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호 특집] 인영씨가 만난 사람, 부깽

소식

인터뷰 진행 및 정리 : 서울인권영화제 심지, 선율

사진1. 서울인권영화제 Errors 티셔츠를 입은 부깽이 웃고 있다.[사진1. 서울인권영화제 Errors 티셔츠를 입은 부깽이 웃고 있다.]

여의도 차별금지법제정 농성장과 멀지 않은 카페, 심지와 선율은 울림의 애독자이자 서인영 후원활동가인 부깽 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부깽 님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인터뷰어 심지가 던지는 모든 질문에 대해 정성껏 답변을 준비해서 들려 주셨다. 가장 진실과 가까운 표현을 만들기 위해 단어를 선택하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오늘의 기록자인 선율은 한 단어라도 놓칠세라 조그만 휴대용 키보드를 바쁘게 쳤다.

심지: 안녕하세요, 부깽님!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집회를 오가면서 자주 뵈었는데 이야기 나누는 건 오랜만이에요. 오늘 어떻게 인터뷰에 응하게 되셨나요! 

부깽: 사실은 원래 주목받고 싶지 않아 인터뷰에 응하지 않을 뻔했어요. 그런데 하필 인터뷰 제안을 제가 하루 중 가장 방심하는 시간에 봐서 하겠다고 답을 한 거예요. 하루 중 조깅하는 시간이 있는데, 조깅하고 나면 정말 차분해지고 마음을 놓게, 방심하게 돼요. 그때 연락을 보고 좋다고 한 건데, 미리 보내주신 질문지를 받아 보고 갑자기 후회가 몰려왔어요. 왜 내가 방심했을까!

심지: 역시.. 부깽님이 방심한 틈을 노리길 잘했네요. 인터뷰를 요청하고 보니 새삼, 문득 부깽이라는 이름의 뜻이 궁금해졌는데요. 

부깽: 부깽이라는 이름을 되게 오래 썼어요. 부깽의 뜻은… 원래 프랑스말이에요. 책, 책인데 약간 비하하는, ‘책 나부랭이’ 이렇게 부르는 단어예요. 저는 책을 많이 사는 사람이에요. 책을 읽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그냥 많이 사는 사람이에요. 저는 책을 많이 사고, 정말 많은 걸 책에서 배우고, 책을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다른 사람들이 부깽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부지깽이의 줄임말이라는 식으로 넘어가곤 했는데, 실은 이런 뜻이었다는 거고요.

심지: 또 스스로를 더 소개한다면? 

부깽: 페미니스트예요. 되게 오랫동안 페미니스트로 살아서, 페미니스트로 산 날이 더 많아서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해도 거리낌이 없어요. 

심지: 페미니스트가 되신 계기가 있을까요?

부깽: 저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는 그런 것의 존재 자체를 몰랐고, 그런 세계가 있는지도 몰랐어요. 남들, 어떤 남들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남들과 똑같았죠. (부깽 님은 명확하고 정밀한 표현을 사용하기 위해 곰곰이 생각하였다.)

알고 싶은 건 많았지만, 페미니즘과 접점은 많지 않았어요. 그때는 접점이 없는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그 때 막 여성주의가 붐이었고, <달딸(달나라 딸세포)> 같은 잡지가 만들어지고, 대자보에는 ‘성희롱’이라는 처음 보는 단어가 쓰여 있었어요. 지금은 성폭력에 대한 체계가 훨씬 갖춰져서 개념과 대응하는 방식을 잘 알잖아요. 그때는 성폭력 사건에 피해자 이름을 붙이던 때였어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자연스레 페미니즘을 접하게 됐고, 그 시절 저한테는 참 중요했어요. (페미니즘 관련한 공간에) 쭈뼛쭈뼛, 기웃기웃하면서 ‘쟤는 뭐지?’ 하고 보는 시선을 오랫동안 견뎠어요. 페미니즘은 정말 많은 것을 다르게 보는 법을 가르쳐 준 것 같아요. 많이 위안도 받고요. 많은 사건을 보고 접하고, 그간의 역사와 변화를 보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된 것 같아요.

예전에 만난 사람들, 단체들과 접점이 계속 만들어지면서, 제 주변의 세상이 자연스럽게 훨씬 더 평화롭고 좋은 곳이 되었어요. 좋은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던 것 같아요.

심지: 버블 속에 사셨던 거죠.

부깽: 버블이라면, 버블 of 버블에 있었죠. 있다가… 있다가… (나오신 거 같나요, 이제?) 그랬나, 그러지 못했나… 모르겠어요. 여러 시절이 지난 거잖아요, 말씀드렸듯이 운이 좋았어요. 가끔 그런 생각 하거든요. 주변 환경이 다른 분위기였으면, 정말 모르고 살았다면… (페미니즘을 통해) 전에 모르던 걸 보고, 그게 그거였군! 하고 알면서 많은 위안을 받았어요. 오래된 이야기죠.

심지: 페미니스트로서의 부깽님에 대해 잘 알게 된 기분이에요. 또 스스로를 소개할 방법이 있으실까요? 

부깽: 자전거를 좋아해요. 자전거로 주로 이동을 많이 하는데요, 많이 나돌아다니는 편이 아니라, “자전거로 못 가는 곳은 가지 말자!” 하는 편이에요.

심지: 자전거로 가장 멀리 간 곳은 어디예요?

부깽: 유럽 갔다 왔어요! (심지: 유럽에 가셨다고요?!!) 한 번 비행기를 타기는 했죠. 그때는 6개월 동안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녔어요. 국내 여행도 많이 다녔어요.

심지: 국내 여행도 버스나 기차를  한 번 타고 가셨나요?

부깽: 아니, 국내는 그냥 자전거로 다녀요. 좋은 국도들이 많이… 아, 저 자랑해도 되죠? 우리나라에 자전거로 다닐 수 있는 정말 좋은 길을 많이 다녔어요. 7번 국도가 예쁘기로 유명해서 많이들 가지만, 저는 오히려 그 옆에 있는 심곡항이 좋아요. (기록자인 선율이 잠시 본분을 잊고, 자전거 길 꿀 정보를 머릿속에 넣으며 심곡항에 가려다가 가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을 털어놓았다.) 거기 자전거를 타고 쭉 가면, 옆에서 파도가 들이쳐서 정말 예뻐요. 그리고… 35번 국도 안동에서 태백으로 넘어가는 길도 좋았고, 제주도는 다 예뻤던 것 같아요.

심지: 원래는 되게 안 돌아다니는 것처럼 말씀하셨었는데…

부깽: 자전거로는 많이 다녀요. (웃음) 동네 얘기처럼 이야기하면 알고 해서 좋네요.

심지: 소개 잘 못하시겠다고 하더니… (웃음) 부깽님의 기나긴 자기 소개 잘 들었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부깽: 그러니까요, 그게. 저의 일과는 조깅, 달리기와 맛있는 걸 하루에 한 끼 정도 해 먹는 것 정도예요. 그러면서 제가 활동하는 단체 중 하나인 빈고, 반자본주의 활동하는 그런 곳이에요. 요즘 ‘커먼즈’가, 전부터 있었던 개념이지만, 발견된 단어인 것처럼 요즘 유행하죠. 저는 ‘커먼즈’란 건 어떤 걸까 고민하고 시니컬해졌어요. 근데 제가 요리 레시피 사이트를 보면서 깨달았어요. 사람들은 공유하는 걸 좋아한다. 이거야말로 진짜 공유다! 맛있는 걸 알고 있고, 그걸 남에게 나눠 주고 싶어 하는 것! 그래서 생각해요. 진정한 커먼즈는 레시피에 있다. 하하.

심지: 부깽 님도 많이 나누는 편이세요?

부깽: 저는 나누는 거, 잘하지 못하는 편이에요. 조깅한다고 말하거나, 맛있는 거 한다고 할 때요. 제가 감정표현을 자주 하거나 잘하지는 않지만, 달리기 하면서 세상의 풍경이나 볕의 느낌, 이런 걸 느낄 때 다른 사람들도 이걸 꼭 알았으면 하는 마음, 맛있는 걸 먹을 때, 아! 이렇게 맛있는 게 있는데! 나눠 먹어야 하는데! 생각이 들어요. 그때가 제 일상에서 약간 방심하는 순간, 경계가 낮아지는 순간이에요.

심지: 서인영 회의할 때도 항상 먹을 걸 가져오시죠. 은혜로운 분. 주머니에서 항상 뭐가 나와.

부깽: 오늘도 나누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오늘은 아무것도 없네요. (부깽 님은 아쉬운 모습으로 주머니를 잠시 만져보았다.)

심지: 부깽 님 SNS에 올려주시면 잘 볼게요. 레시피든 풍경이든.

부깽: 사실 제 레시피는 아니고, 다른 사람의 레시피를 따라 해 본 거예요. 따라 한 게 너무 맛있으면 첫째는, 내가 한 게 이렇게 맛있다고? 와! 둘째는, 이걸 나눠야 하는데!

심지: 부깽 님의 서재도 궁금해요.

부깽: 제 서재… 지금은 좀 병풍처럼 되어있지만… 읽는 것보다 사는 속도가 더 빠르지만…

심지: 저도 책 수집가에 가까워요. 공감합니다.

부깽: 아, 요즘 집을 조금씩 고치고 있어요. 어떤 면에서는 제가 되게 적응을 잘하고, 둔감한 사람인 것 같아요. 3년 전 즈음 친구들이 집 벽지를 다 뜯었어요. 곰팡이, 이것 좀 고치라고요. 처음엔 벽지가 뜯어져 있는 모습이 되게 거슬렸는데, 점점 “벽이 그럴 수도 있지. 뜯어져 있기도 하지…” 하고 별생각 없어지고, 벽이 뜯어진 곳에서 잘 지내게 됐어요. 오늘은 친구들과 작은 방 하나 벽지를 다 뜯었거든요. 뿌듯하더라고요.

심지: 오늘은 나름대로 역사적인 날이네요.

부깽: 하하. 벽지를 뜯을 때 노동요를 틀자기에 틀었어요. 그러다가 친구들이 ‘오늘 무슨 날 아니야?’하는데, 그러다 오늘이 518이라는 걸 알았네요. 뭐, 조용히 책 읽고, 조깅하고, 맛있는 거 해 먹고, 두문불출 하다가 가끔 집회 나가고, 하는 게 저의 요즘 일과예요.

심지: 요즘 작업은 어떠세요?

부깽: 일은 하죠. 밥벌이는 하죠. 밥벌이는 많이…는 안 해요. (심지는 “좋은 삶이다!”라고 외쳤다.) 많이 하진 않지만 조금씩 하고 있어요. 제가 친구에게 ‘나 계절을 타는 것 같다’ 이야기했더니, 친구가 “그걸 이제야 알았어?” 하더라고요. 제가 계절이 바뀌면 저조했다가 활기차졌다가 하거든요. 사계절이 있어서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어요. 하여튼 주기적으로, 일하고 노는 한 달과 약간 저조한 두 달이 있어요.

심지: 요즘은요?

부깽: 5월이잖아요! 오월은 모두 행복한 때잖아요. 날이 좋고, 나들이 가기도 좋고, 집회하기도 좋고. (자전거를 좋아하는 기록자 선율이 또 본분을 잊고 자전거 타기는 더운 날씨가 아니냐고 묻는다.) 이동할 때 외에는 거의 안 타요. 이전에는 자전거만 타는 시간이 따로 있었으면, 요즘은 조깅을 훨씬 많이 해요.

~ 휴식 ~

잠시 인터뷰를 휴식하는 동안 부깽 님은 선율에게 요즘 한창 샛강에 출몰한다는 엄마 오리와 아홉 마리 새끼 오리 동영상을 보여 주었다. “세상 모두가 이걸 본다면 세계 평화가 올 텐데!” 말하며, 새끼 오리들이 쪼르르 샛강을 건너는 모습을 적극적으로 보여 주시는 부깽 님의 모습에서 그 말이 진실일 수 있음을 느꼈다.

심지: 자기소개를 부끄러워하는 듯하면서 굉장히 열심히 해 주셨어요. 쉬고 온 기념으로(?) 서인영 이야기를 해볼까요. 서인영과의 첫 만남에 대해 알려 주세요. 고운, 심지와의 첫 만남은 기억하세요?

부깽: 고운 님은 훨씬 전에도 본 적 있는데, 2019년, 2020년인가? 홈페이지를 만들자는 회의를 했어요. 하다가 중단됐죠. 작년에 다시 고운 님한테 연락이 왔어요. hrflix를 만들자고. 저는 JW플레이어라는 게 있는지 몰랐어요. 제가 그런 플레이어를 만들어야 하는 줄 알았어요. 온라인에서 상영하는 툴 자체를 만들어야 하는 줄 알고, 그게 제 기술 수준으로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했어요. 근데 그건 이미 있는 거였어요. 그렇게 심지님과 고운님을 처음 만났죠.

심지: hrflix 작업 비하인드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저는 작업하신 걸 보고, 서인영을 너무 잘 알고 계신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속으로 혼자 놀랐어요.

부깽: 서인영 작업은 즐거웠어요. 단체 홈페이지를 만든 적이 많은데, 누구나 홈페이지를 삐까번쩍 하게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잖아요. 모든 홈페이지가 처음엔 삐까번쩍 하지만, 갈수록 약간 키치하게 돼요. 많은 글자가 있는 웹자보를 올리고 하다 보면… 서인영 홈페이지에는 이미지를 많이 써 보고 싶었거든요. 이미지가 많이 들어가면 예쁠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심지가 너무 예쁘다며 호응한다. 선율은 아직 자세히 볼 기회가 없었지만, 집에 가서 보겠다고 약속한다. 실제로 검정과 빨강의 조화가 세련되면서도 이미지가 가지런히 들어가 있어 너무 차갑지 않은 느낌으로 예뻤다.)

부깽: 요청이 있는 것도 좋았어요. 작년 말에 서인영에서 많은 영화를 상영했잖아요. 되게 많이 하고 연말 상영, 평등 수크린, bds 상영 등 많았죠. 그러면서 유용하게 쓰였고, 대관도 있었잖아요. 만든 게 잘 쓰이는 것이 좋았어요.

심지: 작업 도중인가 끝나면서인가 후원활동가로 가입해 주셨죠.

부깽: 그즈음에 고운 님, 심지 님과 일 말고도 인사하는 사이가 됐던 것 같아요. 두 분 페이스북을 봤는데, 너무 구구절절하게, 후원해 주세요, 하시는 글이 있어서…가 실제로 후원 이유고요. 고운 님은 페이스북에 가족인가 지인에게 “후원 끊었어?” 하고 확인하시는 댓글 쓰신 걸 봤어요. 심지 님은 생일 선물로 서인영 후원을 선물해 달라는 글을 쓰셨어요. 서인영의 재정이 어떤지 잘 모르지만, 상임활동가가 두 분이잖아요. 또 두 분이 너무 열심히 하시니까. 쪼끔… 되게 쪼끔이지만,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심지: 저희의 절절한 전략이 통했군요! 울림도 잘 보고 계시겠죠? 최애 코너가 있으신가요?

부깽: 잘 보고 있죠. 활동가 편지를 제일 많이 보는 것 같아요. 나머지는 SNS 같은 곳에 올라와 있는 소식을 정리한 내용이라면, 활동가 편지는 그것과는 다른 내용이라서 달라서 재밌게 보고 있어요. 최근에 요다 님이 쓰신 <나의 서인영 잔류기>를 재밌게 봤어요.

심지: 울림을 열심히 읽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메일 오픈율에 많이 신경 쓰고 있는데요…

부깽: 전 단체에서 보낸 메일은 대체로 다 열어봐요. 

심지: 주변에 서인영과 울림을 영업하시겠어요?

부깽: 영업해야 할 것 같아요.

심지: 울림 300호를 기념해 다른 후원활동가, 울림 구독자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세요?

부깽: 이번 인권영화제는 좋은 세상에서 열리면 좋겠어요. 차별금지법 있는 곳에서 인권영화제가 최초로 열리는 9월이었으면 좋겠어요. 

심지가 너무 좋은 말씀이라고 리액션하고, ‘차별금지법이 제정돼야 활동가들도 영화제에 집중할 텐데…’ 하며 부깽 님에게 서인영의 최근 소식을 조금 더 전했다. 부깽 님은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해 주셨다. 부깽 님은 카페 앞에 주차해 둔 자전거를 끌고, 한산한 저녁의 여의도 길거리를 따라 샛강 방향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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