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여성’, ‘원숭이 같은 여성’으로 프릭쇼(기형인간 쇼)에 출연하고, 사후에도 100년 이상 방부 처리된 시신이 순회 전시된 ‘훌리아 파스트라나가’라는 여성이 있다. 이 여성을 해부학적으로 분해하고, 괴물로 묘사하며 사람들의 볼거리로 전시해 왔던 프릭쇼는 장애와 다른 몸에 대한 사회의 혐오와 차별, 문화적 타자화의 과정을 드러내주는 역사다.
이에 대해 로즈마리 갈런드 톰슨은 그의 책 『보통이 아닌 몸』에서 “심한 선천적 장애인들의 몸은 언제나 사람들이 자신들의 불안, 확신, 환상을 배출하는 아이콘 기능을 해 왔고, 기형인간과 놀라운 인간들은 사회가 이들보다 더 평범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인간성을 결여한 오로지 몸뿐인 존재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괴물(monster)’를 의미하는 라틴어 monstra는 원래 ‘표시’를 의미하였으며, ‘보여 주다’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demonstrate의 어원을 형성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제 프릭쇼는 사라졌다(고 한다). 그럼 전시장과 무대에서 구경거리가 되었던 장애인은 이제 그 무대에서 내려왔을까? 여전히 그들은 무대 위에 있지만 더 이상 ‘보여지는’ 존재가 아니다.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생산하고, 출연하며 관객에게 ‘보여주길’ 원하며 무대에 서고 영화에 등장한다. 그러나 여전히 기존 상업 작품들에선 극중 장애인 역할을 비장애인이 잠정적으로 ‘장애인이 되어’ 그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사회가 규정한 ‘장애’에 대한 편견은 그대로 반영되어 대부분 불행한 존재, 천사, 희화화의 대상, 천재, 범죄자 등 몇 가지 이미지로 재현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애인 당사자가 배우로서 서부극, 사극, 연애극, 모험극 등에 나타나 역동적인 삶의 주체로 나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프릭쇼는 진행 중이다. 결국 관객-사회가 장애인의 이야기를 보고,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가의 문제가 남는다. 이제, 몸이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그 이야기 속에서 서로 다른 ‘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새롭고 정치적인 이야기를 생산하고, 장애인의 몸이 접근하고 표현할 수 있는 연기양식과 무대연출 등을 재구성하는 장애인 예술가들의 노력은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다른 몸을 가진 사람은 여전히 낮은 위치로 여겨지고 그런 존재들은 쉽게 인권을 무시당한다. 구경거리가 되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이라는 관계는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회 제도 안팎을 넘나드는 투쟁은 유효하며, 무대 위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투쟁중이다. 기꺼이 자신의 몸으로 연기를 하기도 하고, 무대 장치의 일부로 오브제가 되기도 한다. 의사소통을 돕는 자막도 무대와 분리되어 ‘편의시설’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무대장치로 적극 활용한다. 또 비장애인다움을 단지 흉내 내지 않고 장애인/비장애인 역할을 넘나들며 장애인다운, 비장애인다운 몸과 이미지에 균열을 내기도 한다. 이러한 문화적 도전의 과정들은 무대 안팎의 세상과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실천이다.
진희 (장애여성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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