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램 노트: 게임의 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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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혐오는 공정성의 이름으로 둔갑한다. <게임의 규칙> 속에는 공정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테스토스테론 주사를 맞는” 트랜스남성 맥이 여자 리그에 있는 것이, “생리하면서 뛰어본 적이 없는” 트랜스여성 안드레아가 여자 리그에 있는 것이 공정하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특정 성별로서의 일상을 살다가 경기에서만 다른 성별로 호명되어야 하는 삶은 누구에게 공정한가. 이들의 게임은 승패를 가르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자살을 시도하는 트랜스젠더 청소년의 비율이 40%에 달하는 세상에서, 이들에게 경기란 오롯이 자신으로서 살아갈 수 있음을 드러내고 증명하는 장이기도 하다. 이는 생존에 대한 이야기다.

<게임의 규칙>이 마주하는 혐오와 차별은 지난봄 한 트랜스여성이 숙명여대 입학을 포기하게 했던 혐오와 차별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여성”의 자리를 “뺏는다”는 말이 담지 못하는 장면들이 있다. 트랜스젠더로서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몸을 견뎌내고 태어날 때 부여받은 성별을 거부하며 자신의 존재를 마주하고 드러내기까지의 장면들 말이다. 공정함도, 권리도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서 만드는 게 아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로 이분된 체계에 부합할 수 있는 “정상성”을 외치는 것은 모두가 지는 게임일 뿐이다.

규정된 몸에 순응하지 않고 존재만으로도 투쟁이 되는 이들이 집에서, 학교에서, 경기장에서, 거리에서 다른 사람들과 만나며 세상을 바꾸고있다. 자신을 “강성 공화당”이라고 말하면서 맥을 응원하는 할머니, 새라와 메이크업 영상을 찍으며 깔깔대는 친구들, 안드레아 덕분에 세상에 나올 용기를 얻었다는 동료 트랜스젠더 선수가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맥이, 새라가, 안드레아가 트랜스젠더로서 오롯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가 뭔지도 몰랐”다던 코치가 자신의 선수와 함께 혐오에 맞서는 동지가 된다. 때로는 치열하게, 때로는 발랄하게. 우리의 저항과 연대는 그렇게 퍼져 나가 거리를 채운다. 그러니 이제, 당신도 우리의 거리를 마주할 차례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20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혐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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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가 죽었다. 미군 병사 펨버튼은 클럽에서 만난 간다가 트랜스 여성이라는 걸 알게 된 후 성매수 과정에서 그녀를 죽였다. “‘그것’이 고추를가지고 있는 게 화가 나서 죽였다”는 그의 해명을 누군가는 ‘정당한 살인이다’는 말로 옹호했다. 법원은 그의 해명을 수용했고, 그는 처벌받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간다의 죽음은 결코 단순하게 독해할 수 없다. 혐오와 폭력은 그 대상과 형태를 바꾸며 유구하게 반복되어왔다. 그녀의 죽음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철저히 트랜스 혐오에 기반했고, 간다는 자신의 정체성이 밝혀져 폭력과 혐오에 노출될까 봐 자신을 숨겨야만 했으며, “울롱가포에서 미군이 저지른 범죄는 단 한 번도 처벌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식민지 청산 이후에도 온갖 제도를 통해 필리핀에 대한 구조적 영향력을 행사해왔으나 게이 아들을 둔 간다의 언니는 자기 아들에게도 혐오범죄가 일어날까 봐 공포에 떨어야 했다.

간다의 어머니는 성인이 된 간다에게 간다라는 이름을 주었다. ‘예쁜’이라는 뜻의 이름. 누군가에겐 라우데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는 간다라는 이름으로 남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던 사람. 그런 간다가 죽었다. 누군가는 울분을 토했고 남겨진 이들은 그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자기 앞의 위험과 맞닥뜨려야 했으나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애써 그 폭력을 수호했다.

그래서 간다의 가족과 친구들은 거리로 나왔다. 거리엔 간다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성과 정치와 계급과 특정한 언어로는 환원되지 않는 복합적인 폭력으로 가득 찬 세계는 간다를 죽음으로 내몰았으나 그 세계의 폭력성을 밝히고자 투쟁하는 이들 역시 이 세계에 존재했다. 누군가는 남겨지고 누군가는 떠나가고 누군가는 배제되는 세계의 논리에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느끼는 이들. 폭력적인 구조에 얽혀있는 혐오를 드러내고자 거리에 나와 광장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이 거리에 있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21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우리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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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은 통제를 위한 공간이다. 모든 것은 관리하기 쉽게 통제된다. 밥 먹는 시간, 취침시간, 옷, 외모, 그리고 성별까지도. 이미 트랜지션 중이었든 수감생활 동안 남성으로 정체화했든 상관없다. 여자교도소에 있는 모든 재소자들은 ‘여자’여야 한다. 나는 남자라고 아무리 말해도, 심지어 서류상으로 남자여도 여자 교도관에게 알몸 수색을 받아야 한다. 수염을기를 수도, 처방 받아오던 호르몬을 맞을 수도, ‘나의 이름’으로 불릴 수도 없다.

여성들의 공간에 침범한 남성들은 공포의 대상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웬걸. 여자교도소에 있는 트랜스 남성들은 공포의 대상이 아닌 욕망의 대상이다. 재소자들 중 가장 실세인 여자만이 이 남자들을 차지할 수 있다.

오히려 살아남기 위해서 여자교도소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남성’이 되어야 한다. 같은 공간에서 누군가에게는 여성되기를, 누군가들에게는 남성되기를 요구받는다. 왼쪽 아니면 오른쪽, 남자 아니면 여자로 나누려고 하는 감옥 시스템은 이러한 현실 앞에서 우습게 느껴진다.

브라질에도 LGBT 재소자들을 위한 제도는 있다. 그러나 법을 어긴 자들은 법에 의해 보호받을 자격이 없다는 논리는 너무나도 쉽게 이들의 시민성을 빼앗는다. 시민으로서의 지위를 빼앗긴 공간에서 트랜스 남성들은 건강, 안전, 정의 그 무엇도 보장받지 못한다. 사회의 성별 체계에서 벗어난 몸 자체가 규율의 대상이 되고 처벌 대상이 된다. ‘트랜스’이기때문에 감옥에 온 것이 아님에도 ‘트랜스’인 것에 대한 처벌까지 같이 받는다. 감옥 안에서 교도관들에 의해 허락된 성별밖에 될 수 없기 때문에, 나로서 살겠다는 최소한의 권리조차도 빼앗긴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이 트랜스 남성들의 요구는 분명하다. 트랜스 남성으로 감옥에 왔으니, 트랜스 남성으로 수감생활을 하게 해달라는 것. 이들은 오로지 두 개로만 나뉜 공간에서 오롯이 자신으로 존재함으로써 저항한다. 왼쪽과 오른쪽. 두 줄 간의 사이, 그 거리에 있는 그대로존재하는 이들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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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뚜렛히어로: 나의 입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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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연의 관객으로서 거부당한 경험은 제스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타자가 되는 경험에 맞서, 제스는 베케트의 희곡 <내가 아니야>를 해석하고 무대로 옮긴다. 제스는 극의 주인공 ‘입’을 장애의 경험이 축적된 여성으로 정의한다. 그렇기에 제스가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는 서로 다른 삶의 경험을 공유하는 소수자들이 함께 있다. 제스는 ‘입’과 자신의 경험, 그리고 이들의 서사를 만나게 한다. 이로써 소수자로서 마주해야 했던 차별의 경험을 재해석하고, 제스는 자기 안의 서사를 찾아가며 새로운 ‘입’을 탄생시킨다.

무대에서 장애를 보여준다는 것은 단순히 손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경험을 가지고 와야 하는 것이다. 장애의 경험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는 사회는 장애를 고립시킨다. 그러나 제스의 말대로 다름은 아름답고 우리는 함께 행동할 때 강하다. 제스가 탐색하는 ‘입’은 그러한 “다름”의 경험들을 드러내고 마주하게 한다. 무대는 그렇게 “함께” 하는 “행동”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세세하게 말하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이 영화가 누구나 차별 없이 접근 가능한 작품이 되길 염원하며 만들어졌으리라는 것을 알게 한다.

거부의 경험은 우리 자신이 마치 ‘극복’되어야 하는 존재인 양 생각하게끔 만들지만, 우리는 속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제스가 그러했듯 나의 존재를 드러내고, 배제되었던 경험을 말하고 나눔으로써 우리의 세계는 확장된다. 때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이렇게 우리의 세상을 확장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이 바뀔 수 있냐고, 너희가 어떻게 세상을 바꾸냐고묻는 이들에게 답한다. 우리를 마주하라! 우리의 존재와 이야기가 바로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증거가 될 테니까.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15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유어 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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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상파울루에서는 버스비 인상 계획에 맞서는 청소년들의 무상 교통 실현 운동이 민중의 연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2015년에는 무상교육을 외치는 공립학교 통폐합 반대 운동이 일어난다. 거리로 나온 청소년들은 공립학교 통폐합 반대만을 외치지 않았다.

브라질 정부가 너무나도 쉽게 공립학교를 없애겠다고 발표한 배경에는 그동안 집적된 차별이 있다. 폐쇄 예정인 공립학교는 주로 빈곤한 지역에 있고, 이러한 지역에는 버스비도 제대로 마련하기 어려울 정도의 최저임금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가족들이 살아간다. 투쟁을 함께하는 청소년들은 자신이 겪어온 불평등의 역사를 마주하고, 지금 이 사회는 달라져야만 함을 외친다. 결국 이들의 운동은 빈부격차와 성차별, 인종차별 등 그동안의 불평등이 만들어온 세상을 바꾸기 위한 저항이 된다.

이들은 거리에서 경찰의 무력과 맞서기도 하고, 학교를 점거하기도 하고, 스스로 교육의 장을 만들기도 한다. 학교에서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페미니즘을 배우고, 아프리카계 고유의 방식으로 머리를 다듬어준다. 학생들의 정치는 나쁜 것이라고 했던 가르침을 뒤집고 스스로 조직을 꾸려 투쟁을 이어 나가기도 한다. 교육받아야만 하는 존재로 남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유어턴>은 언제나 ‘미래의 희망’으로 유보되던 존재들이 지금, 여기에서 마주하는 차별과 배제에 저항한 역사다. 서로를 보듬고 서로에게 힘을 불어넣으며 이들은 외친다. “저항은 우리 본능이라고요.” ‘나중에’를‘지금 함께’로 바꿔내는 힘, 새로운 세상을 그리는 유쾌하고 단단한 상상력이 우리의 거리를 채운다. 지금도 누군가의 운동이 저마다의 시공간에서 다양한 색으로 세상을 바꾸고 있다. 비록 미세한 움직임일지 몰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행동한다. 그렇게 조금씩, 이 세상은 다채롭게 물든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17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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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5일 한국에서 관측된 지진 중 가장 큰 피해를 준 5.4 규모의 지진이 포항에서 발생했다. 많은 사람이 피해를 당했고 언론에서는 그 내용을 다루었다.

아수라장이 되었던 그곳에는 동생에게 몸을 의지해서 대피하던 시각장애인도 있었고, 사람들을 뒤따라 걷지만 어디로 가는지 도무지 알 수 없던 청각장애인도 있었다. 대피 할 수 있는 문은 활짝 열려 있었지만 혼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문밖으로 대피할 수 없었던 지체장애인도 있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지진만이 아니다. 재난은 지금껏 사회가 숨겨온 불편한 진실들을 여실히 드러냈을 뿐이었다. 우리는 이미 코로나19라는 재난을 통해서 그동안 사회가 소수자를 어떻게 배제해왔는지 알게 되었다.

K방역은 ‘정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영역이다.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약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나, 생계를 위해 출근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에게는 자가격리와 같은 지킬 수 있는 방역수칙이 허락되지 않았다. 사회적거리두기는 활동지원이 필요한 장애인의 생활을 제한했다. 재난은 고려대상이 아닌 존재들을 외면하는 한국사회를 여과 없이 보여줬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을, 나를, 서로를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계속해서 공적 지원의 확장을 논함과 동시에 공공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을 한없는 연대로 메워나갈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함께 세상을 살아낸 방식이며, 세상을 조금씩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간 방식이므로. 누구도 남겨지지 않는 그 날까지, 우리는 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19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문 밖에서 잇는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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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자유다. 그게 당신이 길을 잃은 이유다.”

정신장애인 시설에서 나오게 된 사람들의 목표는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것들이었다. 구속 없는 하루를 보내는 것, 결혼과 출산이라는 버겁고 벅찬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가족을 갖는 것, 둘만의 장소에서 지내는것, 그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정돈된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 누구에게나 당연히 주어졌어야 할 일상이었다.

“법이 모두에게 평등하다면, 저한테도 평등해야죠.”

왜 누군가는 끊임없이 법과 평등과 자유의 이름으로부터 배제됐으며 오롯한 자신의 공간마저 지니지 못했나. 때때로 사회는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말로, 혹은 정신질환자도 ‘정상’이 될 수 있다는 말로 치료와 격리를 강요했다. 그러나 시설 안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빼앗겼다. 나의 공간을 꾸려나가는 일이나 나에게 맞는 노동환경을 조성해가는 것처럼 평범한 삶의 궤적에 오르고자 할 기회를 빼앗겼다. 사회가 주목한 것은 우리의 질환이 가져올 혹시 모를 위험이었지 우리의 삶이 아니었다.

사회가 정신장애인에게 정상의 기준을 들이미는 한, 격리와 수용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적 집단으로 바라보는 한, 사회는 격리수용소의 거대한 확장판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탈시설은 단순히 ‘격리해제’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수용소의 논리’는 불편한 것들을 한데 묶어 어느 한켠에 숨겨두면 끝이라 여기고는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함께’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끝없는 의문이다. 정신질환을 가지고 살아가기 위해선 약물치료를 너머 어떤 사회적 지원이 마련돼야 하는지, 시설의 밖에서 어떻게 오롯한 삶을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담론이다.

“다 괜찮아질 거예요. 전 제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점점 나아진다는 것. 물리적 탈시설을 경험한 슬라바코는 위와 같이 증언한다. 점점 나아지는 삶을 경험한다는 것, 그리고 점점 나아지는 삶을 꾸려간다는 것. 탈시설은 수용소의 논리에 대한 정면의 도전이다. 숭고한 개인의 사소한 일상을 위한 위대한 도약이다. 그러니 감히, “정신장애인에게 삶을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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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혜나, 라힐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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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민족’, ‘순수혈통’, ‘단일 민족’. 오랫동안 한국의 민족성을 대표해온 단어들이다. 수많은 외국의 침탈로부터 한국을 지켜낸 정신이기도 하다. 하지만 2020년 한국의 거리를 둘러보자.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거리에 있다. 다양한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한국에 자리를 잡아 살아가기 시작한 건 오래된 일이다. 2018년 다문화 가구원은 이미 100만명을 넘어섰다. 이는 한국 총인구에서 2%를 차지하는 수이다.

혜나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아빠와 한국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국에서 태어난 후, 지난 24년 동안 같은 질문을 받아왔다.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어느 순간부터 혜나는 자신이 한국인임을 설명하기를 포기했다.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순간 질문 세례를 받기 일쑤기 때문이다. 질문을 한 사람들은 답을 들은 뒤 홀연히 사라진다. 그 자리에 남는 찝찝함과 불쾌함을 감당하는 것은 오직 혜나의 몫이다. 어떤 이들에겐 금방 잊혀질 대화들은 혜나의 가슴에 오랫동안 남는 상처가 됐다.

요즘 혜나에겐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아들 라힐이의 미래가 자신의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라힐이는 사람들의 질문 세례를 어떻게 감당하며 살아갈까. 사람들의 시선과 질문이 변하지 않는 한, 혜나의 미래도, 라힐이의 미래도, 라힐이가 낳은 자녀의 미래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매일 외국인이냐는 질문을 받고, 외국인이 아닌 이유를 대답하면서 비슷한 소외를 경험하고 피로를 겪을 것이다.

사람들은 혜나의 정체를 묻고 혜나는 해명 대신 존재로 답한다. 사람들이 멋대로 긋는 경계를 딛고 혜나는 말한다. “그냥 다 같이 섞여서 있는, 다 같은 사람이잖아” 한국인과 한국인 사이. 거기에 혜나가 있다. 아무런 판단도 필요치 않는, ‘평범한’ 가족이 있다. 끝없는 질문을 멈추고 혜나를 마주하라. 이젠 우리가 혜나의 질문에 답을 할 차례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21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보이지 않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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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1. 2019년 기준 한국에서 재학 중인 탈북청소년의 수이다. 여기에 학업을 중도 포기한 청소년의 수까지 더하면 약 3천 명의 탈북청소년이 한국에서 살고 있다. 탈북청소년의 입국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15년 이후부터는 그중에서도 제3국 출생 청소년이 다수를 차지하게 됐다.

중국, 라오스, 몽골 등의 국경을 넘고 넘어 한국에 도착한 탈북민이 가장 먼저 가는 곳은 국정원이다. 이후 하나원에서 3개월간의 적응 교육을 끝내면 전국 각지로 퍼져 ‘한국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한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탈북청소년의 이야기다.

탈북이주민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내용은 조금 다르다. 말투, 사용하는단어, 언어 등 그들이 갖춘 외부 조건들은 한국 생활에서 단순한 ‘차이’가 되지 못한다. 그것들은 실시간으로 이들이 북한 출신임을 드러내고 ‘북한 출신’이라는 딱지는 이주민 그 이상의 의미가 된다.

‘북한사람의 피’를 가진 것만으로도 한국에선 ‘사상 검증’의 대상이 된다. 근거 없는 편견과 한국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는 ‘레드 컴플렉스’는 탈북이주민의 정착을 한 번 더 위태롭게 만든다. 때문에 탈북민은 한국 국적을 취득한 후에도 ‘한국인’으로 보이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못한다.

홀로 앉아서 시간을 보내야 했던 체육 시간. ‘한국말을 잘 몰라서’ 배울수 없었던 수업 시간. 자기소개서에서 ‘북한’이라는 단어를 지웠을 때 비로소 받게 된 ‘합격통지서’. 한국을 경험할수록 탈북청소년들의 고민은 깊어진다. 자신의 북한 정체성을 지워야만 한국에서 살 수 있는 건지. 여전히 생생한 북한의 기억을 간직한 채로 한국인이 될 수는 없는지. ‘이쪽’임을 증명하라는 세상의 요구가 가혹하기만 하다.

‘동포’를 믿고 국경을 넘은 이들이, 이 땅에서 살기 위해 또 한 번 높은 벽을 오른다. 차별과 편견이 쌓은 ‘배제의 벽’. 그곳엔 자유를 약속하는 사회도, 타자를 환대하는 ‘사람’도 없다. 이것이 벽 뒤에 감춰진 ‘진짜 한국’이다. 국민의 자격을 따지는 국가는 자유롭고 안전할 수 있을까? 모든 구성원이 행복한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16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혼란 속에서 마지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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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땅이 보이는 칼레에는 매일 시리아를 탈출한 난민들이 찾아온다. 트럭이나 배에 숨어서, 또는 해협을 헤엄쳐 결국 영국으로 가려는 이들이다. <혼란 속에서, 마지드에게>는 이러한 난민 당사자들이 핸드폰과 카메라로 직접 찍은 영상들을 모아 엮었다. 이 영화에서 펼쳐지는 ‘나’의기억은 곧 난민들의 기억이다.

기억은 죽지 않는다. 기억은 자꾸 엉킨다. 폭격으로 목숨을 잃은 동생 마지드에게 전하는 말은 이 기억을 함께 가지고 있는 모두에게 전하는 말이 된다. “잊자, 잊자” 읊조리지만 전쟁의 기억을 거둘 수 없다. 폭격이 이어지는 고향 다마스쿠스를 살아서 탈출했지만 “내가 런던에서 다마스쿠스를 찾을 수 있을까” 되물어야 한다. 폭격에 세상이 흔들리던 기억도, 발코니에서 흘러나오는 커피 향에 대한 기억은 모두 오롯이 나의 것이다. 포탄이 날아오는 소리, 흔들리는 시야, 지저귀는 새, 나뭇잎에 스치는 바람의 결까지 생생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살아서 겪어내야 했던 장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 반복되는 창공과 새, 바다의 이미지는 새로운 터전과 미래에 대한 염원이기도 하면서 떠날 수 없는 고향과 그 기억들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모든 장면들은 영화를 마주한 이를 집어삼킬 듯 혼란스럽다가도, 무수한 추억이 깃든 ‘나’의 고향에 스며들게 한다. 그렇게 <혼란 속에서, 마지드에게>는 시리아를 떠났지만 다른 땅에 닿지 못한 수많은 마지드에게 보내는 편지가 되고, 수많은 마지드를 기억하는 기록이 된다.

이 기록이 시리아에서, 시리아 바깥에서, 또 다른 전쟁의 공간 안팎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나’와 마지드에게 치유의 힘을 전할 수 있기를.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15프로그램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