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인권영화제 :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
프로그램북
우리는 똑같이 아프지 않다.
누군가는 더 아파야 했고, 안전한 공간 바깥에 남겨져야만 했다.
“아프면 쉬라”는 재난문자가 쇄도할 때, 확진자가 발생한 물류센터에서는 당일 오후조가 정상출근했다.
혐오와 낙인으로 온갖 미디어가 요란할 때, 어느 성소수자는 가슴 졸이며 선별진료소에 들어섰다.
긴급 기금을 출연한 기업들이 칭송받을 때, 어느 노동자는 가장 먼저 ‘삭감’의 대상이 되었다.
제약회사의 주식이 치솟을 때, 어느 이주민은 등록과 미등록의 경계를 두고 약국에 들어가지 못했다.
한국의 선진적인 방역을 앞다투어 칭찬할 때, 어느 격리시설에서는 집단감염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있었다.
코로나19의 ‘안전’과 ‘방역’이 나눈 경계 속에서, 누군가는 나머지수로 남겨져야 했다.
생소한 일은 아니다. 코로나19는 그 이전부터도 이미 소외되고 배제되어있던 사람들의 장면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을 뿐이다.
동시에 우리는 똑같이 아프다.
바이러스의 확산과 함께 세계는 애도의 틈도 없이 갈라지고 무너지며 연대를 유보했으나, 오히려 그 속에서 우리는 모두 연결된 한 몸임을 느낀다. 아픈 사람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모두 아프다. 이제 더 이상 아프다는 것은 오한과 발열, 인후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집회 금지 조치로 텅 빈 광장에서, “임대” 딱지가 나부끼는 거리에서, 낙인의 바람이 휩쓸고 간 이태원에서, 타인의 고통이 상상되는 곳곳에서, 우리는 모두 아프다.
아프지 않기 위해 잠시 멈추고 거리를 두라 하지만, ‘잠시 멈춤’이 우리의 삶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멈춰야 할 것은 나의 일상이 아니다. 지금의 혐오를, 지금의 해고를, 지금의 불평등을 멈춰야 한다. ‘거리두기’가 우리의 관계를 차단할 수는 없다. 거리를 둬야 할 것은 지금의 사회적 재난을 만들어낸, 뿌리 깊은 차별과 배제다. 점점 더 많은 존재가 멈추어지고, 점점 더 많은 관계가 차단될 수록, 코로나19의 위기를 만들어낸 불평등의 뿌리는 깊어질 것이다.
코로나19의 ‘극복’은 “신규 확진자 0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이러스의 종식만으로는 이 재난을 극복했다고 할 수 없다.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한 발 물러나는 것만으로는, 어떤 존재를 없애는 것만으로는 이 위기를 이겨낼 수 없다. ‘안전’은 누구의 안전인지, 국가의 ‘방역’이 유보하는 것은 무엇인지 질문해야 한다. 확진자와 사망자의 숫자에 가려져있던 사람과 관계, 장면과 사건을 말해야 한다. 차별과 배제로 인한 위기의 불평등이 우리 모두의 사회적 재난임을 외쳐야 한다. 바이러스가 사라진 세상을 넘어 차별과 배제와 혐오가 사라진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 서로의 이야기를 드러내고, 떠올리고, 기억하며, 우리는 더욱 더 연결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누구도 남겨두지 않겠다.
우리가 상상하고 만들어나갈 세상에서는,
누구도 남겨지지 않는다.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
[코로나19 인권영화제: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는 총 9편의 인권영화를 상영합니다.
‘여는 영화’로 <문 밖으로: 자유를 위한 투쟁>을, 그 다음으로 <컨베이어벨트 위의 건강>, <(테)에러>, <청소>, <야간근무>,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 <멈출 수 없는 청년들>, <사고 파는 건강>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잇는 영화’로 <퀴어의 방>을 상영합니다.청도대남병원 폐쇄병동의 집단감염으로부터, 비로소 우리는 재난 앞에서 평등하지 않고, 똑같이 아프지 않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확인했습니다. <문 밖으로: 자유를 위한 투쟁>을 ‘여는 영화’로 선정한 이유입니다. 각국의 공공의료체계는 부실함을 드러냈고, 택배노동자는 하나둘씩 쓰러졌습니다. 재난은 원래도 더 취약했던 곳을 더 강하게 치고 지나가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