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부터 40년 넘게 철권으로 시리아를 다스려 온 알아사드 독재 정권의 교체를 요구하고 자유·평등·사회 정의·민주주의를 외치던 시리아 혁명은 2011년에 시작됐다. 알아사드 독재 정권은 무수한 시민들을 가차 없이 잡아들여 참혹하게 고문하고 학살했다. 정부의 잔인한 대응으로 인해 평화로웠던 시위는 점점 무장 대결로 바뀌었다. 게다가 외국 세력들의 개입이 시리아 갈등의 복잡성을 악화시키고 시리아는 격렬한 지옥으로 변모했다.
시리아 상황은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워졌으며, 국민들은 안전한 피난처를 찾기 위해 고통의 여정을 시작했다. 2천3백만 명 시리아 인구 중, 7백만 명 이상이 국경을 넘어 전 세계의 안전한 피난처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8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지옥 같은 시리아 안에서 피난처를 찾고 있다. 국경을 넘는 사람들을 ‘난민’이라고 하고, 국내에서 피난처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실향민’이라고 부른다. 그 명칭에 따라 그들의 법적 지위는 달라진다. 사실 그들에 대한 더 정확한 명칭은 ‘지옥의 생존자’일 것이다.
난민 수용국의 국내외 난민 정책의 빈번한 변화, 국가 간 난민에 관한 법률 및 정책의 불균형, 난민 문제의 정치적 악용, 난민 반대 운동, 난민에 대한 차별과 혐오 등으로 난민들의 고통은 증가한다. 그리고 실향민들은 눈앞에서 나라가 파괴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작은 텐트에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생한다. 하루하루 꿈이 사라지고, 희망이 멀어지고, 용기와 의지는 허공에 뿌려진 종이처럼 흩어진다.
지옥의 생존자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의지와 아름다운 추억, 그리고 언젠가 그것을 되찾고 싶은 욕망으로 암울한 현실을 견디고 있다. 모든 것을 잃은 그들에게 남은 것이라곤 행복한 과거의 추억뿐이다.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고, 더 아름다운 추억을 새롭게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생존자들은 매우 단순한 것들을 자랑하듯 SNS에 공유하거나, 작은 행복을 과장하는 모습을 종종 보인다.
때때로 이런 행위들로 인해 난민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이 난민들을 판단하고 비난하기도 한다. 왜곡된 고정관념에 젖은 사람들이 생각할 때 난민이란 가난하고, 더럽고, 슬프고, 사회의 어두운 구석에 사는 존재인데, 평소 자신이 생각하던 난민의 모습과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난민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도움이 아니라, 편견과 선입관 없이 ‘평범한 이웃들’로 인정받는 것이다.
2016년, 터키에 거주하는 10대~30대 시리아 난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질문 중 하나는 “단 2시간 동안만 시리아를 방문할 수 있다면,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어떤 물건을 가져오겠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대부분은 “가족 집을 방문하고, 고향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사진을 찍고, 사랑하는 사람의 무덤 방문하고, 가족사진이나 일기장을 가져온다”는 답을 하였다.
우리는 그들을 도와줄 수 있다. 아니, 어려운 이를 돕는 것은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일 것이다. 먼저 난민에 대한 잘못된 정보나 왜곡된 편견을 바로잡고, 종교·민족·국적 등에서 오는 차별 없이 난민들과 가까워져야 한다. 난민들은 자신들의 고국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 바로 돌아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날까지 난민들을 우리 사회에 잠시 머무는 손님이라고 생각했으면 한다. 한국 국민들이 이 손님들을 따뜻하게 대우하여 전 세계의 모범이 되길 희망한다. 그리고 영화 속 인물들이 ‘마지드’를 외쳤던 것처럼, ‘시리아의 평화와 자유’가 현실이 될 때까지 함께 외쳐주기를 소망한다.
압둘와합 (헬프시리아 사무국장)
댓글
타인을 비방하거나 혐오가 담긴 글은 예고 없이 삭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