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에 남다 Half-Life in Fukushima

작품 줄거리

반감기(Half-life)는 방사성 물질이 가진 방사능이 원래의 절반이 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의미한다. 후쿠시마 지역의 방사능이 언제쯤 완전히 없어질지는 알기 어렵다. 그리고 그런 후쿠시마에는 나오토가 꾸린 삶의 터전이 있다. 그가 기도를 드리던 바다, 함께 살아오고 돌봐온 소와 고양이, 산책 가던 숲과 사람이 가득하던 거리. 나오토는 이 공간을 벗어나 지속되는 삶을 상상할 수 없었기에 후쿠시마에 남았다. 하지만 그가 남은 후쿠시마는, 이전과 다르다. 그의 집은 방사능 제거 작업의 대상이고, 그의 땅에서 나오는 농작물은 아무도 먹을 수 없다. 이웃은 다 떠나갔으며, 거리는 고요하고, 전철이 오가던 역사에는 수풀이 무성하다. 방사능과 함께 후쿠시마에는 나오토와, 그의 공간과 삶이 남았다. 하지만 그 무엇도 이전과 같지 않고, 같을 수도 없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유영

프로그램 노트

2011년 3월 11일 이후 후쿠시마는 이전과 전혀 다른 소리를 담게 되었다. 이제 후쿠시마에서는 ‘위험 안내 방송’이 일상의 소리이다. 안전하다던 원전은 후쿠시마를 전부 바꿔놓았다.
나오토는 규슈전력이 센다이 핵발전소를 재가동한다는 뉴스를 본다. 규슈전력은 이번에도 안전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안전은 누구의 삶을 담보로 한 안전일까. 우리의 전기는 누구의 위험 위에 서 있는 편리함일까. 또,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에 어떤 위험들을 감수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제 후쿠시마에서 위험한 것은 원전만이 아닌, 후쿠시마 그 자체가 되었다. 후쿠시마에서 나오는 쓰레기들은 위험물로 표시되어 처리되고, 후쿠시마의 버섯은 맨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후쿠시마를 알던 존재들은 이 공간이 위험한 곳이 되리라 상상한 적 없었다. 또한, 후쿠시마의 그 어떤 생명도 자신이 방호복을 입고 대해야 하는 존재가 될 줄 몰랐다. 나오토 또한, 자신의 삶이 위험을 감수한 대단한 삶이 되기를 바란 적 없었다.
나오토는 그곳에서 살아왔기에, 그곳에서의 삶을 이어나간다. 위험해진 후쿠시마에서, 위험하다고 평가받게 된 삶을, 나오토는 계속 살아간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감독

마크 올렉사 Mark Olexa, 프란체스카 스칼리시 Francesca Scalisi

프란체스카 스칼리시, 마크 올렉사

프란체스카 스칼리시는 1982년에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감독 겸 편집자이다. 마크 올렉사는 1984년에 스위스에서 태어난 감독이자 프로듀서다. 둘은 스위스에 기반을 두고 DOK MOBILE을 운영하고 있다. 2015년에 그들은 <Moriom>으로 각지의 영화제에서 최고의 단편영화상을 휩쓸었다. <후쿠시마에 남다>는 그들의 첫 번째 장편으로 일본 후쿠시마에서 촬영되었다.

인권해설

“후쿠시마 핵사고로 방출된 방사능으로 인해 죽은 사람은 없다.” 핵산업계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이 말은 사고 당시 다량 피폭당하고 급성방사선 장해로 죽은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맞다. 그러나 이 말에 인권 경시와 생명에 대한 상상력의 부족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사람들’은 자연, 동물, 다른 사람, 문화, 역사와 더불어 살고 있다. 즉 우리는 그들 속에 있어야 자긍심을 갖고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방사능이라는 침략자로 인해 고향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조잡한 임시주택에서 타향살이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것은 문화, 생태계, 역사 속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핵사고 관련사(関連死)”라는 말이 있다. 이는 핵사고로 피난한 사람들 중 피난 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인해 병 또는 자살로 죽는 경우를 가리킨다. 그 수는 2000명 이상에 이른다. 이 중 자살한 50대 여성의 예를 들어보자. 피난민은 신분증을 제시하면 강제 피난구역에 일시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 여성은 고향 생활이 그리운 나머지 일시귀가 중 고향 집의 마당에서 분신자살을 했다. 자살과 핵사고의 인과관계를 증명하기 위해 남편이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소는 고향에서 가족과 더불어 사는 공동생활과 지역사회와의 유대가 상실된 것이, 객관적 스트레스 평가 기준상 가장 높은 스트레스를 유발한 요인이라고 판단하고 도쿄전력에 배상을 명했다. 그러나 고향의 상실, 그 회복의 불가능성을 어떻게 배상할 수 있는가. ‘배상’이라는 개념으로 해결할 수 없는 가치가 있기 때문에 이 여성은 고향의 기억 속에서 목숨을 던졌을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의 정체성이 담긴 고향을 지키기 위해 외롭게 싸우는 남자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싸우는 상대는 방사능이다. 이길 가능성은 없다. 그는 황폐해져가는 고향에서 동물들에게 먹이를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도 자각하고 있다. “처음엔 모든 게 예전처럼 돌아가기를 바랐다. 지금 불가능하다고 본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의미가 없는 싸움을 왜 하고 있을까? 답은 없다. 방사능으로 오염된 땅에서도 마치 예전과 같은 것처럼 사는 것으로 자긍심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단, 우리는 이러한  행동으로부터 핵사고 이전에 그가 살아왔던 풍요로운 삶을 상상할 뿐이다.

그리고 잊어서는 안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이 방사능을 누가 방출한 것인가? 물론 도쿄전력, 그리고 그를 지원해 온 국가다. 자본과 국가가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피난시키고 이들에게서 고유의 문화와 생태계도 모두 빼앗았다. 그런데도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고 핵발전소 재가동을 도모하고 있다. 왜,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 경제성장과 물질적 가치에 몰두하여 삶의 의미를 잘 찾지 못해서 그런 것 아닐까. 인권 개념은 한 사람의 개체에만 한정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둘러싼 문화와 생태를 포함하는 총체로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화적, 생태적 가치를 모르는 도쿄전력과 국가가 주인공을 비롯한 피난민들의 심오한 고독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도시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도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우리는 피난민의 억울함을 얼마나 이해하고 느끼고 있는가? 이 주인공의 고고한 모습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성찰해야 할 것이다.

타카노 사토시 (경북대 대학원)

1322회 서울인권영화제삶의 공간: 지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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