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숨결> 프로그램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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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치아노, 루치아나, 혹은 루시. 그녀가 보여주는 삶의 궤적은 이탈리아의 최연장자 트랜스여성이라는 수식 너머로 흘러 넘친다. <기억의 숨결>은 루시가 풀어내는 90여 년의 기억을 그대로 담아내며, 그 이야기를 듣는 그녀 주변인들의 표정과 응답, 손짓 하나하나까지도 섬세하게 쫓아간다.

90년이 넘는 기억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울까. 루시가 그녀의 기억을 곱씹고 꺼내어 펼쳐놓음으로써 우리는 또 하나의 세계를 마주한다. 루시의 이야기는 정제되지 않은, 그녀 자신의 언어로 발화된다. 가장 사적이면서도 가장 생생한 이야기. <기억의 숨결>의 관객들은 그 이야기의 기록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한다. 

루시가 살아낸 생에는 성직자로부터의 성폭력, 성매매, 전쟁에서의 징병과 포로 생활 등의 기억들이 얽혀있다. 루시는 이 기억들을 ‘극복’했다고 하지 않는다. 이야기할 때마다 몸서리치기도 하며, 그 감정을 그대로 전한다. 루시의 이야기 속에는 루시가 어떻게 이러한 삶을 살아냈고 살아왔는지, 밀도 높은 역사가 담겨있다. 꾹 닫아놓아도 힘들 기억들을 루시는 어떻게 열어냈을까.

루시가 기억의 문을 여는 힘은 그녀 스스로의 강인함에도 있겠지만, 그녀 주위에서 삶을 함께하는 이들의 존재에 있기도 하다. 서로의 곁이 되어주며 돌봄을 나누는 이들의 목소리, 고갯짓 하나하나가 기억의 문을 여는 힘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을 보며 가만히 생각해본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마주하며 사는가. 96세 트랜스여성의 삶을 그려본 적이 있었던가. 노년 퀴어의 얼굴을, 삶을, 그 속의 기억을 그려본 적이 있었던가. 당사자도, 주변인도, 우리는 쉽사리 노년의 기억에 대해 떠올리기 어렵다.

그러나 기억의 숨결이 나에게서 너에게로 전해질 때, 그렇게 나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남아 흐를 때, 우리는 좀 더 미래의 기억에 대해 편안하게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힘이 되자고, 기억의 문을 여는 힘이 되어주자고 그려본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영화별 상영 시간표

스틸컷1. 다카우 포로수용소 행사의 초대장을 꺼내드는 루시. 백발의 머리에 얼굴에는 세월의 주름이 앉아있다.
  • 2022년 09월 10일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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