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잠들지 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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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의붓아버지로부터 12여 년 동안 지속적인 성폭력 피해를 입었던 피해자가 그녀의 남자친구와 함께 가해자를 살해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일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친족성폭력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고 1994년 제정된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상 ‘친족성폭력’을 명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2014 년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통계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아는 사람인 경우는 81%이고, 이 중 친족을 포함한 친인척으로부터 피해를 경험한 경우는 13.9%에 달한다. 그리고 같은 해 대검찰청이 발표한 ‘친족성폭력 사범 접수 및 처리 현황’에 의하면 2003년 184건이었던 친족성폭력 피해 신고 건수는 2013년 502건으로 10년 동안 2.6배 증가했다. 피해를 경험하고도 신고하지 않는 암수(暗數)율이 높은 성폭력 피해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실제 친족성폭력 피해는 더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친족성폭력은 개인에게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가족’이 폭력의 장소가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가해자는 끊임없이 ‘우리둘만의 비밀이다’, ‘너만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이 사실을 다른 가족이 알면 무척 힘들어할 것이다’라며 피해자 개인에게 피해의 책임을 감당하도록 강요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메시지는 피해자에게 가족이 해체되거나 자신이 버림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 다른 비가해 가족이 겪게 될 심리적 충격을 확신하게 만들고, 피해 사실은 더욱 은폐된다. 성폭력을 낯선 사람으로부터 겪는 ‘특별한 경험’으로 호명하는 우리 사회에서 ‘더 특별한 경험’으로 여겨지는 친족성폭력 피해는 친족성폭력의 실재를 믿고 싶어 하지 않는 사회적 인식에 의해 철저히 배제되고 소외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성폭력피해 생존자의 ‘말하기’는 우리 사회가 듣지 않으려 하는 성폭력 피해를 특정한 이미지로 고정하지 않으면서 우리 눈에 보이도록 한다. 동시에 성폭력 피해 경험이 씻을 수 없는 고통의 기억이고 그렇기에 피해자는 위축되어 있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통념을 깨뜨리고, 피해를 재해석하며 살아가고 있는 생존자(survivor)로 재위치한다. 불편하고 외면하고 싶은 경험을 묻어두지 않고, 고통스럽지만 꺼내어 들여다보는 과정은 ‘기억’함으로써 성폭력을 방조하고 조장하는 ‘거대한 침묵’에 맞서도록 한다. 기억한다는 것은, 잊지 않겠다는 것은 그래서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다.

란 (한국성폭력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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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눈물의 길: 타이베이, 여성,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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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외신을 통해, 대만의 수도 타이베이 중심가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단지 앞 도로를 2만여 명의 사람들이 점거해 누웠다는 뉴스를 접했다. 그들은 타이베이 시의 주택 가격 폭등과 정부의 주거정책에 항의하며, 가장 비싼 땅을 점거하고 누워 하룻밤을
보냈다. ‘새둥지 운동(巢運·차오윈)’이라고 불리는 연대시위는 지난 1989년 무주택자 5만 명이 거리시위에 나선 이후 25년 만에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대만도 한국만큼 도시개발의 폭력과 주택가격의 폭등 등 땅과 집을 둘러싼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
는 사건이었다.

< 눈물의 길 : 타이베이, 여성, 집 >은 대만 정부의 도시개발과 강제철거로 ‘추방’당하는 각기 다른 마을들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들은 그들의 마을이 파괴되는 도시개발을 ‘인간이 만든 재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인간이 만든 재해’에 대해, 정부와 건설사와 법원은 ‘사유지에 관한 분쟁’이라거나 ‘그 마을이 무허가이고 불법’이라며, 책임을 주민들에게 떠넘긴다. 대만이나 한국이나 도시개발과 강제퇴거로 인한 폭력이 법의 보호 아래 이루어지고 있고, 저항하는 우리가 불법이 되거나 혹은 용산에서처럼 테러리스트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모든 개발사업들에서 주민들은 ‘사적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공공의 외면’ 아래 쫓겨나거나, 반대로 ‘공적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공공의 이익’에 반한다며 쫓겨난다. 단순히 집 하나 부수고 짓는 것이 아닌 마을을 부수고 짓는 개발사업이, 때로는 ‘사적 이익’을 위해, 때로는 ‘공적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즉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추진되는 데, 그 끝은 항상 ‘도대체 누구를 위한 개발이냐!’며 절규하며 끌려나오거나, 쫓겨나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가득하기만 하다. 국제행사, 국격향상, 도시환경 정비, 주거환경 개선, 주택공급 확대…. 온갖 목적의 수식어들을 가져다 붙여놓아도, 결국 파괴되는 공동체와 개인의 삶이, 동일한 수준으로 재정착될 수 없다면 그것은 가진 자들만을 위한 개발에 불과하다.

시공간을 넘나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아직 용산을 어제의 한 사건으로 잊을 수만은 없다. 여전히 주상복합이 들어서는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서 삶이 송두리째 빼앗긴 이들의 몸부림이 이어지고 있고, 계약갱신 거부나 전월세 폭등, ‘빚내서 집 사라’는 강요된 이름으로 우리의 주거권이 빼앗기고 있고, 추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저항하고 연대하는 우리가 아닌, 법 집행이라는 이름으로 대책 없이 남발되는 강제퇴거가 ‘불법’이고, 주거권의 박탈이 주민들에 대한 ‘테러’임을 밝혀야 한다. 주거권을 명문화하는 ‘강제퇴거금지법’ 제정이 필요한 이유이다.

이원호(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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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불안한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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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의 수배, 3년의 구속. 그리고 옥중 편지를 이유로 3년 만기 출소예정일에 검찰 기소. 또 구속. 옥중편지가 이적표현물이라는 이유같지 않은 이유로 또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된 기가 막힌 이야기. 윤기진에 대해 한국의 공안기관은 왜 그토록 잔인한가.

국가안보라는 미명으로 개인의 삶을 완전히 구속해 버리는 끔찍한 법이 국가보안법이다. 장기간의 내사와 수사를 이유로 윤기진과 그의 가족, 친지, 친구들은 모두 감시의 대상이었을 것이며 손쉽게 도청, 감청을 통해, 편지글과 기고문을 통해, 그리고 압수수색을 통해 언제든 잡아 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통일운동가’를 자처하는 것은 감시의 삶을, 창살 없는 감옥에서의 삶을 각오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감옥에서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국가의 안보’를 위협한다는 공안기관의 히스테리적 망상이 우리 사회의 ‘인권과 표현의 자유’를 질식시키고 있다.

2008년 이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입건된 경우의 80% 이상이 국가보안법 7조 위반이다. 제7조는 국가보안법에서 가장 문제가 심각한 조항으로, 헌법에서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조항이기 때문에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이 우선적으로 폐지할 것을 권고하는 조항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이전에는 문제를 삼지 않았던 사이버 상에서의 자유로운 의견 소통 행위에 대해 공안기관이 국가보안법의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북한의 게시물을 리트윗한 것을 처벌할 수 있는 법이 국가보안법이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 공안기관은 신매카시즘 분위기를 사회에 퍼뜨렸다. 소위 종북몰이. 과거 독재 시절 빨갱이 사냥에 버금가는 종북몰이로 우리 사회는 실체 없는 이념 전쟁이 한창이다. ‘종북이면 유죄고 반북이면 무죄’인 유치한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 개인의 정치적 의견이 정권의 견해, 또는 다수의 견해와 다르다는 이유로 처벌 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의 문제를 직시하자.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 현존하고 명백한 위험성’, ‘급박한 위험성’ 같은 법해석의 적용 없이 남용되는 국가보안법을 언제까지 용인할 것인가.

윤기진의 부인인 황선 씨는 통일토크콘서트에서 통일과 관련한 자신의 견해를 말했다는 이유로 현재 구속, 수감 중이다. 이 가족의 불행은 이 가족만의 책임이 아니다. 국가보안법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한 가치를 더 이상 짓밟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
의 과제이다.

윤지혜(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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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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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와 뉴스라고 하는 제도는 체제가 무엇이건 간에 존재한다. 정치적으로 완고한 독재와 통제가 자행되더라도, 뉴스의 시스템만은 돌아간다. 물론, 세상 모든 뉴스는 형식과 내용의 긴장감 속에서 완성된다. 무엇을 전할 것이냐, 그 판단을 누가 어떻게 할 것이냐 그리고 표현 이후 발생하는 문제들에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 뉴스의 완성도와 뉴스라고 하는 제도의 강건함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2012>, 독일에서 만들어진 이 짧은 우화는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뉴스의 속성을 날카롭게 째고 든다. 대중에게 무엇을 알리는 행위로서의 뉴스와 그 제도가 궁극적으로 세상과 어떤 호응관계를 갖는지 짧지만, 강렬하게 성찰토록 한다. 그리고 그 성찰은 놀라울 만큼 우리의 현실과 겹쳐진다. 뉴스와 정치권력, 제도로서의 뉴스가 사회를 어떻게 타락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다.

‘세상을 보는 창’이란 말은 뉴스를 설명하는 가장 흔한 규정이면서 동시에 가장 적확한 규정이기도 하다. 불가피하게 혹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은 뉴스라고 하는 틀을 통해 세상을 더듬을 수밖에 없고, 뉴스가 어떤 세상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어떤 문제들은 존재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 차이들은 사소한 찰나일 수 있고 우연적인 누적일 수 있지만, 뉴스가 끊어지지 않고 유지되는 지속성의 산물이란 점에서 결국 세상의 풍경을 바꾼다. 종편 이후의 한국 정치 뉴스가 어디에 와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쉽다.

무능한 국가가 단 한 명도 제대로 구조하지 못한 채 침몰하고, 대통령을 둘러싼 비선 실세 논란과 불법정치자금 의혹이 발발해도, 사회적 균열이 첨예해지지 않는 이상한 침묵의 사회. 어쩌면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살고 있는 세상이야말로 <2012>의 사회에서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는 그들이 사는 세상일지도 모른다.

김완(미디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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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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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3월 9일 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델라웨어 카운티 미디어 가에 위치한 FBI 지국 사무실에 있던 비밀문서가 도난당했다. 그리고 며칠 뒤 언론사들은 FBI의 비밀 사찰과 관련한 내부 문건들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반전운동, 흑인인권운동 등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FBI사무실을 침탈했다는 것 자체로도 놀랍지만 이들이 공개한 문서를 통해서 FBI의 비밀사찰과 공작이 사실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데 의미가 크다. 이 문서로 시작해서 이후 밝혀진 일명 ‘대첩보작전(코인텔프로Cointelpro)’은 미연방수사국이 미국 내부의 저항 정치 조직을 조사하여 파괴하려는 목적을 가진 프로그램이다. 그중 하나인 ‘샴록(Shamrock)’ 작전은 1950년대, 60년대 웨스턴 유니온과 전기방송회사, 또는 국제 통신전화회사로 전달되는 전보를 중간에 가로채는 것이었고, ‘미너렛(Minaret)’ 작전은 외국인 6,000명과 2,000여 개 단체 및 미국인들을 도청했으며, ‘카오스(Chaos)’ 작전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학생들을 교란시키기 위해 시행되었다.

의심스러웠던 FBI의 감시와 사찰, 공작이 사실로 밝혀지기는 했지만 이런 일들이 20년이나 가능했던 것은 국가안전보장이라는 목적으로 CIA와 같은 정보기관이 만들어지고 ‘스미스법’과 같은 법률이 만들어지면서 비밀첩보활동은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국가안전’을 위해서 ‘전복세력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적에 대한 첩보활동’은 ‘국가기밀활동’이기 때문에 국회의원이나 시민들의 감시조차 예외가 되고 심지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이런 비밀스런 활동이 용인되는 이유는 ‘안전사회’를 추구하게 하는 불안과 의심 때문이다. 8명의 ‘도둑’들에 의해 FBI의 비밀 첩보활동이 밝혀졌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감시는 더욱 체계적이고, 일상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히 감시를 의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CIA와 NSA에서 일했던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에서 알 수 있듯이 PRISM 프로그램으로 전 세계의 일반인들의 통화기록과 인터넷 사용정보 등의 개인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수집했다. 이 역시 9.11 사건 이후 미국 사회에 급증한 테러에 대한 공포를 기반으로 감시가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감시사회’는 미국만의 일은 아니다. 몇 년 새 급증한 집회 현장에서의 채증카메라와 곳곳에 설치된 CCTV를 비롯해 카카오톡과 같은 메신저와 휴대전화 압수수색, 인터넷과 트위터 게시글에 대한 검열 등 경찰, 국정원 같은 공안기구는 우리의 일상을 마음대로 들여다볼 수 있다. 이런 감시의 기술은 점점 진화하고 있어 DNA와 같은 생체정보를 수집 및 분석하고 안면인식, 차량추적 등의 프로그램이 개발되고 있다. 공안기구는 본래 권력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 감시와 통제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 ‘국가의 안전보장’이라는 이유를 표면적으로 내세우지만 실제로 그들이 해온 역할은 권력을 유지하고 비판을 잠재우며 사회를 통제하는 일이었다. 비판자에 대한 당장의 처벌도 문제이지만 ‘위축효과’를 통해 미래까지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감시와 통제가 우리에게 안전한 삶을 안겨주지 않는다. 안전은 우리가 자유롭게 발언하면서 민주적 참여가 이루어질 때, 사회적 관계와 신뢰가 단단할 때, 경제적 이유나 정치적 이유로 삶이 위축되지 않을 때 가능하다.

 

랑희(인권단체연석회의 공권력감시대응팀, 인권운동공간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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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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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남자친구가 안 생길까?”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답한다. “예뻐져야 한다”고. 넘쳐나는 성형·다이어트 광고와 미디어에서 끊임없이 양산하는 분절된 신체에 대한 세세한 기준들. 이처럼 일상적으로 외모평가가 만연한 사회에서 여성들이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기란 쉽지 않다.

“딸아 걱정 마. 이제 시집갈 수 있을 거야.”, “영화처럼 살고 싶니?”와 같은 인터넷이나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성형외과 광고 문구들은 모두 “외모로 당신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형·다이어트 광고에서는 실재하기 힘든 ‘이상향’의 몸을 기준으로 제시하고 이 기준을 벗어나는 여성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부정하게 만든다. 이러한 ‘이상향’의 기준은 매우 협소하기에 대부분의 여성들은 이에 속하지 못한다. 속하더라도 언젠가 이 기준에서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이러한 광고들은 언젠가 한 번쯤 들었던 외모에 대한 평가 발언, 타인의 외모와 비교 당했던 상황 등을 떠올리게 하며 몸에 대한 ‘수치심’을 자극하고 자신의 몸에 대한 혐오를 재생산하게 한다. 연애, 결혼, 취업 등 삶의 모든 순간에 외모가 개인의 ‘경쟁력’으로 평가받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외모 꾸미기의 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소비자원이 2014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성형시장의 규모는 7조 5000억 원대이며, 이는 국제 성형시장 규모의 1/3 수준이다. 국내 섭식장애 환자는 2012년 기준 13,002명으로 5년 새 18.8% 증가했다. 이 가운데 여성이 남성보다 약 4배 더 많을 정도로 여성들은 사회의 외모 기준에 맞추려는 실천 때문에 아픈 상황이다. 다이어트·성형 등 미용 산업은 방대해지고 외모 꾸미기는 ‘일상의 문화’가 되어 누구든 노력하면 외모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이 보편화 되었다. 미디어에서 수없이 재현하는 마르’고 ‘예쁜’ 여성의 이미지, 그리고 외모와 연결되어 차별적으로 재현되는 ‘예쁜=착한 여성’이라는 이미지는 현실에 그대로 반영되어 외모는 곧 ‘인격’으로 평가되기에 이른다. 소위 ‘뚱뚱한 몸’은 ‘게으름’으로, ‘날씬하고 예쁜 몸’은 ‘부지런함과 착한’ 이미지로 연결되어 이상적인 신체조건에 자신의 몸을 맞추는 것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들은 ‘타인이 보는 자신의 몸’과 ‘내가 바라보는 몸’ 사이에서 갈등한다. 몸매 관리를 하지 않으면 ‘자기관리를 못하는 게으른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고, ‘예의가 없는 사람’으로 평가받는 상황에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타인이 보는 시선에서 과연 나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영화 속에서 자신의 몸에 대한 타인의 평가와 외모지상주의에 질문을 던지고자 했던 아름은 “못생기고 뚱뚱한 나를 찍는 것에 고통스러움”을 느낀다. 외모지상주의에 자신이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오히려 아름은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모순과 맞닥뜨리게 된다. 결국 외모에 대한 사회적 시선에서 자유로워져야한다는 강박과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 모두 자신의 모습이며, 사회의 욕망 안에서 스스로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여기에서 다시 사회에 질문을 던진다. 개인이 사회의 외모 꾸미기에서 자유로워지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개인은 이러한 문화에 자유로울 수 있는가? 타인의 시선, 사회적 기준에 갇히지 않는 외모 꾸미기란 가능한가? 하지만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신과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고 싶은 개인의 욕망을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될 것이다. 외모지상주의에 균열내기 위한 소소한 제안을 해본다. 이를테면 타인과 자신의 외모에 대해 평가하지 않는 ‘외모에 대해 일주일 동안 말하지 않기’와 같은 캠페인. 이러한 작은 실천 속에서 외모지상주의에 균열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쎄러 (한국여성민우회 여성건강팀)

32인권해설

인권해설: 게이비 베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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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소수자운동의 역사는 20년을 넘었다. 짧지 않은 이 시간 동안 성소수자들은 “나 여기 있다”고 외치는 싸움을 해왔고, 이제는 딴나라 얘기인 것만 같았던, 동성 결혼의 법제화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김조광수-김승환 부부는 2013년 9월 공개결혼식을 열고, 그해 12월에 서대문구청에 혼인신고서를 제출하였으나 해당 구청은 이 혼인신고를 받아줄 리 만무했다. 이에 동성 부부 혼인신고 불수리 처분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였고, 2015년 이에 대한 첫 심리가 열렸다. 심리 바로 10여 일 전에 미국에서는 연방대법원의 동성 결혼 합법화 결정이 있었다.

한국의 동성 결혼 투쟁은 힘겨운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지만 반-성소수자 운동은 “동성애, 동성결혼이 나라와 가족을 망칠 것”이라며 분주하게 선동하고 있다. 이들은 동성 부부의 자녀들이 “부모가 동성애자여서 우리는 고통받았다”고 말하는 서구의 사례들을 끌어와 동성 결혼 반대 레퍼토리로 활용하고 있다. 아직 자녀는커녕 동성 결혼조차 먼 미래 같기만 한 지금의 한국에서 말이다.

세계 어디에서나 동성 결혼의 추이, 동성 부부의 행보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뜨거운 이슈이다. 동성 부부들은 자녀들이 엇나가거나 문제를 일으켰을 때, 그들이 특별한 부모라는 점을 흠 잡힐까 걱정한다. 자녀들에게 “너희는 특별하다, 남들과 같지 않다, 남들의 시선이 힘들 수 있다”고 주의를 주기도 한다. ‘보통의’ 아이들이 부모를 불신하거나 문제를 일으켰을 때에는 그들 부모의 ‘이성애’를 흠잡지 않는데 말이다.

동성 부부의 자녀들은 미디어의 관심, 정치적 논쟁에 노출되어 살아간다. 그들은 실제로 특별하게 성장할 수도 있지만, 특별하거나 평범하다는 사실이 그들의 성장을 막을 수는 없다. 정치적인 문제를 떠나, 부모와 가족은 그들이 뿌리내린 토양이자 삶의 조건이고 이 땅의 모든 자녀들이 겪고 있는 고통, 행복, 도전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정현희 (가족구성권연구모임)

29인권해설

인권해설: 깊고 오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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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한 뉴스를 보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40년간 함께 살아 온 여고 동창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안 60대 여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친구’가 암 판정을 받고 입원한 이후 ‘친구’의 친척이 아파트 열쇠를 바꾸었고, 새로 집을 구해 살다 아파트에서 투신해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두 사람의 깊고 오랜 우정으로 비춰졌던 이 사건에서, 우린 이 관계에 제대로 이름붙이고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제대로 이름붙이지 못한 사랑과 죽음. 이 두 여성의 삶은 부부, 사랑과 같은 평범한 단어로도 불리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또 다른 레즈비언의 사례도 있다. “작년 초에 내 파트너가 갑작스레 병원에 실려가 입원을 하게 되었다. 한밤중에 입원 동의서를 쓰려고 했는데, 우리가 가족 이상의 사이라고 말을 해도 병원 측에서는 둘은 친구사이여서 사인을 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어쩔 수 없이 친한 게이 친구에게 연락을 해서 그가 남편인 것처럼 말을 해서 입원을 할 수 있었던 웃지 못할 일이 있었다.”1)

「한국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에 따르면, 설문조사에 참여한 성소수자의 67.5%(2,132명)가 파트너와의 삶에서 필요한 제도로 ‘수술 동의 등 의료 과정에서 가족으로서 권리 행사’를 꼽았다. 이것은 그/녀가 아프고 병들었을 때, 친구가 아닌 가족, 연인, 부부라는 이름으로 곁을 지키려는 투쟁과도 같다. 이 영화는 현실이며,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이름 붙여지지 못한 사람과 관계에 이름을 붙여주려는 시도이다.

 

정현희 (가족구성권연구모임)

 

1)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동성애자 가족구성권자료집』, 2006

33인권해설

인권해설: 태양이 떨어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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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예상하고 있겠지만 이 다큐멘터리에서 ‘태양’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을 일컫는 말이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피해자들은 하나 같이 당시 상황을 ‘섬광’, ‘뜨거운 불빛’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는 태양이란 표현이 비유적인 표현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태양의 표면 온도는 섭씨 6천 도가 되지 않는 데 비해,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 중심부 온도는 100만 도 이상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오히려 가벼운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뜨거운 열기와 거대한 폭풍, 이후 방사능 낙진으로 인한 피해는 인류가 경험한 그 어떤 것보다 잔혹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를 경험한 우리 국민들에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이중적이다. 원폭 투하가 세계 2차 대전을 끝냈다거나 전쟁에 책임이 있는 일본이 ‘피해자 코스프레(흉내)’를 하고 있다는 비판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외국인 피해자 중에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이 당시 조선인들이었으며, 이들 피해자와 2세, 3세 등 후손들이 지금도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피해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사회적 약자들’이다. 제국주의가 창궐하던 당시 대동아공영권을 앞세운 전쟁의 피해자는 일본과 조선의 민초들이었다. 이들과 제국주의를 구별해 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역사 인식은 한걸음도 나가기 힘들 것이다.

또 다른 의미로 ‘태양’은 거대하고 무한한 힘의 상징이기도 하다. 아버지 태양신 헬리오스가 몰던 ‘태양의 마차’를 몰다가 추락해 죽은 파에톤의 신화처럼,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을지라도 이 거대한 힘이 갖고 있는 유혹은 강하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핵무기 개발 논의가 대표적이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 벌써 70년. 그 사이 폭탄은 수천 배 이상 강해졌고, 지구상에서 2천여 차례의 핵무기 실험이 있었다. 그때마다 많은 생명은 자신의 존재를 위협받았고, 불안에 떨었다. 다행히 핵무기 개발 경쟁이 주춤해지면서 인류가 공멸하는 사태를 막았지만, 그 상황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핵무기를 단지 게임의 아이템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70년 전 낡은 핵무기가 빚은 참상을 꼭 한 번 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이 원하는 세상인지 묻고 싶다.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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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나가!

인권해설

<끝없는 외침, “Get Out!”>

끝없이 “나가!”라고 외치지만 그들은 꿈쩍도 않는다. 한 번 안방을 내어주면 그것으로 끝이다. 우리의 의지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것! 여기에 인권의 근본 문제가 있다.

영화 <나가!>는 대만의 란위 지역과 난티엔 지역의 주민 운동을 교차시키며 보여준다. 란위는 30년째 “나가!”를 외치는 중이고 난티엔은 이제 막 “나가!”를 외치기 시작했다.

생각건대, 대만 정부가 1982년 란위에 핵폐기물을 반입하면서 ‘제도적 근거’를 충분히 마련하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란위 주민의 30년 외침은 서서히 힘을 발휘했다. 2000년대 들어서 대만 정부는 란위의 핵폐기물 반입을 토지 임대로 변경하면서 한 발 물러섰고, 2010년대 들어서 새로운 핵폐기장 부지로 난티엔을 선정했다. 결국 란위에서 난티엔으로 그들은 ‘이동’할 뿐이었다. 이러한 현실 앞에 “나가!”를 외쳐 온 란위의 반핵 활동가도 자괴감을 느낀다.

한국에서도 2005년 주민투표로 경주 핵폐기장이 결정되기까지 20년간 여러 곳에서 ‘그들’과 엄청난 충돌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끝없는 ‘이동’이었을 뿐이다. 특히, 2005년의 주민투표는 ‘제도적 근거’를 부여하면서 그들에게 견고한 안방을 마련해준 쾌거였다. 대만 정부도 란위의 실패를 교훈삼아 난티엔에서 주민투표라는 제도적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혹시나 반대표가 많을까봐 현 단위 투표를 향 단위 투표로 축소하는 법 개정의 치밀함까지 보여준다.

난티엔 마을의 지도자인 ‘바오레이스 지아나자판’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이 정부의 50억 달러 보상금에 홀리는 모습을 안타까워한다. 또 핵폐기물에 대한 올바른 정보가 제공되지 않는 것을 우려한다. 2005년 경주의 핵폐기장 유치 찬반 주민투표가 꼭 그러했다. 그때 우리가 들은 유치 주장은 이랬다. “중저준위 핵폐기물은 작업자가 사용한 신발, 옷가지 등이다. 집 앞마당에 묻어도 안전하지만 국민들이 불안해 하기 때문에 별도의 처분장을 만드는 것뿐이다.” 그리고 수천억 원의 지원금과 지역발전 청사진이 투표 기간 내내 마을과 마을, 사람과 사람 사이를 침 흘리며 핥고 다녔다.

이러한 현상을 란위의 반핵 활동가인 시난 마페이푸 씨는 “복지식민주의”라고 정의한다. 생소한 용어였는데 생각해보니 적확한 표현이었다. 국가가 국민을 잘살게 해주는 것은 당연한 의무인데, 소외 지역의 사람들은 항상 정부와 거래를 해야만 ‘개발’이 주어졌다. 핵폐기물을 받아야 개발이 주어진다. 도시가 토해내는 배설물을 받아들여야 개발이 함께 주어지는 식이다.

바오레이스 지아나자판 할머니는 핵폐기물이 난티엔에 들어올 경우 목숨이 다할 때까지 투쟁 의지를 밝힌다. “제가 죽으면 사람들이 정부의 횡포에 죽었단 걸 알게 되겠죠.” 아픈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나가!>의 영상은 무척 따뜻하다. “나가!”를 외치는 이들의 밝은 에너지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대만 주민들의 투쟁을 보고 있노라면 샘이 나기도 한다.

란위와 난티엔의 주민이 모두 승리한다면 ‘그들’은 복지식민주의에 감사할 더 소외된 지역을 찾아서 ‘이동’할 것이다. <나가!>는 주민들의 계속되는 싸움을 남겨둔 채 막을 내린다. “핵폐기물은 심각한 문제예요.” 영화 속 마지막 외침이다.

 

이상홍 (경주환경운동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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