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리고 싶은 것>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그림책에 들어갈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만으로 겪는 난관을 보여 준다. 이 운동이 현재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말해 준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1992년 1월 8일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를 열고 있으며, 일본 정부에 계속 문제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수요시위는 ’위안부’ 피해자들과 시민사회단체, 여성과 학생, 일반 시민 등 다양한 사람이 성별, 국적, 연령의 경계를 넘어 인권과 평화를 외치는 연대와 교육의 열린 공간으로 발전해 왔다. 2011년 12월 14일 1000번째 시위에서는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평화비(소녀상)’를 세워 세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2013년 5월 1일 현재 수요시위는 1072번째가 되었다. 또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위안부’ 문제의 진실과 평화의 메시지를 후세에 알리기 위해 박물관을 건립하려 서대문 독립공원 안에 부지를 마련했다. 그러나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는 이유로 광복회 등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시민들의 기부와 9년간의 준비 끝에 성미산 자락에 터를 마련해, 2012년 5월 5일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을 개관할 수 있었다. 이곳은 ’위안부’ 생존자들이 겪은 역사를 기억하고 교육하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하는 공간이다. 지금도 계속되는 전시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대하며, 전쟁과 여성폭력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려 행동하는 박물관이다. 최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침략의 역사를 부인하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까지 정당화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일본에서 극우화 움직임이 점차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깜깜한 어둠은 새벽이 올 징조라 믿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계속 나아가고 있다. 선지은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 상임활동가
인권해설: 잔인한 내림
인권해설
2013년 봄,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동아시아의 갈등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가 지나간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역사’임을 되새겨 준다. ‘대동아공영권’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일본 보수 우익의 ‘오래된 염원’은 침략의 역사를 부정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만주국의 주역이며 A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의 손자, 아베 신조 수상에게 할아버지의 역사를 복권시키고자 하는 욕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역사인식은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던 그 시대로부터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았다. 흔히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로 여기지만, 오늘도 일제 침략이 남긴 상처와 싸워야 하는 시대의 증인들이 여기 있다. 한국원폭2세환우회 한정순 회장.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핵폭탄의 피해를 입은 어머니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대퇴부 무혈성 괴사증’이라는 희귀병을 천형처럼 안고 태어났다. 그녀의 다섯 오누이들도 원인 모를 병으로 고통의 세월을 살고 있다. 1945년 8월 6일의 히로시마에 있었던 식민지 조선의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로부터의 ‘잔인한 내림(遺傳).’ 그러나 그 고통은 그녀에게서 끝나지 않고, 잔인하게도 뇌성마비를 안고 태어난 자신의 아들에게로 이어졌다. 얼마 전에 태어난 손주를 안고 즐겁게 웃으면서도 그녀가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할 가슴 한 켠 불안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을까. “50년이 넘도록 살면서 흘린 눈물만 해도 말라도 다 말랐지 싶다.”던 그녀는 자신과 같이 고통을 겪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당당한 활동가로 거듭난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비키니, 체르노빌, 후쿠시마의 피폭자들과 연대의 손을 잡은 그녀. 식민지 지배로 비롯된 자신들의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하고, 두 번 다시 자신들과 같은 피해자가 없도록 탈핵과 평화로 나아갈 것을 호소하는 그녀의 외침에 나는 그리고 한국 사회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를 기회로 일본을 앞질러 핵발전소를 수출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천박한 인식에는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야스쿠니의 역사인식을 비판하고, ‘독도는 우리 땅’이라 굳게 믿는 그대 곁에는 오늘도 식민지 지배의 상처를 현실로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해방이 되고 67년이 지나도록 원폭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법률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않은 대한민국은 오늘도 기만적인 원전신화를 만들어 내며 야만의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히로시마와 후쿠시마 그리고 ‘한국의 히로시마, 합천’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할 것인가? 그녀의 절절한 호소에 이제는 당신이 응답할 차례이다. 김영환 (평화박물관 활동가)
인권해설: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인권해설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자의 존재가 가시화된 진 얼마 안 되었다. 사람들이 아는 동성애자라야 국내외 유명 연예인 몇 명으로 한정되어 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평범한 군인이, 교사가, 회사원이 커밍아웃을 했다가는 해고를 당하거나 각종 사회적 불이익을 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은 쉽게 커밍아웃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평범한’ 동성애자를 만나기가 한국에서는 무척 드문 일이다. 노년의 동성애자를 만나기란 더더욱 그렇다. 그래선지 동성애자의 인권을 이야기할 때도 노인 동성애자는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도 분명 한국 사회 어디에선가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프랑스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세계대전 때 태어나 급속한 사회 변화와 프랑스의 68혁명을 경험한, 그리고 현재의 프랑스를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노인 동성애자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동성애자인 것이 알려져 직장에서 쫓겨나 시골에 들어가 농장을 짓고 ‘같이 사는 두 여자’로서 평생을 살아온 할머니 커플, 평범하게 결혼해 애를 다섯을 낳고 키우다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자기 정체성을 깨닫고 낙태권 옹호 운동을 펼치기도 했던 할머니, 어릴 때부터 남자 친구들에게만 끌리는 자신이 어딘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설명할 언어를 가질 수 없었던, 동성애가 정신병으로 분류되던 때를 살아낸 할아버지 등 다양한 노인들을 보여 준다. 이들은 남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열심히 사랑하며 살아왔고, 주어진 환경에서 더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좌절할 때도 있었지만 어떻게든 살아왔다. 노년에 이른 이들은 젊은 시절보다는 더 여유 있어졌다. 앞서 세상을 뜬 연인들의 사진을 벽에 걸어놓고 추억하며 미소 짓기도 하고, 장성한 자식들과 함께한 식탁에서는 누구도 서로의 생활 방식을 비난하지 않기로 하는 규칙을 정해 놓아 항상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상처투성이의 젊은 날은 덮어 두고 자연과, 동물과 깊은 교감을 나누며 살아가기도 한다. 자신을 힘들게 했던 사회의 편견과 냉대에 대해서도 농담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나이가 많이 들어 예전만큼 성생활을 즐길 수 없게 된 점을 서글퍼 하기도 한다. 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사회에서 살아왔다면 지금 더 행복해져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래도 지금,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편안한 표정으로 과거를 추억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안심이 된다. 인간의 생존력은, 행복해지는 능력은 대단하기에, 나도 그렇게 살아나갈 것이기에. 박혜정 (번역가)
인권해설: 라즈 온 에어
인권해설
화면 속의 라즈는 매력적이다. 하지만 당신의 현실에서 라즈는 어떠한 존재일까” 다른 존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영상과 현실에 따라 나뉜다. 영상에서 보는 존재들은 낯설지만 씩씩하고, 외롭지만 열심히 살고 있는 존중받아 마땅한 우리 주변의 소수자다. 하지만 그들이 현실에 나타난다면? 많은 다큐멘터리가 그렇지만, 다큐멘터리는 보통의 존재를 화면의 프레임 안에서 보여 주곤 한다. 하지만 그 보통의 존재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간 순간 그 존재는 특별한 단 하나의 존재로 재발견된다. 트랜스젠더라는 존재도 다르지 않다. 사람들에게 트랜스젠더는 낯설고 어색한 존재일 수 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에서 트랜스젠더를 보고 난 순간, 트랜스젠더는 ‘그 트랜스젠더!’가 되며, 특정한 존재로 거듭난다. 그런데, 그 특정한 존재로 누군가 느끼게 된 “그 트랜스젠더!”가, 본래에는 우리 주변의 보통의 존재라는 것이다. 주변에서 만나는 수많은 친구와 아는 사람들의 무리에 트랜스젠더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평범하며, 그들은 다양하며, 그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너무 뻔하고 흔한 말이지만, 더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그 말은 당연하다. 그런데 아직도 사람들에게 트랜스젠더의 존재는 낯설기만 하다. 사람들은 주변의 수많은 ‘여자’가 키도, 몸도, 얼굴도 제각각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주변에 트랜스젠더가 있다면?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모든 전제 조건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무감각한가? 어떤 트랜스젠더는 열심히 살지만 남자 같은 외모로 치마를 입고. 어떤 트랜스젠더는 아주 예쁜 여자인데 되지도 않는 저음을 내기 위해 노력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들을 ‘나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더라도 ‘불편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모든 트랜스젠더의 존재가 불편하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불편하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트랜스젠더이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불편해 하는 어떠한 “표현”을 끊임없이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정체를 쉬이 알지 못하니 그냥 쉽게 “트랜스젠더”라고 생각해 버리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트랜스젠더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 특별한 다른 사람이 아니다. 차이로 차별을 하진 말라.” 하지만, 이번엔 다른 말을 하고 싶다. “트랜스젠더는 우리와 다르지 않다. 어떤 사람은 정말 좋고 어떤 사람은 불편하다. 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성격적인 면’인 것이지 ‘트랜스젠더이기 때문’은 아니다.” 캔디.D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인권해설: 2의 증명
인권해설
코이 마티스는 미국 콜로라도 주에 사는 6살 소녀다. 코이는 생물학적 남성의 표지를 가지고 태어났으나, 자신을 표현할 수 있을 시절부터 스스로 여성으로 정체화하였다. 지금 여권과 주 발급 신분증명서에 코이의 성별은 여성으로 기재되어 있다(미국은 연방 차원에서 2007년부터 여권 및 기타 공문서상 성별 변경에 대해 성전환수술에 대한 입증을 요구하지 않으며, 성별전환을 위한 적절한 임상적 치료를 받았음을 입증할 것만을 요구한다). 초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코이는 어느 날 학교로부터 더 이상 여자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다는 통지를 받았다. 코이의 부모는 2013년 2월, 콜로라도 주의 차별금지법에 근거하여 학교 당국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렇게도 어린 나이에 학교라는 공간에서부터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은 녹록하지 않다. <2의 증명>은 나의 존엄성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로 산다는 것은 어떠한 일일까. 특히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남녀는 유별해지고 서로 다른 교복을 입게 된다. 남중고 혹은 여중고를 다닌다고 가정해보라. 나의 다른 젠더표현에 대해 뒤에서 동료들이 수군수군하는 걸 느낀다. 내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학교는 곧 지옥이다. 학업을 지속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이렇게 되면 교육받을 권리란 유명무실해진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시작이다. 새 핸드폰을 구매하고 개통할 때, 은행 창구에서 당신의 신원을 확인할 때, 구직을 위해 이력서를 제출할 때, 나는 끊임없이 거부당한다. 국가에게 내가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국에서 트랜스젠더의 공부상 성별변경은 2006년 대법원 결정 이후 가능해졌다. 대법원은 ‘종래에는 성별을 생물학적인 요소에 따라 결정하여 왔으나 근래에 와서는 생물학적인 요소뿐 아니라 개인의 해당 성별로의 귀속감, 사회적으로 승인된 행동·태도·성격적 특징 등의 성 역할을 수행하는 측면, 즉 정신적·사회적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한다’고 하며, 호적법 제120조 ‘성별정정’ 절차에 근거하여 가족관계등록부상 성별변경을 허용하는 예규를 만들었다. 이 예규는 다양한 요건과 서류를 요구하고 있지만, 핵심적인 것은 정신과적인 성전환증 진단, 외과적인 성전환 수술, 생식능력의 상실 이 세 가지이다. 하지만 이는 의료계의 임상적 경험칙에 어긋나는 획일적이고 과도한 의료적 개입이며, 개인의 신체의 완전성에 대한 침해 행위다. 요그야카르타 원칙 제3조는 ‘법 앞에서 인정받을 권리’의 내용으로 “성별정체성에 대한 법적 승인의 요건으로서 성전환수술, 불임, 호르몬 치료를 포함한 의료적 시술이 강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세계성전환자보건전문가협회(WPATH)는 임상 경험을 통해 많은 성전환자들이 수술을 받지 않더라도 그들의 성별 정체성을 안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표현하고 있으며, 성전환과 관련한 수술은 어떤 사람에게는 의료적으로 필요하지만 모든 성전환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즉 그 누구도 성별 정체성을 인정받고 신분증을 정정하기 위해 수술을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사회 현실, 알려진 과학·의학적 지식과 합의를 법이 따라가지 못한다면 ‘법 지체(law lag)’다. 대법원 예규의 요건과 별도 입법의 공백을 지금 이대로 두는 것은 한국의 트랜스젠더들에 대한 국회, 대법원의 책임 방기이면서 동시에 적극적인 인권 침해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를테면 계약법이 상거래 현실과 합치하지 않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특히 당시 대법원 결정의 취지인 ‘성전환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향유하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가 오히려 크나큰 장벽으로 작용한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이미 그들에게 인생의 많은 시간은 그렇게 지나버렸다. <2의 증명>은 제도의 장벽과 주변의 시선에 좌절하는 한 개인의 기록이다. 당신이라면 이 삶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류민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인권해설: 너를 위해
인권해설
<너를 위해>는 십대 레즈비언 커플의 연애 이야기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 커플의 연애담은 아주 달달하지만 애달프고 슬프기까지 합니다. 십대라고 해서, 레즈비언이라고 해서 연애를 별다르게 하는 건 아닌데도 말이죠. 그저 둘이서 눈 마주치고 손 꼭 붙잡고 둘만 아는 시답잖은 이야기나 하루 종일 종알종알 지저귀면 그게 연애지 별 게 있겠습니까. 이 커플도 이렇게 달달한 연애를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커플이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공간인 학교의 친구들이 이들의 연애를 알아챕니다. 이때부터 이 커플에게 학교는 동성애혐오성 괴롭힘을 직면하면서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텨나가야 하는 치열한 공간이 돼버립니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는 이 커플과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는 십대 내담자들을 종종 마주합니다. 이들의 고민 속에서 성적 지향과 성별정체성 이슈에 대해 학교가 우호적인 공간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늘 목격해왔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겪은 것처럼 폭언, 폭행, 따돌림 등 또래 친구들의 동성애혐오성 괴롭힘, 이러한 괴롭힘을 방관하거나 조장하는 교사, 학생인권조례에서조차 필사적으로 사수해내야 하는 ‘성적 지향’이라는 차별금지사유 등 반인권적인 무수한 사례들을 우리는 슬프게도 쌓아 왔습니다. 2013년 4월 30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유네스코가 펴낸 <(가제)동성애혐오성 괴롭힘 없는 학교를 만들기 위한 교육정책(원제: Education Sector Responses to Homophobic Bullying)>이라는 책의 한국어 번역판을 교사, 행정가, 정책입안자, 학부모, 학생, 시민단체, 그리고 교육에 몸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하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 메시지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안전해야 마땅할 학교나 교육기관 등에서조차도, 학생들과 교사들이 동성애혐오로 인한 폭력과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청소년들은 자유롭고 평등하며, 온전한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며, 보호와 존중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너를 위해>는 십대들이 직접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영화의 만듦새를 따라가다 보면, 영화를 보는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어떠한 노력들을 해야 하는지 고민의 싹을 틔울 수 있을 것입니다. 십대라는 이유로 자기결정권을 무시당하지 않도록,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혐오와 차별을 겪는 일이 없도록, 십대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긍정하고 두텁게 고민하면서 자긍심을 길러 나갈 수 있도록, 그러니까 영화 속 주인공들이 자신들의 연애를 달달하게 이어나갈 수 있게 말입니다. 권선의 (한국레즈비언상담소 활동가)
인권해설: 옥탑방 열기
인권해설
감염인과 비감염인 사이의 외나무다리를 건너자 나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사무국장이다. 10년째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많은 HIV/AIDS 감염인을 만났다. 대부분은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에서 활동하면서였다. 매년 12월 1일 에이즈의 날을 맞아 열리는 감염인 인권 주간 관련 행사나 간담회 또는 기자회견 및 집회를 통해 감염인을 만났다. 그때마다 가능한 한 친구사이에서 활동하노라 밝힌다. 하지만 그들을 친구사이 사무실에서 직접 만나기는 사실 쉽지 않다. 이런 이유에서다. 동성애자 커뮤니티 내에서 HIV/AIDS 감염인을 타자화하는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동성애자 친구들 중에 감염인이 있다거나 자주 가는 클럽, 바에도 감염인들이 갈 수 있고, 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스스로가 안전한 성행위를 하고 있는 주체이고, 그것을 상식으로 여겨 자신이 감염되거나 또는 감염인을 만날 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남성 동성애자 HIV/AIDS 감염인은 동성애자 커뮤니티에 자신이 감염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길 원치 않는다.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만나 왔던 친구와 소원해질 수 있고, 본인의 의도, 사실과 상관없이 잘못된 소문들이 퍼질 수도 있어서다. 그래서 가능한 한 감염인들은 감염인 커뮤니티를 통해 친구를 만나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다. 가장 친밀하게 지낼 수 있는 관계인데도, 에이즈를 바라보는 잘못된 시선과 감염인이라는 낙인이 주는 고통 때문에 감염인과 비감염인 사이에 건너기 힘든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는 듯하다. <옥탑방 열기>는 그 다리를 건너야 한다고 믿는 영화다. 감염인이라고 섹스 할 수 없는 이유는 없다. 그 다리를 건널 수 있는 방법은 나도 깊게 고민할 문제고, 우리가 함께 풀어 가야 할 숙제다. 이종걸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
인권해설: 청춘유예
인권해설
이상한 나라가 있다. 헌법에 단결권이 보장되어 있지만, 노동조합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온갖 해괴한 질문에 답변해야 하고 소송까지 해야 하는 나라.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행복해질 자격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나라. 그렇지만 일을 하고 대출까지 받지 않으면 대학을 다닐 수 없는 나라. 대출이자를 갚지 못하면 신용불량자가 되고 마침내 제대로 된 어떤 일자리도 얻을 수 없는 나라. 30분 피자 배달에 목숨을 걸어야 하고, 법률이 보장하는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고, 당연히 받아야 할 주휴수당조차 착취당하는 나라. 그리고 이 나라에 앨리스가 있다. 착하지만 약하고, 상식적이지만 억압당하고, 꿈이 있지만 끊임없이 좌절해야 하는 앨리스들이 있다. 이들 앨리스 앞에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지만, 이들은 착하기에, 상식적이기에, 꿈이 있기에 기어코 서로 손을 맞잡고 이 벽에 맞선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승리들을 일구어 낸다. 거대 프랜차이즈를 상대로 주휴수당을 쟁취해 내고, 법원에서 노조 설립 판결을 얻어 낸다. 작은 승리지만, 너무나 벅찬 승리였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승리를 맛본 사람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 작은 승리가 가져다주는 벅참과 기쁨이, 그것이 가져다주는 성과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 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의 삶에 얼마나 활력이 되고 어떤 행복을 안겨 주는지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명랑운동회에서 앨리스들이 던진 신발은 이상한 나라의 거대한 벽을 향한 발길질이다. ‘결사의 자유로도 충분한데 왜 노조냐?’ 하는 생뚱맞은 질문에, 앨리스들은 ‘그럼 당신들은 결사 하쇼, 우리는 노조 할래요!’라고 당당하게 맞받아친다. 이 ‘이상한 나라’의 이름은 대한민국이고, 착한 앨리스들은 우리의 젊은이다. 이들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에, 결국 승리할 것이다. 아니 이미 승리하고 있다. <청춘유예>의 선언이다. 김종서 (배재대학교 법학부 교수)
인권해설: 따뜻한 밥
인권해설
지금 한국의 병원에서는 ‘건강권’을 둘러싼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환자에게 은근히 권해지는 검사와 치료들, 누군가에게는 열려 있고 누군가에게는 닫혀 있는 응급실 병상의 존재는 과연 병원에서 건강과 이윤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를 묻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영리병원을 만들고 민간보험회사를 키워서 의료산업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노골적으로 언론에 오르내리고, 급기야 돈 못 버는 병원은 없어져야 마땅하다는 정치인이 전 국민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병원 밖으로 잠시 눈을 돌려, ‘해고는 살인이다’는 문장을 생각해 보자. 맞다. 해고는 살인이었다. 일할 권리를 잃어버린 사람이 수없이 죽음 앞으로 떠밀려갔음을 우리는 알고 있고, 비정규직이라는 굴레가 목숨을 앗아 가기 쉽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건강권은 아파서 병원을 찾는 사람들에게만, 병원에서 치료받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닌 것이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 보자. 1990년대 말부터 비정규직, 하청, 파견 노동자가 확산되었고, 병원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끊임없이 ‘핵심업무’와 ‘비핵심업무’를 구분해 나갔고, 비핵심업무로 규정된 시설관리, 급식, 주차관리, 진료보조업무 등을 외주화했다. 입원환자를 돌보는 간병업무는 특수고용직으로 채워 나갔다. 어느 병원의 시설관리업체에서는 10년 일한 노동자가 갓 입사한 노동자보다 저임금을 받는 경우도 생겼고, 어느 병원에서는 비정규직으로 고용하기 위해 1년마다 진료보조노동자를 갈아치우는 일도 생겼다. 어차피 세상이 그렇게 된 지 오래이니 병원이라고 특별할 것도 없지만, 일할 권리를 빼앗기면 건강을 잃는다는 사실을 병원에서 확인하는 상황이 씁쓸할 뿐이다. 그런데 병원에서 대규모로 형성된 비정규직 노동자의 존재는 또 다른 물음을 제기한다. ‘핵심업무’와 ‘비핵심업무’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무균시스템이 구축된 수술실, 환자 치료에 활용되는 최첨단 장비들을 관리하는 노동자들의 업무는 핵심적이지 않은가? 안전한 재료로 균형 잡힌 식사를 환자에게 제공해야 하는 급식노동자들은? 입원환자와 24시간을 함께하면서 의료진과 소통해야 하는 간병 업무는? 이런 노동자들이 1년마다, 2년마다 갈아치워져도 과연 환자의 안전과 건강에는 문제가 없는가? 병원 로비에서 농성하는 식당노동자들을 비난한 한일병원 환자들은, 병원 급식의 외주화 문제가 자신의 건강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일하는 사람의 건강권과 치료받는 사람의 건강권이 만나는 어느 지점에 <따뜻한 밥>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김동근 (사회진보연대 보건의료팀)
인권해설: 村, 금가이
인권해설
단양쑥부쟁이라는, 남한강을 따라 사는 한반도 태생의 2년생 풀이 있다. 무리지어 가을에 자줏빛 꽃을 피우고, 맺은 씨는 이듬해 싹이 튼 후 그 해가 다 갈 때까지 커 봐야 한 뼘이 되지 않는다. 비옥한 땅에서는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 생존을 위해 척박한 자갈밭을 삶터로 택했다. 그렇지만 댐이 만들어지고 홍수라는 강의 복원 기능이 상실되면서 이런 여건의 땅이 줄어들고 결국 멸종위기종이 되었는데, 강을 처참하게 파괴한 4대강사업은 단양쑥부쟁이들을 아예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그래도 이들은 한때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는 점에서 댐 수몰민들보다는 나아 보인다. 1조 원을 넘게 들여 모래강 내성천에 짓는 영주댐 사업은 4대강사업 중 단일사업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반면 목적은 불분명하며, 그 파괴성은 매우 심각한데도 4대강 본류 공사가 아니기 때문인지 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2009년 4대강사업 추진 논란 속에 국토부는 영주댐을 전광석화로 밀어붙였고, 400년 전통의 금강마을을 포함한 511세대는 졸지에 수몰민 처지가 되어 버렸다. 평생 농사만 짓다가 폭삭 늙어 버린 촌로는 갈 곳이 없다. 내 땅 한 평 보상받아서 다시 농사지을 땅 한 평을 살 수 없는 현실에서, 대문 열 것도 없는 위아래 집에 찾아가면 밥 주고, 커피 한잔 권하며 말동무해 주는, 그런 이웃이 없는 도시의 집은 이들에게는 시간이 멈춰 버린 감옥일 뿐이다. 보상비는 도시의 아들 딸 사위 며느리에게 돌아가고, 결국 어느 쓸쓸한 자리에서 막걸리로 소일하다가 세상 떠나는 것이 유일하게 남겨진 시간임을 알기에 조상을 파내고, 고향을 가슴에 묻고 떠나야 하는 심정은 말없이 억울하고 허망하다. 금강마을 앞 비단여울 계곡에서 봄의 절정을 알리던 연록의 왕버들도, 분홍빛 산벚꽃도 모두 요란한 전기톱에 베어져 나가고, 강 따라 달리던 기차들도 떠나 버린 지금 영주댐 수몰 예정지 곳곳은 마치 전쟁 뒤의 폐허 같다. 주민들의 고통을 알고 함께하는 것은 운명을 같이할, 먹먹히 흐르는 내성천뿐이다. 지난 3년간 금가이 사람들과 함께 숨 쉬어 온 강세진 감독의 <촌, 금가이>에서 보여 주는, “이곳에서 살수만 있다면 못 추는 춤을 열아홉 번이라도 추겠다”는 미동할매의 유일한 소원은 결코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인가? 공익이란 미명을 내건 댐 국책사업을 따라서 사람들이, 수백 년의 문화가, 한반도 고유의 아름다운 모래강이, 그리고 그 강에 깃들어 사는 귀한 생명들이 사라져 간다. 박용훈 (강 사진기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