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색무취 Colorless, Odorless

작품 줄거리

먼지를 비롯한 제반 환경 조건이 통제되는 청정한 공간 ‘클린룸’.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종종 유해한 화학물질에 노출되지만, 화학물질의 축적으로 인한 부작용은 즉시 나타나지 않는다. <무색무취>는 반도체 산업 재해 피해자들의 업무 기록과 아카이브 자료, 증언을 따라 과거를 추적하고 미래를 모색한다.

프로그램 노트

일회성 부품처럼 취급되는 노동자와 무분별하게 소모되는 자원은 생산 효율과 산업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쉽게 지워진다. 영화 <무색무취>는 클린룸, 클린노트, 방진복 등으로 대표되는 반도체 공정의 ‘청정함’ 이면에 있는 노동자들의 존재를 건져 올린다. 이들의 몸과 이야기는 드러나지 않는 작용을 탐지하고 붙잡는 유일한 증거가 된다.

2007년, 반도체 공정 생산라인에서 일하던 22살 오퍼레이터 황유미 씨는 급성 백혈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녀의 직업병이 산업 재해로 승인되기까지는 약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반도체 산업의 특성상 새로운 물질과 장비가 끊임없이 도입되지만 부작용은 곧바로 드러나지 않고, 기업은 ‘국가핵심기술’이라는 명목으로 정확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다. 묵묵히 현장을 지키는 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병과 책임 회피, 그리고 침묵이다. 선명히 존재하는 몸과 목소리를 지우고 그 위에 쌓아 올린 경제 성장과 기술 혁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과거에 비해 고도화된 반도체 산업 시스템에서 위험은 전방위로 흐른다. 산업재해는 원청에서 하청으로, 국내에서 국외로 확산되고 공정 과정에서의 막대한 자원 투입은 환경 부담으로 이어진다. 이 모든 문제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일상에서 향유하고 관계 맺는 것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곧 삶과 터전에 관한 것이다. 수면 아래에서 우리를 잠식하는 것은 무엇일까? 감추어진 세계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무색무취를 감지하려는 노력이 지금 이 땅의 우리에게 절실하다.

– 서울인권영화제 이음활동가 영

감독

이은희

이은희는 기술 환경과 개인,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관찰하며, 현대 기술의 메커니즘 탐구를 통해 사회적 문제를 다룬다.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 중이다.

인권해설

무색무취가 서울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지금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이슈가 있다면 반도체 초과이윤에 대한 성과 배분 이슈일 것입니다. AI 열풍으로 반도체 가격이 상승하여 삼성전자가 연간 300~500조 원대의 천문학적 영업이익 달성이 현실화되었고, 노동조합으로 뭉친 노동자들은 성과 배분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오랜 무노조경영 노동 탄압을 뚫고 노동자들이 성과급 요구로 집단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정부와 기업, 주류 언론들은 ‘이기주의’라며 매도합니다. 반도체 생산은 공급망(소재, 부품, 장비업체) 노동자, 수많은 하청 협력업체 노동자들까지 함께 생산한 것인데 정규직만의 성과 잔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사회적 인프라가 많이 쏟아부어진 산업(물과 전기의 막대한 소모, 각종 세제 혜택 등)이므로 공적 환원이 중요하다는 목소리는 정당하고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핑계로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막기 위해 정부가 나서서 반(反)헌법적인 긴급조정권 발동까지 고려하였던 것에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반도체’ 초과이윤에 관심을 가지는 만큼, 진작 반도체 노동자들이 생명과 건강을 위협받고 끊임없이 직업성 암과 희귀질환에 시달리고 죽어갈 때 이를 예방하기 위해 노력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화학물질에 노출되어 죽어가는 일뿐만 아니라 성과 스트레스에 노동자들의 정신건강은 매우 악화되어 있습니다. HBM 연구개발을 담당했던 삼성전자 신입 연구원이 입사 1년 만에 높은 성과 압박을 견디다 못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까지 있었습니다.

누가 이 산업을 이끌고 있는가. 반도체 산업은 어떤 산업인가. 많은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영화 <무색무취>를 보고자 하는 분들에게 재벌, 자본, 정치적 이해를 먼저 이야기하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노동자들이 왜 여전히 똑같은 백혈병에 걸려 죽고, 같은 직업병으로 신음하는가, 왜 넘어진 자리에서 또 계속 넘어지는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이 산업의 문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007년입니다.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유미 님의 아버지가 당시 “삼성을 상대로 싸우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며 꺼내신 말씀은 “2인 1조로 일하는 설비에서 딸과 동료 둘 다 백혈병으로 사망했는데, 삼성은 단돈 500만 원을 주고 죽음을 덮으려 했다”라는 것입니다.

이 죽음이 산업재해 같다는 의심을 품은 아버지가 삼성에 저항하지 않았더라면, 끈질기게 싸우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반도체 산업의 편리함과 주식 가치만을 좇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황유미 님을 시작으로 정말 많은 노동자가 똑같은 백혈병이나 혈액암, 뇌종양, 각종 암과 희귀질환으로 숨지고 지금도 투병 중에 있다는 진실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이 산업의 실체가 제대로 보입니다. 이 반도체 산업은 첨단 기술 산업이기 이전에 수백, 수천 종의 유해화학물질과 방사선을 이용해 생산하는 유해위험한 산업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무색무취>에는 그렇게 일한 삼성반도체 여성 노동자가 희귀종양을 앓고, 반도체 노동자의 자녀들이 2세 질환(자녀산재) 피해를 보고 과거를 떠올리며 조심스레 증언하고 있습니다. 외주 하청 노동자, 해외 전자산업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을 누구도 정확하게 말하지 못합니다. 첨단 산업의 특성상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물질들이 빠르게 도입되었다가 또 사라지는데 직업성 암과 만성 질환과 같이 서서히 걸리는 치명적 직업병을 산재로 규명하기에는 많은 한계들이 있습니다. 더 이상 과거의 작업환경이 남아 있지 않거나 새로운 직업병 영역이거나, 영업비밀에 가려 알래야 알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어떤 유해화학물질을 취급했는지, 어떤 유해위험요소가 있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빠른 생산 물량 달성, 즉 이윤 추구만이 지상 최대의 목표인 것 같은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생명과 건강은 보장되기 어려운 구조였습니다.

황유미의 죽음으로부터 19년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피해자의 존재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알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직업병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 증언을 하고, 산재 인정을 받기 위해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생명과 건강을 짓밟고 선 반도체 산업, 자본의 이해가 노동자의 권리보다 더 우선시되는 사회 속에서 더 이상 당하고 싶지 않은, 생명과 건강 그리고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더 소중하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반올림은 피해자들과 함께 진실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내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 이종란(반도체 노동자들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2007년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스물셋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사망한 여성노동자 고 황유미 님의 억울한 사연을 접한뒤로 ‘삼성반도체 백혈병 진상규명 대책위원회’ 활동을 시작으로 18년째 반올림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반올림에서 직업병 피해자 상담과 산재신청 조력, 건강권 확보를 위한 연대활동을 하고 있다.

프로그램 협력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약칭 반올림)은 2007년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님의 호소로 시작되었습니다. 2007년 11월 20일 19개 노동시민사회단체가 모여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 대책위가 발족하였습니다.
이후 장기적인 활동을 위해 현재의 반올림으로 이름을 바꾸고 10년 넘게 정부와 삼성을 상대로 반도체, 디스플레이 노동자들의 직업병 피해를 산재로 인정받기 위한 투쟁을 벌여왔습니다. 그 결과 2017년 대법원에서 첨단산업 산재 판단기준을 제시하고, 2018년 삼성전자는 중재협약을 통해 공식적인 사과, 보상, 재발방지책을 약속했습니다.
현재도 반올림은 전자산업 직업병 피해노동자들의 산재 인정 활동과 함께 노동자들이 건강하게 일할 수 있도록 피해자 상담 및 산재 지원 ,연구, 국내 외 연대, 제도 개선 등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927회 서울인권영화제이 땅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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