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 편지] 보름달은 생각보다 말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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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울림에 편지를 올리는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고운입니다. 한가위 보름달 아래서 몇 자를 적어 보아요.

벌써 추석이 지나가고 있다니, 올해는 어떻게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갔을까요. 25회 자원활동가들도 한참 전에 만난 것 같은데 이제야 일 년이 되어가고 있네요. 봄에 차별금지법 제정 쟁취 농성장을 왔다갔다 했던 것도 오래 전 같은데 아직 서너 달 지났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25회 서울인권영화제 개막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 믿기지가 않습니다!

사실 서인영은 어떤 면에서는 조금 작아졌어요. 지난 달부터는 상임활동가를 포함해 여덟 명이 25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외롭고 어려운 순간도, 많긴 합니다. 이번 태풍 때 사무실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을 땐 으앙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어요. 항상 “괜찮아요”를 입에 달고 살지만 아직도 좌충우돌 미숙한 점이 너무 많은 저에게 부담이 큰 것도 사실이네요. 그러다 보니 해야 하는 것들, 더 깊이 살펴봐야 하는 것들을 자꾸 놓쳐서 “죄송해요”라는 말도 붙이고 살고 있습니다. 저는 “죄송해요”보다는 “감사해요”라는 말을 더 좋아하는데 말입니다.

사진1. 태풍 힌남노가 온 날, 사무실 천장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모습. 천장의 나무 타일이 비에 젖어있다.

그래도 모두들 일당백을 하며, 서로를 다독거리면서 어느덧 한가위 보름달을 보고 있어요. 추석 날 저녁에도 사무실에 나와서 동고동락하는 한국농인LGBT의 보석 활동가, 그리고 번역이며 자막작업이며 손가락에 불이 나는 우리 자원활동가 요다님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 편이 짠하기도 합니다. 요다님이 예쁘게 담아오신 송편과 전을 보자니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면서 눈가가 시큰해지네요.

너무 말랑해질 때면 초심을 떠올려 봅니다. 실은 초심이라고 해봤자 별 거 없어요. 자원활동가로 처음 서인영에 발을 들였을 때는 ‘나는 영화도 좋아하고 인권도 좋아하니까 인권영화제가 딱이겠군’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상임활동가 제안을 받았을 땐 저도 ‘잘’ 쓰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냥 딱 그 정도였어요. 큰 포부라든가 하는 건 조금 쑥스럽지만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저의 초심도 나름 괜찮은 듯해요. 저는 좋아하는 일 아니면 못하거든요. 그리고 그 일이 내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일인 것은 행운이니까요. 최소한 세상을 망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요. 그래서 지치거나 외로울 때, 마음이 찡하고 눈물이 터질 때, 초심을 떠올려 봅니다. 사랑과 우정은 이긴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일은 사랑과 우정의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내가 오랫동안 좋아할 수 있는 일임을 잊지 말자고요. 억지 책임으로, 억지 노력으로 하지 말자고요. 그러면 너무 억울해지니까요. 

서울인권영화제는 조금 작아졌지만, 더 단단해지고 있습니다. 올해는 영화제 준비를 하며 ‘기틀 다지기 모임’도 진행이 되었는데요, 서인영에 다소 부족했던 조직의 기반을 좀 더 단단히 다지는 활동이었습니다. 25회 영화제가 끝나면 다시 이 활동에 집중할 예정이에요. 이는 초심을 다시 잡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초심은 첫 마음이 아니라, 어려울 때 떠올리는 마음인 것 같기도 해요. 좀 서툴어도, 사실 서툴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우리의 리듬으로 뚜벅뚜벅 서인영의 내일을 계속해서 열어보려고 합니다.

말만 많고 결론이 없는 편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어쨌거나 기쁠 때는 충분히 기뻐하고, 아플 때는 충분히 아파하고, 사랑할 때는 충분히 사랑하며 개막까지의 시간을 보내봐야겠습니다. 힘이 들 땐 오늘처럼 이렇게 수다도 떨어보고 그러면서요.

그럼, 우리 곧 만나요!

2022년 9월 한가위 밤,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고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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