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폭력이 존재함은 상식이 되었다. 박근혜 정부는 “4대악”이라 칭했고, 인권감수성 있는 시민들에겐 이제 많이 들어본 이야기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다큐는 다시 묻는다. 여성폭력에 대해 알고 있냐고. 어찌 보면 그 ‘존재’를 알게 된 시점과, 자세하게 그 작동구조 속 이야기를 직면하게 되는 시점 사이에는 큰 지연이 있을지 모른다.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닐까.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지 않게도, 이 다큐는 어느 평범한 가정집의 창문과 대문, 바깥 벽을 주욱 따라간다. 다양한 나라의, 흔한 ‘가정’의 외벽이다. 거기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 다큐의 주인공들은 다양한 국가의 아내폭력 생존자들이다. 비슷하게 만나고 사귀고, 동거하고, 결혼한다. 그런데 왜 남편은 도청을 시작하고, 알코올을 담은 병에 불을 붙여 건네며, 강간하고 때리고, 길에서 총을 쏘는가? 그 알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생존하려는 투쟁을 시작하는 스페인, 인도, 미국, 핀란드의 그녀들.
전 세계 1/3의 여성들은 친밀한 관계에서 폭력을 경험한다. 한국에서는 두 집 중 한 집에 가정폭력이 있다. 많은 여성들이 기소와 재판 과정도 없이 가정이라는 감옥에 수감되고, 생사를 오가는 고문을 겪는다. 한국은 가정폭력방지법을 ‘가정보호’를 목적으로 운용하며, 이혼할 때 섣부른 선택이 될까 봐 숙려기간을 의무화하고, 가임기여성지도를 그려가며 결혼과 임신이 무조건 늘어나야 한다고 한다. 여성폭력의 현실에 대한 분석과 연구, 대책도 없이 그렇게 결혼하라고, 또 결혼을 유지하라고 강요한 이후를 책임질 수 있는가.
이 영화는 그녀들의 ‘반전’의 시점을 뚜렷하게 담아낸다. 죽으려고 가스밸브를 열어놓고 잠들려 하다가 그 집을 빠져나온 날, 알몸으로 무조건 내달린 날, 스포츠센터 가는 가방에 옷 두 벌만 넣고 나온 날. 거기엔 조력자가 있었다. ‘내 집’이라는 생각을 ‘그건 집이 아냐’로, ‘이게 어쩔 수 없는 내 삶’ 이라는 생각을 ‘그건 삶이 아냐’로 바꾸어 말하기, 그리고 그 말들을 듣기. 수잔 브라이슨은 『이야기 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에서 이런 사회적 타인과 자아의 관계를 말한다. “자아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진다. 자아는 타인의 폭력에 의해서 파괴될 수 있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다시 세워질 수도 있다.” 그녀들은 지지자, 상담자, 쉼터운동가, 다른 생존자와 합심하여 가정은 안온하다는 지식과 다른 새로운 지식을 만들고, 폭력 아빠의 아이방문권이 허락받는 여전한 사회 속에서 다른 ‘삶’을 꾸려간다.
그녀들의 지금 삶을 멋지게 담아내는 후반부. 직장을 다니고, 어렸을 적 꿈을 찾아가고, 끽연을 하고, 연애를 한다. 또 이제는 ‘어디에나’ 간다. 일하다가 머리를 비우러 가는 공원의 바위턱, 수영장에서 유유한 글라이딩, 푸른 들판을 가로지르는 고속철도. 열차창에 빗방울은 스쳐가고, 수영장 바닥엔 뿌연 물속 기억이 여전하지만. 그래도 “웅덩이를 벗어나니 세상이 내 것이다.”
오매 (한국성폭력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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