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화 <지슬> 덕에 제주4.3사건이 재조명되고 있지만, 사실 4.3사건에 대한 국가적 판단은 2000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일단락되었다. 이 법에 따라 제주4.3사건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되었고, <진상조사보고서>는 희생자와 그 유족들을 위로하고 명예회복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따라,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권력의 잘못”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4.3의 진실이 알려지기까지는 5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리고 아직도 더 규명되어야 역사적 진실들이 남아 있다. 제주4.3사건을 다룬 영화 <레드헌트>도 바로 그 과정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997년 제2회 인권영화제의 상영작이었던 <레드헌트>가 국가보안법과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 규정 등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서준식 집행위원장이 구속되었다. 이 영화가 사전심의를 받지 않은 데다가, 북한의 대남적화혁명전략에 동조하는 이적표현물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대법원은 <레드헌트>가 “국가의 존립·안정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이적표현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함으로써 표현의 자유에 관한 중요한 선례를 하나 남겼다. 이 과정을 통해 <레드헌트>의 상영을 막기 위해 동원된 국가보안법과 사전심의제도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 그리고 왜 ‘표현의 자유’가 옹호되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에 제주4.3 사건의 진상 규명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이 영화 자체가 곧 표현의 자유를 위해 분투해 온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다.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
인권해설: 뺴앗긴 목소리
인권해설
“처음 그들이 유대인을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니까 / 그들이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 … 그리고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나를 위해 항변해 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치 홀로코스트 생존자 독일 신학자 마르틴 니묄러가 남긴 유명한 시의 일부분이다. 스리랑카의 언론인 라산타 위크라마퉁가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쓴 사설에서 인용한 구절이기도 하다. 2009년 1월 8일, 스리랑카의 사실상 유일한 독립 언론인 《선데이 리더》의 편집장이던 그는 출근길에 괴한 네 명이 쏜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가늘게 맥박을 유지하던 스리랑카의 언론 자유와 인권이 박동을 멈추는 순간이었다. <빼앗긴 목소리>는 라산타의 아내이자 동료 기자였던 소날리 사마라싱헤를 비롯해 스리랑카의 독립적이고 양심적인 언론인들이 오늘날 맞닥뜨린 현실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권력층의 추악한 얼굴과 내전의 참혹한 실상을 있는 그대로 들추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큐에 등장하는 언론인들은 피붙이 하나 없는 독일, 영국, 미국 등지를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는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반면 갖은 협박과 납치, 고문, 암살로 언론인들의 입을 틀어막고 내쫓은 자들은 오히려 그들에게 ‘반군 동조자’, ‘테러리스트’, ‘반역자’의 딱지를 붙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영화의 배경이 된 스리랑카는 인구의 75퍼센트를 차지하는 다수 싱할라족을 상대로 11퍼센트의 타밀족이 분리 독립을 요구하면서 26년간의 긴 내전을 치렀던 나라다.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LTTE)’란 명칭의 타밀 반군은 비록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체계적인 훈련과 현대식 무기를 갖춰 한때 북부와 동부 지역에 타밀 독립 국가를 수립하기 직전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 공격 전술에다 어린아이들까지 서슴없이 전투에 끌어들이는 잔혹함은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그에 맞선 스리랑카 정부군도 전쟁 범죄와 인권 침해에 있어서는 그들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만 무려 약 10만 명, 그 가운데 절대 다수는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잡던 평범한 주민들이었다. 그랬던 내전이 정부군의 총공세로 2009년 5월에 드디어 기나긴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그냥 막을 내리고 잊어버리기엔 너무나 중요한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내전 막바지에 정부군은 타밀족 수십만 명을 ‘사격금지구역’으로 몰아넣은 후 집중 포격했다. 이른바 ‘물고기를 잡기 위해 물을 빼내는 전략’이었다. 그로 인해 내전 막바지 몇 달간 살해된 주민이 약 2만 5000명에서 7만 명 그리고 정부군에게 끌려가 지금까지 생사조차 파악되지 않는 사람이 공식 통계로 14만 6,679명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스리랑카의 언론인들은 바로 그런 잔인한 전쟁의 참상을 세상에 알리려고 몸부림쳤던 이들이다. 그 대가는 암살과 납치 그리고 타국에서의 기약 없는 유배의 나날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미리 써 놓은, 사실상의 유언장이 된 마지막 사설에서 라산타 위크라마퉁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들은 종종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냐고, 그러다 목숨을 잃는 건 시간문제라고 말하곤 한다. 물론 나도 그걸 피할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소리 높여 말하지 않는다면 박해받는 사람들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최재훈 (경계를 넘어)
인권해설: 비열한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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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20일, 미국 루이지애나주 멕시코만에서 석유시추선 딥워터 호라이즌호가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딥워터 호라이즌호는 스위스에 기반을 둔 해양굴착업체 트랜스오션 소유의 시추선으로, 사고 당시 영국의 석유회사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에 임차된 상태였다. 20일에 일어난 폭발은 현장 노동자 11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하루 이상 지속된 화재 끝에 22일 시추선이 침몰하면서 대량의 원유가 바다로 유출됐다. 하루에 5000배럴 이상, 무려 2억 갤런(약 757,082,357ℓ)에 가까운 원유가 유출된 이 사고는 지금껏 미국 역사상 최악의 환경재앙으로 기록되고 있다. <비열한 에너지>는 ‘딥워터 호라이즌호 원유유출사고’, 일명 ‘BP 원유유출사고’의 전말과 그 여파를 다각도에서 면밀하게 파헤치는 장편 다큐멘터리다. 걷잡을 수 없는 화염에 불타는 시추선, 바다를 검게 뒤덮은 기름과 그 안에서 죽어가는 생명체들, 배와 경비행기가 동원된 진화 및 방제작업, BP의 책임을 추궁하는 국회 청문회. 영화는 도입부부터 간헐적으로 삽입된 뉴스 영상을 통해 거대한 재앙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 한편, ‘재난의 스펙터클’에 묻혀 간과되기 십상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루이지애나 지역공동체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사고의 실체를 담아낸다. 인근 생태계의 심각한 오염과 파괴를 부른 원유 유출로 평생 바다를 터전 삼아 살아온 루이지애나의 어부들은 생계가 막막해졌다. 해산물 관련 업체들은 망해갔고, 일을 찾아 타지로 떠나는 이들이 많아졌다. 가시적인 성과를 위해 화학 분산제부터 뿌려대는 근시안적인 방제작업은 환경오염을 가중시켰고, 최소한의 보호 장비도 지급되지 않은 BP의 정화작업 과정에서 유독물질에 노출된 작업자들은 건강을 위협받고 있다. 책임지고 사태를 수습하겠다던 BP는 사고 해안 접근 및 촬영을 막는 등 대외적 이미지 관리에 주력하며, 제한된 일자리와 턱없는 보상금을 제시하는 회유책으로 주민들의 분열을 초래했다. 연간 20억 규모에 달했다는 수산업과 지역경제의 몰락도 몰락이지만, 현지 주민들의 건강과 정서적 고통, 지역공동체와 문화의 붕괴 등 결코 숫자로 치환될 수 없을 장기적인 피해를 어떻게 가늠하고 보상할 수 있을까? 피해의 실상을 축소, 은폐하기에 급급한 BP의 행태와 이를 방치하는 정부의 미온적인 대응에 맞서 공동체와 삶을 복원하고자 하는 루이지애나주 주민들의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윤 추구에 눈 먼 거대기업의 무책임한 개발과 정치권력이 자본의 논리에 좌우되는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는 <비열한 에너지>는 ‘태안유류유출사고’(허베이 스피리트호 유류유출사고)란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진 삼성중공업의 유류유출사고를 기억하는 한국의 관객들에게는 더욱 여운이 길 작품이다. 2007년 사고 발생 후 지금까지도 제대로 보상 받지 못한 태안 주민들의 고통과 싸움 역시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황혜림 (다큐멘터리 <산다> 프로듀서,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
인권해설: 304 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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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을 304로 나누어 본다. 0.059라는 값이 나온다. 백분율로 환산하면 5.9퍼센트.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대한민국의 장애인구 출현율 5.6퍼센트와 얼추 비슷하다. ‘수적(數的) 소수자’가 ‘삶의 소수자’로 치환되는 씁쓸하고도 냉혹한 현실. 〈304 대 18〉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권리를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자면 ‘접근권(right of access)’이라고 할 수 있다. ‘부산국제영화제’라는 구체적인 행사에 장애인들이 얼마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가라는 차원에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영화’라는 문화 분야에 초점을 맞춰 영화접근권이라는 차원에서 문제에 다가설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제’ 혹은 ‘영화’라는 하나의 행사․분야는 장애인이 처해 있는 총체적인 삶의 현실을 드러내 주는 한 단면일 뿐이다. 반복해서 말하자면, 그러한 행사에 장애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던 다양한 차별의 요소는 그들 일상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로 작동하면서 장애인들을 무수한 삶의 장면에서 배제한다. 몇 가지 수치를 더 찾아본다. 전국 173개 영화관 중 1년에 11회 이상 자막 상영(한국영화)을 한 영화관은 5.8퍼센트, 마찬가지로 11회 이상 화면 해설 상영을 한 영화관은 4.6퍼센트에 불과하다. 2011년 말을 기준으로 봤을 때 전국 시내버스 3만 1,928대 중 장애인이 탑승 가능한 저상버스는 약 4,080대로 12.8퍼센트다. 전국 평균이 그러할 뿐 충남․전북․경북 지역처럼 3.5퍼센트 이하인 곳도 있다. 우리나라의 청각장애특수학교에 근무하는 교사 391명 중 수화통역자격증을 취득한 사람은 24명으로 6.1퍼센트에 머문다. 청각장애인의 70퍼센트가 일반학교에 재학 중임을 생각하면 그 초라한 수치가 지닌 유의미성은 더욱더 쪼그라든다. 발달장애인(지적장애인 및 자폐성장애인)이 다양한 삶의 영역에 주체적으로 다가서고 참여할 수 있는 기본이 되는 자기결정권(right to self-determination)의 보장 문제는 아직 제대로 개념조차 잡혀 있지 않은 게 현실이다.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5.9퍼센트, 5.8퍼센트, 4.6퍼센트, 12.8퍼센트, 6.1퍼센트라는 수치에 대해. 그 수치는 최소한 어떤 문제가 인지되고 있음을, 그리하여 어떤 반응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반응은 ‘일방주의’적인 관점에서 ‘배려’라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배려이기 때문에 그냥 더 노력하면 될 문제인 것이고, 〈304 대 18〉속 영화의 전당 관계자의 답변처럼 예산이 없으면 어쩔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기에, 장애인이라고 해서 비장애인이 영위하는 일상의 5퍼센트 내지 10퍼센트만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기에, ‘일방주의’를 ‘상호주의’로 바꿔 내고 ‘배려’의 자리에 ‘권리’를 채워 넣기 위한 투쟁은 지난하지만 여전히 절실한 것일 수밖에 없다. 김도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
인권해설: 아이샤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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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와 심리적인 독립’은 장애여성의 독립에서 중요한 과제다. 미성숙하고 준비되지 않은 사람으로 나를 바라보는 기존의 관계와는 맞서 독립을 쟁취해야 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규정하며 선택과 결정을 제한받는 일상과는 싸워서 자기결정권을 지켜내야 한다. 하지만 장애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관계는 제한적이고, 사회적 자원은 부족하다. 비혼으로 ‘홀로’ 사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쉽지 않고, ‘함께 살기’를 통한 독립적인 삶의 실현도 버겁다. 영화에서 시각장애여성 아이샤의 장애와 살아온 삶에 대한 담담한 내레이션은 한국의 장애여성의 현실과 겹쳐진다. 그러나 아이샤가 기술을 익히고 교육을 받으면서 다른 삶이 전개되고, 새로운 목표를 가지게 된다. 장애여성이 자신의 삶을 개척할 수 있는 교육과 경험을 가진다는 것, 자신에 대해 말하고, 꿈을 꿀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실제 한국의 많은 장애여성들은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정규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이후에 다른 사회경험으로 연결되지 못해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한국에서 장애인 자립생활운동이 시작된 지 15년. 많은 장애여성이 독립을 꿈꾸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그래서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받기 위한 장애여성의 투쟁은 이념과 실천을 넘나들며 진행 중이다. ‘의존적인 존재’를 거부하는 것을 넘어 ‘의존과 독립의 관계’를 재해석하고, 물리적인 독립의 필요성뿐 아니라 관계적으로 평등해지고 심리적으로 독립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최근엔 장애인자립생활운동을 젠더적 관점으로 재구성하며 ‘독립’을 다시 이야기하고 정의하고자 한다. 척박한 일상 속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니팅소리와 독백은 힘이 있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는 모습은 또렷하다. 그녀의 노래처럼 더 많은 장애여성의 독립 노래가 다양한 삶의 공간에서 만들어지고 울려 퍼지길 바란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형화된 독립생활설명서가 아니라 더 세분화된 독립 이야기다. 이진희 (장애여성공감 활동가)
인권해설: 농부, 저항을 키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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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생산하는 것이 농업이고, 농민들이 이 일을 한다. 하지만 지금은 식량 생산을 대부분 농민이 아닌 기업이 좌지우지하고 있다. 그 바람에 콩, 밀, 옥수수 같은 작물이 꼭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축 사료, 바이오디젤로 쓰이기 위해 더 많이 생산되는 지경이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의 저자 장 지글러는 “부유한 사람들이 먹을 고기를 살찌우기 위해 빈곤층의 식량이 가축 사료로 들어간다(Rich people’s animals eat the poor man’s bread)”고 말할 정도다. 더 많은 생산을 위해 다국적 기업들은 남미의 넓은 숲을 다 없애고, 생산성이 높은 유전자조작 콩을 심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지난 20년 동안 파라과이 동부의 80퍼센트를 차지하던 숲은 8퍼센트로 줄어들었다. 콩의 경우만 보더라도 세계 콩 재배지 70퍼센트 이상이 유전자조작 콩을 재배하고 있다. 비행기에서 남미를 내려다보면 콩 재배지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는 말이 통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결국 몬산토 같은 기업들 덩치가 수십 배 커지는 동안, 20만 명이 넘는 소농들은 농업과 농촌을 버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몬산토가 만든 제초제(라운드업)에 내성을 지닌 종자(라운드업레디)를 심으면 경작지에서 잡초를 제거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비행기나 트랙터로 서너 번 제초제를 뿌리면 그만이다. 내성이 있는 종자는 죽지 않는다. 하지만 유전자조작 종자가 아닌 전통 종자들은 다 죽는다. 경계를 넘어서는 농약 살포 때문에 현지의 소농들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파라과이뿐 아니라 아르헨티나, 브라질에서는 더 심각해 소농들이 거의 사라진 상태다. 그저 땅과 전통적인 농업 방식을 지키려던 사람들이 범죄자가 되는 이 현실이 불편하다면, 참여해 볼 만한 날이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서 5월 25일, 몬산토 반대의 날 행진을 조직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http://occupy-monsanto.com/ 고이지선 (녹색당 활동가)
인권해설: 새들도 둥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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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정부는 경제성장과 빈곤퇴치를 명목으로 대대적인 기업투자 유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경제적토지양여(Economic Land Concessions) 제도를 운용하며 대규모 관광업, 농업 등에 투자하는 기업들에 최대 99년까지 국유지를 임대하고, 오랜 세월 그 땅에 정주하던 사람들을 내쫓는 것에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는다. 지난 10년간 기업에 임대된 국유지만 해도 캄보디아 전체 경작지의 50퍼센트 이상이며 이로써 강제퇴거 당하거나 위기에 놓인 캄보디아 주민은 42만 명에 달한다. 영화에 나오는 벙깍 호수는 2007년 캄보디아 정부가 상업문화관광센터 개발사업을 위해 기업(shukaku inc)에 133 헥타르(약 40만 평)의 땅을 임대하면서 매립이 시작된 곳이다. 4천 가구 이상이 살던 이 지역에는 지난 몇 년간 강제퇴거가 진행되면서 지금은 겨우 100가구 정도만 남아 있다. 대다수 주민은 갖은 공격과 협박에 못 이겨 ‘토지소유권포기각서’에 서명하고 불충분한 보상금을 받고 떠나거나, 황폐한 재정착지로 강제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퇴거에 반대해 지역에 남아 주거권 투쟁을 하던 이들은 군경에 의해 구타와 체포를 반복적으로 당하고, 주요 인물로 ‘찍힌’ 사람들은 날조된 혐의로 감옥에 갇혔다. 벙깍 지역뿐 아니라 개발이 진행되는 캄보디아 전역에서 이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그럼에도 30년 가까이 장기집권하고 있는 캄보디아 훈센 총리는 지금의 개발이 사회 재건과 국가 번영을 위한 길이라고 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이다. 비단 6~70년대 한국의 개발독재정권이 하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 캄보디아에서 개발은 정치적으로도 ‘핫’한 이슈다. 다가오는 7월 총선을 앞두고 훈센 총리가 이끄는 집권 여당과 프랑스로 망명한 삼랑시 대표가 이끄는 야당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개발로 인한 토지분쟁과 강제퇴거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문제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현재 벙깍 호수는 매립이 끝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지역에 남아 터를 지키던 이들은 지난한 투쟁 끝에 훈센 총리로부터 호수 주변에 주택부지를 약속받았지만 이마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지금의 상황이 권력자들만의 ‘뻔한’ 결말로 끝이 나지 않도록 이제 우리는 ‘뻔한’ 결말을 거부하고 인권의 언어로 ‘새로운’ 결말을 쓰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 벙깍 호수의 메마른 물 위로 자본과 공권력의 폭력에 사라져 간 삶들과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울음에 응답해야 할 이유가 우리에게 있으므로. 이정주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활동가)
인권해설: 공중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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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어딘가를 찾고 있다. 그녀는 자신을 기다리는 장소를 만날 수 있을까.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한 젊은 여성에게도 ‘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주택정책은 1인 가구를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집은 가족의 것이므로, 그런데 가족은 결혼을 통해서 구성되므로. 임대주택은 혼자 사는 사람보다 2~3인 가구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며, 청약가점제 역시 가구원 수가 많은 가족에게 가점을 준다. 정부의 정책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사람들의 말은 누군가 주거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문제를 삶에 필수적인 경험으로 둔갑시켜 버린다. 물론 이것은 한국의 전반적인 주거권 현실과 맞물려 있다. 부동산시장의 문제점이 끊임없이 지적되어 왔지만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문제를 봉합하기 일쑤였다. 집값은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는 가격인지를 따져 묻는 기준이 아니라, 시장이 잘 굴러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가격이 되었다. 건설회사든, 집주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든, 빚에 빚에 빚을 내서 집을 짓고 사는 구조가 심화되면서 부동산 시장의 불안정성은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 그 피해는 결국 실제로 거주하는 사람들이 지게 된다. 특히나 세입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다 보니 집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은 더욱 불안한 삶을 이어 가야 한다. 그녀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헤매는 동네는 개발 사업이 추진되는 지역이다. 절반 이상의 집이 철거되었다. 그곳에서 흔들리는 빨간 풍선은 한국 사회가, 아니 대부분의 사람이 개발에 걸었던 ‘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발 사업은 조금이라도 더 저렴하게 거주할 수 있는 집들을 모두 짓뭉개고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주거지를 만들어 왔을 뿐이다. 아직은 남아 있을, 조금 싸게 거주할 만한 집도 언젠가는 헐릴 것이다. 설령 수년의 시간이 허용되더라도 그 동네는 이미 숨쉬기를 멈춰 버린 동네다. 폐허가 되어 버린 동네는 단지 개발의 폐해만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살 만한 집에 살 권리가 있다는 주거권의 외침을 듣지 않는 한국 사회의 야만을 쓸쓸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그녀가 가장 그녀답게, 평온하게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트렁크인 것은 은유가 아니다. 우리가 ‘집’이라는 서로의 장소를, ‘사람’으로부터 함께 고민하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담을 수 있는 집을 만날 수 없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인권해설: 안톤의 여름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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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국가 대한민국에서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교련 수업은 이제 없다. 이제 더는 어느 누구도 촌스런 교련복을 입고 의무적으로 제식 훈련을 받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교련이 없어졌다고 해서 청소년과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군사 훈련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촌스런 교련복 대신 멋들어진 군복을 입고, 반공 교육이라는 이름 대신 안보 교육이라는 이름을 달고 청소년과 아동을 대상으로 한 병영 체험 캠프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안톤의 여름방학>을 보고 “어떻게 청소년들에게 저런 체험을 시킬 수가 있지?” 하며 놀랄 필요는 전혀 없다. 국방부에 따르면 2011년 한 해에만 모두 74만 명이나 되는 어린이가 이런 안보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교육에는 체력 훈련이나 단순한 견학도 들어 있지만, 살상 무기를 조작하거나 적에 대한 적개심을 주입하는 교육도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 국방부는 16세 이상 시민들에게는 실탄 사격을 허용하겠다고 밝혔는데, 16~17세는 국제아동권리협약에서 규정하는 아동에 해당한다. 아동권리협약은 1991년 대한민국 정부가 비준한 국제인권법으로 교육의 목적이 이해와 관용, 평화에 입각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안네의 일기》에서 안네는 “전쟁의 책임이 위대한 사람들과 정치가, 자본가들에게만 있는 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책임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있습니다. 정말 전쟁이 싫었다면 너도나도 들고일어나 혁명을 일으켰어야지요.”라고 말했다. 안네 또래의 독일 아이들은 ‘히틀러 유겐트’에 들어가 각종 군사 훈련을 받았다. 그들이 받은 교육은 명령에 대한 복종, 살상 무기 조작법, 애국심과 적에 대한 적개심이었다. 이것은 ‘안톤’이 군사 훈련 캠프에서 받은 교육과 일치한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에서 행해지는 많은 병영 체험 프로그램과도 일치한다. 사람들이 총검술과 군복을 불편해 하지 않는다면 전쟁은 어느 때든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 이용석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인권해설: 영재특별전형
인권해설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쓰여 뻔하고 진부하게 느껴지는 표현, 구도, 카메라 스타일 등을 영화 비평에서는 ‘클리셰’라고 지칭한다. 어디서 본 듯한, 판에 박힌 장면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다음 장면을 혹은 영화 전체를 순식간에 예상할 수 있다. 새로운 상상력이 안겨 주는 낯선 불편함보다 지루할지라도 익숙한 패턴이 안겨 주는 안정감을 더 찾기 때문일까. 고정관념을 벗어 던진 영화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관객들 역시 그런 영화를 ‘뻔하다’고 욕할지언정 외면하지 않고 즐긴다. 꼭 영화판에만 클리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널을 뛰듯 바뀌는 입시 정책은 우리에게 묘한 기시감을 선사한다. 어디서 본 듯한 정책이 5년이나 10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형국이다. 너도 나도 교육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앞장서지만, 제자리 맴돌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변화된 입시 상황에 맞춰 우왕좌왕 진학 지도를 준비하는 학교들, 발 빠르게 새로운 정보를 유포하는 학원들, 내 자식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부모들. 삶도, 우정도, 사랑도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 사이 부자유와 경쟁에 짓눌린 청소년들은 때로는 어쩔 수 없음에 적응하고,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죽음을 택하며 어떻게든 청춘의 시간을 채워 나간다. 수능을 전후해 대학 배치표 한 장에 인생을 걸어야 하는 진풍경은 언제쯤 사라질까. 나는 ‘선’ 위에 있나, 아래에 있나. 그것이 곧 나라는 사람의 등급을 결정한다. 수시 전형이든, 입학사정관제든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에 등급을 매기고, ‘우등 학생’의 자격을 논할 뿐 무엇을 공부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주지 않는다. 보상을 탐하지 않는 선행, 그 자체로 즐거운 여행, 삶을 풍요롭게 하는 취미 생활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상장으로 돌아오든, 점수로 돌아오든, 생활기록부에 남든. 모든 것은 남보다 내가 우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입증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단다. ‘빽’도 없고, 돈도 없고, 점수도 없는 가장 보통의 학생들. 그 어떤 것으로도 돋보이지 못하고 ‘있는 듯 없는 듯’ 학교생활을 이어 가는 학생들. 주조된 틀에 자신을 맞춰 보려 애쓰지만, 그마저 무색해진 학생들. 스스로 학교를 등진 것인지, 학교로부터 내쳐진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학생들…. 이름 없이 스러져 가는 이 무수한 삶은 결국 어디로 흘러갈까. 한국의 학교를 설명할 때, 경쟁과 차별 그리고 절망이란 단어를 쓰지 않을 수 있는 순간은 언제쯤 찾아올까. 영화 <영재특별전형>의 주인공 영재는 영재(英才)가 아니다. 정확히 말해, 영화를 통해 우리는 그가 영재(英才)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뛰어난 성적과 놀라운 스펙이 영재(英才)의 조건이라면, 주인공 영재는 평범한 ‘루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정말 그러한가. ‘No Test, No Loser!'(시험이 없으면, 패자도 없다!)를 외치며 일제고사와 줄 세우기 입시 정책을 거부했던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기억하자. 그리고 ’루저‘들의 반란을 기획하자. 교육이란 이름의 경쟁 놀이를 거부하고, 함께 섞이고 서로를 이해하며 나를 알아 가는 진짜 교육을 상상하자. 홀로만 특별하지 않기에 모두가 특별할 수 있는 교육. 모든 평범한 영재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응원할 수 있도록 입시 클리셰를 넘어선 낯선 불편함을 흔쾌히 감당하자. 한낱 (인권교육센터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