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줄거리
중국의 전자기기 생산 공장은 멈추지 않고 돌아간다. 그곳엔 환풍기도, 창문도, 대화도 없지만, 그를 대신해 세계 최대의 생산력이 들어차 있다. 그 ‘자랑스러운’ 원동력은 가장 저렴한 재료인 발암물질, 그리고 가장 값싼 농민공. 노동자들이 오늘도 내일도 직업병으로 스러지지만, 공장은 쉼이 없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 이예팅과 활동가들은 자신과 같은 직업병 피해자들이 보상받을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준다. 그리고 하청업체에 잠입해 발암물질의 사용 흔적을, 원청 기업과의 연결고리를 찾아 나선다. 화학물질에 중독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노동자들은 또 다른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모으기 시작하고, 거리에 나가 벤젠 금지 캠페인을 벌인다. 그들은 쉼 없이, 각자의 방식으로 묻고 있다.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노동자들의 목숨값은 얼마인가.
프로그램 노트
반도체는 휴대폰, 노트북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전자기기들의 핵심부품이다. 반도체 공정에는 단 한 톨의 먼지도 허용되지 않는다. 방진복과 클린룸이 추구하는 강박적인 청결은 오직 제품만을 위한 것이다. 반도체 생산과정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유해화학물질들은 모든 반도체산업 노동자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반도체 세정액에 포함된 벤젠은 백혈병을 유발하는 발암물질이다. 노동자들은 동료들이 하나 둘 쓰러져도 계속 일해야 한다. 빈자리는 금세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진다.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고 도시로 온 젊은 농민공들은 도리어 생계를 위협할 정도의 돈을 병원비로 내야 한다.
벤젠 사용 중단에 드는 제품당 추가비용은 고작 1달러. 하지만 하루에 오천 번씩 맨손을 유독세정액에 담가야 하는 노동자들의 건강은 그 가치조차 인정되지 않는다. 직원들의 부(富)와 건강(康)을 약속하는 팍스콘(富士康)에서 수십 명의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가 발생했지만 책임지겠다는 사람은 없다. 팍스콘에 납품하는 하청업체도, 팍스콘의 최대 원청인 애플도 책임을 부인한다. 회사들은 시작도 끝도 없는 거대한 자본의 톱니가 되어 빈틈없이 돌아간다. 그 속에서 반도체 노동자들이 어렵게 받아낸 직업병 진단서는 갈 곳을 잃는다.
중국노동자단체는 홀로 아픔을 감당하던 반도체산업 산재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모은다. 피해자들은 서로와의 만남을 통해 스스로가 ‘직업병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애플, 삼성과 같은 기업들이 개인에게 퍼붓던 책임의 화살을 고용주에게로 돌린다. 그리고 더 이상의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함께 벤젠 금지를 외치며 견고하게 맞물려 돌아가던 톱니에 빈틈을 만든다.
그러한 외침 속에서도 팍스콘 공장에서는 여전히 벤젠 냄새가 난다. 농민공들의 손에도, 아이폰과 갤럭시를 사용하는 우리의 손에도 같은 벤젠이 묻어 있다.
감독
헤더 화이트, 린 장
헤더 화이트는 비영리단체인 베리테(Verité)의 창립자이다. 20년 동안 국제적 공급망(global supply chain)과 사회적 책임 관련 주제에 대해 연구했다. 린장은 뉴욕대학교에서 저널리즘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베이징에 거주하며 뉴욕타임즈에서 프리랜서 비디오 프로듀서로 일한다. <반도 체 하나의 목숨값을 구하라>는 두 감독의 첫 다큐멘터리다.
인권해설
“그땐 제가 죽는 줄 알았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눈물 나고…. 그래요.”
만 스물두 살도 되지 않은 유미 씨가 흐릿한 동영상 속에서 울먹였다. 그녀는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제품을 세정하다가 백혈병에 걸려 숨졌다.
“나를 봐요. 이게 뭐예요. 이러면 안 되지요. 삼성은 나한테 사과해야 해요.”
휠체어에 앉은 혜경 씨가 오열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삼성 반도체에 입사하여 LCD 회로기판을 6년 동안 만들었다. 월경이 없어지고 몸이 아파 퇴사한 뒤 뇌종양을 진단받고, 종양 제거 수술의 후유증으로 시각, 보행, 언어 1급 장애인이 되어 10년째 투병하고 있다.
“처음 진단받을 때 의사가 5년을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런데 자꾸 욕심이 생겨요. 10년만 더 아이들 곁에서 살고 싶어요.”
혜정 씨는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퇴사 후 전신성 경화증을 진단받았다. 손끝부터 시작해서 온몸이 서서히 굳어가다, 결국 모든 장기들이 굳어서 사망에 이르는 희귀질환이다. 발병 초 만났던 그녀는 밝고 씩씩했지만, 한 해 두 해 몸이 굳어가면서 슬픔과 두려움을 토로했다. 어린 자녀의 곁에 조금 더 있고 싶다던 그녀는, 마흔 살 추석 때 숨을 거두었다.
이 영화 <반도체 하나의 목숨값을 구하라>에는 노말헥산에 중독되어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된 여성 노동자들이 나온다. 2005년 경기도 모 LCD 공장에서 일하던 태국 이주여성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노말헥산에 중독되었던 일을 자연스럽게 상기시킨다. 선진국에서는 사용이 금지된 벤젠이 개발도상국에서는 버젓이 사용된다. 유럽에서 석면 사용을 금지하자 석면 산업은 한국으로 공장을 옮겼고, 한국에서 석면을 금지하자 인도네시아로 공장을 옮긴 것처럼, 전자산업도 유해물질과 직업병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국가를 찾아서 자리를 옮겨왔다. 전자산업 중에서도 가장 첨단이라 부르는 반도체 산업 역시 이런 궤적을 똑같이 그려왔다.
1980년대 초, 전자산업의 요람이라 불리던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 밸리 지역에 대규모 지하수 오염 사건이 알려졌다. 페어차일드 반도체 공장 저장 탱크에서 트리클로로에틸렌이 새어 나온 것이다. 오염된 지하수를 마시던 지역 주민들의 아이들은 선천성 기형을 안고 태어났다.
1985년 미국 IBM 공장에서 제품을 개발하던 연구원이 사장에게 편지를 썼다. 동료 12명 중 5명째 암 환자가 나타나자, 제품 생산에 사용하는 화학물질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어 대책을 요구하는 편지였다. 회사는 묵살했다. 이후 5명이 더 암에 걸렸다.
1990년대 필리핀의 반도체 공장 노동조합들이 펴낸 안전보건 소책자에는 23세에 재생불량성빈혈로 숨진 여성 노동자의 사례가 담겨있었다. 혹 그녀의 죽음이 반도체 공장에서 다룬 수백 종의 화학물질 때문은 아닐까 하는 질문과 함께.
그 질문에 아무도 답하지 않은 세월이 20년 가까이 흐른 뒤, 한국에서 황유미 씨를 비롯한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백혈병, 재생불량성빈혈, 림프종, 뇌종양, 유방암, 다발성 경화증 등이 알려졌다. 병든 노동자와 가족들은 휠체어를 끌고, 혹은 자식이나 배우자의 영정을 품에 안고 수없이 거리에 나섰다. 정부가 이들의 질병을 산업재해로 인정하지 않고, 삼성은 작업환경이 안전하다고 주장하고, 주류 언론은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굳게 침묵하던 몇 년을 버텨냈다.
이 투쟁의 성과로 수백 명의 다른 피해자들이 확인되었고, 이들은 하나둘씩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작업환경의 유해성이 조금씩이나마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드러난 문제들이 해결되기까지는 아직도 먼 길이 남아있다. 여전히 노동자들의 산업재해 인정은 오랜 노력과 시간이 걸린다. 삼성은 공장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은커녕, 그 중 극히 일부 물질을 모니터링하여 정부에 보고하게 되어 있는 작업환경측정보고서조차 공개하지 않기 위하여 정부를 상대로 소송까지 불사하고 있다.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하여 개시되었던 삼성과 반올림 사이의 사회적 대화는 삼성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중단되었고, 그 재개를 요구하는 반올림의 노숙농성은 어느새 1천일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한국에서 여전히 많은 숙제들을 남겨둔 사이에, 삼성을 비롯하여 세계 굴지의 반도체 생산업체들은 중국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투자를 진행해왔다. 완제품 조립 공장들은 중국보다 더 인건비가 싼 베트남 등지로 옮겨갔다.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전자제품 수요를 고려한다면 그곳에서 병들고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수는 몇천, 몇만 명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산업재해임을 인정받고 원인을 규명하고 기업의 책임을 묻기 위하여 다시 원점부터 시작하여 싸워야 할지 모른다. 전 세계 삼성 휴대폰의 절반을 생산하고 있는 베트남에서, 삼성 노동자 45명의 인터뷰를 담은 보고서가 끝내 삼성의 압력으로 발간되지 못한 최근의 상황으로 미루어보면, 이들의 싸움은 원점이 아니라 마이너스에서 시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 황유미 씨의 생전 인터뷰 영상을 다시 틀어본다. 바짝 야윈 목, 바닥을 짚어 겨우 몸을 지탱하고 앉은 모습만 보여주던 카메라 앵글 속으로 딱 한 번 그녀의 얼굴이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짧은 순간 카메라를 응시하던 그녀의 검은 두 눈에 담긴 건 슬픔이었을까 공포였을까 아니면 원망이었을까. 우리가 침묵한다면, 우리가 연대하지 않는다면, 또 얼마나 많은 황유미가 슬픔과 공포와 원망 속에 죽어가게 될까.
공유정옥(직업환경의학 전문의, 반올림)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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