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펼치기] 블링컨 미 국무부 장관 방한 항의행동: Stop Funding Genocide!

소식

팔레스타인 해방 없이 민주주의 없다!

3월 18일부터 20일까지 사흘 간 서울에서 제3차 민주주의 정상회의가 열립니다. “반권위주의, 부패 척결, 인권증진”을 위해 “약 110개국 정부와 시민사회, 민간 분야의 관계자들이 참석”한다는 이 회의의 대주제는 “미래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그리고 이곳에는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을 지원, 방조, 묵인하는 이들이 모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도 초청국 중 하나입니다.

특히 미국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봉쇄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국가입니다. 미국은 가자지구의 즉각적 휴전을 촉구하는 안보리 결의안에 대해 이미 세 차례나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에 비공식적으로 100여 차례 무기를 수출하였고, 심지어 자국의 법을 무시하면서까지 무기 공급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진1. 기자회견과 함께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모습. 참여자들은 검은 옷에 쿠피예를 두르고 붉은 칠을 한 손바닥을 펼쳐 보이고 있다. 현수막에는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학살 중단하라”, “Blinken! Stop Funding Genocide!”라고 적혀있다.
사진1. 기자회견과 함께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모습. 참여자들은 검은 옷에 쿠피예를 두르고 붉은 칠을 한 손바닥을 펼쳐 보이고 있다. 현수막에는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학살 중단하라”, “Blinken! Stop Funding Genocide!”라고 적혀있다.

그 책임을 가장 무겁게 통감해야 할 토니 블링컨 미 국무부 장관이 민주주의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방한하였습니다. “미래세대를 위한 민주주의”를 논한다는 미국은 팔레스타인을 향한 이스라엘의 집단학살 희생자 30% 이상이 어린이들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선박을 통해 긴급 식량 지원을 하고 가자지구에 임시항구를 건설하겠다고 미국은 말하지만,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간신히 끼니를 이어가도 폭격에 금방 으스러지고 마는 팔레스타인 민중에게 미국이 해야 할 일은 항구를 짓는 것보다 이스라엘의 학살 지원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이에 167개 시민사회단체가 함께하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은 제3차 민주주의 정상회의에 앞서 3월 18일 오전 9시, 서울 신라호텔  인근(동대입구역 4번 출구)에서 긴급 항의행동<미국은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지원 중단하라 : Stop Funding Genocide>를 진행했습니다. 참여자들은 이스라엘 정부의 전쟁범죄 공모자인 미국 정부를 규탄하고, 집단학살 지원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붉은 칠을 한 참여자들의 손바닥은 팔레스타인에서 스러져가는 이들을 상징합니다.

사진2. 피케팅을 하는 참여자 아래로, 길가에 경찰 버스가 일렬로 늘어서있다. 그 앞에 형광 제복을 입은 경찰관들이 기자회견을 하는 시민단체와 피케팅을 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긴급행동을 마주보고 서있다.
사진2. 피케팅을 하는 참여자 아래로, 길가에 경찰 버스가 일렬로 늘어서있다. 그 앞에 형광 제복을 입은 경찰관들이 기자회견을 하는 시민단체와 피케팅을 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긴급행동을 마주보고 서있다.

한편 피케팅 시작과 함께 경찰 버스가 대오 앞을 막아섰습니다. 일렬로 죽 늘어선 버스는 피켓이 전혀 보이지 않도록 가렸고, 경찰들은 참여자들이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도록 인도를 막아섰습니다. 결국 인근 빌딩 입구로 올라가 피케팅을 진행해야 했지만 경찰은 이마저도 방해하며 버텼습니다. 팔레스타인 민중과 연대하겠다는 이들의 입을 틀어막는, 반민주주의 현장이 아닐 수 없었지요. 그 앞에서 어떤 세대를 위한 어떤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겠다는 걸까요? 결국 30분 진행 예정이던 피케팅은 경찰 버스가 빠질 때까지 한 시간 30분 동안 진행됐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호화로운 자찬이 이루어지는 호텔 안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모든 폭력과 배제에 저항하며 서로의 손을 맞잡고 연대하는 이들에게 있다는 사실이 분명히 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외친 구호가 입가에 계속 맴돕니다. 전쟁이 멈추고 점령이 끝날 때까지, 함께 외치면 좋겠습니다.

Stop, Stop, Genocide!

Stop funding genocide!

Stop supporting genocide!

FROM THE RIVER TO THE SEA,

FREE FREE PALESTINE!

사진3. 인도 위 빌딩 앞에서 피케팅을 진행하는 팔레스타인 긴급행동 참여자들. 8명이 각각 든 피켓을 이으면 “인종청소 중단하라”가 있다.
사진3. 인도 위 빌딩 앞에서 피케팅을 진행하는 팔레스타인 긴급행동 참여자들. 8명이 각각 든 피켓을 이으면 “인종청소 중단하라”가 있다.

 

–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고운

5소식

2024년 2월 재정 보고

소식

2024년 2월 재정 보고

4소식

[활동펼치기] 어두울수록 빛나는 연대의 행진

소식

“너 페미야?”

페미니즘이 사상검증의 주요한 수단이 되는 이상한 시대입니다. 하지만 암울한 시기에도 연대하고 투쟁하며 전진하는 우리. 차가운 바람이 3월을 무색하게 만들었던 지난 8일, 청계광장에서 2024년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39회 한국여성대회가 있었습니다. 

3월 8일 세계여성의날은 1908년 미국의 1만 5천여 여성노동자들이 생존권과 참정권을 요구하며 벌인  대대적인 시위 이후로 세상을 바꿔온 여성운동을 기념하고 지금도 숨겨지거나 배제된 여성의 권리를 말하는 날입니다. 비장애 성인 남성을 표준으로 한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 사회에서 ‘그 외’로 뭉뚱그려진 이들이 세상을 바꿔 온 역사를 생각합니다.

“성평등을 향해 전진하라! – 어두울수록 빛나는 연대의 행진”

하수상한 시절이지만, 이번 여성대회의 슬로건은 지금의 상황을 보여주며 힘을 모아 어둠을 헤치고 나아고자 하는 의지와 긍지를 드러냈습니다. 광장과 거리를 채운 동료들의 얼굴을 마주하니 슬로건의 외침이 몸으로 와닿았습니다. 찬 공기를 뜨겁게 달구는 우리의 열기를 느끼며, 서울인권영화제도 함께 행진했습니다.

사진1. 여성대회 행진 모습. 참가자들이 종로대로를 지나고 있다. 여러 단체의 깃발들 사이로 서울인권영화제 깃발이 나부낀다.
사진1. 여성대회 행진 모습. 참가자들이 종로대로를 지나고 있다. 여러 단체의 깃발들 사이로 서울인권영화제 깃발이 나부낀다.

“모이자, 광장으로!

바꾸자, 여성주권자의 힘으로!

가자, 성평등 민주주의로!”

서울의 복판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퇴행을 멈추라 외치고, 이성애 중심 가부장 사회를 넘어 모두의 평등으로 나아가자 외치고, 그러다보니 행진은 금세 끝났습니다. 광장으로 돌아와 다시 한 번 구호를 외치고 춤까지 추며 마무리를 했는데요, 아쉬운 마음은 크게 들지 않았습니다. 약간의 긴장과 함께 앞으로의 싸움을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컸나 봅니다.

특히 다가오는 4월, 총선이 있습니다. 벌써부터 반페미니즘을 등에 업고 혐오선동에 가까운 발언을 하거나 퇴행적인 공약을 내놓는 이들이 한가득입니다. 여성 주권자 행동 ‘어퍼’는 앞으로 여성주권자의 힘으로, 남성 기득권 정치를 허물고, 성평등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바쁜 활동을 이어나갈 예정입니다. 서울인권영화제도 미약하나마 ‘어퍼’에 참여단체로 있는데요, ‘어퍼’ 캠페인 페이지에서 이어지는 활동을 계속 보실 수 있으니 많이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 ‘어퍼’ 캠페인 페이지 바로 가기>> https://2024upper.campaignus.me/ 

사진2. 청계광장에서 서울인권영화제 깃발을 든 고운, 소하가 투쟁!을 외치며 웃고 있다.
사진2. 청계광장에서 서울인권영화제 깃발을 든 고운, 소하가 투쟁!을 외치며 웃고 있다.

 

 

–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고운

10소식

인권해설: 바다에서 온 편지 2

인권해설

세월호가 침몰했다. 국가는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했고, 304명이 희생되었으며 9명은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1년이 지난 지금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슬픔을 간직한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길 위에있다. ‘왜’로 시작되는 수많은 질문들 중 한 가지도 속 시원히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세월호는 왜 침몰했는가? 세월호처럼 낡은 배를 운항하도록 허가하고, 더 이상 실을 수 없을 만큼 가득 물건들을 싣고서, 가장 기본적인 안전수칙도 몸에 배어 있지 않은 선원들에게 키를 맡긴 자들은 누구인가? 또, 목숨 앞에 ‘돈’을 흔들어대며 이 사람들을 모욕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이토록 천박한 국가의 맨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진실을 덮으려는 권력에 맞선 사람들의 시간. 차곡차곡 흐르는 시간들 사이로 잊는 것이 두려운 기억들이 쌓여간다. 가령, 그 기억들은 이런 것들이다. 삶을 장담할 수 없었던 그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내가 살겠다고’ 다른 사람들을 밀치진 않았을지 죄책감에 시달리며 끊임없이 고통스런 기억 속으로 소환되는 생존자. 자기 자식에게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구명조끼를 입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했던 것이 아픈 기억으로 남은 엄마. 10센티 앞도 보이지 않는 뿌연 물속에서 손으로 더듬더듬 만져 가며 사람들을 건져 올렸던 민간잠수사들. 그들은 22년 전 서해 훼리호에서도 똑같은 일을 했었다.

이 영상에 담겨져 있고, 또 담겨야 하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떠올려본다. 세월호가 ‘집’이었던, 그래서 지나온 삶의 흔적을 모두 잃어버린 어떤 사람, 세월호에서 2박 3일 일하고 15만 원을 받던 아르바이트생, 삶터에 자리를 내주고 따뜻한 물을 건넸던 인근 섬 주민들…. 그리고 지난 여름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서명한 5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은 어떠한가. 세월호 참사의 결말은 훼손된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들의 경험은 이 참사를 잊지 않고 행동하려는 기억들과 합해져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어질 것이다. ‘4.16 존엄과 안전에 관한 인권선언’을 만드는 힘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4.16인권선언은 2014년 4월 16일에 세월호에 탄 사람들, 그리고 그날 타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은정(천주교인권위원회)

2인권해설

인권해설: 나는 오류입니까: 칠드런404

인권해설

2013년 6월 11일 러시아에서는 ‘비전통적 성적 관계의 선전으로부터 아동을 보호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이른바 ‘LGBT 선전에 관한 법률’이다. 이 법은 표면적으로 아동의 보호를 내세우고 있으며 성소수자를 명시해 두고 있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 성소수자를 탄압하기 위한 법률이다. 이 법안의 통과는 애초에 성소수자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던 러시아 국민들의 여론을 등에 업고 만장일치로 이루어졌으며 그 영향으로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하는 혐오범죄는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러시아의 한 혐오범죄 집단은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유인한 뒤 끔찍한 고문을 가하고 심지어 이러한 장면을 녹화한 동영상을 인터넷에 공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반인권적인 범죄를 저지른 조직에 대한 처벌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많은 성소수자 인권운동가들이 기소되고 처벌받고 있다. 이 영화에 출연한 Elena Klimova 역시 청소년 성소수자를 응원하는 프로젝트인 ‘Children 404’를 이유로 재판을 받았다.

‘러시아 LGBT 네트워크’가 2013년 러시아 내 성소수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 해 동안 최소 1회 이상 신체적인 폭력을 당한 비율은 15.4%에 달했으며, 2회 이상 신체적인 폭력을 당한 사람은 3.3%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리적인 폭력을 포
함하면 50%가 넘는다. 러시아 내 성소수자들에 대한 호모포비아들의 혐오 표현과 위협은 영화 속에서도 여러 번 등장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의 성소수자들이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은 큰 위험을 감수하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Children 404라는 온라인 공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하는 사진을 올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45명의 청소년들이 자신의 실제 목소리를 담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페이지를 찾을 수 없다는 오류 메시지를 차용한 프로젝트의 이름을 통해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내가 여기 있다고, 나는 오류가 아니라고.

이인섭(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2인권해설

인권해설: 승리의 날

인권해설

참여정부 시절인 2007년 10월 31일, 법무부는 헌법상 평등의 원칙을 실현하는 최초의 기본법이라며 강하게 추진하려던 차별금지법 일부를 수정했습니다. 성적지향, 병력,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언어, 출신국가, 범죄 및 보호처분 등 7가지 항목을 원안에서 삭제하고 국무회의에 제출한 것입니다. 이유는 보수 기독교 단체들, 경총을 비롯한 재계, 보수 언론의 강력한 반대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이 2001년에 통과된 국가인권위원회법에 포함된 차별금지사유임에도 말입니다. 그 이후 인권기본법이자 포괄적인 차별금지를 실현하는 차별금지법 제정 과정에서, 보수 기독교 세력은 차별금지법을 동성애 차별금지법이라 주장하며 이 법안이 동성애 조장 법안이라는 잘못된 주장을 했습니다. 이후 국회를 통해 입법 발의된 제정안에 대해서도 노골적으로 반대했습니다. 직접적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재계는 멀찌감치 팔짱을 끼고 이 상황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입니다.

2011년 3월 31일, 헌법재판소는 군형법 제 92조에 합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 조항은 남성 동성애자들의 행위를 ‘계간’이라는 혐오적인 언어로 차별하고, 형벌로 처벌하는 조항입니다. 심지어 성폭력이라 할 수 없는, 개인의 가장 내밀한 영역인 ‘성적 접촉’까지 처벌 대상에 포함했습니다. 당시 보수 기독교 세력은 이 법안이 없으면 군대에 동성애가 합법화된다는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하여 기독교인들을 호도했습니다. 그리고 국가인권위원회가 이 조항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야 한다는 의견을 발표하자, 국가인권위원회를 마치 동성애를 조장하는 기관인 양 매도하며 건물 앞까지 가서 항의했습니다. 이들은 이후에도 성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하는 운동,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법 조항 폐지 운동에 반대 목소리를 냈습니다.

보수 기독교 세력은 또한 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 성적지향 부분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2014년 11월부터 법 개정을 촉구하는 백만인 서명운동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작년 11월과 올해 3월에는 탈동성애인권포럼의 행사를 국회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버젓이 진행했습니다. 이 단체는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로 복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동성애 전환치료를 위한 단체입니다. 이들은 동성애자도 사랑하지만, 동성애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죄이기 때문에 법으로도 이를 막아야 한다는 지극히 기독교 편향적 시각을 들이대고 있습니다. 보편적 인권의 가치가 아닌 차별과 배제, 그리고 혐오의 시선을 드러냅니다. 이는 사실 보수기독교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지난 3월 교육부는 성교육표준안을 발표하고, 이에 대한 교육지침을 각 교육청에 하달하면서 성교육 중에 ‘동성애’ 및 다양한 가족형태 및 관계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도록 지시했습니다. 보수 기독교계만의 입장이 아닌 정부 안에서도 성소수자의 인간 존엄성을 무시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들을 버젓이 벌이고 있습니다.

5월 17일은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입니다. 세계보건기구가 동성애를 질병목록에서 삭제한 것을 기념하면서, 전 세계의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 폭력을 없애고 이를 위해 국제적으로 함께 행동하고자 하는 날입니다. 보수 기독계와 정부는 스스로 혐오가 아니라고 하지만, 소수자들을 차별하고 배제하고 드러내지 못하도록 막는 움직임은 결국 혐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혐오들은 즉각 멈춰야 합니다. 사람의 삶 전반을 다루는 일을 한다는 기독교와 정부가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죄로서 바라보며 혐오하는 것은, 차별하자, 낙인을 찍자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인권 선진국이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 동성애를 비범죄화하는 것은 이것이 단지 성소수자의 문제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1] 군형법 92조는 현재 군형법 92조 6으로 ‘제1조제1항부터 제3항까지에 규정된 사람에 대하여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을 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개정 2013.4.5.]’로 남아있다.

이종걸(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3인권해설

인권해설: 레즈보포비아

인권해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인종 분리 및 차별 체제였던 아파르트헤이트를 공식적으로 종료시킨 뒤 성적 지향에 의한 차별 금지를 헌법에 명시했다. 여러 사회 영역에서의 차별 금지를 다룬 각종 법률의 제정, 동성 간 혼인의 성문화, 성별 정정의 제도화와 같은 노력은 다른 국가나 지역과 비교해 봐도 상당히 전향적인 축에 든다.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 다양한 문화가 분쟁없이 공존하는 시공간을 꿈꾼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는 남아공의 별칭으로 ‘무지개 국가’라는 표현을 고안했고 넬슨 만델라 대통령 또한 이를 즐겨 사용했다. 이때 무지개는 평화와 희망으로 가득한 국가를 건설하여 빛나는 미래를 이룩하자는 염원을 담은 상징이다. 그런데 무지개란 주지하다시피 세계적으로 성소수자의 자긍심을 나타내는 상징으로도 쓰인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무지개 국가’라는 별칭은 성소수자 권리에 대한 남아공의 법적 보장 장치와 더불어 이 국가를 쉽사리 성소수자 친화적인 사회로 상상하게 한다.

<레즈보포비아>는 그 이면의 실상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이다. 성, 성별, 성적 지향에 의한 차별을 금지하는 헌법과 법률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남아공 사회의 레즈비언들은 끊임없이 협박받고 폭행당한다. ‘교정’ 강간의 피해자가 된다. 무참하게 살해된다. 인터뷰에 응한 레즈비언 활동가들은 남아공 사회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가부장제와 남성중심주의를 레즈비언에 대한 공격과 범죄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한다. 여성을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나마 의미있는 존재로 보는 자들이 그걸 거부하는 레즈비언들을 가차없이 단죄하고자 한다. 자신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를 고치거나 없애려는 남성들의 필사적인 의지가 레즈비언을 겨냥한 폭력으로 나타난다. 보수적인 흑인 부족 공동체 내에서는 동성애를 서구 문화와 백인이 전파시킨 악으로 보는 시각과 여성 억압적 통념이 결합하여 레즈보포비아가 강화되고는 한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만 해석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또한 레즈비언을 지역 및 종교 공동체로부터 내모는 데 크게 기여하는 세력이다.

마지막 장면. 한 무리의 레즈비언들과 지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춤을 추며 경찰서를 향해 행진해 간다. 레즈비언을 강간하고 도주 중인 가해자를 체포하는 데 소극적인 경찰에 대해 책임을 묻는 시위이다. 참가자들은 피해자가 더 이상 공포 속에서 살아가지 않도록 경찰이 나서라고 소리 높여 주장한다. 이들의 요구는 갈급하다. 같은 사람에 의해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 역시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새기고 슬픔을 삼킨 몸으로 뚜벅뚜벅 걷고 뛴다. 그녀들은 그렇게 살아 있다. 있는 그대로 살게 해 달라고 외치고 있다.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행위가 곧 스스로를 폭력과 살해의 표적으로 만드는 현실 속에서도 이들은 우리를 살도록 하라고 주장하기 위해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증언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구경꾼들의 표정은 종잡을 수 없다. 일그러진 얼굴들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당당하게 시위하는 이들에 대한 충격과 경악의 표현인가. 왜 저래야만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불편함의 표출인가.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찌푸림인가. 단지 덥고 눈부실 따름인가. 우리가 이러면 불편하겠지만 그렇게 불편해 봐야 한다. 우리야말로 저들 때문에 매일매일이 불편하다. 단지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칼을 맞고 강간을 당해야만 했던 한 레즈비언 활동가가 카메라를 보고 말한다. 그녀는 살아남았고 아직 할 일이 많다. 화면 속 용감한 얼굴들이 때 이른 부고란에 실려 우리에게 전해지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무지개 국가’라는 말이 차별과 폭력의 쓰라린 현실을 덮는 포장지가 아니라 남아공 사회를 실질적으로 구성하는 원리로 자리 잡기를 빈다.

이진화/케이 (한국레즈비언상담소)

3인권해설

인권해설: 엄마, 나는 공주님이야

인권해설

영화를 보고 난 후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가슴이 뻐근했다. 슬픔이라 표현해야 할까? 어떤 단어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복잡한 감정과 다시 마주한다.

난 루아나와 같은 딸을 가진 엄마다. 여자가 되고 싶어 했던 내 아이는 지금은 여자가 되어 살고 있다. 영화 속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되기도 했고, 내 아이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가볍게 넘어갈 수 있을 이야기들이 나에게는 진한 아픔으로 다가온 까닭이다.

루아나는 여자 옷을 좋아하고, 인형을 가지고 놀고, 남자 아이보다는 여자 속에서 끼어 노는 것을 편안해 한다. 내 아이도 그랬다. 여동생과 함께 인형놀이를 했고, 단 한 번도 칼이나 자동차를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동생의 옷을 보면 막연하게 입고 싶었고, 너무 부러웠지만 남자이니 표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내 아이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자신의 성정체성에 문제가 있음을 말했다. 사춘기에 부는 바람일 것이라는 나의 소망과 달리 그것은 긴 터널의 시작이었다.

루아나 엄마는 어떤 문제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고추를 가진 특별한 소녀니까 고추도 아껴줘야죠. 나중에 커서 완전한 여성이 되고 싶다면 지금의 몸도 사랑할 줄 알아야 해요. ” -루아나 엄마의 말-

엄마의 이런 태도는 루아나가 자신의 내면을 건강하게 바라볼 가치관을 심어줬을 것이라 생각한다. 유치원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힘든 과정을 겪었지만 루아나 엄마는 피하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을 이해시켜 갔다. 난 친한 지인들과 가족들에게만 나의 상황을 알렸다. 그리고 이사를 했다. 많은 사람과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끊었다. 사람 속에서 평범한 한 여성으로 살기를 소망하는 아이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었다. 언제쯤, 어떻게, 어느 만큼의 커밍아웃을 할 것인지… 많은 숙제를 내 아이와 가족에게 남겨 놓고 있다. 아직도 내 아이는 척추뼈를 세우고 곧게 설 힘이 부족하다.

루아나가 말을 하기 전부터 자신의 성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아기가 불편을 느꼈다는 것은 사회적 학습에 의한 것이 아닌, 선천적 욕구였던 것이다. 우리 사회는 보편적으로 트랜스젠더를 선택의 문제로 본다. 인터넷을 통해 배운 학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도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그것을 검증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었다. 루아나의 이야기는 트랜스젠더 문제가 후천적 선택의 문제가 아닌 선천적 본능의 욕구였음을 확인하게 해준다. 아이의 성정체성을 놓고 갈등하고 있을 많은 부모들이 본다면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어느 날 갑자기 항상 다니던 길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혼란스러웠다. 옳고 그름의 판단이나 미래에 대한 계획 같은 것은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처음에는 길이 없는 듯이 보였다. 나에게 “성정체성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라는 아이의 그 말로 여기까지 오게 될 줄 몰랐다. 이제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우린 길을 만들며 여기까지 왔다. 그 과정에서 아이도 더러는 상처를 입었고, 나도 지쳐 ‘이제 그만 하자고!’ 하며 외치고 싶었던 날들이 많았다. 요즈음 우리 가족은 지난 십여 년 시간을 되돌아보기를 한다. 아이는 육체적으로는 완전한 여성이 될 수는 없지만, 정신적으로는 완전한 여성으로 살기 위해 내면에 상처받은 자신을 찾아 안아주고 위로해 준다. 루아나가 고추가 달린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듯 우리 아이도 어릴 적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힘들지만 다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한 상담을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부드러워지고 강해지는 아이를 느낀다.

“세상이 아이를 인정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세상에 맞설 만큼 아이가 강해지길 바랄 뿐이죠.” – 루아나 엄마의 말 –

루아나 엄마의 말처럼 그 세상을 당당한 한 여성으로 루아나도, 내 아이도 살아내길 소망한다. 세상에 많은 트랜스젠더와 그 가족에게 희망을 전한 현명한 루아나의 엄마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트랜스젠더 자녀를 둔 엄마

3인권해설

인권해설: 네이슨

인권해설

네이슨의 존엄사를 다룬 이 영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네이슨의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이 죽음까지의 경로는 네이슨 본인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오롯이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죽음의 원인이나 계기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힐 것이라 생각한다. 가족으로부터의 부정, 성폭력 등의 트라우마, 트랜지션 과정에서의 수술 부작용, 더 이상의 희망이 없고 살아갈 의지가 없어서 등 갖가지 이유들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그러한 가능성도 있지만 가족의 부정, 성폭력이 네이슨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거나, 트랜지션 수술 부작용이 네이슨을 죽음으로 몰고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단 한 가지의 이유라기보다 여러 가지 종합적인 것들이 죽음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지 않았을까 싶다.

분명 영화에서는 ‘네이슨이 수술 부작용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았었고, 부작용이 삶에 끼친 영향으로 더 이상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라고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미 세계 유수의 매체를 통해 네이슨은 트랜지션 수술 실패로 인한 좌절로 죽음을 선택한 트랜스젠더로 많이 알려져 있다. 물론 그 이유가 결정적이었을 수도 있으나, 그러한 기사들은 네이슨이 수술 실패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안락사를 선택한 것처럼 비춰지기 쉬울 것 같다. 과연 그게 트랜지션 실패라는 이유일까? 실패라고 한다면 어떤 것이 실패이며, 과연 그것이 직접적으로 죽음과 연결하는 연결고리가 되었을까? 그를 죽음까지 이르게 한 것은 자기 자신일까, 혹은 사회일까? 확실한 건 수술과 관련된 이야기가 영화 결말의 결정적인 이유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그것만을 결정적인 이유라고 판단하는 건 얼마나 단편적인 해석인가!

수술이 잘못되었을 때 그리고 그 수술이 재수술로 바로 잡히지 못한다는 그 고통과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FTM 트랜스젠더의 성기재건수술은 수술 부작용의 위험 부담과 금전적인 부담이 큰 수술이다. 많은 부작용 사례들이나 수술 실패 사례들이 있어 왔으며 당사자들에게는 하나의 큰 고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몇 년 전까지 FTM이 법적 성별변경을 할 때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수술 조건으로 성기재건수술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후 많은 노력으로 의학적인 부분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의 한계와 수술의 부작용이나 실패사례, 그리고 금전적인 부담 등을 강조하여 성별변경 시 성기재건수술의 조건이 일부 완화된 바 있다. 그렇지만 수술을 할지 말지는 본인의 선택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생각을 할 수 없듯이 모든 트랜스젠더들도 각자 다 원하는 몸이 다를 것이다. 자신의 육체에 혐오나 불만이 없을 수도 있고 건강상 하지 못할 수도있고 몸과는 별개로 생각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각자가 원하는 몸에 대한 이미지가 있는 것처럼 트랜스젠더에게도 수술에 대한 선택이 그 어떤 것이든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네이슨은 남성의 육체를 가지길 원했고 그로 인해 선택한 성기재건수술이 본인의 만족과는 별개로 기능성의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성기재건수술은 한 번의 수술로 끝나기 어려운 수술이며 긴 과정과 오랜 회복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수술의 고통이 잠깐으로 끝나지 않는다. 주위에 수술 과정을 겪은 사람들은 다 같은 말을 했었다. 죽고 싶을 만큼 아프고 괴로웠다고… 그런 말들로 미루어 보아 네이슨은 여러 번의 재수술을 통해 그 고통을 수차례 겪었을 것이다. 네이슨의 과거 이야기와 다른 병원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 등은 너무나 짧게, 그리고 빠르게 지나가고 만다. 그래서 더욱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양한 상상이나 해석을 하게끔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네이슨에 투영하여 볼 수도 있고, 나의 주변 사람으로도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아예 제 3자 입장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이 영화를 같이 본 사람들과 서로의 생각을 얘기해 보고 다른 사람들은 영화를 어떻게 보았는가에 대해 대화를 나눠보면 이 영화가 얼마나 다양하게 읽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네이슨의 친구들은 그가 오랜 기간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고 말을 한다. 그렇다면 영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네이슨이 신분증 속의 성별을 바꾸고 웃음 가득 기뻐했던 모습이나 지지해 주는 친구들을 만나 편하게 대화하던 시간들, 그리고 자신이 정말 타고 싶어했던 열기구를 탔을 때 좋아하던 모습 등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네이슨은 고통이나 좌절 속에서만 살아온 것은 아닐 것이다. 네이슨의 우울감, 좌절감, 고통 등은 그가 트랜스젠더라서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는 것이다. 남들과 다를 바 없다. 물론 다른 점이라면 어쩌면 남들은 겪지 않아도 되는 경험을 해야 했다는 그 차이일지도 모른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누구나 긴 여운을 느끼는 듯하다. 이 길지 않은 한 편의 영화에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이 영화를 보며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고, 접하기 힘든 다양한 트랜스젠더중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또 그 안에는 복잡한 가정사와 수많은 감정의 기복 그리고 트랜지션 과정… 한 가지의 주제로는 다 풀어낼 수 없을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단편적으로만 해석하게 된다면 정말 안타까울 것 같다. 영화의 결말은 죽음이었지만 이 영화의, 네이슨의 삶의 결말이 어떠한 뜻이었다라고 선뜻 말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덧붙여 네이슨이 스스로 결정한 죽음에 대해서 옳다/그르다 혹은 좋다/나쁘다고도 감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좀 다른 방향에서 보자면, 네이슨의 죽음은 용기 있는 죽음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이별을 고하고 자신의 안락사를 축하하는 자리를 가지며 자신의 죽음까지 본인의 발로 걸어 들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Free as a bird… 어디에서든 그가 그토록 원했던 삶을 살고 있길 바란다.

진호 (조각보-트랜스젠더인권단체설립준비위원회)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그 날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옆에는 마지막 날까지 함께 하는 친구들이 있다.

누군가 당신에게 난 이제 더 이상 내 삶의 고통과 맞서 싸우기 지쳤으니 스스로 끝낼 결심을 했다고 말했을 때, 어떤 감정과 생각이들까. 아니, 당신이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다면 그 이겨낼 수 없는 고통이란 어떤 깊이일까. 그 결심을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설득하고 지지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을까. 고통을 경험하는 인간으로서의 나와 고통 속에서도 희망과 의지를 발견하도록 돕는 자로서의 내가 수 없이 교차한다. 만약 그의 친구라면 난 그에게 뭐라 할 수 있을까. 상대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어떻게든 그 결정을 돌리고 싶은 절박함, 그렇지만 어떻게도 도울 수 없다는 무력감, 여러 감정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하지만 그의 삶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면 그래서 그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 것임을 알고 있다면 선뜻 막아설 수 있을까.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다는 절망을 견디며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 아닌가. 마지막의 시기를 결정하고 삶을 정리하고 원하는 방식으로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은 것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 아닐까. 답을 내리지 못하는 질문들이 쌓여간다.

영화는 쉽게 답하기 어려운, 아니 어쩌면 생각해본 적도 없을 수 있는, 삶을 끝낼 수 있는 권리, 삶이 주는 고통을 끝낼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나라에서 안락사를 선택한 네이슨의 마지막 나날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과정은 어쩌면 담담하게, 때로는 즐겁게, 그래서 오히려 먹먹하게 다가온다. 고통의 원천에 대해서는 아주 잠깐씩 드러난다. 어린 시절 엄마의 학대, 오빠의 성폭력, 트랜지션을 지지해주었던 아빠의 죽음, 수술의 실패… 눈에 띄는 큰 사건들 사이에 얼마나 더 많은 상처가 있었을지는 알 수 없다. 이 경험들 속에서 고통은 켜켜이 쌓여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약물, 심리치료, 상담 등의 개입도 고통의 무게를 덜어주지는 못했다. 엄마는 끝까지 비난의 말을 쏟는다. 형제들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군다. 자신을 일으켜 세워주는 것 같았던 아빠는 법적으로 남성이 되는 날 돌아가셨다. 스스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려 애썼지만 가족이라는 공동체 중 다수의 사람들이 마지막까지도 비수를 꽂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끝내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고통이 그의 절망을 더 깊게 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길을 함께 해준 친구들과의 작별을 성실하게 해나가지만 친구들 속에서도 여전히 외로웠음이 드러난다. 그가 친구들에게 남기는 말은 너무나도 긍정적이고 희망적이어서 쓸쓸하다. 그 누구보다 네이슨 자신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조금 더 고통을 말할 수 있었다면, 주는 것만큼 더 받을 수도 있었다면, 그 외로움이조금 더 감당할 만했다면 하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고통을 대신 겪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한 번은 더 말 걸고 손 내밀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의 절망에 아파하면서 마지막 길에 따뜻한 마음으로 함께 했지만 여전히 다시 한 번 생각해 줄 수는 없겠니, 이게 정말 최선이니, 묻고 싶어진다. 그의 친구들이 그랬듯 나 또한 그를 잃는 것이 안타까워서였을까. 아니면 아무것도 도울 수 없는 나의 무력감에 맞닿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그의 친구들은 그를 잃지 않고 싶은, 결심을 되돌리고 싶은 소망을 솔직하게 표현했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결정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옆을 지켰다. 어떤인연은 끝내 회복될 수 없었고 어떤 인연은 마지막까지 이어져 있다.

떠오른 많은 질문에 여전히 답할 수 없다. 아니, 답하지 않고 계속 질문하려 한다. 편협한 잣대로 성급히 판단 내리지 않으려 한다. 다만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 나와 다른 생각과 삶의 방향을 존중하는 것, 고통의 순간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하는 것의 가치를 되새기려 한다. 잘나거나 모자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저 가진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서도 괜찮은 사람임을 인정받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갖고 있는 소망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나 어떤 사건으로 인해서 나의 몸과 정신이 침해되거나 손상되었을 때, 그 상처를 잘 보살피고 나 자신으로서의 삶과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성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한 개인의 몫을 넘어선 그를 둘러싼 여러 연결고리의 사람들, 나아가 이 사회가 함께할 몫이다. 어떤 틀로 분류된 무엇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수많은 네이슨과 만날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네이슨의 손을 놓지 않았던 친구들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기를, 그래서 나 또한 절망할 때 용기 내어 손 내밀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조이수현(트라우마치유공동체 사회적협동조합 사람.마음)

 


 

수많은 해외 연구에 따르면, 성소수자들은 비성소수자보다 건강이 나빠질 확률이 높다. 성소수자는 비성소수자와 비교할 때, 흡연, 음주 등을 더 많이 하는 경향이 있고, 심장질환이나 비만, 성감염증에 걸릴 확률도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건강상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건강연구를 하는 수많은 전문가들은 차별, 특히 동성애혐오와 사회적 낙인으로 인해 성소수자들의 건강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당연시되는 사회분위기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드러날까 늘 위축되어야 하는 사회 심리적 요인, 커밍아웃했을 때 또는 아웃팅을 당했을 때 이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법/제도적 근거가 전무한 상황, 일상적으로 이들이 마주쳐야 하는 낙인의 위험, 직접적인 혐오범죄의 대상이 될 가능성, 도움이나 상담을 받기 위해 찾은 의료기관에서조차 차별당하거나 낙인을 두려워해야 하는 상황 등을 꼽자면 이들의 건강이 나쁜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특히 트랜스젠더의 경우, 트랜지션(성전환수술)을 하는 이들이 다수 있기에 의료체계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많다. 건강이 나빠질 수 있는 조건뿐 아니라, 젠더표현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혐오 범죄의 직접적 대상이 될 가능성도 크다. 자살 생각도 매우 광범위한 편이이서, 해외연구에서는 트랜스젠더 중 38~65%가 자살생각을 하고 있으며, 16~32%는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 적 있다고 나타난다. 성전환을 한 트랜스젠더의 경우, 일상생활을 관리하고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긴장과 스트레스는 배가되기 쉬워, 심리상담이 요구되기도 한다. 이렇듯, 건강상의 큰 위험을 안고 살아가지만, 트랜스젠더의 건강, 특히 우울증, 불안 등 정신건강상 문제를 알고 이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시도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외에서도 트랜스젠더와 비트랜스젠더를 비교하는 연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국내에서도 트랜스젠더의 건강에 대한 문제는 전무하다.

건강이란 무엇일까? 세계보건기구가 말하듯이, 건강이란 신체적 건강만을 뜻하지 않으며, 심리적 행복과 안녕을 포함한다. 사람들은 건강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좋은’ 음식을 찾고 운동을 하며 의사를 찾아가기도 한다. 더불어, 가족과 친구, 지인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구하기도 하며, 그들로 인해 불행할 때는 다른 사회적 관계망, 지지망을 형성하고자 한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도 여전히 신체적 고통이 지속될 때, 심리적 행복과 안녕이 보장되지 않을 때 개인의 선택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안락사는 그 목적, 방식, 환자의 자발성 여부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지만, 영화 <네이슨>의 선택은 적극적 안락사이자 존엄사로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의료계는 자살에 대한 의사의 조력, 죽음에이를 수 있는 약품에 대한 정보 제공, 의사가 직접적 안락사에 관여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며 이를 법제화하여 허용한 나라 또한 많지않다. 의사가 환자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원칙,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위하여 발전해온 의료행위가 생명윤리와 충돌한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1994년 미국 오리건 주에서 ‘존엄사법’이 통과되고, 2000년 네덜란드, 2002년 벨기에, 2004년 룩셈부르크가 안락사를 법으로 허용하면서 안락사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더불어,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의사의 의견을 물은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의사들의 생각도 달라지는 듯하다. 54%가 의사 조력자살 허용에 찬성한다고 답한 것이다.

안락사를 하기로 한 트랜스젠더 <네이슨>의 선택은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규정할 수도 없다. 아동기 폭력의 피해경험, 트랜스젠더로서의 정체성, 성전환수술의 실패, 전 생애를 걸쳐온 고립감과 외로움은 차별받는 이들이 공히 갖고 있는 ‘건강의 위험요인’들이다. 이들을 건강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적 ‘위험요인’을 없애기 위해서는 살아남은 자들의 싸움이 더 끈질기게 필요하다. 그것이 지금껏 우리 곁에 있었던 수많은 다른 <네이슨>의 죽음을 슬퍼하고 추모하는 길이자, 함께 안녕히 살아갈 수 있는 길이다.

박주영(연구공동체 건강과 대안)

 


 

용어 해설

외상(trauma)
과도한 위험과 공포, 스트레스 상황에 대한 심각한 심리적 충격을 일컫는다『.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 5판』에 따르면 죽음, 심각한 상해 또는 성적인 폭력과 같은 외상사건을 실제로 겪었거나 그러한 위험에 직면했을 때, 혹은 외상사건이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거나 가족 등 가까운 사람에게 일어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에 대한 강렬한 두려움, 무력감, 공포를 경험한 경우를 의미한다.

안락사
의사의 역할에 따라서 적극적 안락사, 소극적 안락사로 구분되며, 환자가 자발적으로 동의하고 이를 요구하는 경우 존엄사라고도 한다. 의사가 약물 등 정보를 소개하고 돕는 경우가 적극적 안락사에 해당되며, 의사조력 자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극적 안락사는 환자의 치료가 불가능한 경우 추가적인 의료조치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연명치료 중단, 심폐소생술 거부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 아래의 용어 해설은『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사람생각, 2008)의 용어정리 pp.13-23 에서 많은 부분을 참조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성전환자/트랜스젠더
먼저 ‘트랜스젠더(transgender)’는 ‘전환이나 초월’을 뜻하는 ‘trans-’와 ‘성별’을 뜻하는 ‘gender’가 합쳐진 말인데, 이를 줄여 ‘TG’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 한국의 언론은 트랜스젠더와 트랜스섹슈얼, 성전환자와 같은 용어를 서로 구분이 안 되는,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트랜스젠더와 트랜스섹슈얼을 구분하며, 트랜스섹슈얼은 수술을 하는 사람, 트랜스젠더는 반드시 수술을 하는 건 아닌 사람들을 일컫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는 하다.

만약 이 용어들의 뜻을 미국 학제에서 사용하는 방식에 따른다면, 성전환자를 ‘정신적인 성과 육체적인 성이 불일치하는 사람’이라고 얘기할 수 있고, 트랜스섹슈얼은 ‘정신적인 성에 육체적인 성을 일치시키려는 사람’, 즉 호르몬 투여와 성전환수술을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용어는 정신병리적인 현상으로서의 성전환자를 설명할 때 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반해 트랜스젠더는, 이런 의료식민화를 비판하며 운동적인 성격을 띠고 등장했다. 트랜스젠더는 반드시 수술이나 호르몬을 하는 것은 아니며, 그 사회에서 요구하는 젠더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로 상당히 넓게 사용하고 있다. 현재에 와선 트랜스섹슈얼이 반드시 정신병리적인 의미로만 사용하는 건 아닌데, 트랜스젠더와 달리 트랜스섹슈얼이란 용어가 성전환수술 경험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이들 용어를 사용하는 방법이 미국의 그것과 동일하다면 그저 어느 유명한 이론가의 정의를 그대로 번역하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란 용어가 특정한 의미로 대중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는 점에서 미국의 맥락과 상당히 다르다. 몇몇 유명 연예인들이 트랜스젠더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각인되면서, 한국에서 트랜스젠더란 용어는 태어났을 때 주민등록번호로 할당받은 성별과 갈등 하는 존재로서, 대체로 성전환수술을 하거나 지금은 하지 않는다 해도 언젠간 수술을 할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지칭한다. 트랜스젠더 커뮤니티에서 이 용어는, 육체적인 성은 남성(혹은 여성)이어도 정신적인 성은 여성(혹은 남성)인 사람들을 의미하는 경향이있으며, 정신적인 성이 여성(혹은 남성)이기에 수술을 하는 이들을 지칭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성전환수술을 한 사람들 상당수가 자신은 트랜스섹슈얼이 아니라 트랜스젠더라고 얘기한다.

ftm/트랜스남성
ftm은 ‘female to male’의 준말로, 생물학적으로 여성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남성 정체성을 가진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mtf는 male to female의 준말). 당사자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트랜스젠더의 성별, 정체성과 전환의 의미를 담은 이 용어들을 즐겨 쓰지만,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성별만을 상정하고 있어 성별이분법적이고, 전환의 의미를 너무 강조하기에 자신을 설명하는 단어로 적절치 않다’는 입장 혹은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남자였지 여자에서 남자로 바꾼 게 아니다’라는 입장 등의 다양한 이유로 이러한 표현을 거부
하는 이들도 공존한다.

‘트랜스남성’이란 용어는 보통 ‘ftm’과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는데, 엄밀히 말해 트랜스남성은 출생 시 부여받은 성(여성)과 달리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의료적 조치를 받았는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 젠더정체성(남성)에 입각하여 의료적 조치를 받았는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남성임을 드러내는 용어이다. 의학적 조치를 통한 경우(트랜스섹슈얼 남성)뿐 아니라, 의학적 조치가 아닌 다양한 젠더적 수행을 통해 자신이 남성임을 드러내는 경우(트랜스젠더 남성)도 모두 트랜스남성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또한 트랜스남성이란 용어는 사회 안의 다양한 남성들과 같이, 예를 들면, 장애남성, 흑인남성과 같이 트랜스남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용어이기도 하다.

트랜지션
트랜지션(transition)은 보통 ‘전환/전환 과정/성전환’으로 번역되곤 하는데, 트랜스젠더에게 전환이란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성별과 다른 젠더정체성으로 ‘정체화하는 과정에 들어선다’는 넓은 의미에서 볼 때, (1)옷차림이나 말투 행동거지 등 젠더 표현을 자신의 젠더정체성에 맞게 재사회화하고 학습하는 과정, (2)호르몬 투여를 시작하거나 성전환을 위한 여러 수술을 받음, (3)법적 성별을 바꾸어 살아가는 일련의 절차 등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물론 이 모든 과정들을 거쳤다고 해서 반드시 전환이 종료되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보통 트랜스젠더들이 모여 있는 커뮤니티에서 ‘전환 중’이라는 표현은 의료적 조치(그리고 이에 뒤이은 법적 성별변경 과정)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패싱/통과하기
패싱(passing) 또는 통과하기는 ‘이러이러한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짐’이란 뜻을 갖는다. 트랜스젠더에게만 국한하여 쓰이는 용어는 아니며 인종, 민족,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장애 등에도 통용되는 단어이다. 패싱(passing)은 원래 유태인이나 유색인종 등 서구 사회의 주류에 속하지 못하는 민족이나 인종이 그 사회에 어떤 식으로 속하는지를 설명하고자 할 때 쓰였던 단어였다. 그러다가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에 확대 적용되어 왔으며, 쓰이는 대상에 따라 그 의미와 맥락이 달라지기도 하여 왔다.
ftm일 경우, 태어날 때부터 법적 신분증에 남성으로 표기되어 있는 듯이, 학창시절 남학생이었던 듯이, 여자인 몸으로서의 경험이 전혀 없는 듯이 얘기하고, 주변 사람들도 그 사람이 ‘원래 남성’이란 사실을 의심하지 않도록 행동할 수 있는데, 이를 패싱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영미권의 트랜스젠더 인권운동 역사 속에서 패싱은 트랜스젠더로서의 역사-개인으로서나 집단으로서의 역사 모두를 지우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이는 패싱의 의미를 너무 협소하게 보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기도 하다. 먼저 트랜스젠더에게 있어 패싱이란 젠더 표현과 젠더 역할, 젠더적 수행이 자신의 젠더정체성대로 받아들여진다는 의미와 더불어서, 자신이 정체화하고 있는 성별과는 다른 성별로 오인된다(비수술 트랜스젠더의 경우 특히 그러하다)는 모순되고 양가적 의미 모두 다로 쓰일 수 있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네이슨처럼 ftm인 경우,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남성’이었다고 말하고 ‘남성’으로 통하는 것도 패싱이며, ftm/트랜스남성이 ‘여성’으로 통했던 역사 역시 패싱일 수 있다. 그리고 모든 트랜스젠더가 남녀 중 한쪽의 성별로만 패싱하려 하지는 않으며, 어떤 이들은 트랜스젠더로, 누군가는 트랜스남성/여성으로 패싱하려 하기도 한다

이처럼 패싱은 좁은 의미로만 보면 과거를 지우거나 부정하거나 속이는 행위로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의 맥락에서 개인과 집단의 역사, 각각의 육체의 역사와 관계망의 역사를 거듭 재구성하면서 자기 개인의 일관성을 추구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SRS/성전환수술/성재지정수술/성확정수술
Sex Reassignment Surgery(SRS)는 ‘성전환수술’이라고 가장 흔히 번역되곤 하며, ‘성재지정수술’이나 ‘성확정수술’ 등 다른 용어로 번역되기도 한다. 넓은 의미에서 성전환수술이라 함은, 신체에서 성별을 나타낸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외과적 수술 – 성선(정소, 난소), 내부성기(정낭, 질, 자궁, 나팔관), 외부성기(음낭, 음경, 음핵, 음순) 등 생식기관의 제거와 성형, 나아가 유방, 얼굴 등 외부에서 성별을 판단하는 외형들의 성형을 포함 – 을 통하여 성별적으로 신체적 외형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광의의 SRS를 포
함하는 의료적 조치에는 호르몬 투여, 정신과적 진단 및 조치 등을 전부 포괄하는 의미로도 쓰이곤 한다. 하지만 대중적으로는 성기 및 생식능력제거 수술을 지칭하는 경우로 가장 자주 쓰이곤 한다.

일반적으로 이 용어는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젠더정체성에 따라 출생 시 부여된 성별과 ‘반대’의 성별로 수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트랜스젠더로 자신을 정체화한 사람만의 전유물만은 아니어서, 간성인 사람이 자신이 편안하다고 느끼는 성별로 신체를 변화시키거나,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지만 필요에 따라 성전환수술을 행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성전환수술이란 용어는 ‘성을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나에게 주어졌어야 할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입장을 가진 이들에서는 사용하기를 꺼려지곤 한다. 대신에 이들은 관련된 외과적 수술을 ‘성을 자신에게 부합하게 정위치에 돌린다’는 의미에서 성정위수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혹은 ‘나에게 적합한 몸’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성적합수술이라고 하거나, 출생 시에 외부성기에 의해 지정된 성을 ‘자신에게 편안한 성으로 다시 지정한다’는 의미에서 성재지정수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3인권해설

인권해설: 나를 위한다고 말하지마

인권해설

국화꽃 너머로 보이는 당신의 얼굴들. 살아서 만났으면 더 좋았을 것을, 나는 정확히 당신들이 어떤 사람이였는지를 당신들이 떠나고 나서 텍스트로 읽게 되었다. 감히 평가할 수 없는 한 우주가 떠나는 것을 이리도 허망하게 바라보아야 한다니, 이 단단한 죽음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낙인의 사슬 장애등급제와 빈곤의 사슬 부양의무제 농성장은 2012년 8월 21일, 비가 많이 오던 여름날 차려졌다. 아무것도 없었던 광화문 농성장에는 2015년 지금, 총 11개의 영정 사진이 놓여져 있다. 이 영화는 11개의 영정 사진들과 함께있는 지역사회에 나온 지 6개월 만에 꿈을 져버릴 수밖에 없었던 국현 형의 이야기이다.

작년 봄, 노들장애인야학으로 국현 형이 왔다. 한글을 잘 모르던 그는 장애인을 더 이상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에서 살게끔 활동하는 탈시설 활동가들의 지원으로 함께 학교를 다녔다. 시설을 24살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형의 나이는 2014년 봄, 53세였다. 4월 13일 체험홈에(시설에서 나와 자립생활을 온전히 하기 전까지 머물다가 가는공간) 불이 나게 되었다. 형이 있던 방까지 불이 번졌지만 국현 형은 침대 위에서 그을린 채로 전신 3도의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 국민연금 공단은 그런 그의 장애를 5급으로 판정, 활동보조 서비스를 받지 못하게 하였다. 다시 이의신청을 하고 싸웠던 그 기간에 그렇게 화마가 그의 삶을 휩쓸었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가 있은 지 바로 다음날인 17일 형은 영원히 떠났다.

전체 삶의 대부분을 시설에서 보내다 자립생활을 하기 위해 지역사회에 나온 지 6개월만의 일이다. 27년 만에 시설 밖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한 그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였다. 현재의 장애등급은 본인의 손상의 조건을 밝히며 ‘내가 당신보다 더 장애가 심하다.’라는 명목으로 줄세우기를 한다. 그리고 등급별로 사람을 나누어서 1급~6급까지의 장애등급으로 사람을 나누어 해당되는 등급별 서비스만을 제공한다. 일본을 제외하면 전세계에서 실제로 사장된 제도인 장애등급에 따른 서비스를 제공하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살 수 있었는데, 그랬었는데.’라는 이 말은 너무나 무겁다. 이 죽음들이 너무나 억울하다. 광화문지하 역사 안에 놓인 11개의 영정 사진들, 그 사람의 단단한 죽음들, 이 죽음에 억울한 나날들. 그 죽음을 품고 살아가기엔 아직 우리는 너무 떨리는 존재들이다. 광화문역사 지하2층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 광화문 농성장에 함께해 주시길, 이 단단한 죽음들의 무게를 우리 함께 안아갈 수 있었으면 한다.

한명희(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폐지 광화문공동행동)

3인권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