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5회 서울인권영화제 넷째날입니다. 오늘 두번째 영화는 이탈리아 최고령 트랜스여성의 삶이 담긴 영화 <기억의 숨결> 이었습니다. <기억의 숨결>은 주인공 루시의 일상과 그녀의 기억을 고요하게, 동시에 풍부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몸에는 여러 다층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요, 트랜스여성의 퀴어서사가 담겨있기도 하고 아흔을 훌쩍 넘긴 노년의 여성 이야기가 담겨있기도 하며 세계2차대전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이야기가 담겨있기도 합니다. 루시는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겪은 역사를 풀어놓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움직이죠. 처음에는 차를 운전해 병원에 갔다가 어느 순간에는 보행기에 의지에 길을 걷고 마지막에는 전동휠체어에 앉아 움직입니다. 그녀는 기록에 꼼짝없이 고정된 부동의 존재가 아닙니다. 숨쉬고 움직이며 역동하는, 사람과 웃고 떠들고 밥을 먹고 누군가의 돌봄을 받고 또 누군가를 돌보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야기 손님으로는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의 김영옥님을 모셨습니다.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은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이 모여 사람의 생애를 페미니즘적인 시각으로 연구하고 분석하는 단체인데요, 그만큼 김영옥님께서는 페미니즘의 렌즈로 영화를 설명해주셨습니다.
” 사실 우리가 한 10년 전쯤에 퀴어는 어떻게 늙어갈까? 이런 식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퀴어로 사는 사람들은 빨리 죽을거야, 5년도 못 살거야, 라고 생각하지만 (루시는) 오래 사셨잖아요. 너무나 건장하시고 일상을 아주 또박또박 잘 챙겨나가시는 모습이 일단 저에게는 굉장히 중요했어요. 그래서 몸으로 산다, 역사 속의 자아, 주체, 몸으로 사는 게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
“…(중략) 전체적으로 보면 루시는 생존자죠. 성폭력의 역사를 살아남았고 나치의 인종학살 현장을 살아남았고 퀴어로 규범, 정상성의 세계에 맞서서 살아남은 생존자인데, 저한테는 임 ㅗ든 다면적인 혹은 선이 여러개인 인생의 행로가 이 사람이 몸으로 살아낸 인생에 그대로 새겨져있고 (중략) 마지막에 잘 다러나는 게 루시는 가족을 꾸리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대안가족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을 옆에 두고 ”
– 김영옥
영화에서 루시는 이탈리아인으로서 징집되었다가 독일군에 소속되기도 하고, 그곳에서 홀로코스트의 역겨움을 경험하고 탈영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다시 다카우(다하우) 수용소에 수감되고, 트랜스여성임에도 남성들과 함께 수감되는 혐오를 경험하죠. 현재의 루시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일상을 단단히 수행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화는 특정한 가치판단을 시도한다기 보다는 루시의 삶을 루시의 힘으로, 그리고 루시 주변 사람과 관계에서 무언가를 그저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애사, 구술사 이런 일을 하려면 혹시 어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까요”
– 관객질문
“목소리, 그 목소리가 어떤 말을 하느냐, 단어에도 관심이 있지만 일단 그 목소리의 물성, 목소리가 어떤 생애 족적을 담고 있는가 이렇게 중요하고 (…중략) 쉰 목소리에 거칠고 느리고. 근데 자꾸 듣다 보면 이게 리듬이 있다는 걸 알게 돼요.”
“나이 든 분들하고 만나려고 할 때 대화를 나눈다는 것에 너무 집중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 김영옥
관객과의 대화에서는 영화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특히 많은 시대를 거쳐 내가 모르는 세대를 축적한 사람과 대화할 때 어떤 태도를 가지면 좋을 지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늙어갑니다. 하지만 의외로 ‘늙음’, ‘죽음’, ‘노년’이라는 키워드는 쉽사리 건드리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해요. 그만큼 노년의 모델이 적은건가 싶기도 합니다. 앞으로 서울인권영화제도 이러한 주제를 많이 발굴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내일이면 서울인권영화제도 막을 내립니다. 마지막까지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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