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줄거리
성폭력 피해 생존자, 연대자들이 모여 예술-회복 공동체 ‘상-여자의 착지술’을 꾸렸다. 한데 모여 몸을 움직인다. 머물고 싶은 움직임에 원하는 만큼 머문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울고 웃는다. 다른 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열띠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매끄럽지만은 않다. 서운하고, 지치고, 막막하고.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서로를 놓지 못할까?
프로그램 노트
착지하기 위해선 착지할 땅이 필요하다. 떨어지더라도, 미끄러지더라도, 그곳에 닿을 수 있다는 믿음은 우리가 끝내 살아남도록 한다.
그리고 여기 그 땅을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미투 운동으로 각자의 분야에서 분투했던 경험을 안고,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회복을 돕기 위해 모인 이들이 매주 모여 무언가를 한다. 등을 대고 누워 천천히 손가락을 꼬물거리고, 다리를 들어보고, 그림을 그린다. 약을 “빼먹지 않고 먹었”는지, “배꼽 시계가 제때 울”리는지, 질문에 맞춰 몸을 움직인다.
이들의 시간은 느리고 꾸준하다. 카메라의 시선과 움직임 역시 그렇다. 영화는 인물들의 속도와 리듬과 방향을 따라 찬찬히 흐른다. 때로는 그 시간이 참 지난하기도 하다. 마음대로 잘 되지 않고, 원망과 미움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바로 그 지점에서 위안을 얻는다. 매끄럽기만 한 공동체도, 굴곡 없는 회복도 없다는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서로가 서로를 떠나지 않는 것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공동체의 안팎을 넘나들며 이렇게 울퉁불퉁한 “능선”을 담는다. 함께 움직이고 기다리며 그 시간을 기록한다. 관객 또한 미투 ‘이후’의 시간을 다시 현재로 불러오게끔.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착지할 곳은 어디일까. 영화는 묻게 한다. 성폭력에 맞서 분투하듯 청소를 하고, 바깥에 나가고, 장을 보는 일상에서 분투하는 사람의 곁이 아니겠느냐고. 당신의 곁에서 함께 싸우겠다는 다짐은 그런 것이다.
–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고운
감독
마민지는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한국의 감독이자 작가로 퀴어·페미니스트·계급 의식에 대한 시선을 결합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이분법적 범주에 저항하며, 개인적인 이야기와 정치적인 서사를 엮어 정체성과 역사의 다층적인 복합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또한 미시사와 거시사를 교차시킴으로써, 주류 담론에서 간과되는 미묘한 결들을 포착하는 영화를 만들고 글을 쓴다.
장편 데뷔작 <버블 패밀리>(한국/핀란드)는 EBS국제다큐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으며, 토론토 릴 아시안 영화제에서 특별언급 되었다. 또한 핀란드 Yle와 일본 NHK World에서 방영된 바 있다. 두 번째 장편 영화 <착지연습>은 2025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월드프리미어로 상영되었다. 차기작 <나의 두 번째 가족>은 Chicken & Egg Pictures 제작지원을 받았으며, 미국 Uniondocs Summer Lab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인권해설
<착지연습>은 #OO계_내_해시태그와 #미투운동이 휩쓸었던 2016년부터 2019년, 그 후의 이야기다. 폭풍 같은 피해 말하기, 파도 같은 릴레이 해시태그는 수면 아래 잠자코 있던 이야기들을 밀어 올렸다. 말하기는 큰 힘으로 일렁였는데 사회 관습과 규범은 쉽게 박살 나지가 않았다. 피해자들이 힘써 말하는 동안 백래시는 노골적으로 세를 불렸다.
2020년 서울 합정동 댄서스라운지에 자청, 늘보, 늘, 라무, 구구, 탁이 모였다. 성폭력 생존자와 연대자인 각 분야의 예술인들. ‘상-여자의 착지술’ 이라고 이름도 지은 이들은 각자의 예술 분야를 살려 생존자를 위한 회복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공간을 내놓은 늘보는 말한다. 왜 생존자를 위한 회복 프로그램이 시스템으로 존재하지 않냐고.
사실 여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치유회복프로그램이 있다. 법무부 범죄피해자보호기금과 복권기금에서 나온 재원으로 현재 성평등가족부가 관할하는 예산에 편성되어 있다. 전국 성폭력상담소 같은 곳에서 치유회복프로그램 다양한 내용을 살펴보고 참여할 수 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이 예산을 대폭 깎았다. 절반이 줄었다. 장소도 구할 수 없어 곳곳마다 다니며 사정하고, 간식도 쪼개가며 먹게 됐다. 치유 회복 예산은 삭감하고 ‘고위험군 범죄자 엄벌’하겠다는 정치는 위험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불평등에 맞서는 대안적인 힘은 깎아내고 자른다.
‘상-여자의 착지술’은 자생적으로 활동한다. 자발적으로 대안 공간을 만든다. 제도권에 대한 대안이 된다. 상-여자답게, 착지하는 방법이다. 상-여자의 착지술의 회복 프로그램은 어떨까? 러닝타임 내내 강렬한 것은 무엇보다 상호작용이다. 바닥을 기어서 옆 사람에게 가고, 손을 뻗고, 서로 닿고 잡고, 몸 한쪽이 연결된 상태에서 뒤집어 비틀며 같이 일어난다. 프로그램 기획자와 진행자, 팀원들은 무엇이 어떤 이에게 불편하지 않을지 생각하고 점검한다. 안내는 더 상세하고 친근해진다. 그 결과 상-여자의 회복프로그램은 참여자들의 감정과 몸을 건드린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던 이는 호흡이 가빠지고, 다른 장소에서 멈추어 쉰다.
<착지연습>은 상-여자 팀 중 생존자와 연대자 사이, 생존자와 생존자 사이의 미묘한 긴장과 차이를 차분하게 담고 끝까지 희미한 선을 따라간다. 한 구성원이 마음과 몸을 털썩 멈춰 세우자 다른 구성원들은 충격과 고통을 같이 전달받는다. 또 다른 구성원은 팀 활동을 중단했다. 그가 회복하려는 일상의 리듬을 남은 구성원들은 알고 응원한다.
결국 여성폭력이 파괴하려는 것이 무엇일까. 안전한 공간, 적정한 거리, 존중하는 말과 서로를 보는 눈, 참여하는 의사결정-과정, 역량을 발휘할 기회, 싸우고 갈등하고 들어보고 설득하고 이해할 기회. ‘상-여자의 착지술‘은 여성폭력이 해친, 해치려던 그것을 회복해 간다. 2020년부터 2024년까지 다섯 해. 회복은 하나의 개발된 프로그램이 아니라, 우당탕탕 작은 넘어짐과 일어섬을 반복하는 일상의 시간, 시간의 관계에서 온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 모두가, 특히 여성들이 폭력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폭력으로 인해 사람들과 가치 있는 관계를 맺게 하는 자신의 능력이 훼손당하기 때문이다. 트라우마 생존자들이 슬퍼하는 것은 이와 같은 관계의 상실이며, 관계의 상실은 곧바로 생존자들의 자율적인 삶을 위태롭게 한다. 트라우마 생존자가 트라우마의 여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시 확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외부의 침범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트라우마 생존자는 어떻게 하면 자신이 한계를 지닌 채 살아갈 수 있을지의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피해입은 자신과 화해를 이루어가고, 동시에 그녀는 자신에게 드리운 외부적 한계들 중 일부는 변화될 수 있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된다. 자율적 자아와 관계적 자아는 서로 도와주는 관계이며, 때로는 서로가 상대방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야기 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 수잔 브라이슨, 인향 2003)
오매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

한국성폭력상담소
성폭력이 ‘정조에 관한 죄’였던 1991년,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문을 열었습니다. 이후 ‘사적인‘, ‘중요하지 않은’, ‘수치스러운’ 성문제, ‘여성들의 거짓말’, ‘여성의 정조 문제’로 치부되던 한국사회의 왜곡된 성인식과 성문화를 바꾸기 위한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성폭력이 성별권력관계와 남성중심적인 사회문화의 문제임을 알리고 평등과 인권을 향한 법과 제도를 만들어 왔습니다.
지금까지 9만 2천여 건(2024년 기준)의 성폭력 피해자 상담, 지원을 통해 수동적인 대상으로 성애화되는 여성, 소수자들의 억압된 경험을 성폭력으로 재정의하는 균열과 변화에 함께 해왔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이분법적 성별권력관계 구조, 여성의 몸과 성을 규범화하는 통념, 차별과 혐오를 확대하는 사회문화에 맞서 평등하게 관계 맺고 나다운 모습으로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 활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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