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줄거리
나를 위한 장례식을 꿈꾼다. 가부장적이지 않은, 이성애 중심주의적이지 않은, 호모포비아가 준비하지 않는, 오직 나와 친구들을 위한 레즈비언 장례식을 꿈꾼다. 사랑하는 친구와 연인과 동반자가 편지를 쓰고 꽃을 건네는 우리를 위한 애도. 그렇게 나는 스물세살에 첫 번째 장례식을 준비하기로 했다.
프로그램 노트
레즈비언의 장례식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스스로 관을 짜고 조문객을 초대하는 ‘퀴어한’ 장례식을 말이다.
퀴어의 생애는 조용하면서도 격렬하다. 사랑하는 이들과 관계 맺으며 ‘나’를 정체화하고 나로서 삶을 살아간다. 그 삶은 가부장제와 이성애중심주의, 성별이분법에서 멀찍이 떨어져있다. 그리고 그 끝, 삶의 종착지에 다다랐을 때는 나의 죽음 앞에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 애도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존엄한 죽음과 온전한 애도의 권리. 이건 분명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당연한 권리일 것이다.
레즈비언의, 그리고 ‘정상’의 주변부로 밀려났거나 ‘정상’의 경계를 거부하는 모두의 장례식을 상상해 본다. 지금까지 경험해온 장례식은 고인의 삶을 이성애 규범으로, 가부장적 사고로 납작하게 만들어왔다. 장례의 공간에서 ‘여자’와 ‘남자’의 자리는 명확히 다르다. “법적 제도 안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 옆에 있을 지위와 권한”을 가진 남성이 상주가 된다. 내 삶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이들의 애도를 온전히 받을 수 없고, 이들은 나의 죽음을 온전히 슬퍼할 수 없다.
퀴어의 고유한 삶을 탈락시키고 애도의 권리마저 앗아가는 사회에서 <My First Funeral>이 기획하는 레즈비언 장례식은 퀴어/여성으로서 애도의 권리를 쟁취하는 퀴어페미니즘적 실험이다. 영화에서 ‘은혜’가 준비하는 레즈비언 장례식은 내가 나의 죽음을 애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내 삶이 기억되는 방식을 스스로 결정하고 친구와 동료, 가족이 온전하고 안전하고 애도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하는 나의 첫 번째 장례식. 마땅히 모든 이의 첫번째 장례식이 존엄할 수 있기를, 그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애도의 권리를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나기
감독
기록을 남기는 건 나의 생존 본능이다. 성소수자와 여성의 불편함은 그저 개인의 일로 소모되고 사라지도록 사회는 열심히 포장해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무도 소수자를 기억하지 않으려는 세상에서, 우리의 존재를 지워내려는 사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기록을 남기는 일이었다. 이상한(queer) 우리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어떤 문제에 부딪히며 생존하고 있는지 세상이 알아주었으면 한다.
2024년 겨울의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말
“살기 위해 존재를 숨겨야 했던 우리가, 이제는 살기 위해 광장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도 지켜야 할 것도 너무 많은 우리는, 서로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함께 모였습니다.
어젯밤, 저는 국회 앞에서 수많은 퀴어-페미니스트들과 마주했습니다. 아픔과 분노, 희망과 결의가 뒤섞인 공간. 바뀌지 않을 것만 같던 세상이, 거짓말 같은 현실이 우리를 외면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장으로 나온 우리는 서로를 보며 힘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 존재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지킬 때,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을 위해 목소리를 낼 때,
우리는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인권해설
장례식은 죽은 자를 애도하기 위한 자리이면서 남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자리이기도 하다. 떠나간 사람을 이야기하고 그리면서 충격과 슬픔을 달래는 시간이다. 하지만 성소수자의 장례식은 그러한 자리가 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법 제도들은 성소수자들이 죽음 이후에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어렵게 만든다. 장례 주관자는 혈족을 중심으로 순서가 정해져 있고, 유언을 통해 지정하더라도 강제력은 없다시피 하다. 생전에 존재가 지워지는 것에 고통받던 사람들은 애도의 자리에서조차 존재가 지워지기 일쑤고 ‘동료’들은 애도의 자리에 초대받지 못함으로써 애도의 권리를 박탈당하며, 떠난 사람은 원하지 않는 ‘이름’들로 불리며 애도 받지 못한다. 성소수자들이 죽음과 애도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일지도 모른다.
대안적인 장례식은 ‘대안’이기에 일반적인 틀을 벗어나기 마련이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햇살 비치는 창가에 자신이 만든 관을 놓고 누워서 애도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영화의 장면처럼. 성소수자가 배제당하는 일반적인 장례식과는 다른 모습들을 상상해 볼 수 있고 제대로 된 애도의 순간을 그려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저 ‘대안’일 수밖에 없기도 하다. 법 제도를 벗어나서 마련된 자리는 부족한 마음의 일부를 채워줄 수는 있지만 그야말로 완벽한 ‘대안’이 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틀이 여전히 견고하여 안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마련된 자리는 틀이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불편하기 마련이다. 이런 대안적인 장례식의 한계는 법 제도의 개선으로 이겨낼 수밖에 없다. 죽음 이전의 차별을 벗어나기 위한 차별금지법 등의 제정과 죽음 이후의 차별을 개선하기 위한 장사법 등의 개정 등의 변화를 위한 노력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지만 ‘정상가족’의 틀은 여전히 견고하다. ‘대안’들의 또 다른 효과라고 한다면 이런 ‘정상가족’의 견고함을 조금씩 흔들 수 있다는 것일 테고, 다양한 대안들의 등장과 법제도 개선의 노력이 함께 하면 작은 변화들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런 작은 변화들이 쌓여 소수자를 배제하지 않는 법 제도가 제대로 마련된, ‘대안’ 장례식이 아닌 그저 다양한 장례식을 통해 누구나 충분한 애도가 가능한 현실이 오기를 빌어본다.
시엘(언니네트워크 상근활동가)
퀴어단체도 페미니즘단체도 아닌 퀴어 페미니즘 단체에서 4년째 활동 중인 여전히 모르는 게 많아 배우고 있는 퀴어 페미니스트 활동가입니다. 책방꼴의 책방지기도 겸하고 있습니다.
*2023년 28회 인천인권영화제 프로그램에서 재수록하였습니다.
언니네트워크
언니네트워크는 2004년 11월 27일에 그 첫 불을 지핀 여성주의 문화운동 단체입니다. ‘언니’라는 단어는 여성들 사이에서 친근하고 편안하게 불리어지며 또한 자매애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언니네트워크는 ‘언니’와 ‘네트워크’의 합성어로, 여성들의 연대, 지지, 공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체의 지향을 담고 있습니다.
2024년 겨울을 함께 보내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