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Itaewon

작품 줄거리

이태원은 언제부터 ‘이태원’이었을까. 그리고 언제까지 ‘이태원’일 수 있을까. 놀러 가는 곳이 아닌 살아가는 곳으로서의 이태원에서 수십 년의 삶을 보낸 여성들이 있다. 1970년대 미군 대상의 유흥업소들이 생겨나면서 형성된 ‘후커힐’ 거리에서 젊은 날을 살아온 삼숙, 나키, 영희. 이들의 현재는 각자의 과거만큼이나 모두 다르다. 오늘의 이태원도 예전과는 분명 다르다. 삶은 단절 없이 계속되건만, 지난날과 오늘날의 공간에는 간극이 생겨버렸다.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항하는 청년들의 움직임도 그 간극을 메우기에는, 이들의 삶에 닿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2003년 뉴타운으로 지정되어 재개발의 흥분으로 시끄럽던 것도 이들의 삶과는 멀다. 삼숙과 나키, 영희의 삶은 이제 이곳에서 어떻게 기억되고 어떻게 계속될까.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고운

프로그램 노트

언덕에 빽빽하게 들어찬 건물들은 제각기 다른 나이를 가진 듯하다. 오래된 간판과 집들 사이, 젊은이들이 가득한 이태원. 용산 미군기지에 인접한 기지촌에서부터 성장한 이태원은 어느새 그 시간들을 잘라내고 어색하게 새로운 가게를 접붙인 곳이 되었다. 그곳에서 살아왔고, 살아가는 여성들이 있다. 니키는 자식들 결혼할 때를 걱정해 한국 사람 없는 미군 클럽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다. 열아홉부터 이태원에서 놀았던 영희는 미군과 결혼도 했지만 1년만에 돌아왔다. 미군 전용 술집을 차렸던 삼숙은 미군 기지 이전으로 40년 된 자신의 가게를 접는다. ‘후커’, ‘술집여자’ 누군가 그녀들에게 붙일 이름. 삶에 굳은살이 박인 그녀들은 그저 태연히 사랑하고 미워하고 살아왔다. 그녀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이태원, 그 공간의 위치는 변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와 즐거이 인사하던 이웃들이, 해가 지자 그녀의 공간을 밝혀주던 간판들이, 쉼터를 만들어주던 나무들이 보이지 않던 때는. 그녀와 그녀의 집은 여전히 이태원을 지키고 있지만, 그녀의 주변은 여전하지 않다. 이따금 그녀들을 반기던 주변의 것들이 그리울 때, 그 그리움은 왜 너무나도 빠르게 변해간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되어야만 했을까.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감독

강유가람 Kangyu Garam

강유가람

<문화기획집단 영희야놀자> 창립을 함께하며, 여성국극을 다룬 장편 다큐멘터리 <왕자가 된 소녀들>의 조연출, 배급 프로듀서로 활동했다. 한국 사회의 가족주의와 부동산 문제를 다룬 중편 다큐멘터리 <모래>(2011)를 연출했고, 여성의 임신중절을 다룬 장편 다큐멘터리 <자, 이제 댄스타임>(2013)을 공동제작하고,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용산 미군 기지촌으로 성장한 이태원에서 살아온 여성들의 삶을 다룬 장편 다큐멘터리 <이태원>(2016)을 연출했다. 공간의 변화, 그리고 그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기록하는데 관심이 많다.

인권해설

이태원(梨泰院). 역사의 혼종성을 짐짓 모른 체하는 사람들에게는 이태원은 그저 배나무가 많은 마을일 뿐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이태원은 “혼혈아를 밴 마을(異胎院)”로 불리며 조롱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태원 근방에는 일본군 병참기지가 있었고, 임오군란 때는 청나라 군대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는 일본군이,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기지가, 해방 이후에는 미군기지가 자리했다. 군사 전략적 요충지라는 지리적 특성상 이태원 근방에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 오랜 시간 동안 해외 군대가 주둔했고, 이태원의 여자들은 해외 주둔군의 아이를 낳았다. 이태원은 대대로 식민지 주둔군, 외지인과 접촉하며 살아가는 낙인찍힌 여자들과 그 아이들의 땅이었다.

하지만 현재 이태원이 서울 어느 지역에서보다 이국적인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유행을 선도하는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외지인과 접촉한 여성들이 만들어낸 이물감과 이방성, 그리고 그것에 대한 냉대는, 글로벌 시대로 오자 이국성으로 번역되며 열광적으로 소비되고 있다. 이토록 화려한 이태원이지만, 이곳에는 여전히 천대받는 여성들이 남아 있다.

“창녀들의 언덕”이라 불리는 이태원 소방서 뒷길 ‘후커힐(hooker hill)’엔 외지인 남성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작은 클럽들이 줄지어 자리하고 있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양갈보”로 불리고 여성운동단체 사람들에게는 “기지촌 여성”으로 불리는 이 클럽 여성들은 오늘도 휴가 나온 미군들, 외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태원이란 이런 델까. 시끄럽고 정말 어지러워.

소방서 골목마다 서성대는 짙은 화장을 한 여자들은

길가는 남자마다 붙들고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_노래를 찾는 사람들, <이태원 이야기> 중

해방 이후 용산 지역에 미군이 주둔하게 되면서 용산 인근에 자리한 이태원은 기지촌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미군들의 유흥, 위락 지역으로 흔히 알려진 이태원이 미군과 맺는 대표적인 관계는 그들에게 위안(comfort)을 제공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여성들을 앞세워 미국으로부터의 자원, 물자, 권력에 접근하고자 했기 때문에 여성들이 이 지역을 떠나고자 할 때마다 “당신들이야말로 애국자”라며 여성들의 존재와 그녀들의 일을 상찬했다. 정서적으로 외지인에 대한 배타성과 열등감을 갖고 있던 한국사회였지만, 국제적 교류를 만들어내야 했던 시기마다 이태원의 여성들을 중요한 외교, 문화적 자원으로 동원했다.

이들은 발전주의 시대 한국사회에 ‘미국적인 것’들을 전달했고, 이들과 이들이 매개한 이국적인 문화는 한국사회 대중문화 번영의 중요한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박진영, 양현석, 현진영, 그리고 이 여성들이 함께 80년대, 90년대 이태원에서 흑인 음악과 춤을 즐겼다. 하지만 역사는 이 여성들을 지우는 방식으로 ‘한국적인 것’들을 구축해나갔다.

특히 2001년 9.11 이후 미군 본부는 테러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였고 이태원은 대표적인 감시의 표적 지역이 되었다. 그렇게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여성들은 이태원에서 최악의 ‘불경기’를 경험하고 있다. 이태원에 남은 여성들은 스스로를 ‘떠나지 못한 자들’로 정체화하고 있다. 미군들과의 결혼도 실패했고 외국으로의 이주도 실패했다고 자신의 삶을 설명한다. 힙스터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 오늘의 이태원은 여성들로 하여금 오히려 과거와의 단절, 불경기를 체감하도록 할 뿐이다. 이제는 나이가 많아 새롭게 이동할 지역이나 클럽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 이들은 모두 이태원이 ‘과거의 영광’을 다시 찾기를 기대하며 이 혹독한 빈곤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영광의 장면들은 언제나 빈민을 축출하고 누추한 모든 것들을 거두는 기획 속에서 연출되었다. 이태원이 ‘힙한 동네’로 이름을 날릴수록 이들 클럽 여성들과 그 장소의 흔적들은 눈엣가시처럼 취급될 것이다. 천대받는 여성들은 종종 “주민 보호”, “사회 보호”의 명목으로 추방되었다. 이전에는 “사회정화”라는 이름이었다면, 이제는 “뉴타운”,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의 삶은 또다시 압박받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외침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곳에 여성들도 살고 있다. 아니, 이태원은 곧 여성들의 노동이자 삶이다.

김주희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

1222회 서울인권영화제삶의 공간: 지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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