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잊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언제까지 이래야 해요.”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을 국가폭력의 피해자로 살아가는 이들은, 해를 거듭해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세상에서, 지난하고 반복되는 싸움에 괴로움을 호소하며 잊고 싶다는 말들을 하곤 한다. 정말 잊고 살 수 있다면 말이다. 이들의 ‘잊고 싶다’는 넋두리의 한편에는 ‘잊히면 어떡하나?’는 두려움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다.
피해자들이 가진 공동의 아픔, 공동의 싸움, 공동의 기억은 수년, 수십 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잊은 듯 각자의 삶을 살아갈 수는 있어도, 각인된 그 기억은 톡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올라온다.
<공동정범>은 바로 이들의 공동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다. 2009년 1월 20일 화염에 뒤덮인 불타는 용산 남일당 망루로 각인된 ‘용산참사’라는 특정한 시간과 사건에서 출발하지만, 특정 사건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공동의 피해와 기억을 가진 피해자들이, 어떻게 기억하고, 갈등하고 혹은 치유하며 투쟁해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건 말하지 못한 우리들의 이야기이다.”라고 <공동정범>을 본 세월호 가족, 강정 주민,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말한 것처럼, 어쩌면 우리가 알면서도 우리가 대면하려 하지 않았던 피해자 집단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이야기일 것이다.
가해자인 국가를 공동의 적으로 맞서 국가의 책임을 물으며 함께 싸우다가도, 국가라는 거대 권력이 전혀 꿈쩍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 막막함을 목도할 때, 어느 순간부터 그 책임의 손끝이 ‘나 때문인가’라며 스스로를 혹은 ‘너 때문이야’라며 가까이 있는 같은 피해자들을 향하곤 한다. 국가폭력은 그렇게 사적이고 내밀하게 작동한다.
우리가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발생한 사회적 사건 그 자체로만 국가폭력을 주목할 때, 그 사건으로 인한 피해자들의 사적이고 관계적인 조각들에 수년 수십 년 동안 내밀하게 작동하는 국가폭력을 놓치게 된다.
우리가 국가폭력의 내밀한 작동을 목격하고 증언할 때, 국가폭력이 피해자 각각을 어떻게 해체해 놓는지 뿐만 아니라, 해체된 듯한 개인들이 왜 다시 피해자 공동체로 모이고, 그 피해를 이야기하고, 투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공동의 아픔, 공동의 싸움, 공동의 기억을 공유한 해체된 각각의 피해자 개인들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재결합하는지를 통해, 역시 공동의 기억을 공유한 ‘잊지 않는’ 우리가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우리의 무기를 다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원호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
태어나면서부터 성별이 여/남으로 정해지고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이분법적인 사회 속에서 트랜스젠더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떠한 경험일까? 물론 각자의 맥락이 있기에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영화는 트랜스젠더 네 명의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이나마 이러한 경험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사실 트랜스젠더의 삶은 다른 이들의 삶과 아주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직장에서 일을 하고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친구들과 만나 밤늦게까지 놀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등 취미생활을 즐기는, 때로는 즐거워하고 때로는 고민하는, 그런 삶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런 일상적 삶 속에서 트랜스젠더이기에, 규범을 벗어난 존재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차별과 배제의 경험도 존재한다. 자신을 대표하지 못하는 이름을 가져야 하는 일, 의료서비스 이용에서의 장벽을 마주하는 일, 가족들에게 정체성을 부정당하는 일, 교육현장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일 등과 같이, 성별이분법적인 사회 속에서 트랜스젠더들은 존재하지 않는, 말할 필요 없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의 부정은 브라질만이 아닌 한국을 살아가는 트랜스젠더들 역시 겪고 있는 일이다.
“동성애를 반대하지만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생각한다.” 지난 대선후보 토론에서도 나온 이 말은, 성소수자 이슈의 질문에 대한 정치인들의 의례적인 답변이 되어 버린 것 같다.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도 몇몇 후보들은 “개인적으로 동성애에 찬성하지 않는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와 같은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이렇게 동성애를,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반대할 수 있다는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발언을 정치인들은 앞장서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성적지향·성별정체성을 포함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10년이 넘게 제정되지 못하고 있으며, 성소수자 인권을 보장한다는 이유로 각 지역의 인권조례가 폐지되고 있다. 또한 여성가족부는 성평등과 성소수자 인권은 별개라는 이야기를 하였고 교육부는 성소수자를 다루지 않는 성교육 표준안을 배포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성소수자의 존재는 사회적 합의의 대상, 누군가에 의해 공공연하게 부정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
한편, 존재의 반대와 차별은 별개라는 주장에는, 범죄화나 해고 등과 같은 의도적이고 거대한 것만이 차별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러나 차별의 경험과 이야기는 결코 그렇게 명시적인 결과만으로 구성될 수는 없다. 기실 성소수자가 겪는 차별의 경험은 이성애가 당연한 사회 속에서 자신의 동성 애인을 이야기할 수 없는 문제, 지정 성별에 따라 남성/여성으로 여겨지고 아들, 딸 등으로 호칭되는 문제와 같이 당연한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험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의 부정은 개인의 자존감을 손상시키며, 동등한 시민으로서 소통할 수 있는 조건을 훼손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심각한 차별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소수자의 존재를 지우는, 공기처럼 만연한 구조적 차별 앞에 우리는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영화 속 사진을 찍는 장면에서 흑인 여성의 말이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사회가 소수자의 존재를 주변화화고 지워버릴수록,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몸을 드러내며 서로를 확인하고 연대해나가야 한다. 이러한 드러냄을 통해 소수자를 억압하고 차별을 만들어내는 규범의 모순점을 드러내고 균열을 만들어 나갈 수 있으며, 끝내는 이를 전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규범에서 벗어난 몸은, 존재는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박한희(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