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 노트: 나의 탈출

프로그램 노트

2011년부터 시작된 내전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시리아를 떠났다. 게이드와 압둘도 떠났다. 언제 폭탄이 날아와 나의 공간을 무너뜨릴지, 언제 나와 내 가족이 죽게 될지 모른다. 계속 남아 있다면 나 역시 무기를 들어야 한다. 나의 삶, 그리고 마주 선 타인의 삶을 지키기 위해 결국 이들은 목숨을 걸고 그곳에서 탈출하기를 선택했다. 길 너머 길을 계속해서 걸어야 하는, 기약 없는 여정을 택했다.
게이드와 압둘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무엇 하나 더하거나 빼지 않고, 자신들의 시선으로 기록해 나간다. 원치 않는 삶의 공간에서 탈출해, 그 후의 내 삶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우리는 그대로 따라갈 수 있다.
탈출의 모습은 돈이 있는지, 동행이 있는지, 데려올 가족이 있는지 등에 따라 달라진다. 이들이 가진 수많은 이야기는 난민이라는 이름 뒤로 사라지는 듯하다.
뉴스에서는 불법으로 국경선을 넘는 이민자들을 체포하겠다는 경고가 흘러나온다. 사실 전쟁만 아니면 이들은 시리아에서 살기를 원한다. 끊임없이 걷고 움직이지만, 이들을 반기는 공간은 없다. 이들은 걷는 걸 멈추고 쉴 수 있는 나의 공간을 찾고 싶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27프로그램 노트

인권해설: 나의 탈출

인권해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느덧 햇수로 7년째를 넘기고 있는 시리아의 끔찍한 내전 말이다. 2011년 3월부터 시작된 시리아 혁명은 자유와 평등을 향한 민중들의 고귀하고도 감동적인 한 편의 대서사시였다. 아무리 지금의 현실이 참혹하고 암울할지라도, 1963년과 1966년, 1970년, 이렇게 세 차례의 쿠데타를 거쳐 집권한 알 아사드 가문과 그 측근들에 의해 무려 40년 동안이나 빼앗겨온 자신들의 목소리를 스스로 되찾겠다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민중들의 그 용기조차 부정한다면, 앞으로 우리가 감히 어떻게 인간의 존엄과 역사의 진보를 입에 담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은 모두의 예상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잔인했다. 평화적인 시위대를 잔인하게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무장투쟁을 유도해내는 ‘항쟁의 군사화’, 수백 명에 달하는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을 의도적으로 감옥에서 풀어줘 시민군 틈에 뒤섞이게 함으로써 시민항쟁의 대의를 종교적 명분으로 변질시키는 ‘항쟁의 이슬람주의화’, 인구의 75%를 차지하는 수니파 주민들과 15%의 시아파 알라위 주민들, 그리고 소수 쿠르드족을 서로 적으로 돌려세우는 ‘항쟁의 종파주의화’, 정권과 같은 종파인 이란과 레바논의 헤즈볼라 민병대를 내전에 불러들임으로써 반대편 종파의 터키와 걸프국가들을 끌어들이고, 러시아까지 불러들여 미국과 서방국가들의 군사개입을 이끌어내는 ‘내전의 국제 분쟁화’라는 파멸적인 전략으로 대응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시리아의 현실은 바로 그러한 전략의 잔인한 결과물이다. 한때 국가대표 골키퍼로 활약하다가 항쟁의 한복판에 총을 들고 뛰어든 한 청년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홈스는 불타고 있다>(2013)의 등장인물들과 같은 젊은 시민군들과 주민들은 이제 상당수가 그 자리에 없다. 수만 명에 달하는 정치 수감자 중 하나가 돼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고 있거나, 수십만 명의 실종자 중 한 사람이 됐거나, 50만 명이 넘는 사망자 가운데 하나로 땅에 묻혔거나, 나라 밖으로 탈출한 5백만 난민의 대열에 합류했거나,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더 높은 곳을 찾아 거기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시리아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630만 실향민 중 한 사람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럼에도 이놈의 지긋지긋한 전쟁은 도무지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만 6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오면서 이제는 폭압적인 독재에 맞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시민들이라는 구도조차 흐릿해져버린 지 오래다. 정부군과 이슬람국가(IS)가 싸우고, 이슬람국가와 또 다른 이슬람주의 반군이 싸우며, 쿠르드족과 이슬람국가가 또 싸우고, 반군과 반군끼리도 갈라져 싸운다. 선과 악, 적과 우리 편의 경계가 무너지고 지워진 속에서 어쨌든, 싸운다. 그러는 사이 미국과 프랑스, 영국, 러시아, 터키, 이란, 이라크, 레바논,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는 각자의 이해관계에 맞는 세력들을 골라 무기를 제공하고, 전쟁을 가르치고, 자금을 대고, 때로는 직접 하늘에서 미사일과 포탄을 쏟아붓는다. 마치 1,700만 시리아 국민들이 모두 죽거나 쫓겨나야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멈출 것처럼 말이다.

물론 우리는 안다. 오늘날 시리아 민중들이 겪는 이러한 고통에 우리를 비롯한 전 세계 시민들이 많이 가슴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그것이 막연히 남의 일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내가 속한 공동체와 나에게 닥친 문제가 됐을 때는 그런 인간적 연민과 연대의식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도 우리는 잘 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영화 <나의 탈출>에서 게이드와 압둘, 이 두 시리아 난민 소년에게 마른 옷과 허기를 채울 음식과 하룻밤의 따뜻한 잠자리를 기꺼이 내준 자원봉사자들의 친절함도 우리의 얼굴이요, 철책으로 그들을 막아선 채 곤봉을 휘두르고 수용소에 가둔 뒤 내쫓는 국가들의 냉담함도 우리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렇다면 당신은 둘 중 과연 어떤 얼굴을 선택할 것인가?

최재훈 (경계를넘어)

21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이태원

프로그램 노트

언덕에 빽빽하게 들어찬 건물들은 제각기 다른 나이를 가진 듯하다. 오래된 간판과 집들 사이, 젊은이들이 가득한 이태원. 용산 미군기지에 인접한 기지촌에서부터 성장한 이태원은 어느새 그 시간들을 잘라내고 어색하게 새로운 가게를 접붙인 곳이 되었다. 그곳에서 살아왔고, 살아가는 여성들이 있다. 니키는 자식들 결혼할 때를 걱정해 한국 사람 없는 미군 클럽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다. 열아홉부터 이태원에서 놀았던 영희는 미군과 결혼도 했지만 1년만에 돌아왔다. 미군 전용 술집을 차렸던 삼숙은 미군 기지 이전으로 40년 된 자신의 가게를 접는다. ‘후커’, ‘술집여자’ 누군가 그녀들에게 붙일 이름. 삶에 굳은살이 박인 그녀들은 그저 태연히 사랑하고 미워하고 살아왔다. 그녀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이태원, 그 공간의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와 즐거이 인사하던 이웃들이, 해가 지자 그녀의 공간을 밝혀주던 간판들이, 쉼터를 만들어주던 나무들이 보이지 않던 때는. 그녀와 그녀의 집은 여전히 이태원을 지키고 있지만, 그녀의 주변은 여전하지 않다. 이따금 그녀들을 반기던 주변의 것들이 그리울 때, 그 그리움은 왜 너무나도 빠르게 변해간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되어야만 했을까.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27프로그램 노트

인권해설: 이태원

인권해설

이태원(梨泰院). 역사의 혼종성을 짐짓 모른 체하는 사람들에게는 이태원은 그저 배나무가 많은 마을일 뿐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이태원은 “혼혈아를 밴 마을(異胎院)”로 불리며 조롱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태원 근방에는 일본군 병참기지가 있었고, 임오군란 때는 청나라 군대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는 일본군이,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기지가, 해방 이후에는 미군기지가 자리했다. 군사 전략적 요충지라는 지리적 특성상 이태원 근방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 오랜 시간 동안 해외 군대가 주둔했고, 이태원의 여자들은 해외 주둔군의 아이를 낳았다. 이태원은 대대로 식민지 주둔군, 외지인과 접촉하며 살아가는 낙인찍힌 여자들과 그 아이들의 땅이었다.

하지만 현재 이태원이 서울 어느 지역에서보다 이국적인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유행을 선도하는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외지인과 접촉한 여성들이 만들어낸 이물감과 이방성, 그리고 그것에 대한 냉대는, 글로벌 시대로 오자 이국성으로 번역되며 열광적으로 소비되고 있다. 이토록 화려한 이태원이지만, 이곳에는 여전히 천대받는 여성들이 남아 있다.

“창녀들의 언덕”이라 불리는 이태원 소방서 뒷길 ‘후커힐(hooker hill)’엔 외지인 남성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작은 클럽들이 줄지어 자리하고 있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양갈보”로 불리고 여성운동단체 사람들에게는 “기지촌 여성”으로 불리는 이 클럽 여성들은 오늘도 휴가 나온 미군들, 외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태원이란 이런 델까. 시끄럽고 정말 어지러워.

소방서 골목마다 서성대는 짙은 화장을 한 여자들은

길가는 남자마다 붙들고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_노래를 찾는 사람들, <이태원 이야기> 중

해방 이후 용산 지역에 미군이 주둔하게 되면서 용산 인근에 자리한 이태원은 기지촌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미군들의 유흥, 위락 지역으로 흔히 알려진 이태원이 미군과 맺는 대표적인 관계는 그들에게 위안(comfort)을 제공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여성들을 앞세워 미국으로부터의 자원, 물자, 권력에 접근하고자 했기 때문에 여성들이 이 지역을 떠나고자 할 때마다 “당신들이야말로 애국자”라며 여성들의 존재와 그녀들의 일을 상찬했다. 정서적으로 외지인에 대한 배타성과 열등감을 갖고 있던 한국사회였지만, 국제적 교류를 만들어내야 했던 시기마다 이태원의 여성들을 중요한 외교, 문화적 자원으로 동원했다.

이들은 발전주의 시대 한국사회에 ‘미국적인 것’들을 전달했고, 이들과 이들이 매개한 이국적인 문화는 한국사회 대중문화 번영의 중요한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박진영, 양현석, 현진영, 그리고 이 여성들이 함께 80년대, 90년대 이태원에서 흑인 음악과 춤을 즐겼다. 하지만 역사는 이 여성들을 지우는 방식으로 ‘한국적인 것’들을 구축해나갔다.

특히 2001년 9.11 이후 미군 본부는 테러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였고 이태원은 대표적인 감시의 표적 지역이 되었다. 그렇게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여성들은 이태원에서 최악의 ‘불경기’를 경험하고 있다. 이태원에 남은 여성들은 스스로를 ‘떠나지 못한 자들’로 정체화하고 있다. 미군들과의 결혼도 실패했고 외국으로의 이주도 실패했다고 자신의 삶을 설명한다. 힙스터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 오늘의 이태원은 여성들로 하여금 오히려 과거와의 단절, 불경기를 체감하도록 할 뿐이다. 이제는 나이가 많아 새롭게 이동할 지역이나 클럽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 이들은 모두 이태원이 ‘과거의 영광’을 다시 찾기를 기대하며 이 혹독한 빈곤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영광의 장면들은 언제나 빈민을 축출하고 누추한 모든 것들을 거두는 기획 속에서 연출되었다. 이태원이 ‘힙한 동네’로 이름을 날릴수록 이들 클럽 여성들과 그 장소의 흔적들은 눈엣가시처럼 취급될 것이다. 천대받는 여성들은 종종 “주민 보호”, “사회 보호”의 명목으로 추방되었다. 이전에는 “사회정화”라는 이름이었다면, 이제는 “뉴타운”,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의 삶은 또다시 압박받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외침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곳에 여성들도 살고 있다. 아니, 이태원은 곧 여성들의 노동이자 삶이다.

김주희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

21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기억의 장

프로그램 노트

기억은 어떻게 작동할까. 기억은 과거의 반영일까. 공동체에서 기억은 어떻게 작동할까. 집단기억은 무엇을 말할 수 있게 할까. 영상은 기억을 어떻게 담을 수 있을까. 모잠비크에 대한 포르투갈의 400년이 넘는 식민지배에 맞서, 1962년 부터 1975년까지 모잠비크 독립투쟁이 있었다. <기억의 장>은 이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목소리와, 지금은 폐허가 된 모잠비크의 장소를 담는다. 말해지지 못했던 기억을 풀어내고 그 기억이 부착된 장소들로 시선을 옮기는 것은, 단선적으로 서술된 역사를 반복하는 게 아니다. 억압되었던 기억들은 “식민지의 유령”이 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폭력의 기억”이 증언으로 다시금 우리를 괴롭히기도 하며, 그 폭력은 “폐허 속 기억”이 되어, 기억들과 기억의 장소들은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감독과 만나 현재의 한 부분이 된다. 이 기억들은 모잠비크 공동체에게 ‘집단기억’으로, 박제된 과거의 사실이 아닌 살아있는 기억으로 재현된다. <기억의 장> 속 세 장막의 이름은 그렇게 과거와 현재를 잇고 그 관계를 규명하는 도구로, 과거의 반영이 아닌 현재가 된다. 그렇게 ‘기억의 세 장’은 지금 우리의 ‘기억의 장’에 펼쳐진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19프로그램 노트

인권해설: 기억의 장

인권해설

기억을 기록한다는 것은 ‘망각과 싸움’이다. 다들 알다시피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인간도 기억도 기록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기억되기를 바라고 어떤 이들은 심지어 불멸을 꿈꾼다.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 거대한 구조물과 초라한 비석을 통해, 그리고 기록을 통해 인류는 역사를 만들어왔다. 인간이 이루어질 수 없음에도 영원히 기억되기를 욕망하는 까닭은 자신의 존재, 자신의 행위, 자신의 삶이 의미 없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을 기록한다는 것은 ‘왜곡과 싸움’이기도 하다. 온전한 기억이란 없다. 개인의 성향,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정치적, 시대적 상황에 따라 기억은 잊혀지기도 하고 입맛에 따라 편집되기도 한다. 굴절되고 변현(變現)된 기억을 고스란히 기록할 방법 또한 없다. 기억을 기록하는 것은 왜곡 없는 기억을 통해 진실에 다가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어떻게 기억이 왜곡되었는지를 통해 진실에 다가서고자 하는 노력이다. 기억이 기록되지 않는 한, 나의 기억이 우리의 기억이 되지 않는 한 어떤 불화나 갈등도 거기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다.  공동체는 기억의 공유를 통해 지속될 수 있다. 공유된 기억이 없는 공동체는 위험하다. 한편 하나의 기억만을 공유한 공동체, 단일한 기억만을 강요하는 공동체는 더욱 위험하다.

기억을 기록한다는 것은 ‘권력과 싸움’이다. 조지 오웰은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고 썼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역사교과서 논란은 권력의 속성을 드러낸 것이며 역사와 교육이 기억의 정치 현장임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국가만이 아니라 어떤 공동체든 집단기억으로 무엇을 채택하고 공인할 것인가는 치열한 정치 투쟁이고 권력 다툼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120여 년 전 밭을 갈던 농민이 무슨 생각으로 전봉준 옆에서 죽창을 들었는지 알지 못한다. 3.1운동에서 민족대표 33인의 생각은 알 수 있어도 같이 태극기를 들었던 넝마주이의 생각은 알 길이 없다. 4.19의 희생자는 대학생보다 도시빈민의 비중이 압도적이었음에도 여전히 ‘학생의거’로 기억된다. 국가 권력에 의해 공인된 역사뿐만이 아니라 국가폭력의 피해자 담론 속에서도 소수자의 기억은 무시되고 배제되기 쉽다.

모잠비크 저항운동에 대한 기억을 기록한 <기억의 장>은 고통스러우면서도 소중한 이야기다. 거기에는 부당한 권력에 저항했고 지금은 망각과 싸우고 있는 이들이 등장한다. 카메라는 침묵한 채 폐허가 된 콘크리트 건물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그 이야기를, 그 기억을 이제 나는 기억하려 한다. 그와 함께 그 기억들이 왜 그동안 기록되지 못했는지, 왜 이제야 이야기되고 기록되는지 나는 궁금하다.

강곤 (세월호참사작가기록단)

20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친밀한 폭력

프로그램 노트

<친밀한 폭력> 속 그녀들은 앉았다가, 등을 보이며 먼 곳을 응시하기도 하다가, 아마 오래 무겁게 닫혀있었을 입을 뗀다. 그녀들은 모두 다른 공간에서 다른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녀들의 모습은 어딘가 겹친다.
‘친밀한 폭력’이 발생했다. ‘사랑’이라고 했다. 금세 폭력은 ‘없는 일’이 되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공간의 폭력을 증명하는 건 풀이 바위를 뚫는 것만큼이나 어렵게 느껴졌다. 하지만 생존자들은 침묵을 뚫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녀가 증언을 시작하자 그곳의 공기는 바뀌었다. 우리는 친밀한 사람이 가한 폭력의 순간에 그녀와 함께 놓인다. 그녀의 이야기를 오롯이 듣는 것으로 그때에는 미처 닦아주지 못했던 눈물을 수십 번 닦아낸다. 세상의 입막음에 저항해 생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얼마나 캄캄한 침묵 안에 갇혀있었는지 깨닫는다. 그렇게 우리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위계가 드러난다. 피해생존자들의 말하기는 세상에 나온 것만으로 저항이다.
그녀들은 폭력의 순간에 영원히 갇혀 있지 않는다. 계속해서 살아가고 나아가며, 자신의 삶을 가꾼다. 작은 이야기들로 시작했지만 그 이야기들은 연결된다. 이야기는 듣는 이들을 통해 침묵을 한 뼘씩 밝혀나간다. 그렇게 폭력의 사슬을 끊어내는 저항이 된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29프로그램 노트

인권해설: 친밀한 폭력

인권해설

여성폭력이 존재함은 상식이 되었다. 박근혜 정부는 “4대악”이라 칭했고, 인권감수성 있는 시민들에겐 이제 많이 들어본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다큐는 다시 묻는다. 여성폭력에 대해 알고 있냐고. 어찌 보면 그 ‘존재’를 알게 된 시점과, 자세하게 그 작동구조 속 이야기를 직면하게 되는 시점 사이에는 큰 지연이 있을지 모른다.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닐까.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지 않게도, 이 다큐는 어느 평범한 가정집의 창문과 대문, 바깥 벽을 주욱 따라간다. 다양한 나라의, 흔한 ‘가정’의 외벽이다. 거기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 다큐의 주인공들은 다양한 국가의 아내폭력 생존자들이다. 비슷하게 만나고 사귀고, 동거하고, 결혼한다. 그런데 왜 남편은 도청을 시작하고, 알코올을 담은 병에 불을 붙여 건네며, 강간하고 때리고, 길에서 총을 쏘는가? 그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생존하려는 투쟁을 시작하는 스페인, 인도, 미국, 핀란드의 그녀들.

전 세계 1/3의 여성들은 친밀한 관계에서 폭력을 경험한다. 한국에서는 두 집 중 한 집에 가정폭력이 있다. 많은 여성들이 기소와 재판 과정도 없이 가정이라는 감옥에 수감되고, 생사를 오가는 고문을 겪는다. 한국은 가정폭력방지법을 ‘가정보호’를 목적으로 운용하며, 이혼할 때 섣부른 선택이 될까 봐 숙려기간을 의무화하고, 가임기여성지도를 그려가며 결혼과 임신이 무조건 늘어나야 한다고 한다. 여성폭력의 현실에 대한 분석과 연구, 대책도 없이 그렇게 결혼하라고, 또 결혼을 유지하라고 강요한 이후를 책임질 수 있는가.

이 영화는 그녀들의 ‘반전’의 시점을 뚜렷하게 담아낸다. 죽으려고 가스밸브를 열어놓고 잠들려 하다가 그 집을 빠져나온 날, 알몸으로 무조건 내달린 날, 스포츠센터 가는 가방에 옷 두 벌만 넣고 나온 날. 거기엔 조력자가 있었다. ‘내 집’이라는 생각을 ‘그건 집이 아냐’로, ‘이게 어쩔 수 없는 내 삶’ 이라는 생각을 ‘그건 삶이 아냐’로 바꾸어 말하기, 그리고 그 말들을 듣기. 수잔 브라이슨은 『이야기 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에서 이런 사회적 타인과 자아의 관계를 말한다. “자아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진다. 자아는 타인의 폭력에 의해서 파괴될 수 있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세워질 수도 있다.” 그녀들은 지지자, 상담자, 쉼터운동가, 다른 생존자와 합심하여 가정은 안온하다는 지식과 다른 새로운 지식을 만들고, 폭력 아빠의 아이방문권이 허락받는 여전한 사회 속에서 다른 ‘삶’을 꾸려간다.

그녀들의 지금 삶을 멋지게 담아내는 후반부. 직장을 다니고, 어렸을 적 꿈을 찾아가고, 끽연을 하고, 연애를 한다. 또 이제는 ‘어디에나’ 간다. 일하다가 머리를 비우러 가는 공원의 바위턱, 수영장에서 유유한 글라이딩, 푸른 들판을 가로지르는 고속철도. 열차창에 빗방울은 스쳐가고, 수영장 바닥엔 뿌연 물속 기억이 여전하지만. 그래도 “웅덩이를 벗어나니 세상이 내 것이다.”

오매 (한국성폭력상담소)

22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올 리브 올리브

프로그램 노트

팔레스타인에서 올리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올리브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주 수입원이자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나무이며, 팔레스타인의 역사다. 그러나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의 올리브 농장을 마음대로 오갈 수 없다. 위즈단 가족이 수십 년간 농사지어온 땅은 한순간에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누군가가 이스라엘 땅이라고 정해버린 자신의 올리브농장을 돌보기 위해 이스라엘이 허가한 통행증을 어렵게 구해야 한다. 심지어 인티파다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이스라엘에서 일조차 할 수 없다. 자신의 삶의 공간이었던 곳에서 이들은 ‘난민’이 되어 일상을 살아낸다.
이스라엘이 건국된 1948년부터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은 계속해서 이스라엘로부터 폭격과 봉쇄, 그리고 점령을 당해왔다. 그리고 지금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에 저항하고 있다. 누군가는 도로 봉쇄 철폐를 요구하는 평화 행진으로, 누군가는 팔레스타인의 상징과도 같은 올리브 나무를 심는 것으로. 각자 저마다의 방법으로 저항의 삶을 살아간다. 이들의 저항에 담긴 소망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터전과 오랜 일상을 되찾는 것이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24프로그램 노트

인권해설: 올 리브 올리브

인권해설

“올리브 나무가 땅에 적응하여 좋은 열매를 맺기까지 최소한 백 년이 걸린다.” 처음 팔레스타인을 방문했을 때 들었던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사람의 마당에 있는 나무들은 삼백 년이 넘은 것이라고 했다. 과학적인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이 이야기는 머릿속에 깊이 박혔다. 이후 올리브 나무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가짐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올리브 나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역사를 함께 견뎌온 동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장비에 밀려 뿌리까지 뽑히거나, 유대인 정착민에 의해 불태워진 나무, 장벽 너머에 있어 이스라엘이 승인한 통행증 없이는 다가갈 수 없는 올리브 나무를 보면서 팔레스타인 민중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건, 나에게는 이제 당연한 일이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군사점령은 반세기를 넘어가고 있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하여 7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추방당했던 ‘나크바(대재앙)’ 이후, 군사점령이 본격화된 67년 전쟁을 지나 오늘날까지도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은 계속해서 짓밟히고 있다. 점령 속에서 생의 대부분을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증오를 버리고 평화를 모색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점령에 순응하라’고 하는 것과 같은 잔인한 말이다. 이스라엘과 이를 옹호하는 시오니스트들에게 집과 땅을 빼앗기고 가족과 친구들을 잃은 것도 모자라, 존재를 부정당한 채 매일을 이어가야 하는 이들에게는 살아있는 것조차 저항이 된다. 일상적인 폭력과 억압, 차별에서 자라난 절망과 무기력 사이에서 희망을 붙잡고 투쟁하는 팔레스타인 민중을 생각하면 찢어지는 나의 마음에서도 존경과 경이가 생긴다.
점령과 식민화의 아픔을 우리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세계 열강의 제국주의, 식민주의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도 우리 곁에 있는 현실이다. 그 생생한 고통과 설움을 기억하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는 한, 강정과 성주에 주민들을 짓밟고 세워진 군사시설이 있는 한,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도래하지 않는 한.

우리와 다른 점이라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점령은 매 순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일상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하루아침에 살던 집에서 쫓겨나 강제철거된 집 위에 유대인 불법정착촌이 세워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8미터 높이의 분리장벽에 가로막혀 불과 몇 킬로미터 거리의 지역에 가기 위해 통행증을 받아야 하고 검문소에서 모욕적인 처사를 견뎌야 한다.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어린이를 포함한 수감자들이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고 천장 없는 감옥이라 부르는 가자지구에서 나가지도 못한 채 폭격을 당해야 한다.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긴 채 난민의 신분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일상 속에서도 올리브 나무를 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다. 이는 점령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저항의 의지이다. 이들이 오늘도 땅에 심은 작은 묘목이 자라 팔레스타인 해방의 열매를 어서 맺을 수 있도록, 점령국 이스라엘에 저항하는 투쟁에 연대하는 의지를 또다시 굳게 다진다.

새라 (팔레스타인평화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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