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베이징퀴어영화제 10년간의 게릴라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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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필증’이 없으면 극장 대관이 불가능하다(1996년).” “다른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것은 문제없지만 인권영화제에서 상영하면 ‘이적표현물’로 국가보안법 위반이다(1997년).” “영화제가 영화진흥위원회의 추천을 받지 않거나 상영작에 등급분류를 받지 않으면 상영관을 대관하지 못한다(2008년).” “‘시국 관련 시민단체들이 집회장소로 활용’하는 것에 대해 시설보호를 하기 위해 청계광장 사용 허가를 취소한다(2009년 13회 인권영화제 개막 2일 전).” “서울광장은 불특정 다수인이 자유로이 오고가는 개방된 공간이므로 영비법상의 상영등급과 관련한 규정을 준수하여야 한다. 청소년 등의 인권보호와 관련한 사항이니 적정하게 처리하셔야 할 것이다. 무등급영화는 법제29조제1호 규정에 의한 예외사항에 해당함을 증거하여야 하며, 12세 이상 등급분류된 영화는 법제29조제3항, 제4항, 제5항 등을 위반하지 아니할 방법을 강구하고 제시하라(2012년).” 

인권영화를 함께 볼 상영관이 없어서 주로 대학의 학내 공간을 전전하던 시절, 그리고 ‘등급분류’를 거부해 상영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거리상영을 해오던 시절 동안 서울인권영화제가 겪었던 일이다. 이렇듯 ‘사전검열’이 폐지되었지만 아직도 ‘서울인권영화제’와 상영작들에 대한 ‘(사전)검열’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최근 몇 년 동안에도, 2016년 현재까지도 ‘정치적 중립’이라는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명목으로 변함없이 반복되고 있다.

“‘정치적 중립성을 해치는 작품’이므로 상영 취소를 요청한다(2014년).” “인권영화제의 내용이 우리 대학의 설립 이념인 기독교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교내 행사 및 장소 사용을 허가할 수 없다(2015년).” “전체적으로 정치성을 띠고 있고 편향성 우려가 있어 공공시설인 서귀포예술의전당 대관은 부적절한 것으로 결정한다(2016년).”  

한국 사회에서 영화제가 선정한 작품을 상영하고자 하면 심심치 않게 당면해야 했던 사건들이다. 이는 베이징퀴어영화제 조직위원회가 영화제를 지속하기 위해 넘어야 했던 고비들과 닮아 있다. 누구나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영화는 무궁무진하게 세상에 나온다. 굳이 영상물로 남겨야 할까 하는 의문이 드는, 이미 주류 담론화된 어떤 것들을 보여주는 영화도 넘쳐난다. 그 틈바구니에서 목소리 낼 수 없었던 존재들의 이야기를 담는 작품들은 드물게 ‘발견’된다. 애써 내보이고 발견하더라도, 갈 곳도 없다.

이 존재들의 목소리가 어떤 의미로 ‘정치적’인 것이며, 상영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의 이야기는 개방된 공간에서 나눌 수 있고 어떤 사람의 이야기는 나누지 못해야 하는 것인가?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내 경험을 나누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모든 ‘나’는 이 사회에서 어떤 정체성과 위치성을 가지고 존재하므로 나의 이야기를, 경험을 나눈다는 것은 곧 정치적인 행위인 것이다.

더욱이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되는 성소수자, 여성, 장애인 등 소수자들의 목소리에는 더욱 힘을 가질 수 있게 하는 방법들이 여러 가지로 요구된다. 더 선명한 ‘관점’을 취하고, 더 분명하게 ‘정치적’이어야 한다. ‘나’는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어떤 위치에서 목소리를 낼 것인가. 그렇기에 ‘여성’, ‘장애인’, ‘퀴어’ 등으로 정체성을 전면에 내건 문화행사들이 존재하는 데에는 충분히 의의가 있다. 이렇게 ‘우리의 이야기’들이 단단한 중심들을 향해 모아지고, 구체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이 이야기들이 담긴 영화/인권영화는 충분히 ‘정치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권영화에게 표현의 자유는 더욱 중요하다. 희미해지기 쉬운 존재들일수록 표현의 자유는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절실하게 쟁취해야 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권영화는 이러한 존재들의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버릴지도 모를 마음들을 포착해 어떤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로써 그 이야기에 또 다른 이야기들을 보태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불러 모을 수도 있다. 인권영화는 ‘우리의 이야기’들을 조금이나마 더 편안하게 생산해낼 수 있도록 하며, 더 풍부해지도록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권운동으로서 인권영화제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인권영화제는 그 이야기들이 모인 새로운 이야기의 장이 된다. 그에 더해 더 깊은 사유와 논의들을 이어지게 할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이 가능한 시간과 공간이 되어주는 영화제는 ‘운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때 이 ‘운동’으로서의 영화제는 ‘증언’의 기록물을 모은, 또 다른 기록물로서 인권운동의 장에서 돋움판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입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1996년 1회 인권영화제가 외치던 ‘표현의 자유’라는 원칙은 아직 유효하다.

 

레고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31인권해설

인권해설: 킬스위치: 인터넷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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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는 권력이다. 인터넷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힘을 주었다. 처음으로 신문이나 방송과 같은 편집된 미디어가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직접 표현하고, 시공간에 관계없이 지식과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으며, 다른 사람들과 만나서 함께 무엇이든 도모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권력을 놓고 싶지 않은 기득권 세력은 인터넷의 구조를 바꾸고자 한다. 지식과 정보의 유통을 자신들이 통제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바꾸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인터넷에서는 권력을 둘러싼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저작권은 사람들이 지식과 문화를 생산하고 향유하며,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방식을 통제한다. 지금까지 인류의 지식이 디지털화되고 접근 가능해졌지만, 이에 허락 없이 접근하는 것은 ‘범죄’이다. 다른 사람이 만든 음악과 영상을 섞어 나만의 창작물을 만드는 것
도 허락이 필요하다. 허락 없는 공유는 해적질이 되었다. 내가 어떤 지식과 문화에 접근하고, 어떻게 공유하며, 창작할 것인지 누가 정하는가?

인터넷 인프라를 소유, 관리하고 있는 통신사는 내가 어떠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지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인터넷 상의 모든 기기와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구조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바꾸고 싶어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도 무선인터넷전화(mVoIP) 앱이 자신의 통화 수익을 잠식할 것을 우려한 통신사들이 특정 요금제에서 무선인터넷전화 앱을 차단하고 있다. 문제는 그들 마음대로 특정한 콘텐츠나 앱을 차단할 권한을 그들에게 줄 것이냐다. 망중립성은 통신사가 특정 기기, 콘텐츠, 이용자, 애플리케이션을 차별하거나 차단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인터넷의 기술 기반은 더 많은 감시를 가능하게도 한다. 인터넷 상의 모든 것은 기록에 남고 추적될 수 있다. 고작 ‘집시법’ 위반을 수사한다는 명목으로, 피의자의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압수수색했고, 그 결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2,368명의 대화 내용이 수사기관에 넘어갔다. 이는 물론 구글, 페이스북 등 주요 인터넷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통신 내용, 해저 인터넷 케이블을 통해 흐르는 모든 트래픽을 무차별 수집한 미 국가정보원(NSA)의 감시 도구에 비할 바 아니다. 디지털 시대의 수사 관행에 더 이상 ‘범죄 혐의’ 요건은 무의미해진다.

인터넷 기술과 구조는 권력자에게 더 많은 ‘통제력’을 부여한다. 하나의 작은 권한이 또 다른 목적을 위해 남용될 여지도 커진다. 교통통제용 CCTV가 집회 감시용으로 남용되는 것을, 영업비밀 방지 시스템이 노동감시용으로 남용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이를 견제할 수 있는 해법은 ‘더 많은 민주주의’, 즉 권력에 대한 시민의 역감시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보가 권력인 시대에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기술 구조는 공적 정보와 지식은 최대한 공유하고, 사적인 정보는 최대한 보호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 망중립성, 프라이버시, 정보문화향유권, 정보접근권 등 정보인권의 보호는 디지털 시대 민주주의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오병일(진보네트워크센터)

24인권해설

인권해설: 레드마리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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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와 ‘자발’에 가려진 여성들의 목소리를 마주하기 위하여>

지난 해 12월 이루어진 한일 ‘위안부’ 협상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완전히 무시한 채 양국 정부의 이해관계에 따라 ‘위안부’ 문제를 외교 카드로 이용해버린 최악의 협상이었다. 심지어 ‘불가역적’이라는 확인까지 붙은 이 협상문은, 한국뿐 아니라 수많은 나라의 여성들을 군수 물자처럼 동원했던 일본 당국의 전쟁범죄 책임을 단 몇 줄의 문장들 속에 뭉개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특히 이 과정에서 소녀상 이전 문제가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협상문에서는 “공관의 안녕을 우려하는 점에서”라고 표현되었지만, 핵심은 소녀상이 일본 정부의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을 상기시키는 상징물이라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협상문에서 ‘불가역적 해결’을 강조하는 동시에 소녀상 이전을 굳이 언급했다는 사실은 그래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간 일본 정부는 이 ‘강제로 동원된 소녀’의 이미지를 어떻게든 희석시키려 했다. 그리고 마치 그 사실만을 지우면 당시의 끔찍한 폭력에 대한 역사적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듯한 태도를 취해 왔다. 한편 그럴수록 한국에서는 그러한 ‘강제 동원’과 끔찍한 폭력을 증명하고 강조하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한 상징적 과제가 되어 왔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영화에서 ‘위안부’ 실상의 중요한 증언자였으나, 위에 언급된 바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지닌 두 명의 여성을 만나게 된다. 일본인 ‘위안부’였던 ‘시로타 스즈코’, 그리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배봉기.’ 두 사람은 ‘강제로 끌려간’ ‘소녀’가 아니었다. 그러나 ‘위안부’ 역사의 또 다른 피해 당사자로서 생생하게 당시의 실상과 폭력을 증언했다.

영화는 묻는다. 시로타 스즈코 씨와 같은 일본인 ‘위안부’ 여성들, 유곽에서 동원되어 온 매춘 여성 ‘위안부’들의 경험은 과연 무엇이라고 이야기 되어야 하는가. 한일 양국에서 반복적으로 ‘강제로 끌려간 소녀’들과 ‘매춘부’를 구분지어 온 과정을 통해 결국 면죄부를 얻어온 것은 과연 어떤 이들인가. 해방 후에도 차마 고향에 돌아올 수 없었거나, 고향에 돌아와서도 평생 낙인 속에 살아야했던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경험은 과연 매춘에 대한 낙인과는 별개의 문제일까.

아내 혹은 순결한 여자와 매춘부, 즉 성녀와 창녀를 가르는 이중규범은 군사주의와 제국주의, 민족주의를 교차하며 전쟁과 외교에 효과적인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또한 이는 여성을 통제하는 강력한 도구로 작동해 왔다. ‘위안부’의 역사가 단지 ‘일제 폭력의 증언’과 ‘민족의 역사’로만 호명되어야 할 때, 정작 그 끔찍한 폭력을 가능하게 한 이 본질적인 구조는 가려진다. 그리고 전쟁과 가난의 틈바구니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강요된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야 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다양한 경험과 연대의 역사 또한 구체성을 잃고 삭제되어 간다.

영화는 그 진실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성노동자들의 삶과 교차시키면서 보여준다. 매춘부였다는 이유로 위안소의 폭력을 증언할 수 없었던 수많은 또 다른 ‘위안부’ 여성들처럼, 성노동을 하고 있는 여성들은 자신들이 삶을 이어가고 있는 그 현장을 떠나지 않으면 자신의 노동 조건과 폭력의 경험을 드러내기가 어렵다.

성노동자에 대한 성폭력은 마치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인 양 이해되고, 해외에서 성노동을 하는 여성들은 ‘나라 망신시키는 년’ 취급을 당한다. 법이 낙인을 강화하고, 다시 낙인이 폭력을 재생산하는 현실에서, 안전한 노동을 위해 필요한 콘돔은 단속의 증거물이 되어 도리어 이들의 안전을 위협한다. 하지만 이제 성노동자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노하우를 직접 계발하고 공유하며, 자신의 삶과 노동에 대한 주체적인 목소리를 모아가기 위해 연대의 움직임들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남성 가부장 또는 국가와 민족에 ‘소속된 대상’으로서 남아있을 때만 ‘보호받을 수 있는’ 자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관리·통제되어 왔다. 그러면서 그 경계와 규범을 벗어난 이들에게는 낙인과 폭력이 당연시되고 만다. 그리고 이 극단적인 남성중심의 이분법은 여전히 여성에 대한 이중의 폭력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남아있다. ‘강제’와 ‘자발’의 프레임이 은폐하고 있는 진정한 폭력의 구조를 발견하고 그 겹겹의 모순된 껍질 속에서 스스로 주체가되고자 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만나기 위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들을 함께 파고들어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나영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적녹보라 의제행동센터장)

27인권해설

인권해설: 위 약관에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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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20만 건. 매일매일 개인정보 유출 소식이 쏟아진다. 그러나 연초 카드사에서 벌어진 1억 400만 건 유출 기록이 경신되면 모를까, 이제는 뉴스가 되지 못한다. 개인정보 유출 소식을 듣고 당신은 어떠하셨는가. “보이스피싱, 걸려 오기만 해봐라” 개그프로에서 본 것 같은 어수룩한 사기꾼들에게 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자신만만하시거나, “어차피 다 유출된 거, 뭐 어때?” 시니컬하고 쿨하게 넘어가시거나. 어느 쪽도 개인이 정신 똑바로 차리면 되는 문제로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들이 주목해서 봐야 할 사실은 이것이다. 왜 요새 개인정보 유출이 기승을 부릴까? 누군가 탐을 내기 때문이다. 해커이건 내부자건 그 정보들을 훔쳐내면 기꺼이 사줄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번성해 있다는 개인정보 암시장에서 그들은 왜 당신의 개인정보를 돈 주고 사갈까? 사기를 치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의 개인정보를 노리는 이들이 불법 시장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도 당신의 클릭을 기다리는 수많은 이용약관들이 모두 당신에게서 개인정보를 가져가겠노라는 내용들이다. 그들은 왜?

단언컨대, 당신을 지배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그들이 옛날 군주나 군인 독재자처럼 당신을 폭력으로 굴복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소비의 늪으로 당신을 인도한다. 당신의 출신, 사회관계, 취향, 당신의 무엇이건 그들은 필요하다. 그 정보의 숲에서 당신이 이 물건을 사야 할 필요를 맞춤하게 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처럼 우리의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회사들은 이 정보들을 다른 이들에게 넘기기도 한다. 개인정보 합법시장의 등장이다.

당신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당신 자신보다 더 많이 당신을 알고 있는 이들의 등장은 정보 인권에 위협적이다. 당신의 개인정보에 대한 결정권이 당신에게보다 권력에 주어졌기 때문이다. 당신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이들은 시장뿐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적 법과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당신이 무얼 생각하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는 국가 권력 또한 그 정보가 필요하다. 물론 그들은 예전부터 당신을 알기 원했으나 인적 감시로는 한계가 있었다. 빅데이터 시대 감시는 촘촘한 기술이 대신해 준다. 그래서 그들은 당신의 사소한 좋아요 하나도 열렬하게 수집하는 것이다.

아직도 감시 문제에 대해서 본인이 떳떳하면 감수해도 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감시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당신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원하는 이들이 당신에 대한 개인정보를 촘촘하게 수집하는 상황을 말한다. 그러니 우리가 감시에 반대하는 이유는 숨길 것이 많아서가 아니다.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 영화는 스노든의 폭로 이전에 만들어졌다. 지금은 간첩 혐의를 쓰고 러시아에 망명 중인 에드워드 스노든이 지난 해 6월 미 국가안보국이 전 세계 인터넷과 통신망을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전에, 그들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이 영화는 낌새를 알아챘다. 감독의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믿고 볼 만 하다.

 

장여경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25인권해설

인권해설 : 22(용기 있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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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예전 일을 기억하지 않죠. 그래서 어르신들도 예전 일을 기억하지 않고요.”

영화 <22(용기 있는 삶)>에서 위안부로 끌려갔던 가족의 말이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이 ‘과거’를 통과한 ‘당사자’만의 몫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기억되기 위해서는 주체의 말을 듣고 기억하려는 자가 있어야 한다. 기억은 기록에 의존하고, 기록은 기억을 넓히고 끊임없이 이야기되도록 한다. 또한 기록은 ‘특정 시점’ 기록이기에 ‘시간의 변화와 듣는 자들’에 의해 변주되고 새로운 이야기로 등장한다. 기록은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아온 사람들을 연결하면서 현재의 문제로 만들 뿐 아니라, 동시대의 문제로 만들어 사회구성원 모두의 것으로 엮는 역할을 한다.

올해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에 위안부 용어와 사진이 사라졌다. 밀란 쿤데라가 “권력에 대한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라고 하였듯이 권력자들이 지우려고 하는 것들 속에 진실이 숨어 있다. 이렇듯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누구의 삶을 어떤 시선으로 남길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때 역사의 추상성을 뛰어넘는 기록이 있어야 개인의 삶이 살아난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록을 접하면서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배상’이라는 추상성이 여러 결로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다가오듯이 말이다. 그래야 ‘과거’만의 일이 되지 않고, ‘그녀’들만의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 사회적 소수자들을 기록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타자화하지 않으면서도, 개개인의 삶과 그 맥락을 단순화하지 않으면서 드러내야 한다. 더구나 기록자와 구술자(화자)의 권력관계, 그로 인한 대상화를 피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기록자의 필터로 걸러진 기억과 이야기만을 듣게 될 것이다. 그래서 기록은 어렵다.

무엇이 인권감수성 있는 기록인지 쉽게 단정할 수 없지만 그 첫걸음은 ‘그/녀’의 이야기를 피해자화하지 않으면서 온전히 듣고 전하려는 시도에 달려 있다.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말했으나 전하기는 어려워하는 그/녀들의 마음을 존중하는 일이다. 용기 내서 말해준 그/녀들의 기록이 퍼지도록 하는 일이다. 아무도 안 보는 기록은 생명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기록과 기억이 생명을 얻으려면 우리 모두의 역할이 필요하다.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

22인권해설

인권해설 : 스레브레니차의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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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동안 대학살(제노사이드)을 통해 고의적으로 절멸당한 사람들이 무려 1억 6700만에서 1억 7500만 명. 채 헤아릴 수조차 없는 거대한 숫자 앞에서 인류가 얼마나 잔학한가, 그리고 잔악해질 수 있는가 새삼 소스라치게 놀란다. 공포와 충격의 역사 앞에서 격분만으론 충분치 않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읽는 순간에도 시리아에서, 나이지리아에서 학살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무엇으로 이 광기 어린 야만과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 있을까?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삶을 위한 죽음의 연구』의 저자 허버트 허시는 기억을 통한 공감만이 제노사이드를 극복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방식은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지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영향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동일한 일이 반복된다면 누가 그런 끔찍한 일에 동참하겠냐고, 나는 절대 아니라고 확신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 속 악행은 광신자나 사이코패스 같은 반사회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가에 순응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보통이라고 여기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벌어졌다. 어리석음이 아니라 사람들의 ‘순전히 생각 없음(sheer thoughtlessness)’이 명령에 동참하고 적극적으로 복종하며 대학살을 불러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맞서는 방법은 온전한 기억으로부터 생각하기와 사회적 공감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은 ‘진공상태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사회적 현상’이다. 가해자들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늘 기억에 대한 조작과 부인, 단절과 망각을 시도한다. 우리 역시 정체성과 세계관, 시공간적 차이,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아 수없이 기억을 편집하고 재구성한다. 온전한 기억이 존립 위기에 처한 것이다. 하여 학살의 진실이 무엇인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자욱한 안개 속에 서 있을 때, 우리를 인도하는 건 생존자들의 증언이다. 학살의 그날을 온몸으로 품고 살아온 생존자들은 그들의 말과 몸, 그리고 침묵 등을 통해 진실의 등불을 밝힌다. 채 삼킬 수도, 뱉어낼 수도 없는 상흔은 우리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며 잊지 말아야 할지 용기내어 증언한다. 제대로 단죄되고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또 다른 학살로 도래할 것임을 예언한다. 더 이상의 참화를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생존자들의 증언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함께 울고 통곡하며,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의 공감으로, 광장의 교훈으로 새겨야 한다. 그 증언을 이으며 새로운 사회적 기억을 써내려가야 한다. 그랬을 때야 비로소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

 

유해정 (인권연구소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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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깨어난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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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하지 않을 책임>

“우리 회사에도 연차라는 게 있었다!” 휴일도 없이 수당도 받지 못하며 십수 년 동안 일했던 생탁의 노동자들은 우연히 회사 취업규칙에서 연차수당에 관한 규정을 발견한다. 지금껏 회사에서는 연차를 쓰지 못하게 했다. 그렇다고 연차수당을 받은 적도 없다.

토.일요일 같은 휴일의 취지는 ‘노동력의 재생산’에 있고, 더 나아가 연차휴가는 ‘노동자의 여가와 문화생활’을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생탁 노동자들의 경우는 그 어느 것도 보장받지 못했다. 십 년 이상 일했다면 회사에서 정한 휴일 외에도 최소 20일의 휴일이 더 있었어야 했다.

인간 노동의 역사는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다. 혹한 노동에 시달렸던 영국의 산업혁명 당시 노동자의 평균수명은 30세 전후였다. 1886년 5월, 시카고에서는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파업에 나선 노동자에게 경찰이 발포해 노동자 4명이 죽고 다수가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튿날 ‘헤이마켓 사건’에 동참한 일부는 ‘급진적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형에 처해졌다. 당시 1일 8시간의 노동은 ‘급진적 사상’이었고, 목숨을 걸고 쟁취한 노동자의 권리였다.

그렇듯 우리는, 우리의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노동시간을 줄여 왔지만 생탁은 달랐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쉬었고, 명절에도 노동절에도 생탁 공장은 돌아갔다. 초록색 생탁병에는 제조날짜를 뜻하는 숫자, ‘5월 1일’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항상 누군가는 제조를 하고 운반을 했다는 얘기다. 휴일 근무를 할 때는 특근수당은커녕 밥 대신 고구마를 먹어야 했다.

1970년대 대도시 양조장 통합정책으로 생탁에는 사장이 41명이나 된다. 특히 장림공장의 사장은 25명, 노동자가 50명이다. 휴일도 없이 일한 노동자 2명의 노동을 사장 1명이 착취하는 이상한 구조다. 결국 노동자들은 “인간답게 일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노조를 결성했다. 생탁 막걸리를 만드는 노동자들은 2014년 4월 29일부터 파업을 시작했다. 너무나도 열악한 현장이었기에 파업 참석률은 거의 100퍼센트에 가까웠다.

하지만 “생산을 완전히 멈췄기 때문에 며칠만 더하면 사장들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할 즈음 회유가 들어왔다. “회사 망하고 나면 파업이 다 무슨 소용이냐”며 하나둘씩 “미안하다”고, 또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현장으로 돌아갔다. 회사는 다수인 어용노조를 내세워서 민주노조에게는 교섭권이 없다고 통보를 했다.

이후 지난한 세월 동안 투쟁이 이어졌다. 부산시청 앞 전광판에서 고공농성도 하고, 제조과정의 비위생 상태를 내부고발하기도 하고, 식약청에 민원도 넣고, 시민사회단체들이 연대하여 불매운동도 하고, 사장 집 앞에서 집회도 하고…. 이 악덕한 기업은 아직까지도 노예가 될 것을 강요하지만, 생탁의 노동자들은 이에 맞서 지금도 길 위에서 싸우고 있다.

 

최고운 (부산반빈곤센터)

32인권해설

인권해설 : 박근혜정권퇴진행동 옴니버스 프로젝트 ‘광장’

인권해설

안간힘 쓰며 살아온 세상의 바닥에 아무것도 없었다. 불평등과 불공정을 버티고 살았던 것은 그나마 규칙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늘구멍만큼이더라도 애쓰다 보면 운 좋게 나에게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그런데 너무 엉망이었던 게다.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자신들이 살아온 세상에 대한 안전망의 부재, 구멍 숭숭 뚫린 체제에 대한 절망을 보게 되었다. 결국 10월 29일을 시작으로 23차례 광장에 모인 1700만 명 시민들은 부패한 권력을 끌어내렸다. 대의민주주의제가 가진 한계를 직접민주주의로 제압했다. 그 광장에 함께 선 미디어작가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시선으로 그들을 재구성했다. 동료시민들은 평등했는가, 무슨 마음으로 광장에 나왔는가, 과거의 광장과 현재의 광장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구호 속에 배제되거나 뒤로 밀린 존재들은 없었는가.

<광장에 서다>는 무대 위에 선 이들의 눈물과 호소를 담고 있다. 광장에 함께 있는 이들에게조차 ‘억울하다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웠던’, ‘살아남아서 죄스러웠던’ 시간을 넘는 용기들이 모였다. 그리고 시민들이 모두 떠난 지하철을 깨끗하게 치우기 위해 광장에 나올 수조차 없는 <청소> 노동자들의 노동을 카메라는 쫓는다. <광장의 닭>은 “동물 혐오 없이도 박근혜를 퇴진시킬 수 있다. 닭은 동료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구호를 들려준다. 바라마지 않는 윤리적 국가(가 존재할 수 있는지는 논외로 하더라도)를 위해서 다른 존재를 배제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설명해준다. <파란나비>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제-사드’가 배치된 김천, 성주 주민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평범하게 살아온 이들이 왜 한순간에 투사가 되어 싸울 수밖에 없는지를 “‘빨갱이’라 불리며 5.18이 이랬구나….”라고  말한다. 파란 나비를 접어 상경하며, 자신의 운명을 자신과는 무관하게 결정하는 국가폭력에 저항하며 싸운다.

<함성들>은 과거의 여의도와 현재의 여의도에서 벌어진 사건과 정물을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날도 어김없이 운행을 시작한 SRT(수서고속철)와 국회 앞에 들어선 뿔 없는 해태상의 이유를 들려주지만, 사실은 관객들에게 질문하고 있다. “세상은 진짜 바뀔 수 있는가?” <누가 청춘을 아름답다 했는가>는 청춘을 소비하는 비-청춘들에게 청춘의 현실을 말하고 있으며 <천개의 바람이 되어>는 개성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의 노래로 시작해,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시선을 찾아가 보려 한다. 감독은 서울광장에서 “계엄령을 선포하라”는 날선 목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현재의 젊은이들은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를 교차시킨다. <시국페미>는 촛불시민혁명 속 여성들의 고민과 이야기를 모았다. 어떠한 문제제기가 있었으며 어떻게 변화했는지 되짚는다. 타자화될 수 있는 존재란 없다. <푸른 고래 날다>는 304명의 희생자를 태운 고래의 꿈을, <조금 더 가까이>는 1/n 혁명의 주인공들이 자신들이 광장에 나선 이유를 직접 말하는 필름이다. 그들의 이유는 비슷하나, 모두 달랐다. 그들이 자신의 이름을 흐르는 물결 같던 행진대오의 필름 위에 덧입혀 말할 때, 그들이 힘이 셌던 이유를 헤아릴 수 있었다.

촛불시민혁명은 새로운 정부의 시작과 함께 일단락을 맺었다.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도 해산선언을 했다. 그러나 역사는 새롭게 시작되고 있지 않겠는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더 많은 민주주의를 향해, 나와 그대가 서 있는 곳은 어디인지 물으며. 이 영화는 우리가 그토록 염원했던 단 한 번의 승리가 가져온 놀라운 경험을 빼곡히 기록하고 있다. 아마 지금보다는 세월이 지난, 오랜 뒤에 더 많이 기억될 이야기들일지 모른다. 지금은, 우리의 현재가 얼마나 위대한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진 (다산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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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노트: 박근혜정권퇴진행동 옴니버스 프로젝트 ‘광장’

프로그램 노트

백만 명이 광장에 모였다. 비슷한 방식으로 억압받았지만, 사실은 아주 다른 삶을 살아온 백만 명이 서 있었다. 우리가 구호를 외치게 된 이유는 모두 달랐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였다.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서로가 모여서 광장은 비로소 힘을 가지고, 역사를 새로 썼다.

그랬던 우리는 광장 이후 어디에 있을까? 세월호, 성소수자, 여성, 장애인, 청소년, 청년, 사드, 비정규직 노동자, 동물권. 그날의 광장을 채웠던 금지된 언어들은 아직 광장에 남아 있다. 때가 오지 않아서, 정권 교체가 우선이기에, ‘나중’으로 밀린 구호들. 하지만 삶의 문제에 위계와 순서를 따지는 광장이었다면, 우리는 정말 ‘함께’ 서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지 못한 채, ‘박근혜 퇴진’이라는 같은 구호를 외친 사실에만 감격했던 거라면 우리는 정말 함께였던 것일까?

이제 한 걸음 내디뎠다. 아직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많은 걸음이 남았다. 촛불 승리로 해결되지 않은 많은 삶이 있다. 광장에 남은 이야기는 무엇인지, 우리는 어느 방향으로 가면 좋을지, 우리를 되새김질하며 다시 생각해보자. 다시, 광장에서 ‘함께’ 마주하고 저항할 수 있기를.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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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팍스콘: 하늘에 발을 딛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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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 이윤 극대화를 위해 국경을 넘나들면서, 저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인권과 노동권 침해도 더 이상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니게 되었다. 물론 헬조선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도 퍽퍽하고 고되기만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도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제품에 스며든 다른 이들의 피눈물을 마냥 외면하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다. 아이폰, 아이패드 등을 조립하는 제조공장인 팍스콘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과연 우리와 무관할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박탈당하고 거대한 기계의 부품처럼 전락해버리는 노동자들, 인간다운 삶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도 잃어버린 채 절망 속에 투신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들 앞에서 우리는 아무런 책임도 없는 것일까.

영화는 말한다. “2010년 아이폰 한 대당 이윤의 58.5%는 애플사가, 21.9%는 원자재 공급업체가, 4.7%는 한국이 가져가고 나면 팍스콘에 남는 몫은 2%에 불과했다”고. “아이패드 한 대당 애플은 150달러(30%)를 먹고 부품공급으로 한국이 34달러(6.8%)를 가져갈 때, 중국 조립라인 노동자는 겨우 8센트(1.6%)를 월급의 형태로 가져 간다”고. 이 지독히도 모순적인 수익분배구조가 팍스콘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미래의 희망을 찾아보기 어려운 절망의 하루하루로 몰아넣고 있다. 기업들은 이렇게 벌어들인 부를, 우리는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선사하는 편리함을 누리고 있다.

인권을 보호할 책임은 전통적으로 국가와 정부의 몫으로만 여겨져 왔다. 그러나 다국적 기업으로 대표되는 자본이 국경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인권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면서, 이 같은 자본에도 책임을 부여해야 한다는 논의가 국제적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제 국제사회는 기업에도 최소한 인권을 ‘존중’할 책임이 있다는 데 합의했다. 자사의 노동자, 작업장 환경, 제품뿐만 아니라 공급망, 지역사회, 환경 등 기업의 영향력이 미치는 모든 영역에서 인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기업을 운영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정부가 인권 보호 책임을 지고, 기업이 인권 존중 책임을 질 때, 소비자이자 시민으로서 우리는 어떤 책임을 질 수 있을까. 내가 일상에서 누리는 편리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 문제를 ‘외면하지 않을’ 책임은 져야 하지 않을까.

나보다 힘든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그래도 낫구나”라고 위안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하면서 “이런 나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라며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난다면, 팍스콘 노동자들이 더 이상 절망에 몸을 던지지 않아도 되는 날을 꿈꿔볼 수 있을 것 같다.

 

강은지 (국제민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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