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애프터 미투>

인권해설

청소년 시기에 나는 어딜 가도 청소년인 것을 들킬까 봐 두려웠다. 단순히 갈 수 없는 공간이 있다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미용실에 가서도 제 나이를 대강 짐작하며 대학 생활을 물어보는 미용사에게 알지도 못하는 과를 지어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교통카드를 찍으면 ‘청소년입니다’라고 울리는 기계음 역시 매번 늘 큰 것 같았다. 그 두려움이 어디에서 왔나 생각하면, 결국 사회가 이제껏 청소년을 어떻게 대해왔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청소년은 미성숙하고, 판단력이 부족하며, 불완전한 존재라는 통념 아래 놓여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아동·청소년의 삶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은 때로는 너무나 사소하고, 혹은 ‘어른이 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유예되고는 한다. 대학에 가기 위한 경쟁 위주의 모진 입시 과정은 물론이고, 생활 패턴, 개인의 욕구, 마음과 감정까지 쉽게 무시되거나 천편일률적으로 부모나 교사, 보호자에 의해 통제된다. 어린 사람의 삶은 누군가 통제하거나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는 믿음 속에서 청소년이 겪는 불평등이나 폭력이 말해지거나, 당장 해결을 요하는 사회적 문제로 호명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2018년부터 수많은 사건이 고발된 스쿨 미투는 학생들의 삶의 현주소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불평등한지 그대로 보여주었다. 스쿨 미투가 대중에게 많은 관심을 얻은 이후, 대다수의 비청소년 여성들은 자신이 학교에 다닐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며, 연대와 지지를 표했지요. 그렇다면 그 폭력은 왜 수십 년간 묵인되고 용인되다가 지금에 와서야 고발되었을까? 폭력의 역사는 앞서 폭력을 겪은 이들이 ‘말하지 않은’ 일이 아니라 ‘말할 수 없게’ 만든 사회적 구조에서 기인한다. 예나 지금이나 어린 사람이 삶에서 겪는 문제가 사회에서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스쿨 미투 운동은 폭력과 혐오로 얼룩져 있는 여학생들의 일상을 사회적 문제로써 호명했고, 그동안 무정치하고 수동적인 존재로만 여겨졌던 여성 청소년들이 ‘말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무력한 피해자”가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운동가”로서 거리로 나섰고 용기 있게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고발했다. 그리고 이러한 말하기들은 실제로 학교를 바꾸고, 사회를 바꾸는 변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스쿨 미투에 대한 말하기들은 많은 한계와 어려움을 디디며 이어지기도 했다. 가해 교사는 학교로 복직하고, 고발자로 나선 이들은 학교 내에서 다시 눈총과 백래시를 경험하고, 청소년을 피해자로만 호명하는 사회는 학교의 불평등이 아닌 교사 개인의 악마성에 주목했다. 특히 피해 사실을 고발한 청소년들은 고발 이후 자신의 말하기가 만들어낸 실질적 변화를 체감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피해 사실을 의심 받고 무정치와 “가만히 있으라.”는 ‘학생다움’을 요구받으며 고립되었다. 특히 스쿨 미투 운동을 이어온 당사자들을 운동가나 고발자가 아닌 피해자나 청소년으로만 보는 시각은 이들의 말하기가 이어져갈 수 있는 사회적 여건에 대한 논의를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사회에서는 흔히 청소년을 미래 그 자체라고 호명하거나, 청소년이 미래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강조하고는 한다. 학내 성폭력이 유구하게 일어났던 현실과 스쿨 미투 이후 고발자들이 겪었던 한계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발생해왔다. 하지만 더 나은 미래는, 더 나은 현재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차별을 금지하자는 당연하고 마땅한 이야기가 “나중에”라는 연호(連呼)로 유예되는 광경처럼, 청소년의 더 나은 삶이 미래로 유예되어온 것이다. 청소년이 당장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져야, 더 나은 미래 역시 상상할 수 있다. 더불어 청소년의 말하기나 행동들이 ‘미래’를 위한 일인 것만은 아니다. 청소년이 아닌 이들 역시 10년, 20년 후의 미래보다는 당장 잘 살자고 많은 일들을 고민하고 시도해보듯, 청소년 역시 마찬가지다. 청소년이 더 나은 미래 이전에 더 나은 현재에 살아남을 수 있으면 좋겠다.

유경(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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