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비념

인권해설

제주는 삼다도 즉, 돌, 바람, 여자가 많다고 한다. 제주여성들의 삶은 돌과 바람만이 존재하는 척박한 섬에서 차별과 억압으로 점철된 일상에 대한 저항의 시간이었다. ‘일상’의 시간을 ‘저항’의 시간으로 대체하며 살아온 제주의 여성들은 오랜 기간 제주의 땅을 지키며 ‘여성’들의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녀들의 공동체는 지금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혹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또는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상품화’되었고, 제주를 지키는 ‘가치’라 명명하는 아이러니가 공존하고 있다. 그/녀들의 일상은 ‘해녀’로 물질을 하고, 물질이 끝나면 다시 밭으로 나가 ‘농부’로 그리고 남은 시간은 가사노동자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 ‘살암시난 살앗주’ : 제주의 ‘할망’들은 ‘그냥 그렇게’ 아픔의 시간을, 고통의 시간을 이어갔다.

여성의 개인적인 경험 이야기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일상적인 삶과 생애 과정에서 주어진 젠더 지위와 역할을 어떻게 인식하고 또한 가부장제적 억압의 역사에 거스르며 투쟁해 왔는지에 대한 젠더 경험의 진술이며 증언이라 할 수 있다. – 김성례(<여성주의, 역사쓰기: 구술사 연구방법> p.21)

남편의 할머니는 ‘백조일손’의 희생자이다. 당시 군대에 가 있는 오빠를 대신하여 10살배기 ‘딸’이었던 남편의 고모가 홀로 자신의 ‘어머니’의 시신을 수습해야 했다. 아직도 그 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더듬으시는 ‘할망’의 눈에는 눈물이 맺힌다.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그녀’의 가슴을 얼마나 녹였을지 짐작도 못 할 만큼의 세월이다.
그렇게 제주의 4.3은 70년의 세월을 거스른다.

아직도 정명되지 못한 4.3을 혹자는 ‘사태’라 혹자는 ‘항쟁’이라 부른다. 하지만 제주여성에게 4.3은 정명의 과제를 넘어선 젠더폭력으로서의, 공동체 안에서 감당해야 하는 제노사이드로서의 폭력 경험이다. 4.3항쟁 과정에서 여성의 역할은 가족 또는 마을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결혼 혹은 ‘성상납’의 매개로 이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 또는 마을 공동체는 침묵을 ‘강요’하고 침묵에 ‘동의’함으로써 당시 생존한 ‘여성’들의 경험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타자의 목소리에 의해 한두 사례가 밝혀지고 있을 뿐, 피해 당사자로서 혹은 생존자로서 ‘여성’의 증언은 거의 전무하다고 할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쏟아지는 증언들 속에서 여성들의 경험은 누구의 ‘아내’이거나 ‘딸’로서 가부장적 구조 안에서 가족의 사태를 수습했던 존재의 위치로, 피해 가족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족의 생존, 마을의 생존 그리고 개인의 생존을 위해 당시 여성들이 경험해야 했던, 가부장제 구조 안에서의 침묵함으로써 존재가 인정되었던 여성폭력 피해자로서 경험들이 쏟아져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젠더로서 경험하는 여성 ‘개인’의 경험은 곧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여성 구술사는 구술자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하더라도 여성주의적 만남이다. 구술사는 여성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자료를 만들어 내고, 여성의 경험을 정당화하고, 세대가 다른 여성들 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며, 전통적 역사에서 거부당했던 여성들의 뿌리를 발견하고, 여성의 역사가 지속되게 하는 것이다.(Gluck 1977:5)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을 시작으로 제주의 군사기지화는 시작되었다. 제주의 반군사기지운동의 연속선에서 촉발된 제주 군사기지화와 젠더적 관점에서의 평화 운동은 우리의 일상적 공간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군사기지가 들어선 마을의 상권은 ‘군인’을 대상으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가부장제가 여전히 체제 유지를 위해 강하게 작동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결국 ‘여성’들이 젠더폭력의 대상으로 치달을 것이다. 그러기에 군사기지화는 여성의 삶에 주요한 변수이며, 여성들의 삶을 왜곡하는 기제이며, 여성의 일상을 또다시 침묵하거나 묵인하게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1% 제주, 제주의 1% 강정, 이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 제주의 군사기지화는 이제 성산 제2공항으로 공군기지로 이어지며 제주섬의 기지화는 제주섬의 일상적 공간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것은 결국 여성들의 삶의 질이 더 낮아질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랜 역사적 경험 속에서 ‘여성’들은 ‘개인’의 경험을 ‘집단화’함으로써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전수한다. 즉, 젠더폭력은 침묵하고 국가폭력으로 대체할 때 ‘여성’ 또한 ‘동일한’ 피해자로 인정되는 것이다. 이제 4.3에서 ‘여성’의 경험은 가부장적 사회구조 안에서 국가폭력 당시 ‘여성’의 ‘몸’이 어떻게 도구화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때이다.

고명희(제주여성인권연대 활동가/여성주의 상담 활동가)

22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비념

프로그램 노트

묘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폭도로 몰려 사라진 사람을 가슴에 묻고 살아야 했다. 제주 여성의 이야기다. ‘남성’만 벌초할 수 있다고 정해져 있어 묘소에도 갈 수 없었다. 같은 추모도 어떤 이들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여성들은 귤을 따는 손으로, 산속을 걷는 발걸음으로 죽은 이들을 기억한다.
아직까지도 제주4.3을 앞장서서 증언하는 사람들은 그 시기를 다르게 겪은 ‘남성’이다. 잡혀 성고문을 당하거나 죽을까 두려워 일본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더더욱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한국이 이들을 잊었듯, 이들도 한국어를 잊어간다. ‘증언자’는 한정되어 있다. 고통을 ‘통용될만한’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들만 증언자로 승인된다. 풀어낼 수 없는 아픔, 굿으로 가슴을 쳐야만 사라질 기억은 말하면 안 되거나 말할 수 없는 기억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여자의 한’ 정도로 치부된다. 같은 때를 말하면서도 이것은 왜 증언도 역사도 되지 못하는 것인가.
비념은 죽은 사람을 달래기 위해 시작된다. 그렇게 시작한 굿은 비념을 지내려고 모인 할머니들이 눈물을 찍어내고 말을 뱉어내는 시공간을 잠깐 열어낸다. 죽은 이들을 위해 부르는 창은 산 사람을 위한 것에 가깝다. 기억의 공간은 다른 목소리를 빌려 열린다.
한국 정부까지 나서서 제주4.3의 아픔을 청산한다는 지금도, 4.3 때 일본에 피신해 국적이 남한이 아닌 ‘조선’인 사람은 한국에 올 수 없다. 한국은 여전히 4.3에서 자행된 학살을 국가 정책으로 밀어붙였던 ‘대한민국’ 위에 서 있다. 그뿐인가. 많은 이들은 아직까지도 남성에 의한 성폭력을 ‘어쩔 수 없는 일’로 가벼이 다루고, 남성의 업적만을 기록한 역사를 ‘진짜 역사’로 만드는 한국의 분위기 속에서 4.3을 기억한다.
제주4.3을 다시 기억하는 오늘, 부유하는 기록들은 누구의 힘을 빌어 여기까지 드러난 것일까? 무엇을 위해? ‘화해’나 ‘진짜 기억’을 위해? 지금까지 생존한 사람들의 이야기조차 오롯이 담고 있지 못한 기록, 남성이 붙잡은 기록물 아래에서야 복기되는 시간을 되돌아보며, 우리는 다시 생각한다. 겹겹이 덮힌 기억들 아래에 있는, 혹은 이 기억들을 가로지르며 존재할 수 없는 기억이라고 여겨졌던, 배제된 이의 이야기를.

23프로그램 노트

인권해설: 레드헌트

인권해설

제주4·3 – 지금 여기 현재진행형인 역사

여전한 망설임, 생생하게 새로 솟는 눈물, 생의 마지막 무렵에도 잘 떨쳐지지 않는 두려움과 원통함. 4·3 생존자분들을 뵈면서 헤아려본 70년이란 시간은 그렇게 읽혔습니다. 아득히 짐작만 해보는 깊고 아픈 시간. 이곳 제주에서 7년 7개월 동안 일어났던 그 사건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이합니다.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제주4·3’입니다.

아득히 짐작만 해보는 깊고 아픈 시간 70년

제주4·3은 7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민중항쟁, 무장봉기, 학살 등 여러 성격의 사건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한 가지 이름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70주년을 맞으며 적합한 명칭을 붙이는 ‘정명’ 작업을 더는 미루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당시 전체 제주도민의 10분의 1인 3만여 명이 학살되는 너무나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 발발의 성격과 7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민중의 참여와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민중항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제주4·3은 최초의 분단반대운동이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온전한 정명은 한반도 통일 이후에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름 붙이지 못한 세월
70여 년 전 일제가 패망하고 독립이 됐지만, 또 다른 강대국들에 의해 국운이 오가고 미 군정은 친일 인사들까지 재등용하는 등 대다수 민중이 바라던 해방의 모습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미 군정의 잘못된 미곡(쌀) 수집정책으로 혼란은 가중되고 수탈은 계속되었습니다. 3·1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들을 중심으로 한 주민자치로 혼란한 시기를 극복하여 진정한 해방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제주 민중에게, 미 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육지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극우단체를 제주로 파견해 극심하게 탄압했고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먼저 깨어나는 남도

이에 항의하며 1948년 4월 3일 무장대의 봉기가 일어났고, 탄압을 멈출 것과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아닌 온전히 통일된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외치며 단독선거를 막았습니다. 그러자 미 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군대를 대거 파견해, 3만여 명의 제주 주민들을 죽이고 온 섬을 초토화하는 대학살의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숱한 죽음에 더해 여성들에게는 성폭력까지 가해지면서 제주 여성들은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고, 이후에도 그 피해를 고발하거나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애도조차 숨죽여 해야 했던 기나긴 세월 제주 온 섬에 스민 트라우마는 “속솜허라”(속마음을 말하지 마라)는 말로 남아있습니다.
제주의 첫 관문인 제주국제공항 터를 비롯해, 유명한 관광지 등 제주의 수많은 곳이 학살과 비극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피울음의 역사, 그 모두가 제주의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피울음의 역사, 그 모두가 제주의 모습
70주년을 맞은 지금도 이 사건이 끝난 역사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4·3으로 인한 고통과 트라우마는 생존자와 유족에게 지속되고 있고, 희생자를 선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극우단체에 의해 갈등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시에 외쳤던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 반대”, “온전한 통일독립”, “공권력의 탄압 중단”과 같은 구호들은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과제이고 지금도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과도한 국방비 지출과 같은 분단비용 부담, 온전하지 못한 사상•표현의 자유는 실제로 현재 우리 삶의 질을 저해하는데도 이런 일이 만성화되어서 우리는 잘 체감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지금 여기 현재진행형인 제주4·3

4·3 70주년을 맞는 지금은 마침 남북 정상회담이 활발하게 진행되며 며칠이 멀다 하고 놀라운 뉴스들을 접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민중항쟁이자 최초의 반분단운동이었던 제주4·3은 재조명되고 제대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또 국가폭력이 일어나는 국책사업의 현장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4·3과 같은 참극이 벌어지고 있는 시리아, 버마의 로힝쟈 학살 등에 눈감는 것은 곧 4·3을 잊는 것과도 같습니다.

70주년인 지금도 늦었지만, 미국 정부는 미 군정기에 시작된 4·3에 가해진 탄압과 학살에 대해서 사죄해야 합니다. 그리고 4·3특별법 역시 더 늦기 전에 개정되어서 생존희생자분들에 대한 배상과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합니다.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 보면 살아진다)는 생각으로 모진 세월을 살아온 생존희생자, 유족들과 함께 많은 분들이 연대하고 기억해주시기를 청합니다.

강은주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홍보팀장, 제주다크투어 공동대표)

28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레드헌트

프로그램 노트

기억의 발자취를 남기고 기록을 상영했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탄압받아야만 했다. <레드헌트>를 상영했던 1997년이 그러하다. 제주4.3을 다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화는 한순간에 이적표현물이 되었고, 국가는 경찰을 앞세워 영화제 기자재를 압수하는 등 상영장을 봉쇄했다. 당시 집행위원장은 구속되었고 인권운동사랑방은 압수수색 당했다. 이처럼 어떤 기억들은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진술하는 것만으로도 지난한 방해에 시달린다.
소리를 내도 괜찮을까, 저 눈빛들이 날 감시하는 것은 아닐까, 어느 순간 날 또 죽이지 않을까. 명치 언저리에 자리 잡은 불안은 70년이라는 세월 동안 봇물 터지듯 나올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조용한 세상 그 아래에 갇혀 있었다.
지금도 제주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섞여 살고 있다. 감시와 방해를 부단히 받아온 사람들은 살기 위해 입을 틀어막아야 했음에도 말 한마디 못한 것이 한스럽다 한다. 용기를 내어도 이 영상을 누가 볼까 두렵고 자식이 부끄러워할까 목소리로만 증언한다. 이들에게 제주4.3은 지나간 과거가 아닌 현재다.
제주는 다랑쉬굴에 있던 많은 이들의 자취를 시멘트로 덮어 끊어버리고, 눈물과 피로 물들었던 정방폭포를 관광지로 만들었다. 제주4.3을 묻고 지내온 날들이 쌓인 오늘의 제주에서는, 4.3 추념식에 참석한 대통령이 국가가 벌인 학살에 대한 사과와 책임을 인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제주4.3의 완벽한 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완성이 아닌 터져 나오는 봇물의 시작을 향해, 우린 광장에서 제주4.3을 이야기한다. 그 어느 곳에서도 담지 못했던, 70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감춰진 이야기들과 광장에 서기 위해.

23프로그램 노트

인권해설: 말해의 사계절

인권해설

그녀의 오래된 이야기에서 듣다, 국가폭력

밀양에서 송전탑 논의가 시작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참 오래된 이야기다. 정부가 환경영향평가보고서 주민설명회를 개최하고 나서야 주민들은 고압송전탑이 세워지는 걸 알 수 있었다. 765kV라는 엄청난 고압 전류가 흐르는 송전탑이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세워지면 농사만이 아니라 주민들의 건강도 장담하기 어려워지는 일이건만 주민들의 동의 없이 진행됐다. 고압송전탑의 배경은 원자력발전이다. 신고리 원전을 6기에서 8기로 증설해 돈을 벌겠다는 한국전력의 탐욕을 기반으로 한 국가정책이 수립됐다. 위험한 에너지를 만들어 쉽게 펑펑 쓰게 해 전력회사가 돈을 버는 정책이다. 원전 그 자체도 위험할 뿐 아니라 그 원전이 만든 고압 전류를 영남지역으로 송전하는 동안 그 구간에 있는 생명들은 아프거나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밀양 주민들은 한국전력 직원들과 그들을 비호하는 경찰들과 매일 매일 싸웠다. 그러나 영화 속 인물의 말처럼, 4․3이나 제주 해군기지 건설처럼 국가에서 하는 일을 막기는 어려웠다. 2014년 9월 공식적으로 송전탑이 마을에 세워졌다. 끔찍한 철탑 손들이 산이며 밭이며 곳곳에 박혔다. <말해의 사계절>은 그 싸움을 함께 한 말해할머니를 기록한 영화다.

“아무도 내 삶은 못 알아주지.”

아흔이 다 된 말해 할머니가 글을 모르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내뱉는 말. 머릿속에도 선명한 아픔의 기억들을 일기로 써냈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 싶다. 담배 연기 사이로 먼 산을 보며 이야기를 꺼내는 말해의 입, 손, 표정에 주목하며 영화는 전개된다. 때로는 고목의 까칠까칠한 표피 같은 주름을, 때로는 아침에 곱게 단장한 머리를, 때로는 지팡이에 의지해 마을 산을 오르는 것을 기록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그녀의 삶이 곧 한국사라는 것을 관객은 금세 깨닫는다.

일본 제국주의가 위안부를 만들어 여성들을 성노예로 만들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렇게 일찍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며, 전쟁과 보도연맹이라는 민간인 학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혼자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난한 여성이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삶이 힘겨워 아들 둘과 함께 물에 빠져 죽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먹고사는 일에 지쳐 고단할 때면 아이들에게 “느그 아버지 찾아가라”며 욕을 하고 때리기도 했다. 아들에게 상처가 됐을 것을 알기에 그녀는 베갯잇을 적시며 후회한다.

그렇게 그녀의 삶에 새겨진 국가폭력은 자식에게도 이어졌다. 사상범 색출이라는 빨갱이 낙인이 없었다면, 큰아들은 월남전(베트남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한국이 베트남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큰아들이 아버지가 죄가 있나 없나 따져보는 방법으로 참전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쟁에서 허리를 다치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가정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농촌 여성에게 떼어낼 수 없는 현실이었다.

무지렁이가 아닌 투쟁의 주인인 말해

70년이나 지났지만 아픔의 기억은 생생하다. 말해 할머니의 삶에 한국사의 흔적이, 국가폭력이 굳은살이 되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는 건, 아직도 송전탑 건설 같은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시골마을주민의 삶을 짓밟기 때문이다. 아물래야 아물 수 없다. 오래된 이야기 속 국가폭력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녀는 그 엄청난 국가폭력 속에서도 담배에 의지하며 속을 달래고 달래 여기까지 왔다.

말해 할머니처럼 폭력의 상흔은 돈으로, 깨뜨려놓은 땅으로 환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망가진 삶은 한 세대로 끝나지 않고 이어지기까지 했다. 저수지에 자식과 함께 몸을 처박으려 했던 그 아픔이 어떻게 숫자로 환산될 수 있겠는가. 공식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구체적인 민중의 삶을 기록하려는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삶을 파괴하는 폭력과, 그럼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을 기록하는 이유는 그/녀들과 함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다. 그/녀들의 기억이 우리 모두의 기억이 돼야 한다.

우리는 깨닫는다. 그녀가 정규교육을 못 받았다고 무지렁이(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가 아니라는 것을. 한전이 주는 돈 몇십만 원, 몇백만 원에 자신이 일궈온 땅을 내놓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녀에게서 송전탑이 세워졌어도 포기할 줄 모르는 삶의 태도를, 저항하는 이유를 배운다. 기록의 힘이다.

기록하다의 다른 말

영화를 보며 한 권의 책, 한 편의 영화로 담지 못한 삶의 무게를 느낀다. 필자는 2014년 <밀양을 살다>(오월의 봄)라는 책으로 밀양 할매들의 삶을 기록하는 데 참여한 경험이 있다. 다시 할매들을 영상기록으로 보니 그녀들이 그리워진다. 글로 담아낼 수 없었던, 담아내기 어려웠던 표정과 느린 동작과 철탑을 보는 눈빛. 속을 뒤집어놓는 철탑까지. 영상기록의 힘을 새삼 느낀다. 무엇보다 <말해의 사계절>에 담긴 할매의 평범한 일상은 관객(독자)과의 거리감을 좁힌다. 고사리 따고 감 다듬고 경찰에 항의하고 반복되는 그녀의 평범한 일상의 기록.

영화를 보며 우리는 기록하다의 다른 뜻은 ‘듣다’ 임을 깨닫는다. 사회적 기록은 사회적 듣기와 만날 때 의미를 오롯이 획득하는 것이므로.

명숙(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활동가)

29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말해의 사계절

프로그램 노트

삶은 세상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어떤 사건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에게 다가와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는다. 밀양시 상동면 도곡리에는 아흔이 다 된 할머니, 김말해가 살고 있다. 말해는 한국의 비극적인 역사를 고스란히 살아냈다. 그 삶은 온전히 말해의 것이지만, 말해의 기억엔 우리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내 하루하루 살아온 것을 일기로 써 모으면 누가 봐도 안 알겠나.” 아궁이 앞에 앉아서 타는 장작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TV 소리만 가득한 방안에 누워 마음속 응어리로 남아있는 기억을 말한다.

축 늘어진 살에 붙은 파스처럼 질긴 삶이다. “뭐 하다 이리 됐노?” 말해는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가지 않는다는 말에 일찍 결혼을 해치웠다. 그러나 겨우 스물세 살 먹었던 해, 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되어 집을 나선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고, 아들은 ‘빨갱이의 자식’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월남전에 참전했다. 학살의 역사는 여러 모양으로 변주되어 또다시 말해의 일상을 헤집어 놓는다. 그 역사를 살아낸 기억은 말해를 투쟁의 현장으로 이끈다.

고사리 파먹고, 손톱 발톱 갈라지도록 일해서 일궈놓은 밭, 그 위로 765kV 대규모 송전탑이 들어섰다. 집 앞 풍경이 변해간다. 옛날 호롱불 켜면서도 살았던 골짜기를 기억하며 말해는 추운 겨울 피켓을 들고 한전 앞에 선다.

이 투쟁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내내 치열하게 살아왔던 기억, 그 삶이 바로 투쟁이었다. 말해의 기억을 들음으로 우리는 그가 수없이 지나왔을 사계절을, 긴 세월을 천천히 따라간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이미 그 자체로 역사가 되어버린 ‘삶’을 만난다.

26프로그램 노트

인권해설: 도시목격자

인권해설

차별 없는 도시를 위하여

도시 공간의 발전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면 공사판이 벌어지고 도로는 온통 파헤쳐지고 있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공간은 사라지고, 그 자리는 아파트와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한국의 주택보급률은 이미 전국 평균 102.6%이지만, 서울 시민의 절반은 자기 집 없이 전세나 월세를 전전하며 살고 있다. 집은 넘쳐나지만, 사람들이 집을 구하지 못하는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이들이 차별 없는 도시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자니 끝은 보이지 않고, 구체적인 정책은 실타래처럼 얽혀 있다. 그마저도 ‘법’이라는 장치로 에워싸고 모든 문제는 항상 법대로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따져 보자, 법은 어디에 있는가?

도시는 개발을 통해 자본의 축적과 재생산을 위한 필수 과정으로 전락했으며, 과잉축적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를 해결하는 핵심적 수단이 되어 버렸다. 재개발 조합이 법을 내세워 세입자들을 내쫓을 수 있게 되었고, 건설자본과 금융자본이 공간을 통해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자본이 장악한 거리는 노숙인과 노점상처럼 낙인찍힌 사람들을 쫓아내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도시 공간의 독점적 사유화와 이를 통한 자산 이득의 배타적 전유는 우리 삶을 파괴하였고, 사회 공간적 배제를 초래했다.

하지만 우리의 헌법 35조에 따르면 “국가는 주택개발정책 등을 통하여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저들도 자본의 안정적 발전을 위해 재생산 영역에서의 극단적 모순을 원치 않는다. 문재인 정부는 주택난에 허덕이고 있는 대다수 서민의 주거권 보장이라는 국가적 책무를 위해 여러 차례 주택정책을 내오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나라의 보유세 실효세율은 1.28%로 선진국의 1/5에 불과하다. 집값을 잡고 투기세력을 압박할 근본적 대책이 없다. 이밖에 분양원가 공개, 재건축초과이윤 환수제 등 불로소득을 통제할 방법도 보이지 않는다. 물가지수에 맞추어 전·월세 상승을 인정 한도 내로 규제하는 ‘전월세 상한제’와 ‘계약갱신 청구권’ 등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계속 거주할 권리도 단계적 도입으로 미루거나 유보적이다. 무엇보다 주거 취약계층의 주거권을 보장하는 공공임대정책도 다주택자나 건설자본의 임대사업인 뉴스테이 사업과 같은 기업형 민간주도 정책을 통해 가려져 있거나 부풀려 있는 셈이다. 결국, 문재인 정부도 투기와 건설자본의 토지? 주택보유에서 나오는 불로소득을 사회로 환수하려는 노력이 없어 보인다.

모든 권리는 실정법을 넘어 새로운 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정의, 평등, 보편성 등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한 권리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주거권도 오랜 민중의 투쟁 속에서 하나둘씩 만들어졌다. 아직도 고통과 슬픔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도시 빈민들이 외치는 ‘법보다 밥’이라는 구호가 문재인 정부에서도 여전히 외쳐지고 있는 것일 테다.

최인기(빈민해방실천연대 수석부위원장)

24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도시목격자

프로그램 노트

격변하는 도시 속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던 감독들은, 그 순간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공간과 기억을 되짚는다. 그들이 다시 목격한 공간은 이미 흔적도 없이 변해있었거나 머지않아 사라지려 한다.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모이고 밀집하는 도시. 하지만 공간은 한정되어있고 욕망은 끝이 없다. 누군가는 내치고 누군가는 나가떨어져야만 하는 게 도시의 생리이다. 결국 개발의 욕망은 누군가의 이주와 철거를 만든다. 도시에서 이 변화의 압력은 너무나 높아서 버티고 서있는 것조차 힘들다. 그렇기에 영화 속 사람들은 각각의 공간에서 철거에 맞서 절규하지만 무력하게 뽑혀나간다.
변화의 여파와 진동은 우리에게까지 미친다. ‘당장 내일 눈을 뜨면 내 공간조차 집어삼키고 있진 않을까’ 싶다가도, ‘나에게도 역시 개발의 콩고물이 떨어지진 않을까’ 하며 들썩거린다. 이렇게 우리는 자주 욕망에 의존하고, 동조하고, 휩쓸리곤 한다. 결국 어느 날의 우리는 뿌리째 뽑혀서 갈 곳을 잃지만, 또 어느 날의 우리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에 올라타 어떤 이들의 삶을 큰 힘 들이지 않고 튕겨낸다. 누군가에겐 돈벌이, 매물, 개발부지일 뿐인 공간이 누군가에겐 삶이자 뿌리이며 역사라는 것을 종종 잊는다. 편리와 발전을 위해 도시는 언제나 변화해야만 하는 걸까.
도시 안에 선 우리 중 누구도 이 복잡한 긴장을 쉽게 벗어날 수 없다. 저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곧 내 옆에서도 벌어지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죽어가는 새벽에 나는 무얼 했나’라는 부채감이 든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인다. 각자 자신의 공간을 박탈당한 사람들이, 하나의 철거부지에 모여 싸운다. 그렇게 오늘도 도시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공간을 지켜내려 한다.
매일 마주하는 도시엔 언제 사라졌고 언제 생겼는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떠나고 머무르는 이들이 누군지 조차 모른다. 이쯤 되면 도시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변화의 속도는 여전히 체할 것만 같다. 도시는 언제쯤 잠잠해질 수 있을까?

26프로그램 노트

인권해설: 앨리스 죽이기

인권해설

박근혜 정부는 종북 프레임이 통치전략이었다.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노무현 대통령 NLL 포기 발언 사건,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 신은미·황선 통일토크콘서트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중에서도 신은미·황선 통일토크콘서트 사건은 ‘전통적 의미의 마녀사냥’에 가장 가까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4. 12. 15.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북한 바로알기 행사는 좋지만, 자유민주주의 헌법 질서 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면서 신은미·황선 통일토크콘서트가 우리 헌법 질서를 벗어난 종북 행사였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종북콘서트’라는 TV조선의 허위보도에 힘을 실어 주었던 것이다. 이후 신은미, 황선 두 사람에 대한 강도 높은 수사가 진행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4년 12월 10일에 발생한 사제폭탄테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암묵적인 방조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정윤회 문건 사태를 돌파하기 위해서 통일토크콘서트 사건을 키웠다. ‘참 나쁜 대통령’이었다.

극우세력은 사제폭탄테러마저 옹호했다. 보수언론과 청와대도 방조 내지 동조했다. 어버이연합 등 극우세력은 현대판 서북청년단과 같았다. 정권의 비호하에 ‘폭력면허’를 가진 양 행세했다. 신은미, 황선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물리적 위협을 가했다. 그들이 거리낌 없이 자신감을 가지고 폭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들이 다수이고 주류라는 자신감이었다. ‘빨갱이에게는 폭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섬뜩한 자신감이었다. 그들은 종북으로 낙인찍힌 개인이나 단체에 대한 물리적·비물리적 폭력을 ‘애국’이라고 떠들어댄다. 그들이 태극기를 들고 집회에 참석하는 맥락과 상통한다. 그야말로 야만의 시대였다.

전국공무원노조, 전교조, 심지어 밀양송전탑 할머니들에게까지 ‘종북’ 딱지가 붙었다. 사드 배치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박근혜에게 가장 절대적인 지지를 몰아준 경북 성주 주민들마저 종북 사냥감이 되었다. 정부를 비판하는 모든 세력은 종북으로 취급되었다.

최근에는 ‘종북몰이’ 보다는 ‘종북팔이’가 더 유행했다. TV조선을 필두로 하는 종편은 보수 논객과 탈북자를 북한 전문가라며 치켜세운 뒤, 북한을 ‘찌질하고 가난하고 짜증 나게 하는 나라’로 묘사하게 했다. ‘아니면 말고’ 식의 자극적·선정적 보도로 시청률 확보에 열을 올렸다.

종북 공세는 지배 권력이 헤게모니에 저항하는 세력을 ‘위험하고 혐오스러운 존재’로 낙인찍음으로써 대중과 진보 운동의 연결고리를 끊으려는 전략이었다. 종북 프레임이 지배전략으로 유효했던 이유는 냉전 구조에서 기득권을 향유하고 있는 언론권력, 정권에 충성하는 검찰권력, 권력에 기생하는 극우단체가 합세하여 상호작용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민주·진보세력의 ‘방관’이었다. 인권을 앞세우는 사람들과 단체들마저 종북몰이를 외면하고 방관했다. 신은미, 황선을 옹호하면 함께 매장당할까 봐 두려워서 모른척했다. 심지어 일부는 보수언론의 허위보도에 편승하여 비난대열에 가세하였다. 그들 역시 레드콤플렉스의 틀에 갇혀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종북 프레임은 헤게모니를 획득하고 활개를 칠 수 있었다. 가장 뼈아픈 부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권 개념은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천부적 권리를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출발하였지만, 근본적·구조적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개인의 인권 실현도 불가능하다. 종북 프레임의 근원에는 분단구조가 있다. 분단에 기생하는 기득권은 끊임없이 전쟁의 공포를 부추긴다. 분단구조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야말로 인권확장을 위한 위대하고 필수불가결한 활동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영역의 운동은 모두 인권 확대를 위해 긴요하다. 따라서 다른 영역의 운동을 존중해야 하고, 분열하지 않고 연대해야 한다.

신은미와 황선의 표현의 자유, 신체의 자유를 억압한 자들도 표현의 자유를 외친다. 신은미, 황선의 입을 틀어막고 추방과 구속에 이르게 한 극우 언론과 수구단체들도 ‘표현의 자유’를 행사한 것이라고 정당화한다. 외견상 인권의 충돌이다. 인권은 결코 가치중립적인 개념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인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투쟁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의 인권을 우선에 두고 지켜야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어떤 기준을 가지고 더 가치 있는 인권을 선별해낼 것인가?

김종귀(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22인권해설

프로그램 노트: 앨리스 죽이기

프로그램 노트

정부수립 이래 대한민국에서는 ‘반공’이라는 이념이 사회의 모든 것을 검열했다. 정부에 조금만이라도 비판적인 의사를 표명하는 사람이나 단체들은 ‘빨갱이‘로 몰려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수십 년간 이어진 군사독재가 무너지고 민주적 절차에 의해 정부가 성립되었지만, 반공 프레임은 여전히 견고하다. ‘종북’이라는 이름표가 붙는 순간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에 시달리고, 때로는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이로 인해 자유로운 의사표명에는 제약이 생기며, 사람들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단해야만 한다. 민주공화국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게 대한민국에서 표현의 자유는 아직 보장되고 있지 않다.
영화는 ‘종북’ 프레임의 희생자 신은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신은미는 남편과 북한 여행을 다녀온 후, 여행기를 발행하고 토크 콘서트를 개최해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전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종북 콘서트’라는 비난과 혐오세력의 황산 테러였다. 사실관계 파악도 없이 그녀의 말은 전부 거짓말이 되어있었다. 보수단체에게 신은미의 발언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미명하에 ‘종북’으로 규정된 사람들에게 온갖 혐오를 표출한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는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욕설을 퍼붓고, 황산을 뿌리는 등의 모든 행위는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정당화된다.
보수단체 뒤에는 국가가 존재하고 있다. 국가는 보이지 않게 그들을 조종하고 있다. ‘국가 이념’의 이름 아래 신은미는 가족과 조국, 교민사회에서 배척되었다. 북한에 대해 우호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황산 테러를 당하고 강제 출국 당하는 사회를 과연 자유로운 민주사회라 부를 수 있을까. 대한민국은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사회에 소란을 일으키고자 한다. 이 적막을 깨부수기 위해, 이념 심판에서 자유롭고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20프로그램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