았다”고 말한다. “이제 비노조(노동조합 조합원이 아닌 상태)는 못할 것 같다”며, 노동조합 1년을 ‘자존감’을 확인했던 시간으로 기억한다. 이는 노동자의 존엄을 지킨 시간이 되었고, 노조가 만든 일터의 변화는 “그나마 좋은 절을 짓고 있다는 자부심”이 되었다. 이 같은 30대 남성 설치수리기사들의 노동조합에 대한 ‘소감’은, 대형마트의 4~50대 여성노동자, 청소를 하는 5~60대 청소노동자들의 목소리와 닮았다. 노동자들이 ‘절을 떠나는 중’이 되기를 거부하고 노동조합을 시작하는 순간, 이 순간은 자존감을 찾기 위해 떠나는 여행의 시작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SK브로드밴드는 지난 5월 22일, 자회사를 만들어 설치수리기사들을 자회사 정규직으로 고용하겠다고 밝혔다. “진짜 사장이 나와라”라고 외쳤던 노동자들의 외침에 “우리는 사용자가 아니다.”라고 답했던 회사가 전향적으로 입장을 바꾼 것이다. 새 정부의 일자리정책이 몰고 온 새로운 바람이다. 지금도 비노조와의 차별에 시달리고 있는 노동자들이 이번 기회에 ‘진짜 정규직’이라는 경유지에 착륙할 수 있을까. 독립운동보다 어려운 줄 알면서도 스스로 선택한 노동조합의 길, 경유지도 노동자들이 직접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진호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네트워크)

22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플레이 온

프로그램 노트

왜 힘들게 파업을 하냐는 질문에 <플레이온> 속 노동자들은 대답한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그렇다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고. 휴일도 없이 일하지만 고용 불안에 시달리며, 다쳐도 산재 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스스로 조심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이렇게 SK브로드밴드 하청 노동자들의 삶은 매일이 견딤의 연속이다.  이들의 삶은 다른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당연한 것은 당연하지 못한 것이 되어 수많은 노동자들을 괴롭힌다. 공기 중에 퍼진 자본의 횡포는 노동자들의 당연한 외침을 잘못된 것처럼 틀에 가두어 버린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이 정도쯤이야’라고 치부하며 견뎌내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렇게 노동자들은 사회 속 하나의 파편이 되어 단절된 투쟁만을, 조용한 투쟁만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팟캐스트 전파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단절되었던 벽을 깨고 다른 이들에게 손을 내민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그들의 외침이 나에게 울림이 되고 그들의 삶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파편으로 존재했던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렇게 이 투쟁의 파동은, 계속해서 퍼져 나가 더 많은 이들과 닿을 것이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23프로그램 노트

인권해설: 캄보디아의 봄

인권해설

2013년 5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의 초청으로 보응칵 호수 마을 대표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캄보디아의 인권침해 상황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당시 마을 대표였던 보브 소피는 이충연 용산4구역 철거대책위원장 등과 함께 북아현동 철거현장과 용산참사가 일어난 남일당 현장을 방문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용산참사에서 목숨을 잃은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포스러웠고 충격적이었다. 이렇게 발전되고 현대화된 도시에서 참혹한 철거과정이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우리도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21세기 도심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누가 국가에 이런 잔인하고 몰염치한 권한을 줬는지 말이다.

삶의 공간이란 내가 살고 있는 건물이고 골목이고 마을이다. 단골가게의 단골 고양이가 오늘은 언제 나타날지 궁금해 기웃거리고 동네 하나밖에 없는 버드나무가 내년에도 살아있기를 바라며 길을 걷는다. 누군가는 밭을 일구고 누군가는 배를 타고 또 누군가는 장사를 하며 사람들을 맞이한다. 그렇게 공간은 함께 어우러지고 쌓아온 시간으로 차곡차곡 채워진다. 어떤 계산으로도 대체될 수 없으며 어떤 명분과 법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존엄한 가치들이다.

공공사업을 한다며 터무니없는 보상금으로 토지를 강제수용하거나, 개발이란 이유로 집을 부수고 강제로 쫓아내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권한과 이권을 민간 사업자에게 넘기는 일 따위도 마찬가지다. 현재 모든 보상이나 협의, 강제퇴거의 실질적 권한은 조합이나 시공사에 있다. 강제퇴거 과정에서 사람이 다치고 살려달라고 호소해도 조합이나 용역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관여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창피한 일이지만 여기에는 서울시, 구청, 경찰, 119, 국가인권위원회도 예외가 아니다. 중요한 건 공공기관의 이런 무책임한 행동이 무능이나 무지 때문이 아니라 공공연한 방치와 묵인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근 장위7구역 재개발 현장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조합이 수차례 불법집행을 시도하고 동절기 강제철거 금지 원칙을 위반했지만 단 한 번도 제재를 받지 않았다. 법원 집행관은 집행이 완료되지 않았음에도 집행 완료를 선언하고 사라졌고, 나머지 철거와 집행은 조합이 고용한 미배치 청소용역들이 대신했다. 옥상과 철탑에서 농성 중인 철거민들에게는 단전·단수는 물론 음식반입도 차단했으며 이에 대한 협의는 전적으로 조합의 결정에 따라야만 했다. 용역을 피해 며칠을 철탑꼭대기에 매달려있거나 밤새 비를 맞고 쓰러지기 직전에도 공권력은 그 어떤 위로나 보호도 취하지 않았다. 이것이 공공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재개발의 현주소다.

재개발에서 원주민의 정착비율은 실제 10% 안팎이다. 이는 재개발의 목적과 방향이 원주민들의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데 있지 않고, 하루라도 빨리 내쫓아 땅값과 건물가격을 올리는데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집은 삶의 공간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오직 평당 분양가로만 존재한다. 이렇게 조합과 시공사가 개발사업을 독점하고 돈을 버는 구조를 없애지 않는 한 폭력적인 강제퇴거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전국에 빈 아파트가 넘쳐나도 매일같이 집이 허물어지고 그 위로 아파트가 올라간다. 아무리 많은 아파트와 고층빌딩이 세워져도 집 없는 사람은 해마다 늘어만 간다.

사람은 누구나 존엄하며 살고 싶은 곳에 살 권리가 있다. 집은 단순한 건물이 아닌 삶의 일상과 추억이 묻어있는 공간이다. 그곳엔 길과 가게가 있고 마을이 있고 나와 연결된 모든 관계들이 살아 숨 쉰다. 누구도 이걸 돈이나 법 따위로 뽑아내거나 대신할 수 없으며 어떤 이유로도 강제로 빼앗아갈 수 없다.

2018년. 캄보디아와 한국의 봄은 다르지 않다.

오랜 시간 호수를 터전 삼아 살아온 사람들에게 호수를 빼앗고 모래를 메워 그 위에 세우려는 게 무엇인지, 사람을 망루와 죽음으로 내몰고 죄를 뒤집어씌운 그 파렴치 위로 어떤 반짝거리는 것들이 만들어지는지 지켜볼 것이다.

‘누구를 위한 개발인가?’
우리는 이 케케묵고 순진한 질문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김은석 (창작집단3355)

25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캄보디아의 봄

프로그램 노트

보응칵 호숫가의 집에 어렵게 정착해 살아왔다는 포브. 힘든 시절엔 이웃들이 그녀에게 병원 갈 돈을 삼삼오오 모아다 주었다. 이곳의 주민들은 그렇게 서로 도움을 주고 또 받으며 지내왔을 것이다. 배니는 그녀와 같은 마을에 살면서 우정을 나누어왔을 테고, 그들의 아이들은 동네 친구들과 물가에 조약돌을 던지며 노는 게 즐거운 놀이 중 하나였다. 승려 소바쓰 역시 그들과 더불어 살며 지역과 주민들의 안녕을 위하곤 했을 것이다. 보응칵 사람들은 이런 수많은 기억들을 겹겹이 쌓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캄보디아 정부는 지역 토지를 민간개발사에 임대하였고 그날부터 호수는 모래로 메워져 갔다. 난데없이 쳐들어온 개발사가 정작 삶을 영위해왔던 주민들을 내치고 땅의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개발사와 경찰은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집을 허물고, 총을 쏘고, 폭력을 행사하며 사람들을 쫓아냈다. 매력적인 건물을 짓고 외국인이 북적거리는 관광도시를 만들려는 계획에, 주민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개발을 위해 호수를 메우고 집을 허무는 건, 말 그대로 단순히 ‘땅’이나 ‘집’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마을은 그저 하나의 땅 위에 각각의 주민들이 따로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서로의 일상이 얼기설기 이어져 관계와 삶들을 공유하는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삶의 터전을 밀어내고 들어선 개발은 공간뿐만 아니라 그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관계, 기억들까지 흔들어 놓는다.

6년이 넘도록 주민들은 그들의 집과 삶, 관계, 기억들이 자리 잡은 공간을 지키기 위해 싸워나갔다. 그 시간 속에선 개발의 폭력과 협박에 맞서 같은 목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 고된 싸움에 지쳐 일상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서로에게 겨누던 손가락질과 비난으로 상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호수를 둘러싸고 살아갔던 시간들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모래로 메워진 호수에 예전처럼 물이 흐르진 않을 테지만, 그들 삶의 공간이었던 보응칵 호수는 여전히 각자의 기억 속에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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