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자와 심지는 ‘동지’라 불리우는 사람들 곁에서, 고운은 코로나 대확산 속에서 숫자로 가려진 사람들의 곁에서, 나기는 친구들을 포함해 세상과 다른 설정값의 공동체에서 질문을 던집니다. 어쩌면 반갑고 어쩌면 차갑게 식은 눈빛일 수 있지만, 쓰는 이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되는 우리 사이의 무언가로 향하고 싶습니다. 질문은 또 새 세상을 향해 있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애도와 기억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애도와 기억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6월 17일 금요일, 다시 한번 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가족과 위중증환자 보호자, 공적 추모를 요구하는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을 준비하는 이들, 음악을 통해 연대하는 문화노동자와 이 자리를 기록하는 미디어활동가들, 그리고 마음을 함께 모은 시민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거리를 행진했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 그러니까 6월 15일에 우리는 한국산연지회 농성장에서 성소수자와 함께 하는 이야기마당을 열고, 두 영화 <내가 싸우듯이>와 <평등길1110>을 상영했어요. 그 후기를 쓰려고 책상에 앉았는데 마침 조합원들의 전면 단식 소식을 전해들었네요. 그 소식을 접하고 보니 왠지 이 후기는 편지여야 할 것 같더라고요. 산연 ‘동지’들에게 쓰는 편지요.
이번 15일 서울시열린광시민위원회에서 서울퀴어문화축제의 시청광장 사용에 대해 조건부 승인을 했다는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신체 과다 노출이나 청소년 보호법상 유해 음란물을 판매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지요. 퀴어의 존재를 오직 성적으로만 다루는 성소수자 혐오적인 처사였습니다. 이 사회는 이렇게나 혐오적인데 우리의 사회는 그보다는 조금 더 평등합니다. 가령 제 정체성을 아는 친구들이나, 제가 하는 사회풍물패나, 이곳 서울인권영화제도 그렇고요. 소수자 혐오적인 사회와 제가 사는 작은 공동체의 차이가 도대체 무엇일지…
목적이나 뜻이 같은 사람, 이것이 ‘동지’의 뜻이라고 한다. 나의 친구는 혐오나 차별 없애기를 목적으로 투쟁한다고 말했다. 자신은 스스로 ‘동지’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함께 싸운다’는 의미를 가리킨다고 했다. 나는 물었다. 모두가 채식을 할 때도 그 이유는 동물해방, 기후 위기, 건강 등 이유가 다양하고 모두 포함될 때도 각각의 정도가 다르지 않냐고. 과연 우리가 운동을 하는 데 있어서 같은 목적이나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데 얼마큼의 가능성이 있을까.
얼마 전, 미국에 사는 친구가 나에게 월경 주기 관리 어플을 쓰냐며, 혹시 쓴다면 어플의 개인정보 취급 방침을 잘 살펴보라며 걱정 어린 조언을 해주었다. 의아해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더니 낙태권을 보장한 로 대 웨이드 대법원 판결이 뒤집힌다면 낙태를 처벌하는 주법이 제정될 것을 우려한 여성들 사이에서 월경 주기 관리 어플의 내용이 낙태죄 처벌에 악용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