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의 사계절 The Whispering Trees

작품 줄거리

선선한 바람이 부는 산속에서 고사리를 캔다. 흙 묻은 낡은 호미가 걸려있고 반달 모양의 장작은 이리저리 포개져 있다. 나물을 다듬는 작은 손은 주름이 자글하다. 밀양에 사는 90세 김말해의 삶은 한국의 비극적인 현대사와 함께했다.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이른 나이에 결혼했지만 남편은 보도연맹 사건으로 끌려갔다. 첫째 아들은 베트남전 참전으로 허리를 다치고, 둘째 아들과 며느리는 먼저 세상을 떠났다. 삶의 끈을 놓지 않은 말해의 일상에 이젠 765kv의 대규모 송전탑 건설이 침투한다. 나른하게 담배를 피우고, 벌러덩 누워 낮잠을 자던 그 밀양을 잃지 않기 위해 말해는 집을 나선다. ‘765kvOUT’이 적힌 조끼를 입고 경찰을 꼿꼿이 마주하며 김말해는 그렇게 다시 저항과 투쟁의 불씨를 지핀다.

프로그램 노트

삶은 세상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어떤 사건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에게 다가와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는다. 밀양시 상동면 도곡리에는 아흔이 다 된 할머니, 김말해가 살고 있다. 말해는 한국의 비극적인 역사를 고스란히 살아냈다. 그 삶은 온전히 말해의 것이지만, 말해의 기억엔 우리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내 하루하루 살아온 것을 일기로 써 모으면 누가 봐도 안 알겠나.” 아궁이 앞에 앉아서 타는 장작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TV 소리만 가득한 방안에 누워 마음속 응어리로 남아있는 기억을 말한다.

축 늘어진 살에 붙은 파스처럼 질긴 삶이다. “뭐 하다 이리 됐노?” 말해는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가지 않는다는 말에 일찍 결혼을 해치웠다. 그러나 겨우 스물세 살 먹었던 해, 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되어 집을 나선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고, 아들은 ‘빨갱이의 자식’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월남전에 참전했다. 학살의 역사는 여러 모양으로 변주되어 또다시 말해의 일상을 헤집어 놓는다. 그 역사를 살아낸 기억은 말해를 투쟁의 현장으로 이끈다.

고사리 파먹고, 손톱 발톱 갈라지도록 일해서 일궈놓은 밭, 그 위로 765kV 대규모 송전탑이 들어섰다. 집 앞 풍경이 변해간다. 옛날 호롱불 켜면서도 살았던 골짜기를 기억하며 말해는 추운 겨울 피켓을 들고 한전 앞에 선다.

이 투쟁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내내 치열하게 살아왔던 기억, 그 삶이 바로 투쟁이었다. 말해의 기억을 들음으로 우리는 그가 수없이 지나왔을 사계절을, 긴 세월을 천천히 따라간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이미 그 자체로 역사가 되어버린 ‘삶’을 만난다.

감독

허철녕 HEO Chul-nyung

허철녕

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과 졸업, 동 대학원에서 다큐멘터리를 전공한 허철녕은 2010년 단편 다큐멘터리 <명소> 공동연출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했다. 2009년 용산 재개발에 감춰진 한 가족의 욕망을 섬세하게 그려냈던 첫 장편 다큐멘터리 <옥화의 집>은 2012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 두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 <말해의 사계절>은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경쟁, 서울독립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

인권해설

그녀의 오래된 이야기에서 듣다, 국가폭력

밀양에서 송전탑 논의가 시작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참 오래된 이야기다. 정부가 환경영향평가보고서 주민설명회를 개최하고 나서야 주민들은 고압송전탑이 세워지는 걸 알 수 있었다. 765kV라는 엄청난 고압 전류가 흐르는 송전탑이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세워지면 농사만이 아니라 주민들의 건강도 장담하기 어려워지는 일이건만 주민들의 동의 없이 진행됐다. 고압송전탑의 배경은 원자력발전이다. 신고리 원전을 6기에서 8기로 증설해 돈을 벌겠다는 한국전력의 탐욕을 기반으로 한 국가정책이 수립됐다. 위험한 에너지를 만들어 쉽게 펑펑 쓰게 해 전력회사가 돈을 버는 정책이다. 원전 그 자체도 위험할 뿐 아니라 그 원전이 만든 고압 전류를 영남지역으로 송전하는 동안 그 구간에 있는 생명들은 아프거나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밀양 주민들은 한국전력 직원들과 그들을 비호하는 경찰들과 매일 매일 싸웠다. 그러나 영화 속 인물의 말처럼, 4․3이나 제주 해군기지 건설처럼 국가에서 하는 일을 막기는 어려웠다. 2014년 9월 공식적으로 송전탑이 마을에 세워졌다. 끔찍한 철탑 손들이 산이며 밭이며 곳곳에 박혔다. <말해의 사계절>은 그 싸움을 함께 한 말해할머니를 기록한 영화다.

“아무도 내 삶은 못 알아주지.”

아흔이 다 된 말해 할머니가 글을 모르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내뱉는 말. 머릿속에도 선명한 아픔의 기억들을 일기로 써냈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 싶다. 담배 연기 사이로 먼 산을 보며 이야기를 꺼내는 말해의 입, 손, 표정에 주목하며 영화는 전개된다. 때로는 고목의 까칠까칠한 표피 같은 주름을, 때로는 아침에 곱게 단장한 머리를, 때로는 지팡이에 의지해 마을 산을 오르는 것을 기록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그녀의 삶이 곧 한국사라는 것을 관객은 금세 깨닫는다.

일본 제국주의가 위안부를 만들어 여성들을 성노예로 만들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렇게 일찍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며, 전쟁과 보도연맹이라는 민간인 학살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혼자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난한 여성이 혼자 아이들을 키우는 삶이 힘겨워 아들 둘과 함께 물에 빠져 죽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먹고사는 일에 지쳐 고단할 때면 아이들에게 “느그 아버지 찾아가라”며 욕을 하고 때리기도 했다. 아들에게 상처가 됐을 것을 알기에 그녀는 베갯잇을 적시며 후회한다.

그렇게 그녀의 삶에 새겨진 국가폭력은 자식에게도 이어졌다. 사상범 색출이라는 빨갱이 낙인이 없었다면, 큰아들은 월남전(베트남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한국이 베트남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큰아들이 아버지가 죄가 있나 없나 따져보는 방법으로 참전을 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쟁에서 허리를 다치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가정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농촌 여성에게 떼어낼 수 없는 현실이었다.

무지렁이가 아닌 투쟁의 주인인 말해

70년이나 지났지만 아픔의 기억은 생생하다. 말해 할머니의 삶에 한국사의 흔적이, 국가폭력이 굳은살이 되지 않은 상처로 남아있는 건, 아직도 송전탑 건설 같은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시골마을주민의 삶을 짓밟기 때문이다. 아물래야 아물 수 없다. 오래된 이야기 속 국가폭력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녀는 그 엄청난 국가폭력 속에서도 담배에 의지하며 속을 달래고 달래 여기까지 왔다.

말해 할머니처럼 폭력의 상흔은 돈으로, 깨뜨려놓은 땅으로 환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망가진 삶은 한 세대로 끝나지 않고 이어지기까지 했다. 저수지에 자식과 함께 몸을 처박으려 했던 그 아픔이 어떻게 숫자로 환산될 수 있겠는가. 공식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구체적인 민중의 삶을 기록하려는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삶을 파괴하는 폭력과, 그럼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을 기록하는 이유는 그/녀들과 함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다. 그/녀들의 기억이 우리 모두의 기억이 돼야 한다.

우리는 깨닫는다. 그녀가 정규교육을 못 받았다고 무지렁이(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가 아니라는 것을. 한전이 주는 돈 몇십만 원, 몇백만 원에 자신이 일궈온 땅을 내놓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녀에게서 송전탑이 세워졌어도 포기할 줄 모르는 삶의 태도를, 저항하는 이유를 배운다. 기록의 힘이다.

기록하다의 다른 말

영화를 보며 한 권의 책, 한 편의 영화로 담지 못한 삶의 무게를 느낀다. 필자는 2014년 <밀양을 살다>(오월의 봄)라는 책으로 밀양 할매들의 삶을 기록하는 데 참여한 경험이 있다. 다시 할매들을 영상기록으로 보니 그녀들이 그리워진다. 글로 담아낼 수 없었던, 담아내기 어려웠던 표정과 느린 동작과 철탑을 보는 눈빛. 속을 뒤집어놓는 철탑까지. 영상기록의 힘을 새삼 느낀다. 무엇보다 <말해의 사계절>에 담긴 할매의 평범한 일상은 관객(독자)과의 거리감을 좁힌다. 고사리 따고 감 다듬고 경찰에 항의하고 반복되는 그녀의 평범한 일상의 기록.

영화를 보며 우리는 기록하다의 다른 뜻은 ‘듣다’ 임을 깨닫는다. 사회적 기록은 사회적 듣기와 만날 때 의미를 오롯이 획득하는 것이므로.

명숙(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활동가)

1823회 서울인권영화제기억과 만나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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