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이 있던 자리 The Free Market

작품 줄거리

네덜란드 로테르담 시에는 700년의 전통을 가진 시장이 있다. 많은 상인들이 그 시장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그런 시장에 도시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주상복합 ‘마켓홀’이 들어선다. 시의회는 시장과 주거시설이 합쳐진 마켓홀이 로테르담의 아이콘이 될 것이라 자부하는데, 상인들은 누구도 마켓홀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무원들은 시장의 규모가 축소될 것이니 마켓홀에 입점할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한다. 몇 년을 장사했어도 시청의 공문 한 장에 상인들은 점포의 소유권과 함께 존재할 권리를 빼앗긴다. 시의 부당한 요구에도 상인들에겐 점포를 지키는 것이 곧 생존이기에 쉽사리 연대하기 힘들다. 상인들은 각자의 복잡한 마음을 뒤로한 채 입점 추첨장에 모인다. 그렇게 마켓홀은 완공된다.

서울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 남선

프로그램 노트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근사한 현대식 재래시장 건물 ‘마켓홀’이 개장했다. 마켓홀은 지역 랜드마크로 떠올랐으며, 전통시장 우수개혁사례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 자리에 700년 된 시장이 있었다. 관광객은 발견할 수 없는 일상이 있었다.

삶의 공간이 변화하면 그 안의 일상도 변화한다. 수레를 끌고 나와 커피를 권하던 이가 있던 새벽, 열심히 한 주를 보내고 교회에 가던 일요일, 함께 일하던 여섯 명의 동료가 있던 일상은 마켓홀에 담기지 못했다. 원래 있던 일상이 변화된 공간에 담기기 위해서는 얼마나 긴 논의와 합의의 시간이 필요한가. 그럼에도 그것은 소중한 일이기에 우리는 그 시간을 함께 보내야만 한다. 그러나 정책결정자들은 마켓홀의 관광효과에 들떠있었고, 상인들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건립을 추진했다.

마켓홀이 완공되면 상인들은 생존이 걸린 결정을 해야 한다. 시시각각 그 시간은 가까워져 온다. 초조함을 안고서는 논의도, 연대도, 투쟁도 쉽지 않다. 마켓홀이 개장하고 상인들은 떠밀리듯 완전히 새로운 일상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커피 수레만이, 이곳에 결국 어울리지 못한 일상이 있었음을 보여주며 유령처럼 떠돈다. 마켓홀은 그렇게 ‘관광명소’가 되었다.

서울인권영화제 프로그램 팀

감독

마를렌 판데르버르프 Marleine van der Werf

마를렌 판데르버르프

마를렌 판데르버르프는 로테르담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영화 제작자이자 시각예술가이다. 판데르버르프는 2010년에 영화 공부를 끝마치고, <Limited>라는 작품을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최초로 상영했다. 그녀의 작업에서, 그녀는 상상력과 잠재의식의 세계를 탐구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세계를 느끼는 방식을 변화하게 만든다.

인권해설

용역들에게 끌려나온 두리반 식당으로 다시 들어가 농성을 시작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공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살을 파고들었다. 이 사회의 ‘폐인’이 됐다는 고립감과 부끄러움은 농성장 바깥으로 출입하는 것을 망설이게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생계의 압박 또한 강도를 더해갔다. 격절(激切)의 시간이 분명했다.

그 1년 6개월 동안 어둠의 공간에 웅크리고 앉아 수많은 기록영화를 보았다. 그건 하나의 역설이다. 뜻밖의 축복인가 싶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국가와 자본의 폭력을 고발하는 작품들이 주류를 이뤘으니까. 망할 놈의 내 처지에 쫓겨난 자들의 서러움까지 겹쳐지면서 번번이 눈물을 쏟았다. 폭력의 야만성에 치를 떨기도 다반사였다. <상계동 올림픽>, <용산>, <국가는 폭력이다>, <쫓겨나지 않는 사람들>, <대추리에 살다>, <용산 남일당 이야기> 같은 작품들은 7년이 지난 여태도 생생하다.

마를렌 판데르버르프 감독의 <시장이 있던 자리> 역시 그런 류의 작품일 거라고 지레 짐작했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7백 년 된 시장을 철거하고 마켓홀을 오픈하는 과정을 담았다니, 달리 어떤 짐작을 하겠는가. 예상했던 대로 영화의 도입부는 어두웠다. 지게차의 굉음이 먼저 흘러나왔다. 그러나 곧 눈발 흩날리는 시장이 펼쳐진다. 과일전에도, 어물전에도, 야채전에도, 병전에도, 드링크 수레를 끄는 노점상에게도, 장보는 이들에게도 눈이 내린다. 고르게 내린다. 감독은 왜 굳이 눈 내리는 시장을 보여주는 걸까? 그는 시장상인들의 입을 빌려 답한다. “시장은 새와 같아요. 자연이에요. 가둬두면 죽는 거예요.”

시장에 내리는 눈처럼 자연현상은 선별적이지 않다. 눈은 갑남을녀에게 고르게 내린다. 하지만 로테르담 시의회에서 추진하는 마켓홀 사업은 예외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시는 인간의 삶을 자본의 논리로 규정하고 있다. 시는 마켓홀이 로테르담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으면, 로테르담을 세계최고의 쇼핑도시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시장의 규모는 축소될 것이다”, “1백 명의 상인은 마켓홀에 입점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입점할지 말지 지금 당장 결정하라”, 시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사업을 강행한다.

대를 이어 장사를 해왔으면 뭐하나?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고, 죽은 남편으로부터 물려받은 삶의 둥지에서 쫓겨나면 나머지 생은 어쩌란 말이냐? 상인들은 쫓겨나는 1백 명에 내가 포함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우왕좌왕한다. 하물며 마켓홀이다. 시는 마켓홀에 입주할 상인들이 지켜야 할 지침에 대해서도 잊지 않는다. 일요일 영업은 필수다. 문 여는 시간과 문 닫는 시간 또한 일정해야 한다. 시장을 새와 같다고 비유한 상인들에게는 엎친 데 덮친 격이 아닐 수 없다. 설령 행운의 여신 덕에 마켓홀 입주가 결정될지라도 분명 새의 날개를 꺾는 지침이라는 얘기다.

두려움에 떨던 상인들은 하나둘 반발하기 시작한다. 대책을 논의하고, 거칠게 마켓홀 사업팀을 방문하기도 한다. 한국의 기록영화라면 이쯤에서 익숙한 폭력사태가 등장한다. 검은 유니폼을 입은 용역깡패들, 용역들을 보호하느라 도열해 있는 듯한 경찰들, 집게발을 앞세우고 가차 없이 철거를 강행하는 포클레인, <시장이 있던 자리>는 다행히 그런 것들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대신 쉽게 포기하고 쉽게 순응하는 장면으로 채워나간다.

덕분에 마켓홀은 별다른 저항 없이 오픈할 수 있게 된다. 낡은 드링크 수레만이 오픈한 마켓홀을 오감으로써 한때 자연으로서의 시장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건 무척 기묘한 역설을 담고 있다. 언뜻 드링크 수레를 포착함으로써 <시장이 있던 자리>는 낡은 것과 새 것의 대비, 정체하느냐 변화하느냐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시장이 있던 자리>는 삶의 둥지에서 쫓겨난 1백 명이 넘는 상인들의 뒷얘기는 보여주지 않는다. 마켓홀에서 삶의 둥지를 틀고자 몸부림치고 있는 낡은 드링크 수레를 보여줌으로써 둥지에서 영영 쫓겨난 이들의 고단함을 여운으로 남겨두고자 하는 것이다.

유채림 (소설가, 두리반 주인의 남편)

1222회 서울인권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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