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마리아2 Red Maria2

작품 줄거리

<레드마리아2>는 낙인에 도전하는 영화다. 이 영화가 불편하게 여겨졌다면, 그것은 이 영화가 우리가 가진 검열들에게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한국의 성노동자이면서 성노동자의 인권실태를 조사하는 ‘연희’는, 소위 창녀와 성녀의 이분법 아래에서는 감히 드러날 수 없었던 성노동자 여성들에 대한 기록을 시작한다.

자발적이어서, 혹은 성매매를 하던 여성이어서 침묵을 강요받아온 건 성노동자들만이 아니다. ‘군위안부’를 이야기함에 있어 어떤 여성들만이 기록되어 왔는지 카메라는 끊임없이 틈새를 파고든다. 이때까지 기록되어왔던 ‘순결한’, ‘비자발적인’ ‘소녀’였던 군위안부라는 기억들 틈새에, ‘성매매 여성’이었던, ‘일본인’이었던, ‘나이가 많았던’ 위안부 여성들이 있다. <레드마리아2>는 다른 기억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다른 기록을 만난다. 성노동자 인권실태 조사를 위해 일본으로 떠나는 연희, 위안부 담론에서의 내셔널리즘에 대해 강의하는 야마시타 영애, 일본에서 살다간 한국인 군위안부 배봉기 할머니를 기록한 작가 가와다 후미코. <레드마리아2>는 기록들의 틈새에 선 다른 여성들의 목소리를 조금씩 내비치고 있다.

서울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 다희

감독

경순

경순

1999년 첫 장편 <민들레(1999)>로 부산국제영화제 운파상을 비롯해 그해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며 주목을 받았고, 2001년 제작한<애국자게임>은 새로운 다큐멘터리 형식과 함께 인터넷 상영이라는 획기적인 방식으로 많은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이후 대통령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을 기록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2003), 가족주의를 유쾌하게 비판한 <쇼킹패밀리>(2006), 여성의 몸과 노동을 새롭게 질문하는 <레드마리아>(2011)를 만들었고, <레드마리아2>(2015)는 여성의 몸과 낙인에 대한 키워드를 통해 삶에 대한 깊이 있는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인권해설

<‘강제’와 ‘자발’에 가려진 여성들의 목소리를 마주하기 위하여>

지난 해 12월 이루어진 한일 ‘위안부’ 협상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완전히 무시한 채 양국 정부의 이해관계에 따라 ‘위안부’ 문제를 외교 카드로 이용해버린 최악의 협상이었다. 심지어 ‘불가역적’이라는 확인까지 붙은 이 협상문은, 한국뿐 아니라 수많은 나라의 여성들을 군수 물자처럼 동원했던 일본 당국의 전쟁범죄 책임을 단 몇 줄의 문장들 속에 뭉개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특히 이 과정에서 소녀상 이전 문제가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협상문에서는 “공관의 안녕을 우려하는 점에서”라고 표현되었지만, 핵심은 소녀상이 일본 정부의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을 상기시키는 상징물이라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협상문에서 ‘불가역적 해결’을 강조하는 동시에 소녀상 이전을 굳이 언급했다는 사실은 그래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간 일본 정부는 이 ‘강제로 동원된 소녀’의 이미지를 어떻게든 희석시키려 했다. 그리고 마치 그 사실만을 지우면 당시의 끔찍한 폭력에 대한 역사적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듯한 태도를 취해 왔다. 한편 그럴수록 한국에서는 그러한 ‘강제 동원’과 끔찍한 폭력을 증명하고 강조하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한 상징적 과제가 되어 왔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영화에서 ‘위안부’ 실상의 중요한 증언자였으나, 위에 언급된 바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지닌 두 명의 여성을 만나게 된다. 일본인 ‘위안부’였던 ‘시로타 스즈코’, 그리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배봉기.’ 두 사람은 ‘강제로 끌려간’ ‘소녀’가 아니었다. 그러나 ‘위안부’ 역사의 또 다른 피해 당사자로서 생생하게 당시의 실상과 폭력을 증언했다.

영화는 묻는다. 시로타 스즈코 씨와 같은 일본인 ‘위안부’ 여성들, 유곽에서 동원되어 온 매춘 여성 ‘위안부’들의 경험은 과연 무엇이라고 이야기 되어야 하는가. 한일 양국에서 반복적으로 ‘강제로 끌려간 소녀’들과 ‘매춘부’를 구분지어 온 과정을 통해 결국 면죄부를 얻어온 것은 과연 어떤 이들인가. 해방 후에도 차마 고향에 돌아올 수 없었거나, 고향에 돌아와서도 평생 낙인 속에 살아야했던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경험은 과연 매춘에 대한 낙인과는 별개의 문제일까.

아내 혹은 순결한 여자와 매춘부, 즉 성녀와 창녀를 가르는 이중규범은 군사주의와 제국주의, 민족주의를 교차하며 전쟁과 외교에 효과적인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또한 이는 여성을 통제하는 강력한 도구로 작동해 왔다. ‘위안부’의 역사가 단지 ‘일제 폭력의 증언’과 ‘민족의 역사’로만 호명되어야 할 때, 정작 그 끔찍한 폭력을 가능하게 한 이 본질적인 구조는 가려진다. 그리고 전쟁과 가난의 틈바구니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강요된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야 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다양한 경험과 연대의 역사 또한 구체성을 잃고 삭제되어 간다.

영화는 그 진실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성노동자들의 삶과 교차시키면서 보여준다. 매춘부였다는 이유로 위안소의 폭력을 증언할 수 없었던 수많은 또 다른 ‘위안부’ 여성들처럼, 성노동을 하고 있는 여성들은 자신들이 삶을 이어가고 있는 그 현장을 떠나지 않으면 자신의 노동 조건과 폭력의 경험을 드러내기가 어렵다.

성노동자에 대한 성폭력은 마치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인 양 이해되고, 해외에서 성노동을 하는 여성들은 ‘나라 망신시키는 년’ 취급을 당한다. 법이 낙인을 강화하고, 다시 낙인이 폭력을 재생산하는 현실에서, 안전한 노동을 위해 필요한 콘돔은 단속의 증거물이 되어 도리어 이들의 안전을 위협한다. 하지만 이제 성노동자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노하우를 직접 계발하고 공유하며, 자신의 삶과 노동에 대한 주체적인 목소리를 모아가기 위해 연대의 움직임들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남성 가부장 또는 국가와 민족에 ‘소속된 대상’으로서 남아있을 때만 ‘보호받을 수 있는’ 자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관리·통제되어 왔다. 그러면서 그 경계와 규범을 벗어난 이들에게는 낙인과 폭력이 당연시되고 만다. 그리고 이 극단적인 남성중심의 이분법은 여전히 여성에 대한 이중의 폭력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남아있다. ‘강제’와 ‘자발’의 프레임이 은폐하고 있는 진정한 폭력의 구조를 발견하고 그 겹겹의 모순된 껍질 속에서 스스로 주체가되고자 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만나기 위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들을 함께 파고들어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나영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적녹보라 의제행동센터장)

1421회 서울인권영화제기억과 만나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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