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헌트 Red-Hunt

작품 줄거리

70년 전 제주도에선 ‘빨갱이 사냥’이라 불리는 학살이 벌어졌다. 다랑쉬굴에서, 정방폭포에서, 북촌 옴팡밭에서. 6년이 넘도록 생존자들의 눈앞에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삶이 아스러졌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기준은 없었다. 그 뒤에는 제주도를 둘러싸고 뒤엉켜있는 지독한 이념적, 정치적 명령과 전략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한동안 학살의 생존자들은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학살이 일어난 지 49년이 지나서야 <레드헌트>의 생존자들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 사라질 수 없는 기억을 증언한다. 이 증언들 안에는 분명히 사람과 삶이 존재한다.

프로그램 노트

기억의 발자취를 남기고 기록을 상영했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탄압받아야만 했다. <레드헌트>를 상영했던 1997년이 그러하다. 제주4.3을 다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화는 한순간에 이적표현물이 되었고, 국가는 경찰을 앞세워 영화제 기자재를 압수하는 등 상영장을 봉쇄했다. 당시 집행위원장은 구속되었고 인권운동사랑방은 압수수색 당했다. 이처럼 어떤 기억들은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진술하는 것만으로도 지난한 방해에 시달린다.
소리를 내도 괜찮을까, 저 눈빛들이 날 감시하는 것은 아닐까, 어느 순간 날 또 죽이지 않을까. 명치 언저리에 자리 잡은 불안은 70년이라는 세월 동안 봇물 터지듯 나올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조용한 세상 그 아래에 갇혀 있었다.
지금도 제주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섞여 살고 있다. 감시와 방해를 부단히 받아온 사람들은 살기 위해 입을 틀어막아야 했음에도 말 한마디 못한 것이 한스럽다 한다. 용기를 내어도 이 영상을 누가 볼까 두렵고 자식이 부끄러워할까 목소리로만 증언한다. 이들에게 제주4.3은 지나간 과거가 아닌 현재다.
제주는 다랑쉬굴에 있던 많은 이들의 자취를 시멘트로 덮어 끊어버리고, 눈물과 피로 물들었던 정방폭포를 관광지로 만들었다. 제주4.3을 묻고 지내온 날들이 쌓인 오늘의 제주에서는, 4.3 추념식에 참석한 대통령이 국가가 벌인 학살에 대한 사과와 책임을 인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제주4.3의 완벽한 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완성이 아닌 터져 나오는 봇물의 시작을 향해, 우린 광장에서 제주4.3을 이야기한다. 그 어느 곳에서도 담지 못했던, 70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감춰진 이야기들과 광장에 서기 위해.

감독

조성봉

부산에서 40년을 바다바람과 살다 홀연 지리산 구례로 들어가 산바람과 8년을 또 살았다. 문득 깨어보니 한라산과 푸른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제주에서 폴짝거리며 살고 있다. 어디였던 늘 바람은 불었지만 지금 여기, 강정의 바람은 피바람이다.

인권해설

제주4·3 – 지금 여기 현재진행형인 역사

여전한 망설임, 생생하게 새로 솟는 눈물, 생의 마지막 무렵에도 잘 떨쳐지지 않는 두려움과 원통함. 4·3 생존자분들을 뵈면서 헤아려본 70년이란 시간은 그렇게 읽혔습니다. 아득히 짐작만 해보는 깊고 아픈 시간. 이곳 제주에서 7년 7개월 동안 일어났던 그 사건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이합니다.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제주4·3’입니다.

아득히 짐작만 해보는 깊고 아픈 시간 70년

제주4·3은 7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민중항쟁, 무장봉기, 학살 등 여러 성격의 사건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한 가지 이름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70주년을 맞으며 적합한 명칭을 붙이는 ‘정명’ 작업을 더는 미루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당시 전체 제주도민의 10분의 1인 3만여 명이 학살되는 너무나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 발발의 성격과 7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민중의 참여와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민중항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제주4·3은 최초의 분단반대운동이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온전한 정명은 한반도 통일 이후에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름 붙이지 못한 세월
70여 년 전 일제가 패망하고 독립이 됐지만, 또 다른 강대국들에 의해 국운이 오가고 미 군정은 친일 인사들까지 재등용하는 등 대다수 민중이 바라던 해방의 모습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미 군정의 잘못된 미곡(쌀) 수집정책으로 혼란은 가중되고 수탈은 계속되었습니다. 3·1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들을 중심으로 한 주민자치로 혼란한 시기를 극복하여 진정한 해방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제주 민중에게, 미 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육지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극우단체를 제주로 파견해 극심하게 탄압했고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먼저 깨어나는 남도

이에 항의하며 1948년 4월 3일 무장대의 봉기가 일어났고, 탄압을 멈출 것과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아닌 온전히 통일된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외치며 단독선거를 막았습니다. 그러자 미 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군대를 대거 파견해, 3만여 명의 제주 주민들을 죽이고 온 섬을 초토화하는 대학살의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숱한 죽음에 더해 여성들에게는 성폭력까지 가해지면서 제주 여성들은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고, 이후에도 그 피해를 고발하거나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애도조차 숨죽여 해야 했던 기나긴 세월 제주 온 섬에 스민 트라우마는 “속솜허라”(속마음을 말하지 마라)는 말로 남아있습니다.
제주의 첫 관문인 제주국제공항 터를 비롯해, 유명한 관광지 등 제주의 수많은 곳이 학살과 비극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피울음의 역사, 그 모두가 제주의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피울음의 역사, 그 모두가 제주의 모습
70주년을 맞은 지금도 이 사건이 끝난 역사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4·3으로 인한 고통과 트라우마는 생존자와 유족에게 지속되고 있고, 희생자를 선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극우단체에 의해 갈등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시에 외쳤던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 반대”, “온전한 통일독립”, “공권력의 탄압 중단”과 같은 구호들은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과제이고 지금도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과도한 국방비 지출과 같은 분단비용 부담, 온전하지 못한 사상•표현의 자유는 실제로 현재 우리 삶의 질을 저해하는데도 이런 일이 만성화되어서 우리는 잘 체감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지금 여기 현재진행형인 제주4·3

4·3 70주년을 맞는 지금은 마침 남북 정상회담이 활발하게 진행되며 며칠이 멀다 하고 놀라운 뉴스들을 접하는 때이기도 합니다. 민중항쟁이자 최초의 반분단운동이었던 제주4·3은 재조명되고 제대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또 국가폭력이 일어나는 국책사업의 현장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4·3과 같은 참극이 벌어지고 있는 시리아, 버마의 로힝쟈 학살 등에 눈감는 것은 곧 4·3을 잊는 것과도 같습니다.

70주년인 지금도 늦었지만, 미국 정부는 미 군정기에 시작된 4·3에 가해진 탄압과 학살에 대해서 사죄해야 합니다. 그리고 4·3특별법 역시 더 늦기 전에 개정되어서 생존희생자분들에 대한 배상과 명예회복이 이뤄져야 합니다.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 보면 살아진다)는 생각으로 모진 세월을 살아온 생존희생자, 유족들과 함께 많은 분들이 연대하고 기억해주시기를 청합니다.

강은주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홍보팀장, 제주다크투어 공동대표)

2223회 서울인권영화제제주 4.3 70주년 특별전

리뷰

영화를 함께 보는 사람과 나누고 싶은 말을 남겨주세요.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도 좋습니다.

리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