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해설: 기다림

인권해설

난민협약상의 이유로 고국을 떠났다면 그 자체로 난민이지만, 국경을 넘어 다른 국가에 정착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이다. 난민들은 자신이 난민인지 아닌지를 해당 국가로부터 확인받아야만 한다. 아프간에서, 시리아에서, 예멘에서 혹은 콩고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 세계가 다 안다 하더라도.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뿌리 뽑혀 나온 사람들에게 당국의 결정을 기다리는 시간은 아무리 짧다 한들, 불안으로 그 뿌리를 말려버리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이곳에 뿌리내릴 수 있을지 없을지 또는 뿌리를 내려도 될지 안 될지, 허가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그 누구도 내일을 꿈꾸지 못한다. 자신들의 나라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왜 자신이 그런 일을 겪고 떠나야 했는지를 물을 사이도 없이, 돌아가지도 머물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기다림 외의 다른 선택지는 없다.

한 해 1,600만 명이 난민이 되는 세상(유엔난민기구, Mid-year Trends 2016). 1992년 난민협약에 가입해 1994년부터 난민신청을 받기 시작한 한국에도 작년 한 해 7,542명의 난민신청자가 있었다. 이 중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98명뿐이다. 1.5%라는 인정률은 ‘난민’이라는 삶이 99%의 절망과 눈물, 그리고 불안으로 이루어짐을 숫자로 보여준다. 1%의 희망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가? OECD국가들의 평균 난민 인정률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이 숫자는 희망이 아닌 ‘가망 없음’의 또 다른 말이다.

첫 번째 불인정, 이의신청에 대한 불인정, 법원에서의 패소, 패소, 또 패소. 가망이 없다는 걸 이토록 여러 번 확인받아도 갈 곳이 없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월남 난민의 자녀인) 그는 자신의 뿌리를 잃어버렸고, 그의 조국은 사라졌다. 그의 부모님은 미국이라 불리는 새 조국에서 발음도 똑바로 못하는 바보였다. 그는 바깥세상에 홀로 직면해야 했다.

_후마타카 마츠오카, <침묵으로부터>

일어나서는 안 되었던 일들의 기억과 어디에도 발붙일 곳 없다는 불안 사이의 삶, 그 속에서도 아이들은 자라고 태어난다. 한국에서 태어난 난민들의 자녀들은 한국국적의 아이들과 다름없이 자란다. 부모들은 아이가 여기에서 한국어를 잘 배우고 다른 한국국적의 아이들처럼 평화 속에 자라기를 바라면서도, 언젠가 쫓겨나야 하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 모순 속에 산다. 학교에 다니며 부모보다 먼저 한국어를 배운 아이들은 금방 어른이 되고, 부모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아이들에게 세상은 불안과 거절, 서류와 도장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이 중 99%가 언젠가 가 본 적도 없는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통지를 받을 것이다.

영화가 상영되는 한두 시간 동안만이라도 이들의 숨막히는 절박함 속에 놓여 볼 수 있다면, 늘 숫자로만 보던 난민이 실은 나와 같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볼 수 있다면, 거기에서부터 무언가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이슬 (난민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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