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 Ding-dong

작품 줄거리

영화는 “장애가 뭐지?” 묻는다. 영화에 나오는 이들은 이 의문에 어렵고, “열라 힘든 거”라고 말한다. 또한 말한다. 내일 당장 장애가 없어진다 해도 ‘내 정체성’을 새로 쌓아야 하니 거부하겠다고. 어떤 이는 언어장애인의 말을 못 알아들었다는 게 부끄러워 알아들은 척했다고 토로한다. 다른 이는 주변 친구들과 사회에서 겪는 고초와 차별을 말한다. 딩동, “장애가 뭐지?” 이 물음은 세상을 두드린다.

프로그램 노트

장애란 무엇일까. 누군가는 이 물음에 “장애는 단지 조금 불편한 게 아닙니다. 열라 힘들어요.”라고 답한다. ‘장애인은 재활시설을 나와서는 제대로 살 수 없을까?’라는 질문에 사회는 고개를 저으며 반대하고 활동가들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 지역 사회 안에서 절대 못 살 것 같은 장애인 당사자들의 증언이 있다. 친구들과 눈을 마주 보면서 웃음 짓고, 띄엄띄엄 글도 읽는 삶들이 있다.

사회에는 장애를 바라보는 여러 시선이 존재한다. 그중에는 장애인을 한없이 착한 존재로 상정하는 시선도 있고, 장애인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들을 끊임없이 대상화하며 괴롭히는 시선도 있다. 장애인들은 늘 어떤 시선에 둘러싸여 왔다. 그 시선들은 대게 차별적이었고 장애인에 대한 프레임을 형성해 그들의 행동을 제약해왔다. ‘장애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매우 복잡한 문제지만, 사회는 너무나도 쉽게 그 답을 내린다.

<딩동>은 장애를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그 답변을 거부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한다. 이야기는 쉽게 규정된 혐오에 저항하는, 긴 만남의 시작이다. 내가 “열라 힘든” 것도, 이 정체성이 나에게 중요하다는 것도, 나의 가족이 겪는 괴로움도 모두 내 삶이라 말하는 것. 혐오에 대항하는 ‘우리’의 서사는 장애를 제약이 아닌 삶의 이야기로 만든다. 같이 말해보는 것은 드러난 혐오를, 가려진 시선을 함께 말하는 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도 모르고 있던 내 안의 혐오와 마주하는 일이다.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된 이곳에 서로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소란이 생긴다. 소란은 모여서 저항이 된다. 우리의 저항은 지금 이 적막을 부술 것이다.

감독

정태회 JEONG Tae-hoe

정태회

영화를 공부하고, 제작하는 사람입니다. 탈시설과 지역사회 장애인자립생활은 꼭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인권해설

아무렇지 않게 혐오하다.

장애에 대해 사람들은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 결함이나 손상된 몸과 정신을 떠올린다. 장애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인식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불쌍한, 불편한, 불가능한, 불결한 존재로 여기도록 작동한다. 개별적 인간으로서 갖고 있는 개성, 꿈, 주어진 삶의 조건들에 의한 다양한 경험들은 삭제되고 동정과 시혜, 희화 혹은 기피의 대상인 ‘장애인’으로 ‘퉁쳐진다’. 장애인의 개인적 삶에 관심을 두거나 질문을 하는 대신 이미 개인이나 사회적으로 내재된 인식 때문에 ‘장애인’을 쉽게 규정하는 것이다. 장애인은 선하고 약한 사람, 불행한 사람, 성적 욕구가 없는 사람, 무조건 도와줘야 하는 사람 등 당사자와의 소통이나 질문이 생략된 타인에 의한 규정은 혐오의 감정과 맞닿아 있다.

개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이해하는 것을 노력 없이 너무 쉽게 얻고자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딩동>이 장애란 이것이다! 식의 정의나 호소 없이 던져주는 파장이 있다고 생각한다.

“(중증의 장애인들이) 시설 밖 지역사회에서 살고 있는 케이스가 있냐고 물어보면 100 케이스 넘게 얘기할 수 있어요”
“지금까지 쌓아오고 내가 만들어 온 색깔이 있거든요. (장애를) 굳이 고치고 싶지 않아요”

영화 속 장애인과 그 주변인들이 전해주는 다양한 생각과 경험의 얘기들은 사람들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견고한 인식에 균열을 내고, 그 생각이 편견이자 혐오의 모습과 닮았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

혐오의 사전상 정의는 ‘어떠한 것을 증오, 불결함 등의 이유로 싫어하거나 기피하는 감정으로, 불쾌함, 싫어함 등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강한 감정’이다. 하지만 장애에 대한 혐오는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어 그것이 혐오라는 것을 인식 못 하는 경우도 있다. 전철이나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젊은 장애여성을 보며 “너무 어린 나이에 안됐어”, “씩씩하게 잘살고 있네!”, “위험하게 왜 밖에 돌아다니지?”, “어쩌다 장애를 갖게 되었을까?”라는 사람들의 쏟아지는 질문들은 배려나 걱정처럼 친절한 모습을 띠고 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장애인을 불행한 사람으로 아무렇게나 규정하며 내던지는 폭력이자 혐오의 발화이다.

그동안 장애 혹은 장애인에 대한 혐오는 장애인을 사회로부터 격리/분리/통제/배제하는 차별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장애인과 가족, 주변인, 장애인단체, 인권단체들이 ‘이동권 확보’나 ‘장애등급제 폐지’를 요구하는 집회를 할 때마다, 일반 시민들의 일상을 방해하며 정부에 생떼를 쓰는 이익집단으로 치부하는 혐오의 시선과 함께 욕설이 들려온다. 발달장애인에 대한 혐오는 통합교육을 반대하는 학부모들 앞에 장애인 자녀의 엄마들을 무릎 꿇게 만들었다. 장애인을 철저하게 경제활동에서 배제하여 빈곤으로 내몰고, 세금 절약이라는 명목하에 아직도 많은 장애인들이 시설이라는 폐쇄된 곳에서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게 한다. 장애인에 대한 혐오는 이와 같은 차별을 합리적인 것, 당연한 것,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느끼게 하고 유지하게 하는 강력한 동기이며, 이 사회와 일반 시민들이 장애인을 동등한 시민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드러나는 슬픈 장면이다.

또한, 정부의 제도는 장애 혐오를 가능하게 하는 공식화 된 가장 큰 권력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동등한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 제도적으로 필요한 조건들을 무시한 채, 개인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방치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우리는 이미 ‘장애’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장애가 문제화되는 ‘사회환경이 문제’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따라서 정교하고 치밀하게 사회적 혐오를 부추기고 이용하는 정부 권력에 대한 비판이 이뤄져야 한다.

이유를 막론하고 ‘다른 몸’, ‘다른 정체성’, ‘다른 국적’ 등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혐오가 정당화되는 사회라면 나 역시 언제든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고, 구체적인 차별로써 개인의 삶을 어떻게 위협하는지도 알아야 한다. 이 사회가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를 혐오하고 반인권적으로 후퇴하는 것을 막는 것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과제이다.

장은희(장애여성공감)

2123회 서울인권영화제혐오에 저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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