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후반, ‘국가경제개발’이라는 거대한 이름 아래 대대적인 국가 주도의 도시개발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향했고, 도시에는 이들이 거주하고 삶을 일굴 새로운 건물이 필요했다. 부동산 가격이 수백 배씩 뛰어올라도 수요는 날이 갈수록 늘었다. 사람들은 소규모 건설업을 시작했고 부동산 투자에 열광했다. 위험을 감수하면 큰 ‘한 방’을 터뜨릴 게 확실했던 시기, 당시 부동산은 모두에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부동산 거품이 가라앉았다. 소규모 회사들은 모조리 부도가 났고, 무수히 많은 개개인의 삶도 조각나버렸다. 거품의 몰락은 가족 사이에도 균열을 내었다. 집안의 경제 사정이 몰락한 상황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마주하고 삶에 치이면서 서로 갈등을 겪기 마련이다. 그리고 간극은 애증과 원망이 되어 그들 관계에 ‘가족’이라는 이름만을 남긴다. 버블경제 또한 그렇게 거품뿐인 가족, “버블 패밀리”를 만들었다.
버블은 수많은 삶을 조각냈지만 그 모든 책임은 ‘지나친 욕심’의 탓이 되어 개인에게 덮어졌다. 그러나 근본적인 책임은 국가에 있었다. 국가는 작은 영리 업자들에 대한 안전망을 만들고 필연적으로 일어날 경제위기 상황을 대비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국가는 오히려 무분별한 개발 사업을 펼쳤고, 부동산에 대한 환상을 키우는 데에 일조했다. 국가와 소수 기업에 떨어질 이익이 부서진 개개인의 손실보다 크다면 그만이라는 계산, 이것이 정부가 말하는 국가경제개발이었다. 처음부터 거품과 함께 휩쓸려갈 사람들이 정해져 있던 구조에서, 과연 모든 책임을 개인의 탓이라고 몰아갈 수 있을까?
지금도 한국에는 영화 속 부모님처럼 부동산 몰락을 겪고도 부동산의 희망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에서 이들의 ‘욕심’은 너무나 당연하게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과거 큰 ‘한 방’의 경험과 여전히 사회에 존재하는 부동산 투기의 흐름을 생각한다면, 사회는 이들의 ‘욕심’을 비난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제는 유일한 희망이 된 부동산의 끈을, 우리는 과연 욕심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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