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버블 패밀리

인권해설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몇 가지 빈곤 지표가 있다. 한 가지는 50%에 육박하는 노인빈곤율, 또 한 가지는 소득이 낮은 사람일수록 더 많은 주거비를 지출하는 주거빈곤율이다. 언뜻 보기에 두 가지 사실은 병렬적이지만 구체적인 연결점이 있다.

이 두 가지 비참은 한 사회학자*의 설명을 통해 연결된다. 그는 한국의 독특한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자본주의 후발 국가였던 한국은 6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노동자들의 월급을 동원할 계획을 세웠다. 저축은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노동자들은 자산을 형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중상위 계층 이상의 노동자들에게만 편중된 이득이었다. 자산 격차는 점점 커지고, 노동자 주택을 공급해야 하는 필요가 늘어나며 정부는 대규모 주택공급 계획을 세운다. 80년대 한국 노동자들의 목표는 ‘내 집 마련’ 이었다. 자가소유자는 이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집은 가장 많은 수익을 보장하는 상품이었다. 새로 연 모델하우스는 인산인해였고, 수십 수백 대 일의 추첨을 거쳤다. 몇 배의 웃돈을 주고 사도 다시 몇 배로 불어났으니 아깝지 않은 투자였다. 전 재산을 집에 투자한 사람들은 집을 통해 부자가 되기를 바란다. ‘경로의존성’ 이라는 개념은 이 과정에서 복지의 확대보다 주택시장의 확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발생하는가 설명한다. 이미 정부 정책에 따라 집을 사고, 임대업자가 된 사람들은 복지와 연금 확대를 위한 세금인상보다 더 많은 월세를 받을 수 있는 사회를 지지한다.
주택 보급률 108%에도 절반의 국민이 집을 갖지 못한 현실, 가장 많은 집을 가진 사람이 2291채의 집을 가진 현실은 어느 순간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정부의 정책과 정부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선택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 사회 공동의 산물이다. 90년대 간편한 주택공급과 노동자들의 내 집(건물) 마련을 위해 지어진 다세대주택과 상가건물은 정부의 전격적인 지원 속에 탄생했고, 누군가에게는 2년에 한 번씩 갱신되는 든든한 노후보장책이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승자의 이야기다. 패자의 이야기는 다르다. 이농 정책에 따라 도시로 밀려든 사람들은 가난한 노동자가 되었다. 그들이 엉겨 살던 청계천, 한강다리 밑, 판잣집은 쉽게 헐렸다. 서울 잠원역 앞 비닐하우스에 살던 한 할머니는 살면서 수차례 철거를 경험한 사람이었다. 청계천 다리 밑에 살 때는 그냥 어느 날 집이 사라졌고, 여의도에 살 때는 포크레인이 집을 쿡 내리찍었다고 한다. 강남에 있던 집은 지게차에 밀려 납작해졌다.
평생 내 집 마련의 기회조차 얻지 못했거나 게임에서 패배한 노인들은 절반의 확률로 빈곤에 빠지게 되었다. 나라는 제법 발전했지만, 그들을 보호해 줄 튼튼한 사회안전망은 없다. 우리 사회는 그런 것을 선택해오지 않았다. 집이 없는 사람들은 재계약 날짜가 다가오면 문 여닫는 소리도 조심스러워한다. 행여 집주인을 만나면 보일러가 말썽이 났어도 불편한 기색을 숨긴다. 세입자 신세란 그런 것이라고 한다.
승자의 이익이 있는 곳엔 폭력이 상주한다. 여전히 도시 곳곳에서 벌어지는 개발은 더 많은 이윤을 보장받기 위해 더 빨리 사람을 내쫓아야 하는 속도전이다. 대규모 건설이 공간과 수익성의 이유로 이뤄지기 어려운 요즘, 세입자를 내쫓기 위해 작은 상가 하나에서도 건물주가 용역폭력을 구입하고 있다. 새로운 현상이다. 뉴타운 건설 붐이 끝나도 우리의 욕망이 끝나지 않는 한 새로운 버블과 폭력은 이렇게 얼굴을 드러낸다.

재벌은 노동자의 저축을 지원받아 성장했지만, 외환위기 이후 고통 분담은 노동자들의 몫이었다. 정리해고, 임금동결, 파견법 수용. 불안정한 노동형태는 일반화되었고 높은 가계 저축은 높은 가계 부채로 전환되었다. 가계부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주택담보대출은 한국 경제문제의 중요한 뇌관이 되었다. 건드리면 터지기 때문에 앞으로도 집값은 올라야만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공공주택 보급률은 OECD 평균 12%, 한국은 5%에 불과하다. 사회복지 지출은 OECD 평균의 절반으로 꼴찌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강남 집값은 여전히 불패의 역사를 쓰고 있다.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불패의 역사인가? 다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약속을 위해 우리는 어디서부터 변화를 시작해야 할까? 20년, 30년 뒤 더 나은 사회를 고민한다면 결코 피할 수 없는 주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선택을 시작해야 한다.

*이 글은 <한국 복지자본주의의 역사 -자산기반복지의형성과 변화>(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8년, 김도균 저)를 참고해 작성하였습니다.

김윤영(빈곤사회연대)

30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버블 패밀리

프로그램 노트

1970년대 후반, ‘국가경제개발’이라는 거대한 이름 아래 대대적인 국가 주도의 도시개발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향했고, 도시에는 이들이 거주하고 삶을 일굴 새로운 건물이 필요했다. 부동산 가격이 수백 배씩 뛰어올라도 수요는 날이 갈수록 늘었다. 사람들은 소규모 건설업을 시작했고 부동산 투자에 열광했다. 위험을 감수하면 큰 ‘한 방’을 터뜨릴 게 확실했던 시기, 당시 부동산은 모두에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부동산 거품이 가라앉았다. 소규모 회사들은 모조리 부도가 났고, 무수히 많은 개개인의 삶도 조각나버렸다. 거품의 몰락은 가족 사이에도 균열을 내었다. 집안의 경제 사정이 몰락한 상황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마주하고 삶에 치이면서 서로 갈등을 겪기 마련이다. 그리고 간극은 애증과 원망이 되어 그들 관계에 ‘가족’이라는 이름만을 남긴다. 버블경제 또한 그렇게 거품뿐인 가족, “버블 패밀리”를 만들었다.
버블은 수많은 삶을 조각냈지만 그 모든 책임은 ‘지나친 욕심’의 탓이 되어 개인에게 덮어졌다. 그러나 근본적인 책임은 국가에 있었다. 국가는 작은 영리 업자들에 대한 안전망을 만들고 필연적으로 일어날 경제위기 상황을 대비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국가는 오히려 무분별한 개발 사업을 펼쳤고, 부동산에 대한 환상을 키우는 데에 일조했다. 국가와 소수 기업에 떨어질 이익이 부서진 개개인의 손실보다 크다면 그만이라는 계산, 이것이 정부가 말하는 국가경제개발이었다. 처음부터 거품과 함께 휩쓸려갈 사람들이 정해져 있던 구조에서, 과연 모든 책임을 개인의 탓이라고 몰아갈 수 있을까?
지금도 한국에는 영화 속 부모님처럼 부동산 몰락을 겪고도 부동산의 희망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에서 이들의 ‘욕심’은 너무나 당연하게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과거 큰 ‘한 방’의 경험과 여전히 사회에 존재하는 부동산 투기의 흐름을 생각한다면, 사회는 이들의 ‘욕심’을 비난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제는 유일한 희망이 된 부동산의 끈을, 우리는 과연 욕심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21프로그램 노트

인권해설: 기프실

인권해설

길이 아닌 포장도로를 거친 손으로 환영하던 시절. 갯벌을 매립해 국토를 넓히는 게 자랑이던 시절. 골짜기 곳곳마다 세워진 댐들을 소풍으로 찾아다니던 시절. 그런 시절은 분명 있었다. 하지만 개발이 마냥 아름다운 시절은 갔다. 개발이 발전으로 환원되던 시절은 진즉에 끝났다. 멀미 나는 길을 돌고 돌아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거친 식단을 일부러 찾아다니고, 느림의 미학을 트렌드로 받아들이며 콘크리트 같은 인공 구조물 대신 풀과 나무와 흙이 각광받는 시절에 살고 있다. 뭘 해도 앞머리에 ‘친환경’이란 말이 붙어야만 한자리할 수 있는 시절을 우린 보내고 있다.

그런데, 기어이 시곗바늘을 뒤로 돌린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의 선진국이 있던 댐도 철거하는 시절에 16개의 댐을 한꺼번에 세우고야 마는 사람들. 무엇보다 자연생태계를 중시하고 자연하천을 추구하는 지구의 흐름 속에서, 준설로 강바닥을 파내 강줄기를 일자로 만들고 콘크리트 구조물을 강에다 처박고야 마는 사람들. ‘4대강 사업’의 비극은 우리 강을 망친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살아내는 시절을 거꾸로 뒤로 밀어내기까지 했다. ‘4대강 사업’이 자행된 우리 강은 더는 지금 우리의 시절이 아니다.

홍수를 막겠다고 시작했지만, 정작 홍수와 상관없는 곳에 댐을 만들었다. 가뭄을 막겠다고 시작했지만, 정작 가뭄과 상관없는 곳에 물을 가뒀다. 수질을 개선하겠다고 시작했지만,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우리는 홍수에 도움 되지 않는 댐에다가 가뭄에 쓸 수도 없는 썩은 물을 이만큼이나 가둬서 가지고 있는 셈이다. 자랑이라면 자랑이겠다. 하지만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목적한 바를 단 한 개도 ‘4대강 사업’은 이루지 못했다. 22조 원이라는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이 들어간 국책사업이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초과 노동, 철야 작업 등 과도한 속성 공사로 사망한 노동자만 21명이다. 과연 21세기에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렇다면 ‘4대강 사업’으로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강을 터전으로 삶을 일구던 어부들을 몰아냈다. 물길이 막힌 강은 더는 강이 아니기에 강에 살던 물고기들은 제 살 곳을 잃어버렸고, 그 물고기들을 쫓던 어부들 역시 이젠 설 곳이 없다. 강을 터전으로 삶을 일구던 농부들을 몰아냈다. 여울과 모래톱을 벗 삼아 농사짓던 곳은 수로처럼 일자로 뻗은 강과 콘크리트로 뒤덮인 둔치가 대신하고, 농부의 땀은 어제의 영화로 기록으로만 남는다. 그리고 두물머리의 사람들처럼 기프실의 사람들처럼 이네들이 쫓겨난 흔적도 도통 찾아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4대강 사업’으로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4대강 사업’으로 극소수의 사람은 돈을 불렸겠지만, 누군가는 죽음을 맞았고, 또 누군가는 삶의 터전을 잃었다. 그리고 우리에겐 ‘4대강 사업’이 가져온 비극과 슬픔을 치유해야 하는 숙제가 남았다. 질문이 처음부터 틀렸던 것이다. 다시 물어보자. 그렇다면 ‘4대강 사업’으로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이제 영화를 보시라.

정규석(녹색연합)

28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기프실

프로그램 노트

국가경제개발, 수해 예방, 수자원 확보, 수질 개선이라는 목표 아래 4대강 사업이 시작되었다. 사업계획에 따라 주요 4개 강인 한강, 낙동강, 영산강, 금강 주변에는 댐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허술하게 진행되었던 4대강 사업은 그 지역에 있던 자연환경, 문화재를 수몰시켰다. 사람들도 더 이상 그곳에서 살 수 없었다.
기프실 마을 또한 4대강의 마지막 사업인 영주댐 건설로 인해 사라질 마을 중 하나이다. 하천이 깊다 하여 기프실이라고 불리던 이곳은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을 띠고 있지 않다. 영주댐이 마을 깊이까지 들어오는 내성천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던 기프실은 이제 사람이 드문 곳이 되었다. 버스정류장에는 더 이상 기프실을 경유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새마을 운동이 진행될 때에도 보존했던 내성천의 고운 모래는 이제 딱딱하게 변해있다. 할머니는 이사 가는 것이 서글프니 묻지 말라고 한다. 내 삶이 깃들어 있는 공간을 떠나는 일은 이토록 쉽지 않다. 기프실 사람들은,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도 마을 사람들은 일상을 살아낼 것이다. 땅을 일구고, 나물을 캐면서. 그러나 그곳이 기프실과 같은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기프실을 발전을 위한 도구로 쓰지만 기프실 사람들에게 이 공간은 매일 등교하던 학교가 있는 곳이고, 힘들게 가꾼 집이며, 10년 동안 살았던 마을이다. 사람들의 손길과 자연의 흔적이 닿고 닿아 만들어진 이곳은 숫자로 환산될 수 있는 걸까. 국가경제개발이라는 목표 아래 삶터가 사라져도 되는 걸까. 마을 사람들의 삶과 분리되지 않는 이 공간을, 국가가 떼어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영상 속 사라져 가는 이 마을을 기억한다. 나와 이 공간은 완전히 분리되지 않음으로.

23프로그램 노트

인권해설: 예외상태

인권해설

식민 침략으로 학살당한 브라질 선주민의 역사는 책 속의 이야기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20세기 중반에도 군사독재정권이 주도한 개발 사업으로 인해, 수많은 선주민이 학살당했고 그들의 거주지인 숲이 파괴되었다. 오늘날에도 광산과 농장을 확장하려는 기업들에 의해 선주민 탄압과 살해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메가스포츠이벤트에는 억압받고 절멸되어가는 것들을 마케팅 도구로 내세우는 이상한 전통이 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개막식에는 선주민 부족과 그들의 문화가 무대 장치로 동원되었으며, 다국적기업은 선주민 고유의 문양을 담은 축구화를 제작하여 유명 선수들에게 제공했다. 2010년 밴쿠버 올림픽은 선주민의 땅을 광범위하게 파괴하며 개최되었으나, 그들의 문화를 모티브로 한 엠블럼을 내걸었다. 2018년 평창올림픽의 마스코트였던 수호랑은 1922년에 한국에서 멸종된 호랑이를 형상화한 것이며, 반다비로 표현된 반달가슴곰은 1983년에 야생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식민 침략과 함께 시작된 노예무역으로 수많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아메리카 땅으로 왔다. 이들은 수출용 상품 작물을 재배하는 근대적 농산업에 의해 착취당했다. 대농장은 폭력을 동원한 노예 노동으로 확장되어 갔고, 탈주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이들은 접근이 어려운 산악지대와 늪지대에 공동체를 건설했으며, 반(反)-식민운동을 전개했다. 도주한 노예들의 공동체를 퀼롬보(Quilombo)라고 부른다. 브라질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마지막으로 노예 제도를 폐지한 국가다. 1888년 5월에 노예제를 폐지한 후에도 대지주가 실질적으로 사회를 지배하며 인종차별과 불평등은 지속되어 왔다. 브라질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토지 불평등 문제를 겪고 있다. 퀼롬보는 지금까지도 촌락으로 남아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고 있으며, 도시 노동자와 빈민의 삶의 터전인 파벨라(Favela)의 원형이 되었다. 리우데자네이루에는 약 1000개의 파벨라가 있으며, 리우시 인구의 24%가 여기에 살고 있다. 브라질 정부는 한 세기가 넘도록 토지와 주택 문제, 빈곤 문제에 대해 방임과 억압으로만 일관해왔다. 파벨라는 그동안 빈민들이 스스로 삶을 지속해나가기 위해 노력해 온 결과이자,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그들의 고군분투, 그 자체이다.

2014년 월드컵과 2016년 올림픽이 차례로 개최되는 동안 리우의 사람들은 착취되는 동시에 배제되었다. 리우시는 월드컵 예산으로 14조 원을 지출하며, 경기장 건설비 3조 6천억 원을 충당하기 위해 사회복지예산을 전용했다. 주 경기장에서 2킬로미터도 채 떨어져있지 않은 마크라렌(McLaren)에는 여느 파벨라와 같이 수도와 전기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으며,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마크라렌의 일부 사람들은 2007년에 공공주택 입주 대상 목록에 올랐으나, 월드컵과 올림픽 개최가 우선시되며 입주가 무기한 보류되었다. 리우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공교육과 공공보건, 복지의 확대를 요구했으나, 그들에게 되돌아온 것은 강제퇴거였다. 7만 7천여 명이 거주지에서 쫓겨났다. 리우 공항에서 시내 중심가로 가는 길에 있는 수많은 파벨라를 가리기 위해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벽이 세워졌다. 빈곤을 비가시화하고 빈민을 몰아내려는 시도는 메가스포츠이벤트 개최 도시가 일상적으로 겪는 일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벌어진 대규모 개발 사업 과정에서 폭력적으로 쫓겨난 상계동 주민들은 부천에 임시 건물을 지어 정착하려 했으나, 바로 앞 도로에 올림픽 성화가 지나간다는 이유로 또다시 강제 퇴거당했다. 전두환 정권은 ’88 서울 올림픽 도시 미화’를 이유로 노점상을 쫓아내고, 도매시장을 폐쇄하며, 판잣집을 가림막으로 가렸다. 2002년 월드컵 때에도 주 경기장 건립을 내세운 개발 사업 과정에서 철거용역과 공권력 2천여 명이 동원되어 동절기 강제퇴거를 강행하여 상암동 주민들을 쫓아냈다. 2018년 평창 올림픽을 위한 정선 알파인 스키장은 가리왕산의 숲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숙암리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켰으며, 경기장으로 가는 도로 인근의 폐가와 짓다 만 숙박시설 등은 올림픽 마스코트가 그려진 가림막으로 꼼꼼하게 가려졌다.

이미 심각했던 리우데자네이루의 경찰폭력 문제는 메가스포츠이벤트 개최로 더욱 악화되었다. 2014년 월드컵 개최 당시 경찰에 의한 사망률은 전년도보다 39.4% 증가했으며, 2015년에는 이보다 11% 더 많은 645명이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다. 이는 시내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의 20%에 달하지만, 책임자가 처벌된 경우는 거의 없다. 메가스포츠이벤트를 내세운 ‘예외상태’는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소외된 공동체에 대한 폭력을 용인한다. 이러한 ‘예외상태’는 월드컵과 올림픽이 모두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개최지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2014년 3월 말에 월드컵 보안을 이유로 파벨라인 마레 지구(Complexo da Maré)에 대규모의 군사 병력이 투입되었다. 20대의 무장차량과 3천 명이 넘는 병력이 주둔했다. 점령은 1년 넘게 이어졌다. 올림픽 개최 때엔 브라질 역사상 최대의 안보병력인 8만 5천 명이 동원되었으며, 이들은 여전히 리우데자네이루 거리에 남아 ‘강화된 치안’이라는 이름으로 파벨라 주민들의 삶을 침략하고 폭력을 일삼고 있다. 2017년 9월에는 주지사의 명령으로 리우 최대의 파벨라인 호시냐(Rocinha)가 점령되었다. 군 병력은 총기로 민간인을 위협하고 학교를 폐쇄했다. 호시냐의 활동가들은 마약밀매 종식을 명분으로 내세운 군대의 비효율적이고 폭력적인 치안 방식을 비판해왔다. 이러한 활동가 중에는 시의원인 마리엘 프랑코도 있었다. 마리엘 프랑코는 마레 지구에서 나고 자란 흑인 성소수자 여성이자 인권활동가로서 의회에서 빈민의 목소리를 대변해왔다. 그녀는 경찰 폭력과 군사 점령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 왔으며, 파벨라인 아카리(Acari)와 호시냐에서 벌어진 끔찍한 경찰 폭력 사태를 폭로한 바 있다. 마리엘 프랑코는 2018년 3월 14일 저녁 9시 30분경에 신원미상의 남성 2명에 의해 피살되었다. 연방정부의 군사개입을 감시하는 특별위원회를 발족한 지 불과 2주가 채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리우의 사람들은 이러한 활동이 그녀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그녀는 피살되기 하루 전에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지 이 전쟁이 끝날까”라는 글을 트위터에 남겼다. 리우의 미래를 위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개최지 사회의 위기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최대의 이윤을 뽑아낸 뒤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국제축구연맹(FIFA)의 유산도,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유산도 아닌, 마리엘 프랑코의 유산이 아닐까.

이름 (평창올림픽반대연대)

24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예외상태

프로그램 노트

파벨라는 높은 곳에 위치해 ‘신들의 도시’라고 불린다. 신과 가장 가까이 살던 선주민들은 월드컵과 올림픽 개최를 위해 하루아침에 가장 낮은 곳으로 끌려 내려왔다. 정부는 그 땅에 공공성을 들이대며 경기장과 주차장, 복합쇼핑몰을 짓겠다고 한다. 이들이 없애겠다고 한 것은 단순히 낡고 허름한 집이 아닌 공간, 문화, 관계다. 삶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통로를 파괴하는 것이다. 정부가 보호하는 ‘국민’에 파벨라 거주민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정부가 브라질의 전통과 통합을 강조할 때 선주민과 함께하는 모습은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선주민 박물관 보존은 보류하며 그들의 실제 삶을 내팽개친다. 이들에게 선주민의 삶은 교정해야 하는 브라질의 ‘오류’다.

정부는 사람들의 현실을 보이지 않는 검은 커튼 뒤로 숨겼다. 커튼 밖 축제 무대는 더 크고 화려하게 치장하고, 커튼에 가려진 삶의 터전은 무서운 속도로 좁혀갔다. 커튼 뒤에는 주로 빈민, 소수인종이 모여 살고 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곳은, 반발할 힘이 없거나 항의해도 무시해버리기 쉬운 ‘약한 곳’이었다.

정부는 그곳에서 공권력을 앞세워 사람들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조용하게 있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들이 ‘약하다’고 했던 삶의 방식은 꺼지지 않는 저항의 방식이었고, 사람들의 춤, 노래, 말하기, 생존은 그 자체로 짓이겨지지 않는 힘을 가졌다. 이들은 하나로 뭉쳐 저항하기도 했고 때로는 각자의 숨 쉴 곳을 찾아 흩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택한 방식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선주민의 움직임은 연대자들과 만나 더 큰 물결을 일으킨다. 이들은 의료 및 교육 서비스를 비롯한 각종 사회 문제, 그리고 나의 존재를 내 공간에서, 의회에서, 거리에서 함께 외친다. 오늘도 투쟁은 다양한 모습으로, 예외상태를 마주하고 저항하며, 나아가고 있다.

23프로그램 노트

인권해설: 손으로 말하기까지

인권해설

농영화를 만드는 이유

우리는 인간의 진심으로 표현한다. 농인독립영상제작단 데프미디어다. “대화나 정보 전달은 수어나 활자를 통하면 됩니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소리가 아닌 ‘눈으로 보이는 시각’입니다.” 소리 없는 영화란 농인의 정체성과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여과 없이 보여주기 위한 자연스럽고 당당한 표현방식이자, 그들에게 높은 담장을 둘러친 이 사회와 소통하는 창구이기도 하다. 음악이라도 있었으면 감상이 훨씬 편했을 텐데 영화에서 모든 소리를 빼버렸어야 했을까? 누군가는 근사한 사운드와 음악으로 영화를 즐길 때, 우리는 단지 눈으로 보기만 하니 즐거움을 느끼기는커녕 내용 파악도 힘들고, 그럴 때마다 “나도 대한민국 사람인가?” 하는 분노가 치민다. 그 분노가 수어로 만든 영화, 즉 소리 없는 영화를 탄생시킨 계기다.
-2016 함께걸음-

현재 영화는 컴퓨터 그래픽, 영상처리, 음향 효과를 결합한 구조체로서 관객들에게 흥미를 제공하는 매체다. 그러나 100년 전까지만 해도, 영사기 발명 이후 등장한 영화엔 소리가 없었다. 그 때 수어가 무성영화에 등장하는 사례가 많았다. 예컨대 나운규 감독의 <벙어리 삼룡이>라는 무성영화엔 수어의 일종인 홈사인(home sign)이 채택된 것으로 추측된다. 미국의 경우, 찰리 채플린이 출연한 무성영화에 농인 배우가 등장하였다. 찰리 채플린은 농인 배우로부터 수어를 동반한 연기 지도를 받아서 훌륭한 연기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바뀌는 과도기에는 무성영화를 생계 수단으로 삼던 많은 농인들이 실업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국에서는 <마지막 포옹>, <만종>, <아다다>, <고래사냥> 등, 외국에서는 <홀랜드 오퍼스>, <시크릿 러브>, <비욘드 사일런스>, <블랙>, <청설> 등, 농인을 소재로 한 다양한 영화가 제작되었다. 농인이 직접 영화 제작에 참여한 것은 2005년 4월부터이다. 농인은 영화 분야에 관심이 있어 관련 교육을 받거나 영화 제작 현장에서 경험을 쌓으려 해도, 의사소통의 문제로 종종 어려움에 부딪혀 영화 분야는 불모지나 다름이 없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농인의 언어인 수어로 하는 영화를 만들 수 없을까?’ 고심하다가 농인끼리 자조 모임으로 시작한 농인영상동호회 ‘데프미디어’를 꾸렸다.

농인은 ‘보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영화에 담아 알리고 싶었다. 예술 분야에서 농인이 차별 없이 문화를 향유할 뿐만 아니라 직접 창작하기 위해서는 교육적인 제반 환경이 갖추어져야 한다. 하지만 수어통역 바우처 등과 같은 제도적인 뒷받침이 없는 현실에 대한 아쉬움을 호소하곤 한다. 데프미디어는 지금도 일상 속에서 알게 모르게 행해지는 농인에 대한 차별들을 개선하고자 영화를 구상하면서 <한국농역사> 제작에 열중하고 있다.

박재현(데프미디어)

27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손으로 말하기까지

프로그램 노트

사람은 저마다의 언어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인식한다. 언어는 사람의 세계관을 구성하며 동시에 어떤 세계를 만나게 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수어가 자신의 언어인 농인은 수어로 세상을 만나고, 세상을 만든다. 하지만 농인이 마주하는 세상은 들리지 않는 것을 기능의 상실로 여겨 ‘치료’를 통한 기능의 회복을 요구하며, 소리언어를 가르쳐 청인과 유사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려’ 한다. 이렇게 청인 중심의 세계와 소리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농인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끊임없이 ‘시끄럽게’ 부딪친다.

수어를 사용하지 말라며 이들의 문화와 세계를 빼앗으려는 세상을 향해 농인들은 ‘손으로’ 그 누구보다 시끄럽게 투쟁한다. 농인 부모는 청각장애를 가진 자신의 아이가 인공와우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의사에게 “우리는 수술 없이도 수어를 하면서 잘살고 있다”고 말한다. 농인 국회의원은 농인들의 연대를 강조하며, 지금 무엇이 개선되어야 하는지 함께 말해야 청인 중심적인 정책이 바뀐다고 말한다. 농인 공동체는 수어 사용에 대한 자신감을 서로 임파워링 한다. 이렇게 농인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강한 자긍심과 끈끈한 연대로 청인 중심 사회에 균열을 낸다.

농인은 ‘장애를 견디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농인 정체성을 가진 주체이며,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고 단절되는 대신 소란한 저항으로 맞서 싸워 이길 것이라 말한다. 농인으로서 있는 그대로 살아가기 위한 저항의 흔적들은 이들의 일상 모든 곳에 완연하다. 그렇게 농인으로서, 농인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저항의 움직임을 적막으로 덮으려는 세상을 향해 균열의 파장을 그려내는 손이 있다. 손으로 말하기까지 그 누구보다 ‘소란스럽게’ 손을 사용한 사람들이 있다. 손으로 말하는 존재의 방식은 겹겹의 파동이 되어 세상을 부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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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해설: 소성리

인권해설

국가안보라는 이름 아래 묻힌 목소리들 한반도에 평화의 봄이 왔다고들 했다. 올 초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시작된 남북 간의 대화와 화해의 몸짓은 한국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우리 사회를 짓눌러 왔던 대결과 전쟁의 위기를 걷어내는 중요한 계기였고 많은 사람들은 평화의 꿈을 꾸었다. 그러나 같은 시간, 분명 우리의 한 부분인 성주 소성리에서는 수천여 명의 경찰에 에워싸인 채 계엄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주민들의 의사는 배제된 채 강행되는 사드기지 공사를 막기 위해 그곳의 사람들은 서로의 몸을 묶어야 했고 무차별적인 공권력에 의해 끌려 나와야 했다. 소성리 사람들의 삶과 평화는 그렇게 질식되고 있다. 같은 일이 10여 년 전 제주 강정마을에서도 벌어졌다. 2007년 국민과의 소통을 최우선으로 삼는다는 정부에서 주민의 의사는 배제된 채 강행된 제주해군기지 사업은 그곳 사람들을 갈가리 찢어놓았고, 이들의삶은 불안해졌다. 지금의 소성리와 같은 모습으로 시작된 저항을 지속하였고 4000일을 넘긴 저항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국가안보를 위해서’ 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군사기지, 군사훈련장 등의 건설 사업에서 해당 지역 사람들의 삶은 그리고 인권은 아주 쉽게 무시된다. ‘그곳’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저항을 님비 혹은 이기주의라는 말로 치환한다. 분단이라는 조건과 이로 인해 뿌리 깊게 형성된 ‘증오’는 다른 목소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국가를 위해 희생하라’는 주장이 다른 모든 목소리를 삼키는 것을 용인한다. 우리는 국가가 추진하는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정책이 국민의 삶을 더 불안하게 해 온 경험을 기억해야 한다. 더 많은 군사기지와 더 강력한 무기가 우리를 더 안전하게 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불안하지만, 지금 이 땅에 번지는 평화의 기운은 무기를 내려놓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국가안보가 아닌, 그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안전과 평화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어야 한다. 영화 ‘소성리’는 부당한 국가정책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투쟁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보장받아야 할 일상과 삶에 관한 이야기다. 소소하고 심지어 조금은 심심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박석진(군대를 보는 시민의 눈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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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노트: 소성리

프로그램 노트

할머니들에게 소성리는 단순한 마을 이상의 의미가 있다. 비옥한 토지와 깨끗한 공기가 있는 하늘, 팔부녀회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작업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살아온 역사가 씨실과 날실처럼 엮인, 살아있는 공간이다. 그런데 사드(THAAD, 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가 기습 배치되며 모든 게 달라진다. 지금이 “꼭 6.25 긑다”고 하는 할머니들에게 사드는 전쟁과 다름이 없다. 평화를 위해 무기를 설치해야 한다는 말도 이해하기 어렵고, 무기를 설치해서 이 땅을 떠나야 한다는 말도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긴 세월 동안 논농사를 주로 지어온 소성리 할머니들에게 사드가 군병력, 인구 밀집 지역, 핵심시설 등을 방어하는데 요긴하게 쓰인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설치한다는 사드야말로 애써 지켜온 삶의 흐름을 깨는 ‘무기’이다. 군병력도 없는 소성리는 그렇게 무기가 설치되어 전쟁터가 되었다. 정작 사드가 지킨다고 하는 핵심시설 지역 거주민들은 ‘위험한 무기’를 원하지 않았다. 누구도 전쟁을 겪고 싶지 않아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외면한다. 결국 사드는 ‘할머니’, ‘농사짓는 사람들’이 있는 소성리로 밀려나 배치되었다. 할머니들은 “우리 사드병 다 들었다!”하며 밭을 매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소성리를 지키기 위해 달려간다. 이들에겐 하루하루가 일상이자 투쟁이다. 이웃과 잠시 수다를 떨다가도 눈 돌리면 곳곳에 사드 현수막이 걸려있다. 호미를 쥔 손으로 농사를 짓기도, 저항하기도 한다. 누군가 도둑처럼 소성리에 사드를 배치했고, 할머니들은 그곳을 지키고 있다. 무궁화 꽃 앞에서 활짝 웃으며 만세를 부르는 동안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소성리로 계속 뻗치고 있다. 심지어 사드철폐를 약속했던 정부는 종전 선언을 예고한 남북정상회담 직전에 사드 부지공사를 강행한다. “사드 가고 평화 오라!” 구호와 함께 할머니들은 오늘도 지팡이를 짚고 진밭교를 꿋꿋이 막아선다. 푸른 하늘 밑에서 이웃들과 오순도순 참외를 까먹던 소성리를, 마을 곳곳마다 기억이 담겨있는 삶의 공간을 지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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