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애국시민 사관학교

인권해설

현역입영 또는 소집 통지서를 받은 사람이 정당한 사유 없이 입영일이나 소집 일부터 다음 각호의 기간이 지나도 입영하지 아니하거나 소집에 응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병역법 제88조 제1항)

대한민국 현 병역법에 따르면 자신의 신념이나 양심에 근거해 병역의무를 거부하는 것은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없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병역을 이행하는 것 이외에는 선택지가 제공되지 않아, 매년 300명에서 500명의 청년은 병역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1년 6월형을 받고 감옥에 수감된다. 1년 6개월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의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기 부적절하다고 판단되어 징집대상에서 제외된다. 다시 말해, 이들은 2등 국민이 되면서 병역의무를 상실한다. 병역의무를 다하지 않고서는 국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는 없다.

영화는 교련과목으로 주니어 ROTC 프로그램을 선택한 또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14세에서 17세 청소년들을 조명한다. 이 프로그램은 청소년 훈련생들에게 미국 시민으로서 국가에 봉사하고 이와 동시에 자기 계발 역량을 향상할 수 있는 것으로, 군대에 입대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미국 국방성 펜타콘과 지방정부, 학교는 서로 연결되어 이 프로그램이 적극적으로 이행될 수 있도록 긴밀하게 협력한다. 주니어 ROTC 프로그램은 애국심이 풍성한 일등 시민이 되고, 군복을 입는 것이 미국을 대표하는 것임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입대하는 것이 정당하고 올바른 길임을 알리는 모습이 마치 대한민국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애국시민’이 되기 위해 ‘일등시민’이 국가에 봉사하는 가장 빠른 길은 전쟁터에 나가 싸울 준비를 하는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과 국방부가 교육의 공간을 장악해 청소년들에게 군대에 입대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주입하는 미국은, 결국 국가안보 강화를 위해 국가에 충성할 수 있는 선택받은 국민을 가려내고 그렇지 못한 국민을 배제한다. 한국은 병역을 거부하는 청년을 감옥에 가두고 전과자로 낙인을 찍으며 사회에서 배제한다면, 미국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배제당한 사람들에게 군대가 유일한 탈출구임을 피력한다. 소위 ‘정상적이고 남성적인’인 국가안보가 당연시되고 이에 저항하는 개인들과 반군사주의 문화를 ‘비정상’으로 취급하고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는 주체로 규정한다. 적대감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이런 움직임은 더 나아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된다. 한국과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군사안보가 강화되고 있으며, 무기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또한, 국가와 결탁해 배를 불리는 군수산업체는 급격히 성장하고 있고 그 규모는 점점 더 비대해지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타인을 적으로 규정하고 혐오와 적대감을 먹고 자라는 이런 군사문화는 개별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소수자를 색출하고 배제하며 차별하는데 그 기반을 형성한다. 이를 증명하듯 이민자와 난민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며, 이는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병역거부를 인권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다. 이는 한 사회 또는 국가가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개별의 존재와 공동체에 대해 어떤 철학을 가졌는지를 보여주며, 그 사회가 얼마나 군사화되어 있는지 그 척도를 제시한다. 또한 강력한 국가안보에 기생하며 자본과 결탁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군수산업체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주니어 ROTC 프로그램’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가는 국가와 국가안보, 군수산업체, 군사화 사이에서 학교는 어떤 배움의 현장이며 과연 ‘교육’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하늬(전쟁없는세상)

23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애국시민 사관학교

프로그램 노트

미국의 주니어 ROTC(JROTC) 훈련생의 대부분은 소수인종, 그리고 빈민이다. 시카고 내 JROTC 훈련생의 54%가 라틴계, 37%가 아프리카계이고, 백인은 5%에 불과하다. 또한 JROTC가 많이 운영되는 곳은 쇠퇴한 공업 도시 러스트벨트의 빈민가와 미국 남부이다. 인종적, 경제적 소수자성은 시민으로서의 위치를 위협한다. 그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라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더 ‘미국 시민’다워지고, 법적인 자격을 쌓아야 하는 자는 사회적 소수자다. 사람들이 인정하는, 국가가 인정하는 시민으로서의 위치를 보장받기 위해 이들은 ‘애국’을 해야 한다. 이를 이용해 JROTC는 사회적 소수자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의 학교에 빽빽이 들어선다.
이러한 과정에서 군대의 어둡고 추악한 실상은 감추어진다. JROTC 모병관은 “이라크는 멋진 곳이야.”라고 말한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대규모 민간인 학살, 생존자들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 전쟁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멋지지 않다. 전쟁의 추악한 민낯은 단지 “이라크는 멋진 곳이야.”라는 한 마디로 감추어진다.
JROTC 프로그램은 모두 미 국방부의 예산으로 진행되며, 이 예산은 사회적 소수자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낸 세금으로 이루어진다. 국가는 ‘애국자 되기’를 시민의 덕목으로 선전하며, 군대라는 애국시민행 급행열차를 통해 더 안전하고 보장받는 ‘진짜 미국 시민’이 될 수 있을 거라 말한다. 이러한 선전을 믿는 자들을 이용하여 국방부는 군을 유지한다. 사회적 소수자에게 멋진 것으로 미화되는 ‘애국시민’은 단지 국방부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이름이다.
이 미화와 시민다움의 강요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있다. 퇴역 군인인 로리 패닝은 청소년 모병을 막기 위한 활동에 헌신하고, 17살 앨리슨은 많은 사람 앞에서 JROTC의 군 미화에 반대하는 연설을 한다. 19살의 코빈 산체스는 소수인종에게 군대가 시민성을 얻기 위한 역할을 수행함을 폭로한다. 우리는 지금 동원된 많은 사람들의 애국으로 이룬 억지 평화의 ‘적막’ 속에서 살아간다. 이제는 이 적막이 잘못되었다고, 애국의 이면에는 시민성 획득을 위한 사회적 소수자의 몸부림이 있다고 ‘소란’을 피울 때다.

26프로그램 노트

인권해설: 반도체 하나의 목숨값을 구하라

인권해설

“그땐 제가 죽는 줄 알았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눈물 나고…. 그래요.”
만 스물두 살도 되지 않은 유미 씨가 흐릿한 동영상 속에서 울먹였다. 그녀는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제품을 세정하다가 백혈병에 걸려 숨졌다.

“나를 봐요. 이게 뭐예요. 이러면 안 되지요. 삼성은 나한테 사과해야 해요.”
휠체어에 앉은 혜경 씨가 오열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삼성 반도체에 입사하여 LCD 회로기판을 6년 동안 만들었다. 월경이 없어지고 몸이 아파 퇴사한 뒤 뇌종양을 진단받고, 종양 제거 수술의 후유증으로 시각, 보행, 언어 1급 장애인이 되어 10년째 투병하고 있다.

“처음 진단받을 때 의사가 5년을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런데 자꾸 욕심이 생겨요. 10년만 더 아이들 곁에서 살고 싶어요.”
혜정 씨는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퇴사 후 전신성 경화증을 진단받았다. 손끝부터 시작해서 온몸이 서서히 굳어가다, 결국 모든 장기들이 굳어서 사망에 이르는 희귀질환이다. 발병 초 만났던 그녀는 밝고 씩씩했지만, 한 해 두 해 몸이 굳어가면서 슬픔과 두려움을 토로했다. 어린 자녀의 곁에 조금 더 있고 싶다던 그녀는, 마흔 살 추석 때 숨을 거두었다.

이 영화 <반도체 하나의 목숨값을 구하라>에는 노말헥산에 중독되어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된 여성 노동자들이 나온다. 2005년 경기도 모 LCD 공장에서 일하던 태국 이주여성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노말헥산에 중독되었던 일을 자연스럽게 상기시킨다. 선진국에서는 사용이 금지된 벤젠이 개발도상국에서는 버젓이 사용된다. 유럽에서 석면 사용을 금지하자 석면 산업은 한국으로 공장을 옮겼고, 한국에서 석면을 금지하자 인도네시아로 공장을 옮긴 것처럼, 전자산업도 유해물질과 직업병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국가를 찾아서 자리를 옮겨왔다. 전자산업 중에서도 가장 첨단이라 부르는 반도체 산업 역시 이런 궤적을 똑같이 그려왔다.

1980년대 초, 전자산업의 요람이라 불리던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 밸리 지역에 대규모 지하수 오염 사건이 알려졌다. 페어차일드 반도체 공장 저장 탱크에서 트리클로로에틸렌이 새어 나온 것이다. 오염된 지하수를 마시던 지역 주민들의 아이들은 선천성 기형을 안고 태어났다.

1985년 미국 IBM 공장에서 제품을 개발하던 연구원이 사장에게 편지를 썼다. 동료 12명 중 5명째 암 환자가 나타나자, 제품 생산에 사용하는 화학물질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어 대책을 요구하는 편지였다. 회사는 묵살했다. 이후 5명이 더 암에 걸렸다.

1990년대 필리핀의 반도체 공장 노동조합들이 펴낸 안전보건 소책자에는 23세에 재생불량성빈혈로 숨진 여성 노동자의 사례가 담겨있었다. 혹 그녀의 죽음이 반도체 공장에서 다룬 수백 종의 화학물질 때문은 아닐까 하는 질문과 함께.

그 질문에 아무도 답하지 않은 세월이 20년 가까이 흐른 뒤, 한국에서 황유미 씨를 비롯한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백혈병, 재생불량성빈혈, 림프종, 뇌종양, 유방암, 다발성 경화증 등이 알려졌다. 병든 노동자와 가족들은 휠체어를 끌고, 혹은 자식이나 배우자의 영정을 품에 안고 수없이 거리에 나섰다. 정부가 이들의 질병을 산업재해로 인정하지 않고, 삼성은 작업환경이 안전하다고 주장하고, 주류 언론은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굳게 침묵하던 몇 년을 버텨냈다.

이 투쟁의 성과로 수백 명의 다른 피해자들이 확인되었고, 이들은 하나둘씩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작업환경의 유해성이 조금씩이나마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드러난 문제들이 해결되기까지는 아직도 먼 길이 남아있다. 여전히 노동자들의 산업재해 인정은 오랜 노력과 시간이 걸린다. 삼성은 공장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은커녕, 그 중 극히 일부 물질을 모니터링하여 정부에 보고하게 되어 있는 작업환경측정보고서조차 공개하지 않기 위하여 정부를 상대로 소송까지 불사하고 있다.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하여 개시되었던 삼성과 반올림 사이의 사회적 대화는 삼성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중단되었고, 그 재개를 요구하는 반올림의 노숙농성은 어느새 1천일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한국에서 여전히 많은 숙제들을 남겨둔 사이에, 삼성을 비롯하여 세계 굴지의 반도체 생산업체들은 중국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투자를 진행해왔다. 완제품 조립 공장들은 중국보다 더 인건비가 싼 베트남 등지로 옮겨갔다.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전자제품 수요를 고려한다면 그곳에서 병들고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수는 몇천, 몇만 명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산업재해임을 인정받고 원인을 규명하고 기업의 책임을 묻기 위하여 다시 원점부터 시작하여 싸워야 할지 모른다. 전 세계 삼성 휴대폰의 절반을 생산하고 있는 베트남에서, 삼성 노동자 45명의 인터뷰를 담은 보고서가 끝내 삼성의 압력으로 발간되지 못한 최근의 상황으로 미루어보면, 이들의 싸움은 원점이 아니라 마이너스에서 시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 황유미 씨의 생전 인터뷰 영상을 다시 틀어본다. 바짝 야윈 목, 바닥을 짚어 겨우 몸을 지탱하고 앉은 모습만 보여주던 카메라 앵글 속으로 딱 한 번 그녀의 얼굴이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짧은 순간 카메라를 응시하던 그녀의 검은 두 눈에 담긴 건 슬픔이었을까 공포였을까 아니면 원망이었을까. 우리가 침묵한다면, 우리가 연대하지 않는다면, 또 얼마나 많은 황유미가 슬픔과 공포와 원망 속에 죽어가게 될까.

공유정옥(직업환경의학 전문의, 반올림)

23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반도체 하나의 목숨값을 구하라

프로그램 노트

반도체는 휴대폰, 노트북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전자기기들의 핵심부품이다. 반도체 공정에는 단 한 톨의 먼지도 허용되지 않는다. 방진복과 클린룸이 추구하는 강박적인 청결은 오직 제품만을 위한 것이다. 반도체 생산과정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유해화학물질들은 모든 반도체산업 노동자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반도체 세정액에 포함된 벤젠은 백혈병을 유발하는 발암물질이다. 노동자들은 동료들이 하나 둘 쓰러져도 계속 일해야 한다. 빈자리는 금세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진다.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고 도시로 온 젊은 농민공들은 도리어 생계를 위협할 정도의 돈을 병원비로 내야 한다.
벤젠 사용 중단에 드는 제품당 추가비용은 고작 1달러. 하지만 하루에 오천 번씩 맨손을 유독세정액에 담가야 하는 노동자들의 건강은 그 가치조차 인정되지 않는다. 직원들의 부(富)와 건강(康)을 약속하는 팍스콘(富士康)에서 수십 명의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가 발생했지만 책임지겠다는 사람은 없다. 팍스콘에 납품하는 하청업체도, 팍스콘의 최대 원청인 애플도 책임을 부인한다. 회사들은 시작도 끝도 없는 거대한 자본의 톱니가 되어 빈틈없이 돌아간다. 그 속에서 반도체 노동자들이 어렵게 받아낸 직업병 진단서는 갈 곳을 잃는다.
중국노동자단체는 홀로 아픔을 감당하던 반도체산업 산재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모은다. 피해자들은 서로와의 만남을 통해 스스로가 ‘직업병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애플, 삼성과 같은 기업들이 개인에게 퍼붓던 책임의 화살을 고용주에게로 돌린다. 그리고 더 이상의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함께 벤젠 금지를 외치며 견고하게 맞물려 돌아가던 톱니에 빈틈을 만든다.
그러한 외침 속에서도 팍스콘 공장에서는 여전히 벤젠 냄새가 난다. 농민공들의 손에도, 아이폰과 갤럭시를 사용하는 우리의 손에도 같은 벤젠이 묻어 있다.

32프로그램 노트

인권해설: 416프로젝트 “공동의 기억: 트라우마”

인권해설

세월호 진상규명, “진짜는 이제부터”*

지난 4월 15일 문재인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4주기를 하루 앞두고 페이스북에 올린 ‘세월호 4년, 별이 된 아이들이 대한민국을 달라지게 했습니다’라는 제목의 추모 글에서 “합동영결식에서 다시 한번 깊은 슬픔에 빠질 유가족들과 국민들 앞에서 세월호의 완전한 진실 규명을 다짐한다”며 “선체조사위와 세월호 특조위를 통해 세월호의 진실을 끝까지 규명해낼 것”을 전했다.
이에 4.16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이자 예은이 아빠인 유경근 씨는 “문재인 대통령의 진심을 믿는다”고 화답했다. 그가 바라본 세월호 참사 4주기의 모습은 어떠할까. 4주기 당일인 4월 16일 목포에서 유경근 집행위원장을 만났다.

세월호 4주기를 맞아 목포에서 열린 행사에 많은 시민들이 발걸음 했다.

목포는 세월호가 있는 곳이다. 세월호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4주기를 나누는 자리를, 목포시민이 중심이 되어 만들었기 때문에 더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목포 외에도 참사 이후 많은 지역과 마을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다양한 활동을 오늘까지 이어왔다. 이러한 움직임을 어떻게 보시는가.

세월호 참사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참사 자체의 성격도 있겠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한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진상규명을 위한 싸움을 하는 내내 옆에서 같이 싸워 주신 분들이 있고, 그 힘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이어졌다. 304명 모든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시민들의 마음이 쉽게 사그라지거나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번 4주기는 영결식을 치르기 때문에 4주기에서 마무리하고 끝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까 봐 많은 걱정을 했는데 시민들이 먼저 이제 진짜 진상규명 시작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이러한 시민들이 있어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4주기를 맞을 수 있었다.

4주기를 하루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이 페이스북에 추모 글을 남겼다.

그 전부터 가지고 계셨던 생각이나 의지를 밝혀주신 것 같고, 위로도 됐다. 세월호 진상규명과 416생명안전공원에 대한 비전도 함께 제시하셔서 힘이 된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와 다를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다. 일부 진전이 이루어진 것이 있다면 무엇이고, 여전히 제자리에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일단 검찰이 박근혜 정부가 어떤 조직적인 방법으로 은폐하고 방해하고 조작했는지 밝혀내기 시작했다. 이전 정부와 비교했을 때 이는 명확한 변화이고, 정권의 의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특히 세월호 특조위를 만들고 그 과정에 정부가 협조하는 모습도 달라졌다. 지금은 정부의 방해로 진실을 밝히는 게 어렵다는 생각은 크게 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사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바라보는 시각은 아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어제 뉴스에도 4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해경의 구조능력이나 구조장비가 열악하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세월호 참사는 구조능력이 없고 구조장비가 없어서 일어났던 것이 결코 아니다. 그 당시는 장비도 필요 없었고, 대규모의 구조단이 투입돼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단지 빠져나오라는 말 한마디면 되는 상황이었다. 왜 그 말을 안 했는지를 밝혀야 한다. 그런 점에서는 정부의 시각이 부족한 점이 있다.

어제 4.16토론회 <세월호와 촛불, 그리고 나라다운 나라>에서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의 모든 총체적 문제가 집약되고 폭발한 사건이라는 진단 때문에 진상규명이 가로막히고 있다”고 말했는데, 무슨 의미인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당시, 전 사회적으로 각성이 일어났다. 터무니없이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우리 사회가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해 많은 진단이 나왔다. 선박 안전규정 문제나 사회 전반적인 교육, 법과 제도, 심지어 인성의 문제까지 나왔다, 나아가 사회의 이기주의, 이윤 추구 때문이라는 진단까지 나왔다. 이 진단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분명 우리 사회의 문제였고, 앞에 나온 진단들 때문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것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법과 제도가 충분히 갖춰지고, 매뉴얼대로 행동하고, 인성을 향상하고, 구조능력을 키운다고 참사가 안 일어났을까? 침몰 원인이 과적이나 조타 실수가 맞다고 하면 그게 맞겠지만, 지금은 그 이유가 아닐 가능성이 커졌다. 구조를 어쩔 수 없이 못 한 게 아니라 시도조차 하지 않은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원인 때문에 침몰한 거라면, 구조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이라면 앞에 나온 진단들이 참사의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있을까?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 수사하는 사람들이 ‘이번 기회에 문제를 제대로 고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인식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런 식의 접근으로 과연 진실이 밝혀질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든다.

세월호 참사 자체의 본질, 진실을 깊이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없는 것 같다.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건 맞지만, 세월호 참사를 기준으로 봤을 때는 너무 안일하고 일반적인 접근을 하는 게 아닌가. 진실을 더 파고 들어가려고 했을 때 음모론이라거나 참사 피해자들이니까 그런 것 아니냐며 회피했는데, 드러나는 정황은 우리가 이야기한 것과 맞아 들어가고 있다. 그런 측면을 강조하고 싶었고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대안들은 세월호 참사와 관계없이 진행하면 된다. 마치 그것들이 세월호 참사의 대책인 듯 이야기하면 진실이 묻힐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다.

4.16토론회에서 “2년이면 진상규명이 가능하다”는 말도 했는데, 현 세월호 특조위 2기의 문제점은 무엇이고, 사고의 진상을 밝히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2년이면 가능하다는 것이 아니고 너무 짧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진상규명을 위한 기간을 늘리거나 특조위 3기를 만들지 않고 2년 안에 진상규명을 끝낼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특조위에만 임무를 맡기는 게 아니라 특조위가 중심을 잡고, 부족한 부분을 정부가 보완해 줘야 한다. 그것이 검찰의 특별수사팀이고 감사원의 특별감사팀이다. 기관이 협력해서 진상규명을 할 때 2년 안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대구지하철참사 사례를 보면 안전문화공원을 만들면서 갈등이 심했다. 안산에서는 달라야 할 텐데, 416생명안전공원의 핵심은 무엇인가?

생명안전공원이 왜 있어야 하는지, 거기에 왜 우리 아이들을 품어야 하는지에 대해 함께 고민해 주셨으면 좋겠다. 세월호 참사 이후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바람이라면, 억울한 죽음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304명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이다. 아이들은 품는다는 의미는 유골을 품는다는 것이 아니다. 꿈을 품는 것이다. 그 꿈을 시민들이 함께 품었을 때 안산이 생명과 안전의 도시로 바뀌고, 나아가 대한민국이 바뀔 수 있다.

생명안전공원을 납골당으로 지칭하면서 반대하는 사람들과 이를 선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시민들은 정서적인 이유로 반대할 수 있다고 보지만, 이들은 선거를 앞두고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사람들이다. 시의원 예비후보 포스터를 보면 자기 이름보다 더 크게 ‘납골당 반대’라고 쓰여 있다. 그렇게 악용하지 말았으면 한다. 시민들은 그러한 정치적 악용을 분별할 수 있다고 본다. 실제로 반대하시는 분들과 이야기하면서 많은 공감대를 형성해 왔다. 악의적으로 호도하는 사람들에게 시민들이 호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전 사례를 살펴보면 대부분 피해자 유가족들이 포기하거나 타협하면서 실패했다. 이전 사례를 알기에, 416생명안전공원은 유가족들이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생명안전공원은 반드시 만들어질 것이다.

기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고민일 것이다. 시민들이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다가갈 때, 또는 세월호를 기억할 때 유념해야 할 점이 있나?

자신들의 상황이나 조건에 맞춰서 하시면 될 것 같다. 다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유가족의 이야기를 먼저 들으려는 모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많은 분들이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많은 거로 안다. 세월호 참사를 극복하는 데 핵심적인 키를 가진 사람들은 유가족들이다. 유가족들이 이해할 수 있는 진상규명이 우선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먼저 유가족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셨으면 한다. 세월호 참사는 직접 겪은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당일 현장에서 유가족들이 본 것에 대해 아직 많은 분들이 모른다. 참혹하다, 슬프다고 느낄 수 있지만, 우리가 뭘 봤기에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유가족이 생각하는 방향을 충분히 듣고 공감해 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다.

내년 5주기에는 달라진 점이 있을지?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얼마나 밝혀지는가에 따라 다를 것이다. 물리적으로는 쉽지 않겠지만, 진상이 드러나고 책임자 처벌이 시작된다면, 지금보다 덜 부끄럽게 5주기를 맞을 수 있다고 기대한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시민들, 또 연대하는 시민들에게 전할 말씀이 있다면?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언론도 알리기 시작했다. 과적이나 조타 실수가 침몰 원인이 아니고 구조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몇몇 언론에서만 보도했다. 박근혜 정권이 세월호와 관련해 이야기한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고 드러났다. 세월호 참사 자체의 진실에 관해 이야기한 것도 거짓말이라고 보는 게 오히려 합리적이다.

많은 국민들이 침몰 원인과 구조를 하지 않은 원인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최근에서야 보도하기 시작한 언론의 노력이 기여한 바도 있다. 언론이 유가족이 슬퍼하는 모습만 비추지 말고, 2014년 4월 16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집중해 줬으면 좋겠다. 당시 모든 언론이 진도로 가서 취재하지 않았나. 그때의 사진과 영상을 다시 꺼내서 분석했으면 한다. 그렇게 특조위가 조사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에 대해 의논하고 정부에 계속 질문을 던져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시민들 역시 참사의 진실과 관련해 무엇을 알고 싶고, 무엇이 밝혀져야 하는지 구체적인 질문을 갖고 계셨으면 좋겠다. 특조위든 검찰이든 언론이든 진상이 드러났다고 하면, 그것이 내가 원한 답이 맞는지 판단하실 수 있도록 질문해 보셨으면 한다.

* 다음 기사를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동희 기자, “세월호 진상규명, “진짜는 이제부터””, 참여와 혁신,  2018.05.27, http://www.laborpl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432

21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416프로젝트 “공동의 기억: 트라우마”

프로그램 노트

정권이 바뀐 후 선체가 인양되었고, 2기 특별조사위원회가 시작되었다. 안산에는 416생명안전공원이 만들어질 것이며 미수습자의 장례가 치러졌다. 목포, 안산, 광화문, 모든 곳에 퍼져 있던 기억들을 하나둘 마주한다. 그날의 기억은 우리 모두의 ‘집단기억’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한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것은 그 기억을 지우고 잊은 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자는 것이 아니다. 상처의 치유와 회복은 참사로 맺어진 관계 안에서 이뤄진다. 그렇기 때문에 유가족들은 함께 리본을 만들고, 연극을 하고, 풍등을 날리며 서로의 트라우마를 보듬어 준다. 이처럼 영화는 사회와 공동체가, 모두가 함께 겪은 사건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그것을 기록하고 담아내는 행위를 통해 기억을 잇고 퍼뜨린다. 동갑내기 친구가 기록하는 생존 학생의 기억, 서로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는 순간과 그 날이 바꾼 삶의 변화, 그리운 마음을 서로에게 기대 위로하며 외치는 기록, 선체를 인양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하는 처참한 현실 속에 ‘공동의 기억’은 살아있다.

우리의 기억은 잊으라고 말하는 그들의 바람처럼 잠잠히 고여 있지 않다.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다시 꺼내서 기록하며, 걸음을 멈추고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동시에 그 기록은 하나의 파동이 되어 과거의 일을 현재로 불러온다. 기록은 단지 누군가의 기억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을 이어가는 작업이다.

기억은 서로를 연결하고 행동을 만든다. 기록은 가만히 있으라는 사회를 향해 “잊지 않고 행동하겠다”고 외친다. 그렇게 우리는 기억과 만난 기록을 가슴에 담고 다시 소란스럽게 파동을 일으킬 것이다.

25프로그램 노트

[활동펼치기] 우리에게는 애도와 기억이 필요합니다

소식

“우리에게는 애도와 기억이 필요합니다.” 

코로나19 대확산으로 인한 죽음 – 애도와 기억의 장 세 번째 추모문화제

안녕하세요. 자원활동가에서 상임활동가로 활동하게 된 소하입니다. 그동안 회원 활동이나 자원활동만 해오다가 처음으로 상임활동가로 일을 하게 되어 많이 설레고 있습니다. 와중에 처음으로 연대 활동으로 코로나19 추모문화제를 다녀오게 되었는데요. 첫 연대 활동인지라 많은 도움은 안 된 것 같아 아쉽지만, 많은 활동가들을 만났고 (아는 분들도 많았지만요.) 기억에 남을 문화제였습니다. 

사진1. 애도와 기억의 장 추모문화제를 내려다 본 모습.

특히, 추운 날씨로 많이 기억될 것 같습니다. 점심 즈음 비가오기 시작하더니 저녁 즈음에 그친다던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밤새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는 후드티에 달린 모자를 쓰거나 우비를 입고 추모문화제 준비를 하였는데요. 이제야 좀 날씨가 풀려가려나 하던 참에 비가 내려 늦겨울인데도 무척이나 추워서 고생을 했었네요.

추모문화제는 추도사, 코로나19희생자 유가족의 발언, 연대의 발언, 공연, 행진 순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무척이나 추운 자리임에도 참여자 모두들 끝까지 남아 추모문화제와 함께했습니다.

저는 추모문화제를 마치고, 코로나19로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과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되새겨보게 되었습니다. 질병이 닥치면 사회적 약자에게 먼저 위기와 죽음이 찾아오곤 합니다. 감염병은 사회의 취약점을 드러내고 이를 공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도와 기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순히 질병에 입은 피해라는 문제를 넘어 사회구조적으로 취약한 곳에 위치한 약자들이 어떻게 위기 상황에서도 인권을 지킬 수 있냐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팬데믹에서 생겨난 동료 시민의 슬픔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일 겁니다. 더 이상 같은 상황에서 동료 시민을 잃는 비극을 맞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소하

35소식

추천사: 퀴어의 방

인권해설

영화는 네 개의 방을 소개하며 그 방에 사는 주인공 5명의 목소리로 공간을 채운다.

카메라는 퀴어의 방이라고 명명하고 담담하게 사는 이의 옷가지, 신발, 책들이 빼곡한 책장, 수저들 그리고 방밖에서는 내보일 수 없는 모습들과 정체성을 나타내는 스티커 같은 물건들을 비춘다. 주인공들은 가족과 함께 사는 집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그곳을 탈주하여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에서 카메라를 향해 나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퀴어들이 사는 방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곳은 나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다. 비록 그곳이 좁아 보이는 집의 한켠, 텐트의 한켠, 냉장고의 한켠일지라도 그 곳은 온전하게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며 나를 부정하지 않아도 되는,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곳이다. 영화는 퀴어의 방을 나가면 만나는, 퀴어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퀴어의 방 밖의 또 다른 이야기는 혈연 중심의 정상성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내고 비정상성을 확장하고 정상성의 규범을 무너뜨리는 각자가 퀴어로서 살아가는 삶의 서사를 말하고 있다.

코로나19 위기에서 나는 안전한 사람인가, 이곳은 안전한 공간인가의 키워드는 더는 퀴어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나답게 살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것이 가장 안전한 곳이 되는 것이며 어쩌면 안전한 퀴어들의 삶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 우리 사회의 정상성의 규범을 깨부수는 열쇠일지도 모른다.

 

양선우/홀릭(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25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퀴어의 방

프로그램 노트

당연하게도, “집에 있으라”는 권고는 적어도 세 가지를 전제한다. ‘집이 있다’는 것과 ‘집은 안전하다’는 것. 그리고 ‘집에서 머물러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 이와 같은 권고는 국가가 ‘안전한 공간’을 무엇으로 상정하는지, 또 어떤 사회적 정상성을 방역의 기준으로 세웠는지를 드러낸다. 영화 <퀴어의 방>에는 다름 아닌 ‘집’에서, ‘정상적인’ 가족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위협 받았던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언젠가 누구도 함부로 문을 걷어차 열 수 없는 방, 비건인 나로, 동성애자인 나로, 트렌스젠더인 나로서 어떠한 변명도 없이 존재할 수 있는 방을 꿈꿨다.

그러한 공간을 “퀴어의 방”으로 명명한 이는 자신의 방이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점점 넓어지기를, 자신의 정체성과 지향점을 버젓이 드러내는 포스터와 메모, 냉장고 칸이 존재하는 장소들로 주변이 가득 채워지길 바랐다. 그러나 소위 “이태원 발 집단감염”이 발생한 날, 혐오와 폭력으로 얼룩진 방문 앞에서 그는 되물었을지도 모른다. 자신과 동료들이 차지했던 공간이 왜 ‘집’이 아닌 ‘방’이었는지, 이 방 안에서 자신은 안전할 수 있는지 고민하며 서성거렸을지 모른다. 드러내지 말 것을 강요 받았던 정체성은 집단감염의 원인을 묻는 질문 앞에 소환되었고, 질병의 공포 앞에서 “문란해서 참을 수 없었냐”는 조롱과 멸시가 이어졌다. ‘정상’의 범주에 포함된 사람들에게 코로나는 함께 싸워 이겨내야 할 대상이었지만, 애초에 방역의 대전제에서 벗어났던 사람들은 집의 안팎에서, 거리에서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가족과 사회, 질병과 싸워야 했다. 그렇게 ‘비정상적인’ 사람들은 퀴어의 방에 머무를 수도, 퀴어의 방을 나설 수도 없게 되었다.

안전한 공간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안전한’ 공간은 모두에게 존재하진 않는다. 사회에는 집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그 공간이 완전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때로 안전한 공간이란 사회적 정상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상정하는 ‘안전한’ 공간 밖에는 자가 격리가 불가능한 홈리스가 있고 집에 머무르는 시간의 증가로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이 있으며 요리를 하다가 숨어야만 하는 비건들이 있다. 세상에는 안전하고 완전하게 자가 격리를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자가 격리를 제대로 실천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자가 격리가 정말로 모두에게 완전한 안전을 담보하는가? 영화 속 퀴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찾아 나선다.

바이러스는 사회 깊숙이에 내재해있던 혐오와 낙인을 바깥으로 드러낸다. 또한 그러한 혐오는 퀴어들로 하여금 더욱 더 그들의 방에 숨게 한다. 아직 주민등록번호 변경을 하지 않은 트랜스젠더는 사회적 시선 때문에 마스크 구입을 포기하기도 했고 이태원의 클럽에 출입한 사람들은 모두 퀴어로 간주되어 신상 정보가 노출될 가능성을 안게 되었다. 국가는 코로나19에 대하여 익명검사를 실시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성소수자들을 강제적인 아웃팅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한다. 사회에 만연한 혐오와 폭력이 없어지지 않는 한, 익명 검사는 답이 될 수 없다. 퀴어들은 바이러스가 아닌 혐오와 낙인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그들에게 안전한 공간이 퀴어의 ‘방’이 아닌 ‘집’이 되도록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퀴어의 방>에서 서울시 보광동에 거주하는 한 사람은 집 앞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지 못했다. 기존의 가족을 떠나 친구들과 함께 퀴어의 방을 꾸렸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했던 예전 가족이 찾아올까봐, 자신이 주민등록증에 기재된 성별과 다른 정체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집주인이 알게될까봐 자신의 명의를 사용해 집을 구할 수 없었다. 편안하고 안전한 공간을 얻었다는 기쁨의 그림자에는 언제 이 공간을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늘어져있다. 이들이 마련한 장소는 물리적으로 집이지만, 사회적으로 퀴어의 ‘집’이 되지 못한 채 퀴어의 ‘방’으로 남는다.

이들의 집이 방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확진자가 발생했을 때 커뮤니티에 속한 모든 사람의 신상이 노출될 위협에 놓이는 상황과 근본적으로 맞닿아있다. 사회 전반에 걸친 차별은 성소수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감출 것을 강요하는 동시에 ‘혐오하기 위해’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질병의 위협 속에서 노숙인과 장애인의 ‘비정상성’은 삭제되어 “확진자”라는 공포만 떠올랐고, 이들은 격리와 배제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퀴어의 ‘비정상성’은 부각되어 감염의 이유가 되었고, 질타와 모욕의 대상이 되었다.

안전한 공간의 의미가 모두에게 같지 않은 것처럼, 질병의 위협은 누구에게나 똑 같은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퀴어의 방>에는 자신이 거주하는 집이 “편하니까, 안정적이니까 이상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가 안전한 공간에 도달하기까지 지나온 차별과 폭력을 짐작할 수 있다면, “집에 있으라”는 권고의 소극성과 책임의 부재 또한 알 수 있어야 한다. 퀴어의 방을 꿈꾸지만 퀴어의 방으로 낙인 찍히는 것이 두려운 세상에서, 퀴어의 ‘집’은 생길 수 없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명, 은비

22프로그램 노트

추천사: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

인권해설

나는 아직도 2011년 3월 11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TV를 보던 중 갑자기 하단에 일본 동부에 대지진이 발생했다는 자막이 송출됐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붕괴됐다는 소식이 추가로 전해졌다. 전례 없는 강진과 방사능 누출의 재난 상황이 이어지자 ‘일본의 미래’를 분석하는 논평이 쏟아졌다. 그러나 ‘일본 장애 시민의 삶’을 다루는 소식은 따로 접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동일본 대지진 재난을 그저 일본의 위기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 10년이 흐른 지금에서야 마주하게 된 이 영화는 오랜 시간 ‘핵발전소 붕괴’, ‘강진’, ‘쓰나미’ 등 피상적인 단어로 기억하던 동일본 대지진의 모습을 구체적이고 생생한 장애인의 생활 세계에서 조명한다.

특히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동일본 대지진 속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는 일본 장애인과 가족의 고군분투기가 너무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지난 2월 청도대남병원 내 코로나19 집단 확진 사례를 시작으로 지속되는 장애인 차별과 건강 불평등의 문제와 유사했다. ‘재난 상황 시의 패닉, 활동지원인 없는 상황 속 고립된 장애인에게 예견된 참사, 비장애 시민에게 폐를 끼칠까 스스로 고립을 택하는 장애인의 모습, 대피 엄두조차 낼 수 없는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 물리적⋅정보 접근권의 박탈, 재난 시 매뉴얼의 부재, 중증장애인을 배제하는 행정, 미등록 장애인에 대한 무대책 등’ 영화 속에서 마주한 약 2011년 일본 재난의 모습은 2020년 한국 재난의 모습과 지독하게 닮아 있었다.

지진과 감염병은 겉으로 보기에 다른 재난의 양상인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같은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재난은 우리 사회에서 은밀한 시혜와 동정의 모습으로 감추어졌던 장애인 차별과 배제가 드러나는 계기가 된다. 재난 시 자신의 생존권을 주장하는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생존을 고려하지 않는 나쁜 장애인’으로 비추어지고, 장애인 당사자는 ‘비장애인에게 폐를 끼치기 싫다며’ 고립과 죽음을 택한다.

재난은 사회를 바꾸지 않는다. 다만 드러낼 뿐이다. 사회의 위선을 걷어낼 뿐이다. ‘나중에’로 적당히 미루어지던 장애인의 존엄성이 노골적으로 무시된다. 그 재난이 지진이건, 감염병이건, 그 국가가 한국이건, 일본이건 시공간과 관계없이 각자도생이라는 극단적인 원자적 상황 속에서 장애인은 지워진다.

누구라도 환영하지 않을 소수자의 고난과 죽음을 조명한 영화, 재난 앞에서 쓸려가는 사람들, 고립되는 사람들과 지워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가볍지 않은 영화’를 우리는 왜 보아야 할까. 마주하기로부터 연대의 길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재난 속 배제된 이들의 삶을 마주하고, 고립되어 두려움을 느끼고 슬픔을 감내하는 얼굴을 외면하지 않을 책임의 무게를 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대지진 재난 속에서 구체적인 아픔을 마주하는 것, 10년 전 일본의 재난을 목격하면서 현재 코로나19 재난 속 드러난 장애인의 억압을 연결해 상상하는 것. 전지구적 재난이 반복될 때마다 은밀하게 감추어졌던 차별이 노골적인 혐오와 배제의 모습으로 드러날 때, 우리는 다 함께 ‘그만’을 외쳐야 한다. 모든 차별에 저항하는 단호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공존을 꿈꿔야 한다.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세상을 실천하기 위한 첫 걸음으로 영화 <피난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감상을 추천한다. 연대는 생생한 아픔의 역사를 마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변재원(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27인권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