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디아의 나무> 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유치원을 운영하고, 힘들 때면 마당 한 편의 나무 옆에 앉아 사색에 잠기는 파디아는 현재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에 살고 있다. 그는 언젠가 고향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꿈꾸며 가본 적 없는 집을 그린다. 언덕 위의 집, 동쪽으로 난 문 옆에는 큰 나무, 그 나무를 보러 올라가는 파디아… 집이 모두에게 중요하듯 파디아도 고향에 돌아가길 열망한다.

파디아 가족의 고향은 한때 팔레스타인 마을이었지만 이스라엘에 점령당한 사사(Sa’sa’)이다. 파디아가 지내고 있는 레바논의 남쪽 국경과 맞닿아있는 마을이라 거리상으로는 매우 가깝지만, 파디아의 팔레스타인 여권으로는 이스라엘 체크포인트를 넘어갈 수 없어 그가 고향에 갈 수 있는 길은 없다. 이토록 가깝고도 먼 집을 바라만 보며 파디아는 애가 탄다.

영국인인 감독은 이런 파디아의 대리인으로서 귀향길에 오른다. 파디아가 그에게 부탁한 것은 다름 아닌 할아버지의 나무를 찾는 것. 감독은 한정된 정보로 더듬더듬 나무를 따라가면서 파디아의 고향이 철새 이주에 중요한 지점이라는 사실도 접한다. 얼마나 멀리 떠나든 본능적으로, 경계를 넘나들며, 또 반드시 집으로 돌아오는 새들을 보며 관객은 단순히 주거라는 기능을 넘어서 집이란 어떤 의미일지, 누군가를 이동하지 못하게 막는 경계는 어떻게 그어지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영화별 상영 시간표

스틸컷1. 창문 너머 콘크리트 벽을 바라보는 파디아의 뒷모습.
  • 2022년 09월 08일 14:00
54프로그램 노트

<2차 송환> 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어떤 이들에게 ‘한국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반도 분단의 역사 속에서 북한 출신의 전향 장기수들은 수십 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그 후에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이들에게 ‘집’은 일상의 공간이 아니라 그리움의 공간이다. 바랜 사진 속에서나, 희미한 기억 속에서나, 어쩌면 텔레비전 속에서나 만날 수 있을 그곳. “내가 날아간다면 저만큼만 가면 내 고향인데, 고향에도 산 사람이 있을까” 하고 하염없이 그리게 되는 곳.

이들은 언젠가 통일이 되면 고향에 가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지만, ‘통일’은커녕, ‘송환’은커녕, 일시적인 ‘금강산 관광’마저 불발된다. 그뿐일까. 국가보안법의 세계에서, 이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미친놈들” 취급을 받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나라를 망친다”는 소리도 듣는다. 옥살이를 하고 나온 세상에서, 이들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다.

물론 이들에게도 ‘이곳’ 남한에서의 일상이 있고, 희로애락이 있다. “웃을 줄도 알고, 울 줄도 알고, 화도 낼 줄 아는” 이들은 서로의 집에 놀러 가고, ‘만남의 집’에 모이고, 폐지를 줍고, 텃밭을 가꾸고, 피아노를 치고, 글을 쓴다. 글씨도 못 쓰고 받침도 틀리지만 계속 쓰려고 한다. 그것이 그들 스스로를 ‘표현’하고 서로가 이야기를 나누는 방법이기에.

2004년 <송환>의 개봉 이후 주인공 김영식은 영화에 대해 “미국에 대한 비판이 부족하다”고 평한다. 김영식에게서 ‘집’을 빼앗은 것은 열강의 놀음일 터이나, 이들에게 집을 돌려줄 수 있는 열쇠를 쥔 것 역시 그 열강이라는 점은 얄궂다. 영화 <2차 송환>을 상영하는 2022년 현재, 생존해 있는 2차 송환 신청자들의 평균 나이 91세. 국내외 정세는 악화일로로 치닫고, “언젠가 이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긍정적으로 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들과 함께 ‘분단’과 ‘통일’을 이야기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영화별 상영 시간표

스틸컷1. 녹색 식물이 가득한 마당. 김영식 선생이 돋보기로 작은 나무의 이파리를 들여다 본다.
  • 2022년 09월 15일 16:00
50프로그램 노트

<빠마> 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니샤는 맞닥뜨리는 게 참 많다. ‘결혼 이주 여성’에 관한 잘못된 편견, 출산에 대한 압박, 니샤가 지니는 문화에 대한 존중은 없으면서 강요되는 ‘며느리’의 모습, 차별과 무시. 니샤는 어떻게 해서 이 상황을 지내왔을까. 니샤는 끝내 이 모든 걸 감당하게 하는 장소에서 “씨발”이라 외치고 자리를 박차며 나간다. 그는 시간이 흐른 뒤, 탈(脫) 하지 않고 있었던 장소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곳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다. 니샤가 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다른 인물들은 성찰하게 되며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힘을 얻는다. 니샤는 세상 너머를 그렸지, 세상을 탈(脫) 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세상을 탈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고향을 떠나 한국에 정착한 결혼 이주 여성의 상황이라면 또한 그럴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하는 것들도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이지, 이곳을 탈출해 우주에 둥둥 뜨며 살기를 바라는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우주 쓰레기처럼 내가 내던져진 것인지 내 힘으로 나온 것인지도 모를 것 같다. 우리는 관계로 엮인 존재들이다. 어느 관계는 자의든 타의든 단절되기도 하지만 모든 관계를 끊고 살기란 어렵다. 단절만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복합적인 상황과 감정을 폭발시키는 니샤의 탈(脫)은 일시의 적막 속에서 성찰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고 안정되게 한다. 관계는 그와 같이 계속해서 만들어진다. 또한,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행동을 하기에 대해 의미를 새긴다. 모두가 처음부터 자신의 자리에서 이탈하는 방식으로 싸우려는 건 아닐 거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는 강력한 힘에 부딪혀 상황의 요구와 선택에 따라 우리 자리를 내걸게 된다. 그러나 우리, 누군가의 자리가 강제로 빼앗기지 않도록 연대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에 힘써보자. 그렇게 세상을 벗어나려 하지 않고 여기서 같이 세상을 바꾸는 일에 힘써보자.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영화별 상영 시간표

스틸컷1. 니샤가 웃으며 자전거를 타고 있고 뒤에서는 남편이 자전거를 밀고 있다.
  • 2022년 09월 22일 19:00
58프로그램 노트

<로힝야를 거닐다> 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우리는 함께 로힝야 난민 캠프를 거닌다. 세상에서 제일 큰, 60만 명의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난민캠프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밥을 짓고, 공을 차고, 빨래하고, 글을 배우며, 기억을 말하고, 카메라를 응시한다.

2017년 8월 많은 로힝야족이 버마를 떠났다. 학살이 있었고 그 와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 실종된 사람이 많았다. 캠프에는 생존자들이 모였고 캠프에 오기 전, 학살이 있기 전의 기억들이 모이게 되었다.

그 기억들은 마치 유령처럼 사람들 사이를 배회한다. 칼람은 이 캠프에는 시공간이 없다고 말한다. 시공간이 사라진 곳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지 물으면서, 그 자리에 사람들의 기억을 채운다. 상실, 분노, 절망, 그리움, 비극의 기억이 스며든다.

이들의 존재는 이 기억을 끌어안고 구성된다. ‘고향을 잃은’, ‘학살 또는 전쟁을 경험한’ 혹은 ‘이전의 삶을 극복하는’의 수식만으로는 구성되지 않는 존재다. 칼람도, 캠프의 다른 로힝야 난민들도 ‘유령’ 같은 기억을 각자의 방식으로 꺼낸다. 이들이 이야기를 잇는 것은 기억을 꺼내는 작업이기도 하며, 동시에 기억을 만들어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결국 관객들은 그 이야기를 따라가며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계속해서 구성해나가고 있음을 포착한다.

그 기억은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칼람도, 다른 로힝야 난민들도 이 기억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신 이를 오롯이 끌어안고 담담하게 말을 건넨다. 총격으로 인해 움직일 수 없게 된 다리를 매만지기도, 꿈속에서 검은 유령이 길을 가로막기도, 밤이 되면 그저 눈물이 흐르기도, 계속 어떤 비극을 파고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밥을 먹고, 그러다가 날이 밝고, 그러다가 기도를 올린다.

어떤 사람의 존재는 지나온 삶의 기억으로 구성된다. 그 기억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존재는 달라지기도 한다. <로힝야를 거닐다>의 이들은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말을 건네고, 그로써 기억을 꺼낸다. 관객을 만나며 이는 기억을 만드는 작업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계속해서 자신의 존재를 만들어 나가는 스크린을 마주한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영화별 상영 시간표

스틸컷2.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 위에 여러 사람들이 서있고 그 너머로 노을이 보인다.
  • 2022년 09월 22일 20:10
50프로그램 노트

<명: 우린 같지만 달라> 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영화는 성미산마을의 퀴어청소년인 노똘복(노: 노랭, 똘: 똘추, 복: 복순)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퀴어청소년을 만나 서로 ‘다른’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만남을 성사하기 위해 SNS뿐만 아니라 직접 거리를 돌아다니며 포스터를 붙이고, 이렇게 모인 사람들이 한자리에서 스스로 퀴어임을 자각하는 순간, 커밍아웃, 안전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때로 이들이 이야기보다 음식에 집중하는 것 같아 관객은 웃음이 나기도 한다.

노똘복의 용기 있는 행동이 유달리 대단해 보이는 한편 그들 자신을 자신으로 존재하게 하려는 몸짓으로도 느껴진다.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정체성을 지켜나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므로 옆에서 지지해줄 주변인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서로 마주한 적 없는 존재들이 모여 내가 나로서 있게 하는 노똘복의 경험은 퀴어문화축제에 모인 이들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혐오와 차별, 때로는 무지와 무관심을 뚫고 전국 각지의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의 동료이자 앨라이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서로의 존재는 큰 힘이 되고 새로운 세상으로 연결되는 감각을 선사한다. 안전감, 자신에 대한 존중, 억압된 에너지의 발산. 드디어 만났다는 안도와 환희 속에 견고하고 쉽게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사이. 영화에서도 제한된 현재의 세상이 아니라 새 세상으로 시선을 돌리는 힘을 보여준다. 직접 소통하며 전국 각지의 퀴어들과 연결된 세상. 멀지만 가까운 곳에서, 맞이할 새 세상과 서로를 지지하는 존재들을 보여준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영화별 상영 시간표

명 우린 같지만 달라의 스틸컷. 귀여운 그림체로 무지개 앞에서 사람들이 춤추는 모습이 그려져있다.
  • 2022년 09월 23일 17:20
60프로그램 노트

<코리도라스> 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박동수는 22년간 시설에서 지내며 50여 편의 시를 썼다. 그는 시 안에 미움도 고통도 없는 아름다운 나라를 건설했다. 그러나 시설을 나온 후 그는 어째서인지 예전만큼 시를 자주 쓰지 않게 된다. 의아해진 박동수는 자신의 과거를 하나씩 되짚으며 ‘시’의 의미를 찾아 나선다. 그의 기억을 따라 한 뇌성마비장애인의 시간과 관계들이 드러난다. 삶의 고뇌는 자신의 몫이겠지만 결코 홀로 지내지 않는 일상들이 삶 곳곳에 있다.

요즘 박동수는 매일 활동보조인 진산과 만나 바깥 외출을 한다. 종종 친구들과 다른 활동보조인도 만나고 술자리도 같이하며 서로의 인생을 함께 지낸다. 시설에 살 때는 어떠했던가. 공간 자체가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함께 살 수 없다고 선을 그어놓은 곳이 아니었던가. 시설에도 장애인을 돌보는 비장애인은 있었으나 그 관계가 동료시민으로서 동등하지는 않았다. 박동수의 세상은 한 건물 안에 격리되었고 그가 겪은 일련의 사건들은 아주 불평등했고 부당했다. 사람이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을 때, 존재의 목소리에 귀를 닫을 때 어떤 관계는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단절되었고 세상은 단절되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박동수는 말한다. 시설에 있을 때는 희망도 없고 앞이 깜깜한 느낌이었다고. 그래서 시로 다른 세상을 만들었던 것 같다고. 시설에서 나온 지금 시는 박동수의 유일한 탈출구가 아니다. 공간이 바뀌자 관계의 방식이 바뀌었다. 그의 인생을 따라, 시의 의미가 재정립되는 과정을 따라 관계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추억과 사람이 쌓인다. 그는 마치 들판에 새처럼 둥지를 벗어나 연결의 공간으로 삶을 확장한다. 진산과 마을주민, 시장 상인과 미용사,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 그의 세상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도 박동수가 있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날짜별 상영 시간표

    영화별 상영 시간표

    스틸컷1. 박동수가 어항에서 헤엄치는 코리도라스를 바라본다.
    • 2022년 09월 23일 17:50
    51프로그램 노트

    <바스티안> 프로그램 노트

    프로그램 노트

    우리가 수많은 타인에 둘러싸여 사는 존재임을 상기하는 일은 새삼스럽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로서의 우리 자신, 그 새로운 것 없는 주제야말로 영화 <바스티안>이 집요하게 따르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데도 <바스티안> 속 “어느 가족”이 보여주는 풍경에 관객은 매료당하고 마는가.

    영화는 감독의 사촌과 그 주변 인물들을 따라간다. ‘안드레아’로 불리던 사촌은 몸의 변화를 겪으면서, 스스로 ‘남자아이’ 같다고 느끼면서,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트랜스’라는 말이 자신을 잘 설명해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느 크리스마스 파티 날, 그는 감독에게 자신을 ‘다비드’로 소개하며 연이어 다른 가족들에게도 모두 그와 같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선포한다. 온 세상에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겠노라고. 그 순간 감독은 결심한다. 어른이 될 때까지 ‘너’를 찍겠다고. 그렇게 영화가 시작된다.

    나를 새로운 이름으로 불러달라는 요청은 ‘정확하게 사랑받고 싶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에 대한 응답으로부터 시작되는 ‘정확한 사랑’이야말로 변화 내지는 성장의 토양이다. 성장은 안드레아에서 다비드로, 다비드에서 바스티안으로 변하는 주인공만의 것이 아니다. 영화에는 계속 생일, 크리스마스, 핼러윈, 이렇게 무언가를 축하하거나 기념하는 ‘특별한’ 날들이 등장한다. 그 속에서 나이를 먹어가고, 점차 ‘어른’이 되어가는 바스티안을 보여주면서, 매번 ‘새로이 태어나는’ 주변 인물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 변천의 태도는 자연스러운 듯 애쓰는 듯한데, 관객으로서 그 ‘애씀’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전국을 돌며 트랜스에 대해 강연을 하는 바스티안의 아버지에 대해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He is reborn with you.” 이 말을 “너의 아버지는 <너와 함께> 다시 태어났다”로도 바꿔 보고, “너의 아버지는 <너로 인해> 다시 태어났다”로도 바꿔 본다. 수용과 인정과 환대의 경험 속에서, 바스티안과 그 가족은 다시 다른 누군가를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다. “미래의 트랜스 학생들”, 그러니까 자신의 ‘후배들’을 위해 길을 닦고 싶다는 바스티안. 그렇게 바스티안과 그 가족은 세상과 만난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날짜별 상영 시간표

    2022/09/21 수

    영화별 상영 시간표

    • 2022년 09월 21일 20:00
    54프로그램 노트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파업 긴급인권보고서

    소식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파업투쟁 긴급인권보고서

    “진수를 가로막는 자 누구인가” – 정부, 산업은행, 대우조선해양의 책임을 묻는다

    ▼보고서 바로 보기 (아래 표지 이미지를 클릭해주세요.)
    사진. 발표회 모습. 사회자와 발표자들이 일렬로 앉아있다. 사회자의 뒤에서 수어통역사가 통역 중이다.
    사진. 발표회 모습. 오른쪽부터 인권운동공간 활 기선, 다산인권센터 랄라,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이광훈,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김혜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노동위원회 이용우. 수어통역사 명혜진.
    67소식

    [활동펼치기] 서인영은 지금 절찬리 프로그래밍중

    소식

    서울인권영화제 전체회의가 진행중이다. 패드에 활동가들의 줌 화면이 떠 있다.

    치열했던 상영작 선정 과정을 마치고 숨을 돌리기도 잠시, 서인영은 6월부터 본격적으로 영화제 기조 논의와 프로그래밍에 돌입했습니다. 하나하나의 영화를 보고 상영을 할지 말지 판단하는 선정 과정과는 다르게 좁게는 이번 영화제에 출품된 작품의 전반적인 경향부터 넓게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까지 고루 고려해야 하는 과정이라 개인적으로는 회의가 갈수록 어려워지는데요… 지금 인권 영화 창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일까, 서인영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관객분들이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고민하는 요즘입니다.

    먼저 프로그래밍이 뭔지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요, 프로그래밍의 주된 과정은 섹션 구성입니다. 섹션 구성으로 영화들을 서로 엮어 각 영화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를 보완하고 강화할 수 있습니다. 프로그래밍 회의로 깨달은 것은 상투적으로 들릴 순 있겠지만 섹션 구성하는 법에 정답은 없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같은 주제를 다룬 영화끼리 엮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영화의 톤을 고려하기도 하고, 영화를 어떤 틀로 해석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 섹션을 구성했다가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일도 빈번한데요, 결국은 각 영화가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한 작업인 것 같다는 생각에 대충 하기 어려운 작업인 듯합니다. 이후에는 섹션에 알맞은 이름을 붙이고 나름의 순서를 정해서 섹션을 배치합니다. 이렇게 점점 영화제 전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구체화됩니다.

    영화제가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가 바로 영화제 기조이고 이를 한 마디로 담아낸 것이 슬로건일 텐데요. 프로그래밍이 영화 자체에 더 신경을 쓴다면 기조 논의에서는 우리 영화제가 놓인 현시대 상황을 더 고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화 자체의 내용보다는 지금 우리는 어떤 생각과 감정으로 한국 사회를, 이 지구(!)를 살아가는지 이야기 나누며 정리합니다. 논의 중 한가지 공통된 이야기가 있었다면 희망이 희미해질수록 더 힘 나고 전복적인 문장을 찾자는 말이었습니다. 4년 만에 광장으로 돌아오는 영화제인 만큼 서인영 활동가와 관객분들 모두가 공감하고 힘을 얻을 수 있는 슬로건이 탄생하면 좋겠습니다.

    광장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7월 회의에서 중요한 것은 또 있습니다. 바로바로 마로니에 공원 사용 신청입니다. 그런데 7월 첫째 주 회의를 앞두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링크를 클릭하고 제가 마주한 것은… 9월에 마로니에 공원 사용이 어렵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얼떨결에 장소 물색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요, 사실 다른 영화제처럼 실내 상영을 하거나 입장료를 받는다면 장소를 찾는 일이 그렇게까지 어렵진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서인영은 단순히 영화제일 뿐 아니라 상영을 통한 활동이라는 점에서 광장에서의 무료 상영 원칙은 어떤 일이 있어도 타협할 수 없는 원칙입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영화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장애인 접근권 고려도 필수적이고요. 여러모로 최적의 장소였던 마로니에 공원을 놓아주기 어렵지만 (ㅠㅠ) 저희의 원칙을 포기하지 않으며 다른 공간을 찾고 있습니다. 영화제 장소 선정까지도 허투루 하지 않는 서인영을 응원해 주세요. 무사히 여러분을 9월에 뵐 수 있길 바라며 저희는 하던 대로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미나상

    57소식

    [함께나눠요] 영화 <딩동> 보기를 제안하며

    소식

    작은 눈을 가진 사람이다. 어깨까지의 상반신이 찍혀 있다. 검은 배경.

    장애인은 분명히 내가 선 이곳에 존재하는데 내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차별의 흔적이다. 그래서 나는 한때 장애인 친구가 생기는 꿈을 꾸었다. 장애인 친구가 생긴다는 건 비장애인인 나의 가까이에, 장애인을 만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기회들이 있다는 거니깐. 그리고 그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공존하는 세상을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꿈은 말 그대로 ‘한때’였던 것 같다. 내가 선 곳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분리하고 ‘장애’와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동떨어진 일로 생각하게 했으니깐. 무관심했으리.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장애인 동료가 생겼다. 그의 장애를 알게 된 건 옆에 있는 문자통역사의 존재와 조금 늦은 반응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별로 회의를 하는 때에 그의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맞닿으며 문자통역사의 자막 없이 그와 내가, 우리가 소통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문자통역사가 도착하기 전에 그가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주고받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사람마다 장애의 모습이 다양하다곤 생각했는데, 실제로 마주하니 도통 알 수 없겠더라.

     

    서로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 그가 SNS를 통해 나의 동네에 놀러 가도 되냐고 물었다. 조금 당황했는데, 나를 사실 당황케 한 건 그가 가진 장애가 무엇인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둘이 만나면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는데, 선뜻 그에게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가 동네에 도착하기 몇 분 전쯤에야 겨우 메시지로 물었는데, 그의 답은 “함 만나서 알아볼까요?”였다. 내가 조급했고 우리의 만남을 두려워했다는 걸 그때 느꼈다.

     

    ‘장애’와 ‘장애인’에 대해 알고 지내고자 하는 마음은 실제 그에 대한 이해와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되게 막연하게 장애인은 장애에 대한 불편을 겪는다고 생각하고, 그들은 항시 불행한 삶을 보낼 거라고 믿으며, 장애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는 게 조심스럽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본다. 앞선 경험에서 나의 조심스러움은 내 곁에서 찾기 어려운 장애인의 존재와 같은 차별의 흔적이지만, 나와 ‘조금’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오기 때문에 내 안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분리하고 차별하는 무언가가 되는 건 아닐까? 좀 더 일찍 그에게 “어떤 소통 방법을 이용하면 좋을지” 물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한다.

     

    영화 <딩동>은 관객에게 장애와 장애인을 얼마나 마주하는지 묻는다. 그리고 여러 장애인과 장애인 주변인의 짤막한 이야기를 보이고 들려준다. 나의 경우, 장애를 가진 사람과 만나는 경험은 흔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애인과 장애와의 만남은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꼭 필요하다는 걸 장애를 가진 동료와 나눈 이야기를 통해 느꼈다. 그래서 나는 초인종 벨인 ‘딩동’ 소리와 함께 장애와 장애인의 삶과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고 제안한다. 영화에 담긴 이야기에 비추어 자신의 마음속 ‘장애’와 ‘장애인’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외자

    68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