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후쿠시마에 남다

인권해설

“후쿠시마 핵사고로 방출된 방사능으로 인해 죽은 사람은 없다.” 핵산업계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이 말은 사고 당시 다량 피폭당하고 급성방사선 장해로 죽은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맞다. 그러나 이 말에 인권 경시와 생명에 대한 상상력의 부족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사람들’은 자연, 동물, 다른 사람, 문화, 역사와 더불어 살고 있다. 즉 우리는 그들 속에 있어야 자긍심을 갖고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방사능이라는 침략자로 인해 고향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조잡한 임시주택에서 타향살이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것은 문화, 생태계, 역사 속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핵사고 관련사(関連死)”라는 말이 있다. 이는 핵사고로 피난한 사람들 중 피난 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인해 병 또는 자살로 죽는 경우를 가리킨다. 그 수는 2000명 이상에 이른다. 이 중 자살한 50대 여성의 예를 들어보자. 피난민은 신분증을 제시하면 강제 피난구역에 일시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 여성은 고향 생활이 그리운 나머지 일시귀가 중 고향 집의 마당에서 분신자살을 했다. 자살과 핵사고의 인과관계를 증명하기 위해 남편이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소는 고향에서 가족과 더불어 사는 공동생활과 지역사회와의 유대가 상실된 것이, 객관적 스트레스 평가 기준상 가장 높은 스트레스를 유발한 요인이라고 판단하고 도쿄전력에 배상을 명했다. 그러나 고향의 상실, 그 회복의 불가능성을 어떻게 배상할 수 있는가. ‘배상’이라는 개념으로 해결할 수 없는 가치가 있기 때문에 이 여성은 고향의 기억 속에서 목숨을 던졌을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의 정체성이 담긴 고향을 지키기 위해 외롭게 싸우는 남자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싸우는 상대는 방사능이다. 이길 가능성은 없다. 그는 황폐해져가는 고향에서 동물들에게 먹이를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도 자각하고 있다. “처음엔 모든 게 예전처럼 돌아가기를 바랐다. 지금 불가능하다고 본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의미가 없는 싸움을 왜 하고 있을까? 답은 없다. 방사능으로 오염된 땅에서도 마치 예전과 같은 것처럼 사는 것으로 자긍심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단, 우리는 이러한  행동으로부터 핵사고 이전에 그가 살아왔던 풍요로운 삶을 상상할 뿐이다.

그리고 잊어서는 안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이 방사능을 누가 방출한 것인가? 물론 도쿄전력, 그리고 그를 지원해 온 국가다. 자본과 국가가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피난시키고 이들에게서 고유의 문화와 생태계도 모두 빼앗았다. 그런데도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고 핵발전소 재가동을 도모하고 있다. 왜,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 경제성장과 물질적 가치에 몰두하여 삶의 의미를 잘 찾지 못해서 그런 것 아닐까. 인권 개념은 한 사람의 개체에만 한정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둘러싼 문화와 생태를 포함하는 총체로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화적, 생태적 가치를 모르는 도쿄전력과 국가가 주인공을 비롯한 피난민들의 심오한 고독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도시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도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피난민의 억울함을 얼마나 이해하고 느끼고 있는가? 이 주인공의 고고한 모습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성찰해야 할 것이다.

타카노 사토시 (경북대 대학원)

22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후쿠시마에 남다

프로그램 노트

2011년 3월 11일 이후 후쿠시마는 이전과 전혀 다른 소리를 담게 되었다. 이제 후쿠시마에서는 ‘위험 안내 방송’이 일상의 소리이다. 안전하다던 원전은 후쿠시마를 전부 바꿔놓았다.
나오토는 규슈전력이 센다이 핵발전소를 재가동한다는 뉴스를 본다. 규슈전력은 이번에도 안전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안전은 누구의 삶을 담보로 한 안전일까. 우리의 전기는 누구의 위험 위에 서 있는 편리함일까. 또,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에 어떤 위험들을 감수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제 후쿠시마에서 위험한 것은 원전만이 아닌, 후쿠시마 그 자체가 되었다. 후쿠시마에서 나오는 쓰레기들은 위험물로 표시되어 처리되고, 후쿠시마의 버섯은 맨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후쿠시마를 알던 존재들은 이 공간이 위험한 곳이 되리라 상상한 적 없었다. 또한, 후쿠시마의 그 어떤 생명도 자신이 방호복을 입고 대해야 하는 존재가 될 줄 몰랐다. 나오토 또한, 자신의 삶이 위험을 감수한 대단한 삶이 되기를 바란 적 없었다.
나오토는 그곳에서 살아왔기에, 그곳에서의 삶을 이어나간다. 위험해진 후쿠시마에서, 위험하다고 평가받게 된 삶을, 나오토는 계속 살아간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27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호스트 네이션

프로그램 노트

군산 미군 기지촌에 마련된 클럽에는 노래를 하고 주스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여성들이 있다. 그중 일부가 자국에서 빈곤 문제에 당면한 여성들로 연예비자인 E6비자를 받아 한국으로 이주해 온 경우이다.
여성의 빈곤 문제가 국가에 의해 적극적으로 구성된 기지촌과 만날 때, 이들의 서사는 쉽게 인신매매라는 이름으로 상상된다. 주한 미군과 한국 정부를 동력 삼아 작동하는 자본의 톱니가 빈곤 여성을 기지촌 내의 주요 역할자로 대우하다가도 불시에 피해자 위치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떤 여성은 인신매매의 공포를 느끼고, 또 어떤 여성은 기지촌에서 나오기 위해 시설에 의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스템이 자기의 편리를 위해 어떤 존재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배치시키도록 둔다면 우리는 <호스트네이션>의 마리아를 어떤 시선으로‘밖에는’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지금 이대로의 생활로는 가족의 생계를 부양할 수 없겠다고 판단한 마리아가 매니저 욜리의 기숙 트레이닝 센터를 찾아가는 행위와, 연예비자를 받아 한국으로 이주해 기지촌에서 생활하며 “후회 없다”고 말하는 그 발화를,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시스템이 배치한 틀을 깨고 바라볼 수는 없을까.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27프로그램 노트

인권해설: 호스트 네이션

인권해설

이고운 감독의 <호스트 네이션>은 필리핀의 싱글맘 마리아를 쫓아가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 영화는 필리핀 여성들이 한국의 미군기지촌에서 엔터테이너로 일할 수 있는 비자(E-6-2)를 취득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정부가 허가한 합법적 이주여성 성착취 시스템을 드러낸다.

E-6-2 비자로 한국에 일하러 오는 여성들은 대부분 필리핀에서 실직 상태에 있거나, 가족들이 생계를 이어나갈 충분한 돈을 벌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여성들이다. 미군들을 상대로 얼마나 술을 많이 파는가에 따라(실제로는 미군들에게 주스를 사달라고 해서 드링크백을 받는 시스템) 매달 받는 돈의 차이는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실제로 이 여성들이 버는 돈은 필리핀에서 자신들이 벌었던 수입의 10배에서 30배 정도(한국 돈으로 70~90만 원 가량)이기 때문에, 이들은 하는 일의 종류, 강도 등을 따질 겨를도 없이 한국행을 결정하곤 한다.

<호스트 네이션>은 다양한 착취자를 포함하고 있는 E-6-2 예술흥행비자 매매 네트워크와 이 시스템에 협력하는 한국 정부를 세심히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스카우터, 매니저, 브로커, 프로모터, 그리고 클럽 업주라는 이 네트워크의 주요 인물들, 그들의 역할, 소개비에 대해 소개를 받는다. 그 외에도 다양한 조력자들, 여성들이 인천공항으로 여행할 수 있게 해주는 “컨택”, 필리핀 여성들이 국경을 넘을 수 있게 해주면서 뇌물을 받는 출입국 직원 등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이 모든 사람들이 한국 클럽에 필리핀 여성들이 들어올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역할들을 하고 있다. 이러한 착취의 사슬 없이는 필리핀 여성들이 한국에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필리핀 정부가 E-6-2 비자를 지닌 필리핀 사람들의 출국을 허락하지 않고 그로 인해 필리핀 출입국에서 출국이 여의치 않게 되면 인천공항으로의 여정이 매우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한편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영상물등급위원회, 법무부 산하 출입국관리국, 외교부 산하 마닐라 대사관은 E-6-2 비자를 승인하고 제공함으로써 이 모든 과정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영화는 명백히 보여준다.

기존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이 성매매 사슬의 행위자들을 다양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호스트 네이션>의 미덕은 돋보인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군사주의, 가부장제가 촘촘히 얽혀있는 이 문제에서 기본적으로는 시스템과 제도의 책임이 일차적이겠으나, 그 속의 다양한 행위자인 개인을 지워버려서는 이 문제의 해결이 어렵다.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성매매가 유독 군대 근처에서는 왜 허용되어 왔는지, 특히 미군의 경우 한미동맹과 안보(전쟁을 수행하는 군대는 위안부의 존재로 그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다!)라는 명목으로 한국, 미국 정부가 심지어 기지촌을 조성, 관리, 권장해왔다는 사실, 이 제도와 관리체계의 허점을 활용해 폭력적인 방법으로 약자(여성)를 착취하는 개인 및 범죄조직이 존재한다는 현실을 영화는 다시 한 번 드러내 보이고 있다.

 

김조이스, 오리 (두레방)

22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있는 존재

프로그램 노트

‘예전의 나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예전의 나도 나였음을 받아들였다.’나 김도현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을 찾은 후에 가능한 일이었다. FTM 트랜스젠더. 나의 존재를 규명하는 단어를 찾고 나서야 마침내 김도현은 자신을 인정하고, 세상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다.
분명 나를 사랑하고, 믿고, 지원해줄 거라 믿었던 이들이 나의 존재를 못 본 체한다. 나에게는 정말 소중한 것인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더 이상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내 존재를 더욱 드러내고, 알려야 했다. 알리고 싶다. 더 이상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기 싫다. 내 존재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존재를 명백한 단어로 정의했고 여기에 서서 호흡하지만, 아직도 나의 존재에 대해 찬성과 반대의 물음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들을 향해 더 당당히 외친다. 그렇다면 당신이 정의하는 나는 무엇이냐고. 내가 나를 정의했으니, 여기 나를 보라고.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23프로그램 노트

인권해설: 있는 존재

인권해설

“직장 동료, 친한 친구, 지인 중에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혹은 트랜스젠더인 사람이 있습니까?” 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의 4%만이 이 질문에 “예”라고 답했다고 한다. 정말 한국에 성소수자가 그렇게 적어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걸까? 아니다. 성소수자는 교실에, 사무실에, 동네와 거리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성소수자를 보지 못했다는 답변은 자기 주변에 성소수자가 없길 바라는 믿음에 가깝다. 성별은 여성과 남성으로만 나뉘어 있다는 믿음, 여성과 남성이 만나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믿음, 모두가 ‘평범한’ 가족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살아야 한다는 믿음. 이러한 믿음들이 가득한 세계에 성소수자는 없다.

주변에 성소수자가 없다는 답변이 무색하게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는 넘쳐난다. 학교 안에서 성소수자의 80%가 교사로부터 혐오 표현을 들은 적이 있고, 92%가 학우로부터 혐오 발언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성적지향이나 성별표현으로 인해 괴롭힘을 겪은 성소수자는 반절이 넘는다. 커밍아웃 이후 가족에게 냉대 받고 폭력을 당할 수 있으며 친구와 선생님에게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다. 트랜스젠더들은 충분히 여자답지 못해서, 혹은 남자답지 못해서 취직을 못 하거나 직장에서 잘린다. 군대에서는 성소수자 인권 침해가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대선을 거치며 대통령 후보들은 서슴없이 차별 발언을 내뱉었다. 사회 전체가 성소수자를 부정하고 삭제하는 데에 동참하고 있다.

도현은 이 세계에서 FTM 트랜스젠더인 자신을 드러내고 내가 여기에 있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한 외침을 듣고도 모른 체하거나 그를 떠나간 사람도 있다. 반면 도현의 곁에 남아 그와 더 가까워진 사람도 있을 테다. 어떤 관계가 됐든 도현의 목소리를 들은 모든 이는 자신이 가지던 믿음에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정말 그들의 믿음처럼 이 세상은 단일한 ‘정상성’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의 말하기는 성소수자를 차별하고 배제하는 사회에 균열을 낸다. 도현은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며 누구도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도현의 커밍아웃은 자기답게 살기 위한 본능이자 투쟁이다. 그가 이 투쟁을 계속해나갔으면 좋겠다. 그 곁엔 수많은 성소수자 존재가 함께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있는 존재”였다. 성소수자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가 없던 게 아니라 당신들이 우리를 보지 않았던 것임을, 또한 이 땅은 당신들만의 것이 아님을.

 

보통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25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가장 아름답고 아름다운

프로그램 노트

누군가 남들과 조금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을 때, 그 특성은 그 사람을 규정하는 전부인 양 받아들여지기 쉽다. 미셸은 종종 시각장애와 경도의 아스퍼거증후군을 가진 ‘장애인’’으로만 여겨진다. 그렇게 그녀는 ‘돌봐주어야 할 대상’이 되고,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왕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녀가 가진 장애는 미셸이라는 사람을 설명하는 데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에반게리온을 좋아하고, 성에 관심이 많아 BDSM을 실천하고, 성우가 되기를 꿈꾸며, LGBT 활동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 이 모두가 막 20대에 접어든, 좋아하는 것도 꿈꾸는 것도 많은 미셸의 이야기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힘든 그녀가 스스로 ‘인생의 주인공’이 되고자 삶을 설계해나가는 과정은 물론 순탄치 않다. 그러나 미셸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녀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다양한 욕망을 찾고,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며,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부모님의 그늘을 벗어나 의식주 차원에서 자립해나가는 과정이면서, 취향과 가치관을 찾아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미셸은 몸소 보여준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23프로그램 노트

인권해설: 가장 아름답고 아름다운

인권해설

저시력/발달장애여성 미셸은 학교·상담교사, 가족, 애인, 커뮤니티 구성원 등 다양한 이들을 만난다. 이처럼 장애여성은 사회 안에서 가족, 거주지역의 사회복지사, 이웃 등 다양한 주변인들과 관계를 맺는다. 미셸은 “난 검열되지 않은 세상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다”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 하지만, 막상 졸업 후 일자리를 찾지 못해 거의 집에서 생활한다. 미셸이 말하는 ‘준비’는 미셸 자신과 장애인만이 아니라 사회와 주변인에게도 필요하다.

미셸이 부와 명성을 기대한 인턴십은 알고 보니 일주일 방문프로그램이었고, 이동보조를 받지 않으면 외출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으며 방문프로그램 후 LA행을 포기한다. 미셸과 같은 발달장애인의 이동에는 동행만이 아니라 이동장소의 환경, 새롭게 맺는 관계문화, 현장의 분위기 해석 등 통합적이고 복합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또한 주변인이 발달장애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고 무비판적으로 장애차별적인 사회를 바라볼 때, 정보를 조각내거나 여과 없이 발달장애인에게 전달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발달장애인의 행동과 판단은 사회 안에서 이해받지 못하고 그에 대한 책임은 발달장애인의 몫으로 남곤 한다. 이처럼 발달장애인과 관계를 맺을 때 복합적인 지원이 필요하며 이것은 개인인 주변인 한 사람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사회적 지원이 동반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때 지원이 ‘보호’나 ‘통제’로 이어져서는 안된다.

사회에서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취약성만이 주로 강조되어, 부정되거나 과잉된 형태로 묘사되곤 한다. 그리고 취약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성에 대해 말하고 실천하는 것을 금지하는 형태로 이어진다. 그러나 미셸은 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연인과 BDSM을 실천하며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긍정하고 드러낸다. 장애여성으로서 가능하다고 사람들이 허락한 섹슈얼리티가 아니라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탐구하고, 만족감을 줄 수 있는 방법과 원하는 관계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적 시선과 규범에 도전하며 성취된 미셸의 섹슈얼리티를 불편해하는 것은 오히려 주변인과 사회이다.

장애인과의 만남에서 일방향인 보호형태의 지원에만 집중한다면, 장애만 두드러질 뿐 다른 점들을 보기 어려울 수 있다. 미셸은 모든 사람들은 물건을 잃어버려 우울해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서로가 연결됨을 느낀다. 우리는 이처럼 닮은 구석이 꽤 많다. 즐거움, 외로움 등의 다양한 감정과 음식취향, 섹슈얼리티 등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 관계와 사회를 재구성하기 위한 준비는 ‘장애인은 ~할 거야’, ‘장애인은 ~가 필요할 거야’라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궁금증을 갖고 질문하는 대화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때 기존의 세상과 장애인이 느끼는 세상이 충돌하고 맞춰가며 함께 성장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변화를 요청하는데, 이는 우리 모두를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사회와 주변인들의 변화 없이 장애인의 인권은 보장되기 어렵다. 장애와 섹슈얼리티에 대해 기존의 사회구조를 답습하는 판단과 검열을 반대하며, 이를 새롭게 재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준비를 하는 것을 우리의 공통과제로 삼아야 한다.

서연 (장애여성공감)

23인권해설

인권해설: 가장 값싼 군인을 삽니다

인권해설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주로 애국심, 국익, 종교, 이데올로기를 내세운다. 사람들은 김정은이나 조지 부시 같은 통제할 수 없는 정치 지도자들이 돌발적인 행동으로 전쟁을 일으킨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전쟁들, 전쟁에 준하는 군사적인 갈등은 한 가지의 목적 때문에 일어난다. 전쟁이 돈벌이가 되기 때문이다. 전쟁수혜자(War Profiteer). 전쟁으로 이익을 얻는 개인이나 기업, 집단을 일컫는 단어다. 이들은 끊임없이 전쟁을 기획하고,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고, 전쟁을 수행한다. 이들은 전쟁을 준비하고, 전쟁을 실행하고, 전후 복구를 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죽음의 상인”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기업적인 형태로 전쟁 돈벌이에 나선 건 20세기에 들어서다. 19세기 후반부터 활동한 바질 자하로프는 조지 버나드 쇼의 『바버라 소령』에 나오는 무기상 앤드루 언더샤프트의 모델이다. 그는 어머니가 태어난 나라 그리스에 잠수함을 팔면서 자신은 먼저 애국심 있는 그리스인이고 그 다음에 무기상인이라고 했다. 자하로프가 그리스에 잠수함을 팔고 난 뒤 한 일은 그리스의 적대국인 터키에 그리스가 잠수함 두 대를 구입한 사실을 알린 일이었다. 이 죽음의 상인들은 살인무기를 사고파는 것에 아무런 정치적 책임감이나 양심의 가책이 없다. 또 한 명의 전설적인 죽음의 상인 메르틴스는 이렇게 말했다. “메렉스가 판매한 무기를 사들인 이들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선,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에 대해 사고 차량을 판매한 자동차 영업 사원이 짊어져야 할 정도만 책임이 있을 뿐이다.”

이들의 활약상은 점점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과거 전쟁의 주체는 국가였다. 죽음의 상인들은 록히드마틴, BAE, 한화처럼 살인 무기를 만드는 군수산업체가 생산하는 무기를 각국의 국방 담당자에게 판매하는 역할이 주된 일이었다. 하지만 전쟁의 양상이 변해가면서 전쟁수혜자들의 활동범위도 점차 넓어졌다. 무기 거래에 그치지 않고 군사훈련을 시켜주거나, 전쟁 시 군인들의 생활을 보조하는 물자를 생산하고 운반하거나, 전후 사회 기반 시설을 복구하는 일, 심지어 군인이 되어 실제 전쟁을 수행하기까지 한다. <가장 값싼 군인을 삽니다>에 등장하는 이지스, 블랙워터 같은 기업들이 새로운 영역에서 전쟁 장사를 하는 치들이다.

이러한 민간군사기업들은 특히나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인권 문제가 대두되는 곳에서 맹활약을 한다. 각국 정부는 자국 의회의 승인을 피하기 위해, 국제 사회에서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비싼 금액을 지급하면서까지 이런 민간군사기업들을 이용한다. 이들이 수행하는 전쟁은 과거 정부의 정규군들이 수행하는 전쟁보다 더 잔혹하고 심각한 피해를 유발한다.

한국에도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이러한 기업들이 등장할 징후가 농후하다. SJM 노동조합 조합원들에게 끔찍한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사회적으로 유명해졌던 용역업체 컨택터스의 홈페이지에는 당시 군대에 버금가는 장비들이 게시되어 있었다. 이런 회사들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가는지, 우리는 관심 있게 지켜보며 감시해야 한다.

한국은 이미 세계 10위권의 국방비를 지출하는 나라다. 전쟁으로 이득을 챙기는 이들에게 좋은 시장이며, 한국에 기반을 둔 군수산업체들도 세계 곳곳으로 활발히 전쟁 무기를 수출하고 있다. 우리는 이들을 감시하고, 이들의 존재를 폭로하고, 이들의 활동을 막아야 한다.

우리 다 같이 외치자. “여기서 전쟁이 시작된다. 여기서 전쟁을 멈추자!”

용석 (전쟁없는세상)

22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가장 값싼 군인을 삽니다

프로그램 노트

전쟁 용병 한 명을 한 달간 고용하는 데 비용이 얼마나 들까? 질문 자체도 황당하지만, 그 답은 더 황당하다. 시에라리온의 용병 한 명에게 지급되는 임금은 한 달에 250달러다. 이마저도 더 저렴하게 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리저리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다.
이제 전쟁은 하나의 산업이 되었다. 자본과 맞물린 전쟁은 더 이상 국가 대 국가의 정치적 다툼으로 끝나지 않게 되었다. 전쟁 국가가 예산을 짜면 그 예산에 맞춰 끝없는 하청의 톱니바퀴가 연결된다. 그리고 그 톱니바퀴의 끝에는 한 달에 250달러를 받으며 사람을 죽여야 하는 용병들이 있다.
<가장 값싼 군인을 삽니다>는 단순한 반전 영화가 아니다. 전쟁과 자본에 동시에 저항한다. 전쟁의 잔인함을 전시하는 대신 자본의 세밀한 톱니바퀴를 드러낸다. 톱니가 맞물릴수록, 하청의 하청으로 내려갈수록, 인간은 소외되고 조각난 자본의 날은 용병의 어깨로 내려앉는다. 전쟁의 최전선에서는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이 아닌, 이런 용병들이 사투를 벌이고 있다. 이제 반전과 동시에 반자본을 외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29프로그램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