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나는 세상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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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영상으로 시작하는 영화를 보면 알 수 없는 불편함과 답답함이 생긴다. 기존의 익숙한 장면과 시선이 아니다. 뒤틀려있고 다른 것은 꼭꼭 숨기려 해도, 숨기면 숨길수록 어디에서나 분명 티가 나기 마련이다. 그 일상 속의 티 나는 몸과 마음의 다름은 사람들의 다른 시선으로 이어진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노들장애인야학의 중증장애인 학생들과 같이 이동을 하면 시민 몇 명이 꼬깃꼬깃한 몇천 원을 쥐어주곤 했다. 이 돈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들은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는 것일까. 어눌한 어투와 귓가에 꽂히는 다른 음색, 뒤틀려있거나 ‘정상적’이라고 규정되는 신체와는 다른 몸. 이러한 다름을 보는 이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왜 집구석에 있지 않고 밖에 나와 돌아다니느냐”, “밥은 혼자 먹을 수 있냐”고 손가락질 한다. 이것들이 바로, ‘시민들이 쥐어준 몇천 원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응답으로 돌아오는 것들이다.

최근에 계양구 보건소에서 ‘장애예방 5계명’이라는 자(문구용품)가 배포되었다. 그 안의 내용은 “안전벨트를 착용한다”, “위험한 장난을 하지 않는다”, “무단횡단을 하지 않는다” 등의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약속하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 사업은 계양구 보건소의 독자적인 사업이 아닌, 보건복지부와 각 지자체가 추진한 사업이었다. 장애예방교육 강사가 학교 내로 파견되어 교육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이 사업의 목적은 “장애를 예방하지 않으면 개인과 사회에 막대한 복지비용이 들기 때문에 이 교육이 필요하다”라는 것이다. 이처럼 여전히 ‘장애’는 공포의 대상이 된다. 노들장애인야학의 학생들 가운데 중도장애인 대부분이 “혼자서 살 수 없는 몸이 된 후 가족의 지원이 불가한 환경 속에서 시설을 택하게 됐다”라고 이야기 한다. 왜 그들은 시설에 갔어야 했고 지역사회 내에서 ‘거리의 턱’으로, 차가운 시선으로 차별을 받으며 살고 있을까.

우린 대체 어떻게 “함께 살자”라고 외칠까. “이 사회의 변화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라는 물음이 그 시작이다. 다름을 유난히 특별한 것이 아닌 보통의 삶 속 개인으로 인정하고 바라봐 주는 것. 그리고 처음부터 ‘정상적인’ 신체의 사람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모두가 이동할 수 있도록 거리의 턱을 낮추는 등의 일상 속의 변화를 만들자.

휠체어를 탄 친구와 내가 거리의 턱 앞에서, 나만이 이동하고 그이는 갈 수 없을 때 그 공간에서 나와 친구는 다른 몸이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우리가 서로 손을 잡고 함께 건널 수 있을 때, 너와 내가 평등할 수 있는 길이 만들어지며 너와 나의 다름은 달라진다.

 

명희 (노들장애인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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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불릿프루프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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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여성’, ‘원숭이 같은 여성’으로 프릭쇼(기형인간 쇼)에 출연하고, 사후에도 100년 이상 방부 처리된 시신이 순회 전시된 ‘훌리아 파스트라나가’라는 여성이 있다. 이 여성을 해부학적으로 분해하고, 괴물로 묘사하며 사람들의 볼거리로 전시해 왔던 프릭쇼는 장애와 다른 몸에 대한 사회의 혐오와 차별, 문화적 타자화의 과정을 드러내주는 역사다.

이에 대해 로즈마리 갈런드 톰슨은 그의 책 『보통이 아닌 몸』에서 심한 선천적 장애인들의 몸은 언제나 사람들이 자신들의 불안, 확신, 환상을 배출하는 아이콘 기능을 해 왔고, 기형인간과 놀라운 인간들은 사회가 이들보다 더 평범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인간성을 결여한 오로지 몸뿐인 존재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괴물(monster)’를 의미하는 라틴어 monstra는 원래 ‘표시’를 의미하였으며, ‘보여 주다’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demonstrate의 어원을 형성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제 프릭쇼는 사라졌다(고 한다). 그럼 전시장과 무대에서 구경거리가 되었던 장애인은 이제 그 무대에서 내려왔을까? 여전히 그들은 무대 위에 있지만 더 이상 ‘보여지는’ 존재가 아니다.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생산하고, 출연하며 관객에게 ‘보여주길’ 원하며 무대에 서고 영화에 등장한다. 그러나 여전히 기존 상업 작품들에선 극중 장애인 역할을 비장애인이 잠정적으로 ‘장애인이 되어’ 그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사회가 규정한 ‘장애’에 대한 편견은 그대로 반영되어 대부분 불행한 존재, 천사, 희화화의 대상, 천재, 범죄자 등 몇 가지 이미지로 재현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애인 당사자가 배우로서 서부극, 사극, 연애극, 모험극 등에 나타나 역동적인 삶의 주체로 나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프릭쇼는 진행 중이다. 결국 관객-사회가 장애인의 이야기를 보고,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이제, 몸이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그 이야기 속에서 서로 다른 ‘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새롭고 정치적인 이야기를 생산하고, 장애인의 몸이 접근하고 표현할 수 있는 연기양식과 무대연출 등을 재구성하는 장애인 예술가들의 노력은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다른 몸을 가진 사람은 여전히 낮은 위치로 여겨지고 그런 존재들은 쉽게 인권을 무시당한다. 구경거리가 되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이라는 관계는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회 제도 안팎을 넘나드는 투쟁은 유효하며, 무대 위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투쟁중이다. 기꺼이 자신의 몸으로 연기를 하기도 하고, 무대 장치의 일부로 오브제가 되기도 한다. 의사소통을 돕는 자막도 무대와 분리되어 ‘편의시설’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무대장치로 적극 활용한다. 또 비장애인다움을 단지 흉내 내지 않고 장애인/비장애인 역할을 넘나들며 장애인다운, 비장애인다운 몸과 이미지에 균열을 내기도 한다. 이러한 문화적 도전의 과정들은 무대 안팎의 세상과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실천이다.

 

진희 (장애여성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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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움켜쥔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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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is not Good>

10년 뒤면 초콜릿을 먹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카카오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죽는다. 나이가 들어 죽는다. 카카오 나무도 그렇다. 더 이상 젊은이들은 카카오 농사를 짓지 않고, 나무를 새로 심지도 않는다. 카카오는 더 이상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전 세계 카카오의 60% 이상은 가나와 코트디부아르 단 두 나라의 소농들이 생산하는데, 이들의 평균소득은 하루 1달러도 채 되지 않는다. 카카오의 수요는 늘어나는데 왜 가격이 오르지 않을까. 아마 그 이유의 열쇠는 카길과 베리칼리보와 같은 초국적기업들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전 세계 카카오빈 거래량 400만 톤 중 80%를 단 8개 회사가 거래하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작년에 5개 회사로 줄어들었다.

카카오와 같은 주요 교역 농산물들은 식민지 역사와 궤를 함께 한다. 왜 카카오의 원산지인 남미보다 아프리카에서 더 많은 카카오가 재배되고, 커피의 원산지 아프리카보다 남미와 베트남에서 커피를 더 많이 생산하는지. 그 경로를 살펴보면 먹을거리를 둘러싼 피와 땀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어떻게 더 새롭게 재구성되고 있는지도 볼 수 있다.

교역 작물인 향신료, 카카오, 커피는 북반구에서 생산되지 않아서 남반구로 ‘아웃소싱’되어 재배된다. 축산이나 원예처럼 북반구에서 생산 가능한 것들도, 이제 열대지역의 온실에서 대규모로 아웃소싱 되고 있다. 에티오피아의 농민들은 자기 땅을 잃고 북반구 소비자들을 위한 토마토를 생산하는 농업 노동자가 되었다. 소농들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먹을거리를 생산하지 못하고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이처럼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들 역시, 공급사슬의 끝에서는 좋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두 가지만 언급하자면, 첫 번째로 석유를 대체하는 바이오 에너지로 각광받는 팜유가 있다. 팜유 생산을 위해 인도네시아의 열대우림은 1초에 축구장 2개 크기만큼 불태워진다. 이렇게 그곳의 생명체들이 갈 곳을 잃어간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두 번째로는 지속가능성 인증제도다. 여기서 인증은 단지 최저기준일 뿐으로, 초국적 기업들과 대규모 농장에 보다 유리하게 작용된다. 소비자들은 윤리적으로 올바르거나 좀 더 좋은 것을 소비하려 하기 때문에 생산자보다는 소비자를 위한 기준이 우선시된다. 결국 더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향으로 이 인증제도가 운영되는 것이다.

물론 공정무역은 소농을 위한 여러 가지 기준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의 지속가능성 인증과는 차별성이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생산자들의 생활을 향상시킬 정도에 이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1헥타르 남짓한 농사를 짓는 소농들은 인증 시스템의 근처에도 가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비자들은 인증 자체보다는 실제 거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면밀히 감시할 필요가 있다. 브랜드나 마크에 현혹되지 않고, 포장의 이면을 바라보는 노력들을 하지 않는다면, 거대한 착취의 사슬 끝에서 의도치 않게 ‘피 묻은 초콜릿’을 먹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너무 암울하다 하여 이도저도 똑같다며 선택을 포기한다면, 우리의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이들은 무너진다. 거대한 푸드시스템이 세계의 농부들을 무너뜨리고 있을 때 우리의 식탁은 과연 안전하다 할 수 있을까.

 

이하연 (전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 사무국장/현재는 전북 순창에 귀농하여 텃밭을 가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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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망명: 난민이 된 아이들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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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2일, 세 살배기 아이의 시신이 터키의 한 휴양지 해변에서 발견됐다. ‘이슬람국가(IS)’를 피해 작은 배를 타고 시리아를 탈출한 어린이 난민 아일란 쿠르디의 시신이었다. 그의 엄마(35세)와 형(5세)도 같이 숨졌다. 익사한 3살 아이의 사진은 전 세계를 경악시켰고, 시리아 난민 문제의 심각성에 모두가 공감하는 것처럼 보였다. 잠깐 동안은.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난민 어린이들은 계속해서 익사하고 있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다. 국제이주기구(IOM)에 따르면, 터키와 그리스 사이의 바다를 건너다가 빠져 죽은 난민은 어린이만 따져도 5개월 동안 330명에 이른다. 작년 한 해 동안 유럽으로 향하다 익사한 전체 난민이 4천 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하니, 그 바다에서는 매달 한 번씩 세월호가 침몰하는 셈이다. 상당수의 난민은 그들이 그 배에 탔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세상에 전해지지도 않고 시커먼 바다 속에 집어삼켜진다. 이런 상황이니 그 비극적 죽음의 이름이나마 남은 아일란 쿠르디의 경우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무사히 바다를 건넜거나, 내륙으로 인접한 레바논 등으로 탈출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재난이 그렇지만 특히 난민 위기에서의 어린이는 더욱 취약하다. 유럽경찰 유로폴에 따르면, 유럽으로 들어온 시리아 난민 어린이 10,000명 이상이 행적을 알 수 없이 사라졌다. 이 어린이들은 인신매매를 당해 마약 판매나 매춘 등 범죄조직의 돈벌이에 이용되어 학대와 착취를 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난민 수용소의 어린이들에게도 밝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아무런 보호의 손길도 받지 못한 채 그냥 방치되어 있는 상태다. 기본적인 위생시설과 교육의 기회, 경제적 자립과 재정착 지원을 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난민 보호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우리와 관계 없는 일도 아니다. 인천공항에 도착해 난민 신청을 한 시리아인은 2014년부터 올해 3월까지 345명에 이른다. 그럼에도 난민에 대한 국내의 일반적인 인식은 참담한 수준이다. 사람들은 연예인이 까만 피부의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에는 환호하지만 그 아이를 돕는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와 마찬가지로, 물에 빠져 죽은 3살 어린이의 시체가 가져오는 선정주의(센세이셔널리즘)에는 ‘좋아요’를 누르지만 아무도 물에 들어가 그 아이를 구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것이 단지 화면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화면 밖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장덕현 (국제앰네스티한국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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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날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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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 2백만 시대, 보이지 않는 이주민들이 있다. 그들은 미등록이주민들이고, 미등록 상태인 부모의 체류자격으로 인해 미등록 되어버린 아이들이며, 이제 성장을 통해 성인이 되었거나 성인이 되어가고 있는 청소년들이다. 이들은 부모를 따라 왔거나, 먼저 이주해 온 부모와 결합하기 위해 뒤에 왔거나, 여기서 출생했다. ‘다문화가족’이라고 불리는 법적 지원의 테두리 안에 놓였기에 입양의 형식을 거친 중도입국이나 출생등록을 통한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진 아이들과 달리, 이들은 체류와 교육 그리고 건강과 노동이라는 권리들을 충분히 누릴 수 없는 아이들이다.

각자의 아이들은 자신의 꿈들이 현실의 상황에서 실현될 수 없을 것만 같아 너무 일찍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포기하거나, 한국을 떠나거나, 아니면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이 겪는 불안한 삶으로 합류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공장으로 떠나는, 그런 아이들이다. 가수가 되고 싶었던 아이는 몽골로 돌아갔고, 컴퓨터 게임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었던 아이는 인도네시아로 돌아갔다. 돌아간 아이들은 여기서 십대를 보낸 아이들이다. 자신의 고향이라고 여겨지는 그 땅은 낯선 곳이 되어 아이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적응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한다. 이 아이들에게 고향은 지금 나의 국적이 명시하는 그 땅이 아니라, 어린 시절을 보낸 한국이고 한국으로의 귀향을 꿈꾼다.

남아 있는 아이들 중 한 아이는 스포츠 분야의 국가대표 선수가 되고 싶지만, 미등록이주아동이라는 이유로 국가대표를 길러내는 중학교에서 방출될 위기에 있다. 태권도 급수를 따기 위해 대회에 나가야 하는 아이는 미등록이라는 이유로 승급시험에 참가할 수 없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나마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아이들은 교육이라도 받을 수 있다. 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니 괜찮다. 하지만 고등학교는 교장재량이니 가고 싶은 학교라도 갈 수 없다. 게다가 고등학교 이후 진로는 보이지 않는 미래이다. 대학진학이 불가능하고, 취업도 원하는 곳에 안 될 수도 있다. 미등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출생한 아이들만이라도 출생등록을 통한 체류권과 교육권 그리고 건강권을 부여하자며 이주아동권리보장기본법을 제정하려고 노력했으나, 법안은 계류 중이고, 아마도 법안 통과는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대표발의를 한 최초의 이주민 국회의원이었던 이자스민 의원과 공익법인권센터, 그리고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의 노력은 새로이 구성되는 국회에서 다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아이들에게 무엇이 최우선인지를 고려하여 아동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유엔인권아동협약의 골자이다. 우리나라는 바로 이 협약에 가입한 나라이다. 이제 그 협약을 준수할 법을 만들면 된다. 그러면 2만 명으로 추정되는 이주배경아동청소년들이 미등록인 부모의 체류지위와 상관없이 적어도 자신의 삶을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정혜실 (이주민방송MWTV와 다문화마을의 꿈꾸는 나무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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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하루 또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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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약 20만 명의 ‘미등록 외국인’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정부(법무부)와 대형미디어들은 이들을 ‘미등록 체류자’라고 하지 않고, ‘불법체류자’라고 딱지를 붙여 부릅니다. 그런데 그들 대부분은 ‘임금노동자’입니다. 한국에서 ‘체류권을 박탈당한 외국인’이 노동을 하지 않고 생활에 필요한 수익활동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리고 언어의 장벽과 당국의 감시와 협박이 삼엄한데, 한국인 노동자들조차도 취업하기가 쉽지 않은 영업직, 판매직, 첨단 기술직, 관리직, 사무직 노동자로 고용될 기회가 있을까요? 그래서 대부분의 미등록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영업능력이나 사무처리 능력’ 따위를 묻지 않고, 열악한 환경이라도 안정적인 육체노동을 제공할 의지가 있다면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영세 제조업, 농업, 건설업, 재활용품수거업’ 등의 사업장에서 노동을 하면서 조용히 살아갑니다.

한국 정부는 ‘30만 명~50만 명’의 이주 노동자에게 3년~4년 10개월의 체류기간을 주어 제한된 사업장에서 묶여서 노동력을 제공하게 하는 소위 ‘고용허가제’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합법적으로 외국인력을 동원하는’ 매우 모범적인 정책이라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고용허가제가 운용된 지 10년 이상이 지났지만, 위와 같은 열악한 일터들에서 ‘미등록 노동자’ 수는 줄지 않고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그리고 ‘허가받는 체류기간(3년 혹은 4년 10개월)’을 넘어서 체류하여 미등록 상태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입국한 지 1~2년도 안 되어 미등록상태가 되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한국 법무부는 그 많은 사람들이 왜 ‘미등록 상태가 되었는지, 노동권은 지켜지고 있는지’ 따위를 전혀 묻지 않습니다. 그냥 ‘등록’이냐 ‘미등록’이냐만 따지고, 후자라(고 의심되)면 그냥 ‘단속하고, 잡아가두고 쫒아내는 것’ 외에는 정책이 없습니다.

관심도 없고 구제절차도 없습니다. 단지 다른 정부기관들에서 ‘증가하는 유해조수 퇴치’의 명분을 걸고 정기적으로, 혹은 특별기간과 장소를 정하여 ‘멧돼지와 고라니, 너구리 사냥’을 하는 것처럼, ‘사람’ 단속반을 가동하여 일터와 삶터에 들이닥치고 추적하여 잡아들입니다. ‘유해조수 퇴치’와 ‘불법체류자 단속’의 차이점이 있다면, 전자는 그 계획이 사전에 널리 공표되는 데 반해, 후자는 ‘알리지 않고 불시에’한다는 점입니다.

기본적 인권은 ‘존재(생존)할 권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법무부는 미등록 노동자들을 ‘(한국 영토 내에) 있어서는 안 될 생명체’ 라고 확고하게 낙인찍고, 그 수를 줄인다는 명목으로 ‘유해조수(?)’를 퇴치하듯이 정기적 인간사냥을 벌이고 있습니다.

 

김이찬 (지구인의 정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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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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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고에 맞서 투쟁한 지 10년. 아무리 옳고 정당한 일이라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투쟁의 길 위에선 할 말이 많지 않은 법이다. 그래서 그들은 침묵한다. 그들은 가족들에게도, 함께 투쟁을 버텨 내는 이들에게도 할 말이 없다. 침묵이 그들의 관계를 이어준다. 침묵이 멈추면 서로에게 가시 돋친 말들을 뱉어낼 뿐이다. 무표정 속 흔들림은 화면 안에서나 표현될 뿐 현실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들의 침묵이 아슬아슬한 이유다. ‘장병엔 효자 없다, 그리고 장투엔 동지가 없다.’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그만큼 오랜 시간 함께 고통을 이겨낸다는 건 어려운 일이라는 의미다. 3000일이 훌쩍 넘도록 싸움을 이어가는데 그 시간 속에서 서로를 밀어내는 일은 어쩌면 오히려 자연스럽다.

창문 하나 없는 먼지구덩이 속 공장에서 그들은 20년, 30년 동안 기타를 만들었다. 사장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주면 주는 대로 열심히 일하고 월급을 받았다. 사장은 일 년에 몇 백억씩 이윤을 내는 회장님이 되었지만 먼지구덩이 속 노동자들은 그대로였다. 그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들에겐 노동조합이 창문이었다. 먼지구덩이 속 공장에서도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계절이 어떻게 바뀌는지 알고 싶었다. 사람 죽기 딱 좋을 작업환경을 개선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월급을 반 토막난 월급을 받는 불평등을 바꾸자는 것이 그들이 하는 요구의 전부였다. 그 요구는 더 이상 시키는 대로 할 수 없다는 인간선언이기도 했다.

회장이 된 사장은 대화를 거부했다. 그리고 창문 하나 없는 그 공장을 폐쇄했다. ‘감히, 은혜도 모르고, 천한 것들이’가 노동자들의 모든 삶이 걸려 있는 일터를 폐쇄한 이유의 전부다. 그리고 10년, ‘은혜도 모르는’ 그들이 해보지 않은 것은 없다. 고공농성, 단식, 원정투쟁, 공장점거농성, 길거리농성, 밴드, 연극, 그리고 영화까지. 복직이나 승리만이 그들이 해보지 못한 유일한 일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 이어지는 동안 곁을 지키던 이들도 떠나고, 마음은 점차 사막처럼 변해갔다. 그 고요하고 외로운 일상을 견뎌내는 것이야말로 투쟁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제는 가족들에게도, 곁을 지키는 동료들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는 그들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카혼을 두드리며 비로소 침묵을 벗는다.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았다는 듯, 우리가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았다는 듯이 말이다. 3000일 넘게 삶의 모든 것을 걸고 버티고 서 있는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이야기에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하는 건 그들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이씨, 네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할 줄 아냐!”

그들의 노래처럼 그들의 인간선언도 아직 진행 중이다.

 

고동민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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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즐거운 나의 집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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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만 넘어도 장기투쟁.” 사실, 이 말은 옛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일 년, 천 일, 삼천 일 그리고 십 년…. 지독한 시간들이다. 평온한 삶은 고사하고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가 어려워진다. 이에 맞설라치면 기득권이라 여겨지는 이들, 기업, 국가로부터 끊임없이 시달리게 된다. 살아가면서 존재와 분리할 수 없는 보편적인 권리를 앗아가는 방법은 날로 손쉬워지는데, 되찾아 지키는 길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마치 인권침해는 있어서 안 되는 것이지만, “당신의 그것은 인권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누군가의 재산, 기업의 이윤, 다수의 이익, 국가안보와 같은 그 무엇들이 앞세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투쟁을 하다보면 싸움의 결과로 당장의 처지가 조금 달라진다 해도, 반복되지 않을 책임을 묻게 된다. 그리고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게 된다. 끝까지 국가의 책임을 묻고 재개발제도 자체를 되묻고 있는 용산의 싸움이, 전쟁기지를 반대하며 반전평화를 만나게 하는 강정이, 국가폭력을 맞닥뜨리고도 삶은 어떻게 지속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며 핵발전소 폐쇄를 말하는 밀양의 싸움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철폐를 이야기하며 노동의 권리를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싸움이 그러하다.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십 년을 싸운 밀양 할매들이 전해준 말이다. 곁을 지키는 당신이란 존재들과 함께 싸웠기 때문에 알게 되고 얻게 된 것들이라고 웃으며 말해주지만, 그런 즐거움들이 상쇄할 수 없는 고통은 매일매일 자라났을 것이다. 오랜 싸움은 사람을 지독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건강과 물리적인 한계는 물론이고 단단해지리라 마음먹을수록 달라지는 일상, 곁을 지키는 이들이 나고 질수록 진화하는 외로움, 맘먹은 대로만 풀어지지 않는 관계들, 지키기 점점 어려워지는 원칙들…. 미처 세어낼 수 없는 수많은 고통들이 매 순간 있을 것이다.

싸움 십 년을 앞둔 또 다른 이에게 어떻게 싸우고 싶으냐고 묻자, 효과 있고 구체적인 싸움의 방법이 아닌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꾸준해도 마음이 즐거운 것.” 싸움의 끝만이 아니라 어떤 싸움이어야 자신을 지킬 수 있는가를 이미 분명히 알고 있는 이들. 이런 이들에게 우린 싸움이 어떻게 끝나도 후회하지 않게 하고 싶노라고 감히 말하곤 한다.

“연대가 별거겠어?”라며, “‘나라도 가야지’하고 신발 끈을 질끈 묶는 연대의 전령”이 되는 그녀를 바라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그녀는 다른 이들에게 싸우는 이가 얼마나 처절하게 고통받고 있는가에 대해 피해자로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왜 싸우는지, 그게 얼마나 자기에게 의미가 있으며 그래서 어떻게 지키고 싶은지를 먼저 이야기한다. “‘노동자도 인간이다’ 보다는 ‘노동자는 인간이다’가 더 좋아.” 싸우는 이들의 ‘앞선 입’이 되기보다는 함께, 사람들과 나눌 언어를 만든다. 그러나 서로 지키고 싶은 원칙에 대해서는, 폭력에 맞서 함께 싸우는 기세와 용기만큼이나 단호하다. 그녀는 내게 당신이 온전하지 않으면 내가 온전한 게 아니라는 연대의 시작을 가르쳐주었다. 인권은, 천부인권 같은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불완전할 수 있다는 것. 우리가 존엄함을 지키기 위해 서로에게 걸어준 오래된 약속인 것처럼 말이다.

 

기선 (인권운동공간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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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수상 관저 앞에서

인권해설

이 작품은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 사고 이후 일본사회의 변화를 기록한 것이다. 도쿄 도심 한복판에서 탈핵집회가 연일 이어졌고,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데모 따위는 일부 과격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던 ‘보통’ 사람들이 스스로 거리에 나서 ‘핵발전 NO’를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대재앙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애초에는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한 정보가 차단된 상황에서 방사선 피폭의 불안감과 더불어 일상을 송두리째 빼앗긴 후쿠시마 사람들의 분노는 나날이 높아갔다. 다양한 감정들을 표출하기 위해 사람들은 뭔가를 해야만 했고 결국 그들은 거리에 나서기 시작했다. 60년대를 마지막으로 일본에서 거의 보기 힘들어진 데모가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왔다. 입소문과 SNS를 타고 분노는 온 열도로 퍼졌다. 카메라 앞에서 ‘데모에 참여하는 것은 처음’이라며 얼굴을 붉히는 사람들. 그들의 눈빛에서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기쁨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해방감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한 작은 움직임이 결국 2012년 여름 수상관저 앞에서 ‘탈핵’을 외치는 20만 명의 성난 군중이 되었다.

그 후 아베 정권 등장의 패배감으로 운동은 일시적으로 후퇴된 것처럼 보였지만 끝난 것은 아니었다. 수상관저 앞에서 매주 금요일에 열리는 탈핵 집회도 그렇고 핵발전 의존 정책으로 돌아가려는 정부와의 힘겨루기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작년 ‘비밀보호법’과 ‘안보법안’에 반대하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영화는 주로 도쿄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 시민들의 탈핵운동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지만, 지역에서도 탈핵운동은 그 전보다 현저히 발전했다. 특히 핵발전소 입지 지역 주민들이 핵발전소 재가동을 막기 위해 꾸준한 싸움을 지속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작년 8월 센다이 핵발전소 1, 2호기 재가동을 저지할 수 없었지만, 사고 발생부터 5년 동안 일본의 거의 모든 핵발전소는 지금도 가동되지 않고 있다.

사회를 바꾼다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현재 후쿠시마 사고 현장과 전국의 핵발전 재가동 상황 또한 결코 낙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정과 결과의 경계는 항상 애매하다. 낙관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미력은 무력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서로를 믿고 한발 한발 나아간다면, 우리는 조금씩이라도 사회를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이 영화는 그런 희망의 단서이다.

 

오하라 츠나키 (탈핵신문 편집위원)

42인권해설

인권해설: 국회를 점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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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18일에 발생한 대만 국회(입법원) 점거는 참여자들마다 입장, 이념, 심지어는 요구안까지 상이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투쟁을 이해하는 방식도 각자 다르다. 해바라기운동(太陽花運動), 318운동, 학생운동, 서비스무역협정 반대운동. 이 운동이 어떤 호칭으로 불리건, 어떤 이념을 담았다고 판단하건 간에 모두가 동의하는 명제가 있다고 믿는다. 바로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상상은, 이 운동을 계기로 천지개벽할 정도로 변했다는 점이다.

과거 대만은 오랜 세월 계엄 하에 있었다. 당시 권위주의 정권은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에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과 정적(政敵)들을 제거했다. 심지어는 일반 국민도 피해를 입은 경우가 있어, 나이가 있는 대만인 대다수는 정치를 기피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들은 정치와 조금이라도 관련되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대만의 청년 세대에도 영향을 미쳐 청년들이 정치에 참여할 때 가족이 가장 먼저 이를 말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정치에 대한 상상은 오랜 기간에 걸쳐 억눌려 다시 싹틀 기회도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대만인들은 그동안 정치를 자신과 관련 없는 영역이나 더러운 영역으로 여겨,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318 국회 점거는 정치에 참여한 적 없거나, 참여하는 방법을 모르던 이들을 ‘정치적인 장소’로 몰아넣었다. 그곳은 국회 점거 현장이기도 했고, 친구들과의 대화나 수업 내용이기도 했고, 심지어는 미디어에서 전해오는 소식이기도 했다. 대만 사회 전체가 굉장히 ‘정치적인’ 공간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정치적 역량이 318 국회 점거를 계기로 다시 피어나, 사회개혁을 목표로 하는 단체나 개인들은 정치 공간에서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렇게 일순간에 대만 사회는 정치에 대해 서로 논쟁하는 분위기로 변모했다. 이를 원래 좋아했건, 반대했건, 관심이 없었건 관계없이, 도처에 ‘정치’가 있어 사회 구성원 모두가 타인과 의견을 주고받게 되었다.

혹자는 318을 계기로 우리 사회의 청년 세대가 각성한 세대가 되었고, 당국의 교육,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속박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이들이 대만을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세대로 변모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는 318이 ‘계몽’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찌되었건 318은 우리가 첫 발걸음을 내딛게 만들어준 하나의 계기일 뿐이며, 이후에 나아갈 방향은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해바라기운동이 끝난 지 2년이 지난 지금, 어떤 참여자는 한 발 더 나아갔지만, 어떤 이는 그토록 타도하고 싶어 하던 그들의 편에 서 있다.

318 국회 점거는 단순한 사회운동이 아니라 성장의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318 이후로 2년이 지났지만, 성장의 고통은 아직도 대만 전역과 모든 참여자들을 휘감고 있다. 이 성장이 대만에 가져다 줄 결과가 어떨지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우 보웨이 吳柏緯 (대만 독립언론인)

번역 세정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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