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줄거리
에릭슨 아코스타의 시 <Walang Kalabaw sa Cubao(쿠바오에는 물소가 없다)>를 재해석하며, 영화는 물소가 사라지고 도시로 변한 쿠바오를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그러나 눈 부신 네온사인과 반짝이는 불빛들 사이에는 반드시 어둠이 있듯이, 이 어지럽도록 화려한 도시에는 자본에 착취당하고 있는 아웃소싱 노동자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어둠 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함께 뭉쳐, 자본과 시스템에 대항해 기꺼이 성난 물소가 되어 도시를 바꾸고자 한다.
프로그램 노트
물소들은 자취를 감추고 쇼핑몰과 교차로, 대형 콜로세움과 페스티벌 등이 들어오기 시작하며 도시로 변했던 쿠바오는 몇십 년이 지난 지금, 고층 빌딩과 비즈니스 단지로 가득 찬 별천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 중 특히 비즈니스 프로세스 아웃소싱(BPO) 산업의 부흥으로, 외국 자본과 기업에 의해 많은 아웃소싱 노동자가 쿠바오의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 저임금과 불안정한 고용, 위험한 작업 환경 등에 놓이게 되었다. 이 영화는 이 BPO 산업 종사자 네트워크(BIEN) 회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쿠바오에서 사라진 “물소”들을 되찾아 오고자 한다.
자본과 시스템이 사람과 생명, 환경의 가치를 압도하고자 하는 이 도시에서, 우리는 문득 깨닫게 된다. 물소들은 쿠바오에서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자본과 권력은 우리를 그저 다른 이름으로 부를 뿐 착취하다 끝내는 바깥으로 몰아내 버리려 한다는 것을. 하지만 이 물소들은 절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함께 모이고 함께 살아남고자 하며 함께 분노하고 함께 거리로 나서며 저항한다. 한목소리로 외치고 행진하며 쿠바오를, 그리고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영화가 전하려 하는 강력한 에너지와 메시지를 또 다른 도시의 또 다른 광장에 가져온다.
성난 물소들이 거리로 나올 때, 세상은 바뀐다.
– 서울인권영화제 이음활동가 윤리
감독
발 세라피카는 리살 주 출신으로, 필리핀 폴리테크닉 대학교 영어·외국어·언어학과 교원이자 트랜스젠더 여성이다. 현재 필리핀 대학교 필름 인스티튜트에서 미디어학(영화)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그녀의 다큐멘터리 〈물소가 일어서는 날〉은 롤링스톤 필리핀이 선정한 2025년 최고의 필리핀 영화 중 하나로 소개되었다.
인권해설
이 영화는 2010년대 초 필리핀의 노동 현실을 배경으로 한다. 쿠바오는 필리핀 수도권인 ‘메트로 마닐라’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케손시티(Quezon City)의 한 지역이다. 메트로 마닐라는 16개 도시와 1개의 자치구역으로 구성돼 있는데, 필리핀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라 할 수 있다. 면적은 전체 국토의 0.2%에 불과하지만, 무려 1,400만 명의 사람들이 이곳에 살고 있고, 필리핀 GDP의 30~40%를 생산한다. 그만큼 신자유주의화된 필리핀의 무분별한 도시 개발과 글로벌 생산네트워크와도 밀접하게 연결된 노동집약적 제조공장 및 서비스업 기지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쿠바오는 메트로 마닐라의 외곽과 중심부, 출퇴근하는 노동자들이 오가는 가장 밀도 높은 거대 상업지구다.
영화 속에는 BIEN 소속의 여러 활동가와 노동자들이 나온다. BIEN은 ‘BPO산업 직원네트워크(BPO Industry Employees Network)’의 약자로, 노조 결성 자체가 매우 어려운 필리핀의 BPO산업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증진하기 위해 조직된 독립적인 노동자 네트워크다. BPO 노동자 조직화가 어려운 이유는 이 분야 기업들이 경제특구(PEZA)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무노조 경영 전략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려고 하면 업체를 폐쇄하거나, 주동자를 해고하고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등 온갖 교묘한 수단을 동원한다.
이 영화는 필리핀의 사회운동가이자 저항 시인 에릭슨 아코스타(Ericson Acosta)가 쓴 “Walang kalabaw sa Cubao(쿠바오에는 물소가 없다)”라는 시에서 많은 것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필리핀 민중의 역사와 오늘날 필리핀 사회에서 ‘물소’가 은유하는 바를 떠올릴 때, 그것은 다층적 의미를 가리킨다. 콜센터 노동자들이 보기에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콘크리트로 도배된 쿠바오에는 진짜 노동자도, 진짜 물소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에는 가짜 회전목마와 가전 매장, 호객꾼, ‘타마라우 FX’란 이름의 승합차 등이 “방목된 가축처럼 늘어서 있을 뿐”이다. 대규모 콜센터 노동으로 이뤄진 BPO산업은 영미권의 대기업들이 저렴한 가격에 외주화한 엄청난 감정노동을 기반으로 한다. 세련되게 포장된 콜센터 노동의 그늘에는 저임금과 고용 불안, 열악한 노동조건과 착취라는 현실이 있다.
이 영화는 BIEN 소속 활동가들과 조합원들의 증언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시에서 그들이 어떻게 서로를 조직하고 저항하며 자신들의 공간을 만드는지 노래한다. 영화는 필리핀 민중의 영원한 친구로 살고자 했던 한 시인의 시를 통해, 그리고 이곳 노동자들의 춤과 구호를 통해 답답한 현실을 향해 돌을 던지고 싶어 하는 듯하다. 그 에너지를 통해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연결된 필리핀과 한국의 글로벌 착취를 떠올려보자.
– 홍명교(플랫폼c 동아시아 사회운동 뉴스레터팀 활동가)

프로그램 협력 플랫폼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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