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줄거리
비혼, 직장인, 장애인, 배우, 활동가 등등 다양한 수식어를 가진 ‘민아’. ‘민아’는 친구의 결혼식 모임에서 길을 잃은 듯한 검정 치와와 ‘마루’를 만난다. 세상이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걱정을 가진 두 존재는 서로의 일상을 고요히 관찰하기 시작한다. 뿌연 안개 속에 머물던 이들은 돌봄과 기다림을 통해 서로를 발견한다.
프로그램 노트
당신은 누구를 돌보고 있으며, 누구에게 돌봄을 받고 있는가? 흔히 돌봄은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혜적인 행위로 간주된다. 특히 ‘장애인’이라는 이름은 늘 돌봄의 수혜자, 혹은 보호와 허락이 전제되어야만 하는 존재로 규정되어 왔다. <마루와 내 친구의 결혼식>은 비혼, 직장인, 활동가, 배우 등 수많은 수식어를 가졌으나 정작 자신의 목소리는 지워졌던 ‘민아’와, 집을 잃은 치와와 ‘마루’의 만남을 통해 돌봄에 대한 이 견고한 이분법을 뒤흔든다.
민아의 삶은 오랫동안 타인의 시선과 편의로 재단됐다. 긴 치마가 불편해도, 지퍼가 뒤에 달린 옷을 입기 힘들어도 그의 의견은 돌봄의 대상이라는 명분 아래 삭제되기 일쑤다. 결혼과 임신, 출산조차 허락을 구해야 하거나 금기시되는 영역으로 치부된다. ‘정상성’의 범주에서 민아는 언제나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한, 수동적인 존재였다.
그런 민아 앞에 나타난 마루는 거울 같은 존재다. 작고 연약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마루. 민아는 마루를 불쌍한 존재로 대하는 대신 마루 스스로의 용기를 기다리고, 느린 걸음에 보조를 맞춘다. 이 기다림의 시간은 민아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허락을 구해야만 했던 민아가 마루의 보호자이자 세계가 되어주는 순간, 돌봄의 권력관계는 무너진다.
영화는 마루가 민아의 보살핌 덕에 세상으로 첫발을 떼는 과정을 통해, 우리 모두 누군가를 돌보는 동시에 돌봄을 받는 존재임을 증명한다. 돌봄은 구속이 아니라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해방의 과정이다. 씩씩하게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의 뒷모습이 묻는다. 당신이 규정해 온 ‘정상성’의 경계는 어디냐고.
– 서울인권영화제 이음활동가 무이
감독
1988년 서울에서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영화 현장에서 연출팀과 편집팀으로 참여하며 20대를 보냈다. 2022년 군산으로 이주한 뒤, 장애인 커뮤니티와 유기된 동물들 등 한국 사회에서 ‘수치’의 영역으로 가두어 둔 존재, 공간들에 대해서, 그들의 역사와 그들을 위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
실제 환경 재앙을 다룬 2014년 단편 <풍진>은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으며, 이후 10여 년만에 발표한 단편 <마루와 내 친구의 결혼식>은 직접 설립한 제작사 “미묘”의 첫 작품이다.
인권해설
서로 돌보는 힘이 여는 관계, 끈질기게 다르게 살아가는 힘
장애여성인 나는 활동지원 530시간을 받으며 살아간다. 장애인 활동지원 제도가 없었던 시기엔 장애가 있는 엄마가 나와 쌍둥이 언니 둘을 주로 돌봤다. 때론 내가 언니를, 언니가 엄마를, 언니가 나를 돌보며 살아왔다. 장애인 활동지원서비스가 제도화되고 활동지원사로부터 지원을 받는 지금도, 장애가 있는 우리 세 모녀의 서로 돌보기는 끝날 줄 모른다.
측은하거나 안쓰럽게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우리에게 더 많은, 더 특별한 돌봄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렵게 사는 사람, 더 많은 세금을 들여 지원해야 하는 취약계층. 영화 속 민아도 이런 사회 속에서 자신의 ‘다름’을 특수하고 어려운 조건으로 인식하며 과연 본인이 마루를 잘 돌볼 수 있을까 우려하며 낮게 말한다. “나는 좀 다르잖아요.” 나 역시도 늘 남과 다른 내가 자격이 부족하고, 그래서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었다. 그러나 그 다름에서 새로운 의존과 돌봄의 정치가 피어난다. 사회는 장애와 질병이 있는 이들에게 누군가를 돌보는 역할을 기대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 취약함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감각을 익히고, 구불구불한 몸으로 서로 기대어 사는 방법을 개발한다. 의존하며 살아오는 삶을 부정하며 시민의 자격을 박탈당하는 자리에서, 상호의존과 서로돌봄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끈질기게 다르게 살아간다.
국가는 여전히 돌봄이 일부 취약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특수한 서비스라고 여긴다. 돌봄노동은 여전히 개인과 가족의 탓으로 넘겨지고 많은 여성이 감당하고 있다. 코로나19로 돌봄 공백과 위기를 말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 시기가 지나니 다시 돌봄에 대한 논의는 납작해진다. 공공성을 확대하고 민주적인 돌봄관계를 더 확대하며 서로를 지지하는 체계를 고민해야 함에도 2024년 4월 서울시 사회서비스원 설립 조례는 폐지되었고, 5월 23일 서울시는 사회서비스원을 해산했다. 공공돌봄을 권리로 보장하는 대신 예산 효율을 명분으로 돌봄을 중단시킨 퇴행이었다. 코로나19라는 재난 속에서 충분하진 않았지만, 사회서비스원은 사각지대의 중증장애인을 지원함으로써 공공돌봄의 중요성을 보여줬다. 더 확대되어 돌봄의 그늘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함에도 서울시는 최소한의 안전망마저 비용 논리로 해체하였다. 재난과 위기 속에서 증명되었던 공공돌봄의 가치는 여전히 부정당하고 있다.
장애여성인 나의 위치가 단지 돌봄이 필요한 사람으로만 남겨질 때 돌봄 노동의 의미가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다. 돌봄이 필요한 이들과 돌봄노동자의 권리 모두가 존중받지 못하고 함께 무너진다. 모두가 돌봄 받는 구조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보이지 않게 하는 사회, 돌봄 받는 것은 부끄러워해야 하는 사회, 돌봄 받을 자격을 묻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돌봄은 시장화되고 공공성은 흐려지며, 소비자로서의 선택만 남게 된다. 자본주의적 계산법으로 나뉘는 소비자가 아닌 시민으로서 돌봄을 말하고 싶다. 민주주의의 중요한 가치로, 모두에게 필요한 권리로, 돌봄을 국가가 이야기하길 바란다. 보호주의를 내세우며 시설에 가두는 돌봄 말고, 돌봄으로 더 자유롭고 평등해지고 싶다.
나는 돌봄을 받지 못 할 거라는 불안이 아닌 삶을 나눌 수 있고 갈등을 같이 겪어 나갈 수 있는, 서로의 존엄을 고민하는 관계를 맺어 가고 싶다. 하지만 이는 혼자의 바람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 결국 돌봄을 받는 이의 존엄과 돌봄노동자의 권리는 연결되어 있기에, 이 시작은 국가가 책임지는 단단한 공공돌봄 안에서 더 단단하게 만들어 갈 수 있다. 이 토대 위에서 서로 돌보는 힘이 여는 관계를 더 풍성하게 만들고, 끈질기게 다르게 살아가는 힘으로 시설을 폐쇄하고, 지역사회에서 울퉁불퉁, 구불구불 끝까지 살아가고 싶다.
– 진은선(장애여성공감 활동가)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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